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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마니, 어머니, 매년 5월이 되면 어머니날을 맞이하게 된다. 금년에도 5월이 되니 제일 먼제 딸 아이가 제 엄마를 챙긴다. “ 엄마, 뭘 갖고 싶어?” 아내는 그 말 한마디에 흡족한 웃음을 머금고 싱글벙글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온갖 상념을 떠안게 되었다.. 모든 어머니가 자녀의 그 말 한마디로 모든 시름을 잊고 만족해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어머니에게 어떤 존재인가? 어머니는 6남매를 낳으셨다. 아들만 내리 4형제를 낳으시고, 딸 쌍둥이 를 낳으셨는데 나는 아들 막둥이 4번째이다. 어릴 때 부터 친구가 많고 개구장이로 자라 언제나 엄마로 부터의 관심을 끌려고 별난 행동을 많이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초등학교 때이다. 당시 서울 불광동에서 서대문에 있는 미동국민학교로 매일 버스를 타고 통학할 때 일이다 어느날 혼잡한 버스에서 내리면서 가방 끈이 떨어지면서 가방을 잃어 버리고 학교에서 울고 오던날, 엄마는 내게 말씀하셨다. “ 걱정하지마라 내가 걸어다닐수 있게 학교를 옮겨 주마.” 나는 걱정하지 말하는 엄마의 말에 큰 힘을 얻었고 그후로 계속해서 엄마의 강력한 보호와 후원 속에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의 변두리 였던 불광동은 내게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하였다. 골목에서 벌어지는 구슬치고, 딱지치기, 자치기, 이웃동네와 벌이는 전쟁놀이, 개울가에서의 고기잡이, 방과후에 산에 가서 토도리 줍기, 밤줍기, 칡뿌리 캐기, 그뿐인가 .잠자리, 나비, 매미 잡기는 물론이고 장수하늘소를 하나 잡게 되는 날이면 밤새도록 들여다 보느라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둘째, 세째형과 동네 친구들이 어우러져 서오능에 가서 야구시합을 하던 기억이 난다. 세번째 능이 가장 크고 야구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았고 , 관리인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은 일이겠지만 조선시대의 왕실 가족들이 묻혀있는 왕능에서 신나게 야구를 즐기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재미있는 일이다. 이렇게 공부보다는 들로 산으로 다니는걸 좋아했다. 이러한 내게 학업성적이 좋을리 없었다. 그런데도 중학교 입학시험 1차 시험을 보고나서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엄마에게 “ 1등은 문제없다” 며 큰소리를 치던 나였다. 물론 보기좋게 낙방하였다. 이런 버릇(?)은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도 마찬가지 큰소리 치던 1차 시험에 낙방, 2차도 또 낙방, 그리고 3차 까지 가서 간신히 턱걸이 하였지만 엄마 앞에서만은 기가 죽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엄마에게는 늘 자랑스런 아들이 되고싶었던 것이다. 성장하는 동안 엄마는 야단을 치시거나 매를 드시는 일은 없었다. 다만 중학교 시험때 일은 두고두고 엄마가 다른사람에게 나의 성격을 말하는 소재로 삼으시고 계신다. 아무튼 세명의 형이 교복 하나로 1년을 버티는 동안 나는 최소한 매년 2벌의 교복과 운동화 2개가 필요할 만큼 학업에는 소홀하나 무언가에 바쁘고 적극적인 학창시절을 보냈다. 군에 입대하면서 처음으로 엄마곁을 떠나게 되었다. 훈련과 자대배치 그리고 이어지는 휴가로 곧 엄마를 다시만났으니 고향생각이나 엄마에 대한 애타는 심정은 없었다. 그러다가 1980년 1월 해외 근무를 위해 서울을 떠나 남미 수리남 공화국으로 가게 되었을때 “이제 떠나면 언제 돌아오나 ?” 하는 생각에 떠나기 힘들었다. 남미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족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 엄마가 보고싶어 밤을 지새운적이 많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 1983년1월 남미에서 미국 시애틀로 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후 1987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시애틀로 이민을 오셨을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부모님이 옆에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던지. 그런데 시애틀에 도착하신지 1주일만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 내가 왜 이렇게 답답한 곳에 살아야 되니? 비행기 표 사다오. 아들 딸 있는 서울로 가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그런 말을 하셨을까 ? 그렇지만 나는 “ 이왕 오셨으니 1년만 꾹 참고 사세요. 친구분도 생기고 노인회도 다니다 보면 외로움도 적어지고 , 재미있는 일도 많게 될거에요” 라고 말씀 드렸다. 그때에 효균형과 성숙, 영숙은 서울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목적을 가지고 61세에 이민을 오셨다. 