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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구강의 날
[1987년] 연세대 이한열군 최루탄 맞고 혼수상태
← 연세대 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은 연세대생 이한열씨를 이종창씨가 부축하고 있다.(로이터통신 사진기자 정태원씨 촬영)
1987년 6월 9일 연세대 경영학과 2년 이한열군이 교문 앞에서 시위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전두환대통령의 5공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국민들은 당시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게다가 2월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른바 4ㆍ13호헌조치는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학생시위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시민단체들은 학생들과 연합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6월10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당시 연세대 2학년생이던 이군은 이 대회의 일환으로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교문 앞에서 벌이진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군은 27일 만인 7월 5일 새벽 2시5분 끝내 사망했다.
이한열군의 죽음은 한 대학생의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처절하고 비장한 마무리였다./조선
[1870년]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 사망
← ‘올리버 트위스트’의 작가 찰스 디킨스.
영국의 위대한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1870년 6월 9일 58세로 사망했다. 디킨스는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문인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안장됐다.
궁핍한 가정에서 태어난 탓에 어려서부터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던 디킨스는 변호사 사무실 사환과 법원 속기사, 신문사 통신원 등을 거쳤다. 신문사 통신원 생활은 그가 글쓰기에 접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다. 각지의 풍속을 스케치해 본사에 송고하는 일이 통신원으로서의 그의 할 일이었다. 이 당시에 썼던 글들을 모은 단편소품집 ‘보즈의 스케치’(1836) 출간은 작가로서의 시작이었다. ‘피크위크 페이퍼스’(1837)에 이어 1838년 출간한 ‘올리버 트위스트’는 작가로서의 명성과 위치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그가 몸소 체험했던 사회의 부조리와 서민들의 애환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묘사한 그의 글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받았다. 이같은 그의 작품경향은 자전적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1850)와 ‘황폐한 집’(1853) 출간을 계기로 변해갔다. 주인공 한 사람의 성장과 체험을 중심으로 한 초기의 작품경향과는 달리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켜 사회의 여러 계층을 폭넓게 바라보는 이른바 파노라마적인 사회소설로 접근해 간 것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사회의 두터운 벽에 직면해 유머를 잃고 무력과 좌절감이 전편에 흐르는 작품이 주조를 이뤘다. 그럼에도 그의 창작의욕은 꺾일 줄 몰라 ‘두 도시 이야기’(1859) ‘위대한 유산’(1861) 등의 작품을 출간했다./조선
[2007년] 설계수명 다한 고리원전 1호기 가동중단
1978년 국내 최초로 상업운전을 시작한 고리원전 1호기가 30년의 권장 설계수명이 만료돼 9일 가동을 중단했다.
고리원자력본부는 이날 오전 10시 52분에 고리원전 1호기의 발전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고리원전 1호기는 오는 18일로 권장 설계수명이 만료됨에 따라 발전을 중단하고 과학기술부의 계속운전 승인을 기다리며 점검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고리원자력본부는 덧붙였다.
고리원자력본부는 지난해 6월 고리 1호기의 수명을 10년 연장하기 위한 안전평가서를 과기부에 제출한 상태인데 과기부는 오는 12월 15일까지 계속운전 승인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과기부는 다음달 국제원자력기구(IAEA) 관계자를 초청, 고리원전에 대한 안전성 검사를 벌여 계속가동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자료로 활용할 방침이다.
2005년 개정된 원자력법 시행령은 권장수명이 다한 원전은 계속운전 승인 심사에서 16개 분야 112개 항목의 안전성 평가기준을 통과할 경우 10년간 운전을 연장하고, 기준에 미달하면 영구 폐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발전용량 58만7천㎾인 고리 1호기는 지난 30년동안 부산시민이 7년간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인 총 1천147억kWh를 생산했다.
한편 부산지역 환경단체들은 이날 오전 부산역광장에서 권장 설계수명이 만료된 고리원전 1호기의 ‘사망선고’ 기자회견을 열고 "수명이 다한 발전소를 폐기해 시민 안전을 지키고 나아가 핵 없는 세상의 초석을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정호 기자 (부산=연합뉴스) /한겨레 2007-06-09
[2006년] 부미볼 타이 국왕 즉위 60돌
← "부미볼 아둘리아데지" 의 초상이 담긴 태국 -1000Baht 지폐
정치적 혼란으로 몸살을 앓던 타이가 오랜만에 잔치 분위기로 들떴다. 전세계 25개국 왕과 왕족들도 방콕에 모였다. 9일로 즉위 60돌을 맞은 부미볼 아둘리아데지(Bhumibol Adulyadej, 1927~ ) 타이 국왕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이날 오전 국왕은 왕궁 발코니에서 ‘국민과의 만남’ 행사를 열었다, 타이인들이 상서롭게 생각하는 시간인 19시19분에는 모든 타이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촛불을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앞으로 며칠 동안 코끼리 행진 등 축하행사가 이어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타이 곳곳은 왕실을 상징하는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과 국왕의 초상화로 물결을 이뤘다.
현존하는 ‘세계 최장수 재위 국왕’인 그는 타이 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입헌군주제인 타이에서 절대왕권은 1932년 폐지됐지만, 푸미폰 국왕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낸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타이 정치의 고비고비마다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평소 “현실을 알지만 입은 닫는다”는 정치 불개입 원칙을 고수하지만, 1973년 군부가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발포하자 왕궁 문을 열어 도망치는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등 군사정권 반대를 분명히 했다. 92년 군사쿠데타와 뒤이은 민주화 시위로 희생자가 늘자 양쪽의 지도자를 불러들였고, 국왕 앞에 머리를 조아렸던 쿠데타 주모자 수친다 끄라쁘라윤 장군은 곧 사임했다.
올해에도 탁신(Thaksin Shinawatra, 1949~ ) 총리 일가의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시위가 거세지자 탁신 총리를 궁전으로 불렀고, 국왕을 만난 후 탁신 총리는 “올해는 국왕 즉위 60돌인 상서로운 해이기 때문에 사임한다”며 물러났다.
당시 타이 일간지 <네이션>은 “국왕이 속삭인다”는 제목을 달았다. 조용한 말 한마디로 쿠데타나 정치적 소요가 멈추고, 총리를 하야시키는 국왕의 힘을 표현한 것이다. 차크리 왕조의 9대 국왕이자 ‘국가의 영혼’으로 불리는 그는 17번의 쿠데타, 21명의 총리를 지켜보면서 섬세하게 정치적 풍랑을 해쳐왔다.
1950년대부터 자급자족형 농업개발계획을 추진해 왔고, 고산지대 소수민족들의 고냉지 채소 재배를 돕기도 했다. 세계적인 인공강우 전문가로, 직접 개발한 인공강우 기술로 가뭄 해소에 나서고 있다. 이 기술은 지난해 국제특허도 받았다. 그동안 한번도 부정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적이 없으며, 재즈 연주자로도 활약할 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도 가지고 있다.
[1998년] 삼성전자, 세계최초로 4기가D램 개발
1998년 6월 9일 삼성전자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반도체 학술대회 '초고속집적회로 국제학회'(VLSI심포지엄)에서 4기가 D램 개발에 요구되는 회로선폭 0.13㎛의 초미세 가공기술인 '반도체 가공 전공정에 적용한 신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0.13㎛ 공정기술을 0.25~0.3㎛급 공정기술이 쓰이는 64메가 D램이나 0.18㎛급 기술이 쓰이는 2백56메가 D램에 적용할 경우 이들 제품의 원가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게 되었으며, 손톱만한 칩속에 신문 약 3만2천 페이지, 단행본 6백40권 분량의 데이터를 기록하고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제35차 세계광고대회 서울서 개막
← 제35차 국제광고협회(IAA) 세계광고대회가 1996년 6월 9일 한국종합전시장서 개막됐다.
전세계의 광고 및 미디어업계 인사들이 모여 21세기 광고 및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미래를 전망해보는 제35차 국제광고협회(IAA) 세계광고대회가 1996년 6월 9일 한국종합전시장에서 개막했다. 12일까지 계속된 이 광고대회에는 일본 아사히신문 나카에 도시타다 회장과 홍콩 스타TV 라클란 머독 부회장,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 어번 러너 편집국장 등 세계 미디어업계 및 광고계의 거물들이 연사 및 패널로 참가해 21세기 뉴미디어 기술과 그에 따른 광고방향 등을 논의했다.