본인이 이민을 먼저 오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에 자녀 초청을 하므로서 모든 자녀가 미국에서 살수있도록 해야만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미국에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일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신 것이다. 모든 이민자에게 무료로 가르쳐 주는 영어 강좌 , 그리고 매일 50개 이상의 단어를 외우기 시작하셨다. “열심히는 하는데 기억나는건 한 두개 뿐이다.” 고 말씀하시면서도 멈추지 않으셨다. 정확히 5년후 모든 준비를 마치시고 아버지는 자신있게 미국 시민권 시험을 치루었다. 그러나 첫 시험에서 이민국 시험관의 불합격 판정을 위한 의도적인 질문으로 인해 부적격 판정을 받으셨다. 그 일로 충격을 받으시고 쓰러지셔서 1주일간 병원 치료를 받으셨다. 그러나 정확히 1년후 재시험에서 만점을 받으시고 무려 6년간 준비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셨다 . 그날로 한국에 살고있던 자녀들에게 이민초청장을 보내게 되었다.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엄마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던히도 잘 참으시며 기다리셨다. 그후 3년여 기다림 끝에 드디어 아버님의 기대대로 한국에서 형제들이 모든 수속을 마치고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되었다. 그때의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모든 정력과 노력을 소진하신 아버님은 그해(1997년)자신의 목표가 다 이루어지고 자녀들의 평안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적이셨던 아버지 ! 어머니의 충격은 너무도 컸다. 이제 모두 한자리에 모였으니 좀더 오손도손 살게 되리라 고대하셨던 어머니였기에 그 충격은 오래 지속되었다.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시기 싫어하셨던 부모님은 한국에서 처럼 미국에 오셔서도 어머니는 아버님과 두분이 따로 아파드에서 지내셨다. 지금도 어머니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계신다. 같은 아파트에 한국인 노인들이 10 여가구나 되니 친구 분도 많다. 어머니 방에 한국 케이불TV를 설치한 후에는 한국 할머니들이 모이는 사랑방 이 되었다... 매주 2번 한인 노인회에 참석하셔서 점심식사와 함께 친구들을 만나시는 일과 한달에 한번 꼴로 있는 노인회의 소풍에 참석하신다. 무엇보다도 지난해 8월 내가 어머니 곁으로 이사하여 더 자주 어머니를 뵙게 되었다.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져 있다. 매일 걸어서 산보삼아 내 집으로 오신다. 그리고 발 마사지 기계와 세라젬 온열기를 사용하신다. 집 열쇠를 드렸더니 내가 있으나 없으나 오신다. 내가 있는 날이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요즈음에는 부쩍 이북에 계신 외가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개성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남한 땅 이었다. 외가쪽에서 현재 남한에 와 있는 가족은 돌아가신 큰 외삼촌과 둘째 언니의 아들 교진형 밖에는 없다. 홀어머니에 외아들 그리고 줄줄이 여동생이 딸린 집에 시집 보내시기를 꺼려하셨던 친정아버지의 이야기 , 간난아이(인균형)를 데리고 노 젓는 배를 타고 개성을 떠나는 것을 안스럽게 지켜보던 친정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여자 아이 공부시키면 이웃집 처녀 처럼 미혼모가 된다고 생각하던 친청아버지 때문에 언니들은 학교 문턱에도 못가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머니 마쳐 자퇴하였다는 이야기. 이산가족 상봉 이야기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는 어머니. 그렇지만 이제는 모두가 나이들어 돌아가셨을 거리며 눈물을 훔치신다. 이제 내가 어머니에게 해 드려야 할것은 무엇인가.? 맛있는 음식, 옷, 귀금속- - - 그런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 드리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도 많으시다. 내가 좀더 귀 기우리면 어머니는 신명이 나신다. 그래요? 그래서요? 어떻게 되었는데요? 엄마 ! 꽃 많고 연못있는 녹번동 집 살때가 재미있었어 그치! 오마니 ! 우리 6남매 모두 학교에 다닐때 그때는 참 힘들었었지. 어머니 ! 이번에는 어디로 소풍을 가시나요? 엄마! 이번주 스케줄이 어떻게 되요? , 나야 바쁘지 – 엄마 밥줘-! 모처럼 외식하러 가십시다. , 아니면 뭐 잡숫고 싶으세요? 나는 어머니가 옆에 계셔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보고 싶을때 . 응석을 부리고 싶을때, 하고 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때 언제나 달려갈수 있으니까. “ 어머니! 옥균입니다. 지금 엄마 집으로 갈께요. 기다리세요.” “ 그래 그래 운전 조심하고 기다릴께 ! “ 05/08?2005 어머니 날에 |
첫댓글 옥균아!!엄니가 옆에 계시어 너는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