세계광고대회는 IAA(국제광고협회)가 주최하는 세계적 규모의 광고대회로 ‘광고산업의 올림픽’으로 불리운다. 2년마다 세계각국으로 옮겨 개최되며 전세계 우수 언론사, 광고주, 광고회사 간부 등 약 2천-2천5백여명이 참여한다. 아시아에선 1984년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서울에서 열렸다. IAA는 1938년 세계각국 광고주, 광고대행사, 언론매체 및 마케팅커뮤니케이션 업체 간부들이 구성한 세계유일의 광고단체로 본부는 뉴욕에 있고 세계 65개 도시에 지부가 설치되어 있다. 1996년 현재 87개국 3천5백여명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1968년 지부가 설치됐다./조선
[1962년] 제2차 통화개혁 (10 대 1로 평가절하. 환을 원으로 변경, 10일부터 시행)
← 한국 최초의 화폐인 1원권(1910. 12. 21)
1962년 6월 9일 한글로 된 최초의 화폐 단위가 채택되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통화량의 투기자금화를 방지하고 음성적인 부정축재자금을 장기산업투자재원으로 활용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제2차 긴급통화금융조치가 취해졌다. 이 조치는 긴급통화조치법의 개정법률과 긴급금융조치법에 의거해 단행되었는데, 당시의 혁명정부가 제2차 통화개혁을 단행하면서 종래의 환 대신 원을 새로운 통화단위로 채용했다. 환과 원의 교환비율은 10 대 1이었다./브리태니커
[1896년] 국어학자 이희승 출생
"한 민족의 언어는 그 민족의 정신생활의 총화와 물질생활의 전부가 반영된 상징물이고, 사전은 그러한 언어가 담겨 있는 그릇이다." - 이희승, <국어대사전> 머리말
1896. 6. 9 경기 개풍~1989. 11. 27.
본관은 전의(全儀). 자는 성세(聖世), 호는 일석(一石).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서울에서 신학문을 배우기도 했으나, 본격적으로 국어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중앙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30세가 넘는 만학으로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급 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어학회’에서 학회활동과 국어연구에 주력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피검되어 해방될 때까지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해방 후 경성대 교수로 있다가 1946년 학제개편으로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한글맞춤법 강의〉(1946)를 비롯하여 〈조선어학논고 朝鮮語學論考〉(1947)·〈초급국어문법〉(1949)·〈국어학개설 國語學槪說〉(1955) 등 그의 국어학 관계 대표저작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또한 그는 국어사전 편찬에도 힘을 기울여 〈국어대사전〉(1961)의 간행을 이루었다. 1961년 정년퇴임 후에도 서울대 명예교수, 동아일보사 사장, 대구대학교 대학원장,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장, 현정회(顯正會) 이사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학문활동·후진양성·사회활동 등을 활발히 했다.
그가 주로 학문활동을 하던 시기는 어문정리와 규범문법의 확립에 관심이 모아지던 때였다. 그러한 시대상황과 학문적 분위기에서 규범문법을 연구하고 체계화하는 데 힘썼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규범문법체계의 특징은 〈초급국어문법〉에 그 전모가 최초로 나타나 있다. 여기서 국어의 품사를 10품사(명사·대명사·조사·동사·형용사·존재사·관형사·부사·접속사·감탄사)로 분류했는데, 종전의 지정사(指定詞)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체언의 활용어미로 처리한 점과 수사를 대명사에 포함시키고 접속사를 독립품사로 설정한 점 등 독특한 품사분류체계를 보여준다. 또한 어절(語節)의 개념을 도입하고 문장성분을 7성분(주어·서술어·수식어·한정어·목적어·보충어·독립어)으로 나누는 등 후대의 규범문법 정립에 끼친 영향이 크다. 그는 규범문법의 정립에만 그치지 않고 근대적인 학문으로서 국어학의 체계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연구는 〈국어학개설〉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음운론·어휘론·문법론에 두루 걸쳐 국어의 제반현상에 대한 치밀하고도 섬세한 기술의 체계를 보여준다. 국어학 분야에 있어서 이룩된 업적들은 그 뒤로도 많은 후학들에 의해 계승되어 현대 국어학 발전의 토양이 되었다.
그는 국어학 외에도 고전문학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조선문학연구초 朝鮮文學硏究抄〉(1946) 등을 펴냈고 왕성한 시작(詩作) 활동으로 〈박꽃〉(1947)·〈심장(心臟)의 파편(破片)〉(1961) 등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자서전적 수필 〈딸깍발이〉(1952)·〈오척단구 五尺短軀〉(1956) 등을 비롯하여 〈벙어리냉가슴〉(1956)·〈소경의 잠꼬대〉(1962)·〈먹추의 말참견〉(1975) 등의 수필집을 남겼다./브리태니커
[1894년] 국어학자·교육자 김윤경(金允經) 출생
1894. 6. 9 경기 광주~1969. 2. 3 부산.
호는 한결.
어렸을 때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5세(1908)에 신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우산학교·의법학교를 다녔다. 1911년 상동에 있는 청년학원에 입학했으며, 주시경에게 감화를 받아 국어를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졸업한 뒤에 경남 마산에 있는 창신학교에 부임하여 국어·역사·수학을 가르쳤다. 1917년 서울에 돌아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 창립회원이 되었고 1922년 수양동우회 창립회원이 되었다. 같은 해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배화여학교에 부임하였다. 1926년 일본 릿쿄[立敎]대학교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조선문자의 역사적 고찰〉이라는 졸업논문을 쓰고 1929년 졸업했다. 그 해에 일본에서 돌아와 다시 배화여학교에 재직하게 되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재판이 5년이나 계류(繫留)된 끝에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1942년 성신가정여학교에 부임하여 국어·지리를 가르치다가 그해 10월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었고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해방을 맞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62년 연세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1963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맞춤법 제정, 표준말 사정에 힘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한글의 역사를 깊이 연구하여 주시경의 문법체계를 이어받은 〈나라말본〉(1948)을 지어 국어연구에 이바지하였다. 한글전용·가로쓰기·국어순화 등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썼다.
〈조선문자급어학사 朝鮮文字及語學史〉는 1937년에 탈고하여 다음해 1월에 발행되었다. 이 책은 릿쿄대학교의 졸업논문〈조선문자의 역사적 고찰〉을 1928년에 탈고하여 1931년 1월부터 1933년 1월까지 〈동광 東光〉에 연재하다 잡지의 휴간으로 논문의 연재가 중단되자 1934년부터 4년 동안 고쳐 쓴 것이다. 이 책은 제목에 나타나 있듯이 국어문자사이자 국어학사이다. 우선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문자에 대해서 서술하고, 훈민정음의 창제와 변천, 훈민정음에 대한 여러 학설을 역사적으로 정리했으며, 개화기 이후에 나온 국어문법서들을 자세히 검토하였다. 자료와 학설을 철저히 소개하고 있어서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이밖에 〈한글말본〉(1946)·〈어린이 국사〉(1946)·〈주시경선생 전기〉(1960)·〈새로 지은 국어학사〉(1963)·〈한결 국어학논집〉(1964) 등의 저서를 남겼다./브리태니커
[1892년] 정치가 신익희 출생
1892. 6. 9 경기 광주~1956. 5. 5 전북 이리.
자는 여구(汝耉), 호는 해공(海公).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政經學部)에 입학했다. 재학중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해 총무·평의회장(評議會長)·회장 등을 지내면서 학생운동을 벌이고, 기관지로 〈학지광 學之光〉을 발간했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었으며, 이후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1918년말부터 최린·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으며, 3·1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비서장·법무총장·외무총장·문교부장 등을 지냈다. 내무부장 재임중 8·15해방을 맞이해 귀국했으며, 귀국 후에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는 노선을 달리했으며, 정치공작대·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정치활동을 했다.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 학장 등을 지냈으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이 되었으며,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같은 해 8월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국민주당의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다시 국회의장에 피선되었다. 이어 제3대 민의원에도 당선되었으며,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 발전시킴과 아울러 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의 이승만과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하러 가던 도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843년]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주트너(Suttner, Bertha, Freifrau von) 출생
1843. 6. 9 프라하~1914. 6. 21 빈.
정식 이름은 Bertha Félicie Sophie, Freifrau von Suttner. 결혼 전 성은 Gräfin Kinsky von Wchinitz und Tettau. 필명은 Bertha Oulot.
최초의 여성 평화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 평화상을 제정하는 데 영향을 준 인물로 간주되며, 그녀 자신이 1905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다. 주요소설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Die Waffen nieder!〉(1889)는 인기와 영향력에서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Uncle Tom's Cabin〉과 비교되어왔다. 영락한 오스트리아 원수의 딸로 1873년부터 부유한 주트너 가(家)의 가정교사로 있었고, 엔지니어이며 소설가인 7년 연하의 아르투르 군다카르 폰 주트너 남작(1850~1902)과 약혼했다. 남작의 가족이 그들의 결합을 반대하여1876년 그녀는 파리에 있는 노벨의 저택에서 비서 겸 집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파리로 갔으나, 1주일 만에 빈으로 돌아와 비밀리에 주트너와 결혼했다. 1876년 이후 노벨을 만난 것은 2번뿐이었으나 1896년 죽을 때까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베른 평화회의에 참석했는데, 회의가 끝난 후 1892년 8월 취리히에서 마지막으로 노벨을 만났다. 1891년 오스트리아 평화주의협회를 창설하는 등 평화운동에 더욱 동참하게 되었고, 또 이 문제에 대해 노벨에게 편지를 써보냈기 때문에 노벨이 유언장에다 평화상 부문을 포함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1892~99년 자신의 가장 유명한 소설 제목과 같은 〈무기를 내려놓으시오!〉라는 국제평화주의 잡지를 편집했다. 그녀의 평화주의는 과학적·자유주의적 바탕 위에 H. T. 버클, 허버트 스펜서, 찰스 다윈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녀에 관한 책 가운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주트너 남작부인 Florence Nightingale und Baroness von Suttner〉(1919)은 스웨덴의 유명한 급진주의자 엘렌 K. S. 케이가 쓴 것이다./브리태니커
[1815년] 빈 회의의 최종 결의안 조인
1815년 6월 9일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재편을 논의한 빈 회의의 '최종 결의안'이 조인되었다. 나폴레옹 1세를 물리친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영국과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 등 5대 열강 위원회가 빈 회의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주요 쟁점은 폴란드와 작센에 대한 처리, 스웨덴·덴마크·러시아 사이의 요구 대립, 그리고 독일 연방의 국경조정문제 등이었다. 조인에 의해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얻었고 티롤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바덴도 대체로 유리한 결과를 얻었으며 영토도 확장했다.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보하고 라우엔부르크를 얻은 반면 스웨덴령이었던 포메른은 프로이센에 넘어갔다. 빈 회의에서 결정된 국경선은 거의 40년 이상 지속되었다./브리태니커
[1781년] 증기기관차 발명가 스티븐슨(Stephenson, George) 출생
1781. 6. 9 잉글랜드 노섬벌랜드 월럼~1848. 8. 12 더비셔 체스터필드.
그는 뉴캐슬어폰타인의 탄광에서 석탄을 끌어올리는 뉴커먼 대기압 증기기관을 조작하는 기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않고 어릴 때부터 일을 했는데, 19세 때는 뉴커먼 기관을 운전했다. 그후 나폴레옹 전쟁 소식으로 호기심이 생긴 그는 야간학교에 등록을 하고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곧 결혼을 했으며 돈을 더 벌기 위해, 후에 윌리엄 페어베언 경이 된 기계공 동료로 하여금 그의 기관차를 시간제로 운전하게 하면서 자신은 구두를 수선하고 시계를 고쳤으며, 광부의 아내들을 대상으로 옷을 수선해주었다. 그러나 증기기관에 대한 천재성으로 인해 그는 곧 킬링워스 탄광의 수석 기계공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어린 아들 로버트를 남겨둔 채 사망했으며, 그는 아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위해 뉴캐슬에 있는 학교로 보냈다. 그는 아들이 집에 돌아오는 밤마다 아들과 함께 숙제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 1813년 그는 광산에서 석탄을 밖으로 수송하기 위해 존 블렌킨솝이 제작한 '바퀴 달린 증기 보일러'를 조사할 목적으로 이웃 탄광을 방문했다. 이 무거운 기계가 매끄러운 목재 레일에서 견인될 수 없다고 믿은 블렝킨솝은 톱니가 달린 제3의 레일 위로 달리는 래칫 바퀴를 증기 보일러에 부착시켰지만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 스티븐슨은 자신이 이것을 개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킬링워스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레이븐스워스와 상의한 다음, 30t의 석탄을 1시간에 6㎞ 운반할 수 있고 8개의 무개화차(無蓋火車)를 견인하는 기관차 '블루처'를 제작했다. 이것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는 기관차의 출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래서 배기 증기의 방향을 굴뚝 위로 다시 바뀌게 하여 공기를 끌어당김으로써 통풍량을 증대시키는 '증기분사'를 도입했다. 이 새로운 설계방식으로 기관차는 진정한 의미에서 실용적이 되었다.
← 1829년 영국의 리버풀-맨체스터간 선로에서 시범 운행된 조지 스티븐슨의 ‘로켓호’
그뒤 몇 년 동안 킬링워스와 다른 탄광용으로 여러 대의 기관차를 제작했고, 광산용 안전등을 개발해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1821년 그는 풍부한 석탄이 매장된 광맥을 개발하기 위해 스톡턴에서 달링턴까지 역마용 철로가 건설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달링턴에서 그는 이 계획의 책임자인 에드워드 피스를 만났으며, 그에게 강한 인상을 받은 피스는 스티븐슨이 이 선로에 사용될 증기기관차를 제작할 수 있도록 추천했다. 1825년 9월 27일 스티븐슨의 '액티브'(나중에 '로커모션'으로 이름이 바뀜)에 의해 견인되는 대중여객용 열차가 450명의 승객을 태우고 24㎞/h의 속도로 달링턴에서 스톡턴까지 최초로 운행됨으로써 철도수송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재벌들은 두 도시를 연결하는 64㎞의 철도 건설을 부탁하기 위해 그를 초대했다. 이 구간을 측량·건설하기 위해 그는 다른 많은 것들 가운데서도 철도로 인해 말을 이용한 수송 수단이 밀려나고 귀리 시장이 폐쇄되는 것을 염려하는 농부들과 지주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혀야 했다.
리버풀-맨체스터 간의 선로가 거의 완성될 무렵인 1829년 '로켓호'라고 명명된 그의 기관차가 완성되었는데 이 새로운 기관차는 58㎞/h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8대의 기관차가 1830년 9월 15일 개통된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에서 운행되었는데, 이 기관차들은 모두 그의 뉴캐슬 공장에서 제작되었다. 이때부터 철도 건설은 영국·유럽·북아메리카 전역으로 빠르게 파급되었고, 그는 혁신적인 수송매체의 중요한 철도 건설, 다리 설계, 기관차 제작 등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계속 해결해나갔다. 또한 그는 미국 중부에 다수의 선로를 건설했고, 국내의 많은 철도건설계획의 고문으로 활동했다./브리태니커
[1775년] 독일어 교사·언어학자 그로테펜트(Grotefend, Georg Friedrich) 출생
1775. 6. 9 하노버 뮌덴~1853. 12. 15 하노버 하노버.
고대 페르시아 설형문자(楔形文字) 해독에 첫 돌파구를 마련했다.
1797년 괴팅겐 시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을 당시 이미 유럽에는 1765년 독일 여행가 카르스텐 니부르가 페르시아 수도 페르세폴리스 유적지에서 만든 사본을 통하여 쐐기 모양의 설형문자가 잘 알려져 있었다. 동양언어에 대한 특별한 지식도 없이 다만 수수께끼 풀기에 능했던 그는 몇몇 술친구들과 내기를 하면서 설형문자 해독의 열쇠를 찾아내겠다고 장담했다. 문제의 비문이 BC 5세기쯤 만들어졌으며 여러 왕들의 조각상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내고 반복되는 몇몇 기호가 '왕'과 '왕 중의 왕'을 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침내 그는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의 이름을 왕위호칭과 관련시키는 데 성공했다.
세번째의 이름은 다리우스 1세의 아버지인 파르티아의 통치자 히스타스페스임이 밝혀졌다. 그가 해독한 13개의 기호 중 9개가 옳은 것이었다. 그의 발견은 1802년 9월 2일 처음 발표되었다. 이밖에도 2가지 고대 이탈리아 방언 오스칸어와 움브리아어에 대한 책들을 썼다. 그는 〈페르세폴리스 설형문자의 주석에 대한 새 공헌 Neue Beiträge zur Erläuterung der perse-politanischen Keilschrift〉(1873)이라는 저술을 통해 불후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의 업적에 대한 상세한 기사는 C. W. 체람(쿠르트 W. 마렉의 필명)의 〈신과 무덤과 학자들 Gods, Graves, and Scholars〉(1967)에서 찾아볼 수 있다./브리태니커
[1672년] 러시아의 차르, 황제 표트르 1세 출생
초기
1672년 표트르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와 그의 두번째 황후인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르이쉬키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읜 탓으로 소년기와 청년기를 크레믈린 밖에 있는 외인촌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화려한 의식이나 불합리한 전통을 싫어했고 실리적이며 과학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외인촌 생활은 영국, 네덜란드등 서유럽 선진국가들에서 온 기술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2살 때에는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때문에 젊은 나이에 말에 판자를 박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 벌써 십여 가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술을 많이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관심을 쏟으며 생활하던 그는 1689년 모스크바 대귀족의 딸 로푸하나와 결혼했다. 이 때부터 러시아 관습에 따라 성년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소년병들과 군인놀이를 하거나 기계를 관찰하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던 중 1695년 모스크바 대공국은 흑해 진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표트르는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군이 전쟁 초기에 돈 강 하구의 오스만군 요새 아조프를 포위할 때 포병의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아조프 포위 작전은 3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쉽사리 요새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당시 함대를 이용하여 탄약이나 식량 공급은 물론 보충 병력까지도 바다를 통해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함대를 갖고있지 않은 모스크바 대공국으로서는 이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왔고 특히 백해에 있을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선장들로부터 항해술 및 선박에 관한 제반 지식을 습득했던 표트르는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함대 건설 기지를 위한 적정 장소를 물색했다. 그 결과 보로네즈가 선정되었고, 구체적 세부계획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함선을 건조하면서 한편으로는 해군을 조직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어들여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696년 봄 해군을 편성하여 다시 아조프를 공략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일단락되었고 이 전쟁으로 표트르는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표트르의 형 이반이 죽었다. 이 때부터 표트르는 러시아의 유일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통치와 개혁
표트르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에 맞서 좀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을 계획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부터 서유럽의 문화도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이 사절단에 합류하여 행동을 같이했다. 표트르는 프로이센에 가서 포병 하사관으로 가장하여 프로이센군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더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그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유럽화하는 것을 중히 여겼는데, 서유럽보다 발전이 늦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서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성에게는 전통 러시아식 긴 치마를 서유럽식으로 짧게 자르라고 하였고, 동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매겼다. 또한 무질서하고 비능률적인 러시아의 전체적인 행정기구를 그 기능상 좀 더 효율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개편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제도를 면밀히 조사하도록 한 뒤, 스웨덴을 모델로 삼아 행정권을 분산시켰다. 그래서 러시아를 50개 지역으로 분리했다. 그 결과 지방에서 행해지는 세부적인 문제까지 중앙의 모스크바로 보고될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지주들의 농노 착취, 여성의 낮은 지위 등 모스크바 사회의 내부 문제들은 개혁하지 않는 반쪽짜리 개혁이었다. 더구나 종교적으로도 정교회 전통이 강한 러시아 인들에게 서유럽 종교인 개신교를 강요하였다.
전쟁
1710년 오스만 제국은 모스크바에 선전포고를 했다. 표트르는 1711년 오스만 제국의 도전에 맞서기 위하여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때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에 몹시 들떠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왈라키아, 세르비아, 몰다비아 등이 자신을 지원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그가 병력을 이끌고 다뉴브 강에 도착했을 때 누구도 지원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마침내 프루드 강변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자 그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항복하는 대가로 아조프와 흑해 함대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때 망명 중이던 스웨덴의 카알 12세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카알 12세는 북방전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피해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10여 년이나 계속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트르부르크와 근처의 요새들, 그리고 크론슈타트의 조선소에 강력하고 현대적인 대규모의 해군을 조직할 것을 명령했다. 표트르가 새로이 구축한 해군은 1919년 당시 ‘해상의 왕자’라 불리던 영국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표트르는 이 함대로 한고해전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한 뒤 곧바로 육군을 동원하여 핀란드를 강타하였고, 여세를 몰아 스웨덴 본국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1721년에 북방전쟁은 모스크바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스웨덴을 정복한 결과 고대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회복했고 발트 해 연안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이것을 발판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모스크바는 러시아 제국으로 선포되었다. 표트르에게는 황제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다.
[68년] 로마 폭군황제 네로 자살
← 이탈리아 황금 궁전에 있는 네로의 석고상
로마 황제 네로는 전적으로 그의 어머니 소아그리피나가 꿈꿔온 야망의 산물이었다. 황제의 아내와 황제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주위의 눈총에도 시동생인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재혼한 아그리피나는 곧 황제의 친아들을 제치고 네로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자신의 피를 생각하면 크게 꿀릴 것도 없었다. 54년 황제가 죽고 네로가 17세로 5대 황제에 오름으로써 그의 꿈도 사실상 실현되는 듯했다.
집권 초기 네로는 철학자 세네카의 도움으로 악정은 펼치지 않았다. 그러나 네로의 몸에는 아그리피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원래 후계자였던 의붓동생을 독살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어머니, 심지어 새 여자를 맞기 위해 아내마저 살해했다. `폭군`으로 불릴 때 로마의 절반을 태운 대화재(64년)가 발생하고 사람들이 네로의 소행이라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자 네로의 야만성이 또 유감없이 발휘됐다. 기독교인들이 범인으로 몰려 박해를 당한 것이다.
68년 6월 9일, 반란이 일어나고 원로원마저 등을 돌리자 네로는 31세로 자살을 선택한다. “이로써 한 예술가가 죽는구나.” 자신을 뛰어난 예술가로 착각했던 네로의 마지막 변이었다./조선
그밖에
2005년 노인과 여성 21명을 연쇄살인한 유영철 사형 확정
2005년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 대 쿠웨이트 경기
2004년 서울시교육청, 서울 초중고 ‘차렷, 경례!’ 구령 퇴출키로 발표(7.01부터 실시)
1994년 네덜란드 경제학자 틴베르헨 사망 - 계량경제 모델을 발전시켜 노벨경제학상 수상
1991년 필리핀 파나투보 화산 폭발로 754명 사망
1991년 시인 고정희 사망
1984년 서방정상회담, 런던 경제선언 채택하고 폐막
1983년 영국 총선서 보수당 압승
1981년 안전기획부 일본거점 간첩 손유형 등 6명 검거발표
1980년 계엄사, 현직 언론인 8명을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연행
1976년 한국적십자, 북적한적십자에 추석성묘단 교류 제의
1975년 필리핀, 중국과 수교
1974년 과테말라 작가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사망
1967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중동전 참패로 사의 표명
1961년 프랑스의 세균학자 게랭 사망
1959년 미국서 탄도미사일 탑재한 세계최초의 원자력잠수함 ‘조지 워싱턴호’ 진수
1956년 중립국 감시위 비무장지대로 철수
1954년 한국일보 창간
1954년 일본, 방위청설치법 자위대법 공포
1954년 미국의 교육자 겸 작가 알레인 로크 사망
1954년 이기붕 제3대 국회의장 피선
1954년 3대 민의원 개원
1953년 각의, 휴전 거부 결의
1952년 일본. 인도 평화조약 조인
1951년 미국 중국에 10억불 원조 발표
1938년 국민정부 중경으로 이전
1934년 소련.루마니아.폴란드 외교관계 수립
1898년 영국 청나라의 구룡반도를 99년간 조차(租借)
1885년 청나라 프랑스 강화조약 성립(텐진조약)
1873년 스페인, 연방공화제 선언
1812년 독일의 천문학자 갈레 출생 - 1846년 9월 23일에 해왕성을 처음으로 관측
1768년 미국의 면직공업 창시자 슬레이터 출생
164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1658-1705) 레오폴트 1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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