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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나는 부활이요 (정바울)
나균용 목사님 설교
[요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부활이십니다. 이것을 그냥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을 살려내시는 이 놀라운 기적을 성경에 기록한 것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그 집에 들어가셔서 그녀를 살리셨습니다.
둘째는 나인성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상여를 메고 나가는 사람등레게 예수님은 상여를 멈추게 하시고, 그 청년을 살리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셋째로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난 후, 이미 무덤에 장사까지 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앞에 가셔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명하시자,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먼저 이렇게 세 사람들을 살려내시는 역사를 하시고 예수님은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며, 제 3일에 살아나야 한다고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변화산에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셨을 때, 그곳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이를 통해 인류 구속의 대역사가 이루어질 것임을 이야기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부활 후, 성령을 받은 후에야 그때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경을 읽어도 그 뜻을 바로 알지 못할 수 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로 인해 믿음과 삶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는 변화산 사건 후, 예수님이 간질병자를 고치시며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기 전까지 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는 예수님이 채찍질과 십자가를 말씀하시며, 제3일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7장 63절에서는 예수님의 부활 예언을 기억하고 군병들로 무덤을 지키게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첫째는 교리적으로 또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되고, 둘째로는 이것을 우리가 체험해야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장 29절에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는데, 부활에도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누구도 심판의 부활을 받기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양식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이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들 모두에게 더욱 충만하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42. 나는 부활이요
나균용 목사님 설교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이 부활이신 증거, 예수님이 친히 죽은 자들을 세 명이나 살려내셨던 사건, 또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여러 차례 예언하셨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부활 생명을 받은 생활이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할 때, 부활의 승리에 대해 세 가지로 이야기 하는데 첫째 마귀에게 이기신 것이다.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마귀와 그리스도와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승리하신 것이다. 둘째로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사망으로부터 이기신 것이다. 그래서 사망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육신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은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저 천국의 낙원에 거하게 되고 나중에 영광스러운 부활을 받으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승리는 사망에 대한 승리이다 하는 것이죠. 셋째로 부활의 승리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승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 가지의 승리를 주십니다. 첫째 마귀로부터 승리하신다. 둘째, 죽음으로부터 승리하게 하신다. 셋째 죄의 권세를 이기고 죄로부터 승리하게 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로부터 승리하셨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마귀의 특징을 봐야 합니다. 마귀는 첫째로 욕심쟁이입니다. 그래서 만족을 모릅니다. 끝을 모릅니다. 둘째는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살인하려는 마음, 악한 마음,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죽이고 싶어 하고 남을 짓밟아서 이기려고 하는 이런 못된 마음으로부터 우리가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이 악한 마음을 이거를 이것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설명하시기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그다음에 이어서 “그의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말할 때마다 거짓을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의 아비가 되었으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짓에게 속으면 거짓의 종이 됩니다. 우리가 이런 거짓말을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어야 되는데, 거짓을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진리를 가져야 거짓을 이길 수 있어요. 진리가 없으면 누구든지 다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 마지막 때에 우리가 성경을 더 깊이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힘써서 기도해야 합니다. 부자 되는 것도 좋고, 병 고치는 것도 좋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도 좋고, 우리 자식들이 공부 잘해가지고 1등하고 좋은 대학도 가고 이렇게 되는 거 다 물론 좋겠지만 그런 모든 것보다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제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꼭 진리를 사모하고 이 은혜 위에 굳게 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사망으로부터 이겨야 된다. 사망한테 이기는 것이 대관절 뭐냐? 키에르 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결론적으로 얘기하는 거는 왜 사망에 이르게 되느냐, 이것이 가장 큰 병인데 이것은 바로 절망이다. 마귀라는 놈은 우리에게 절망을 넣어주는 놈입니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오히려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풍성한 나라일수록 오히려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 욕심으로부터 나온 것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곧 자기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데에서부터 살아나야 되겠습니다. 또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인생의 허무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일수록 인생의 허무를 더 잘 느낍니다. 그래서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치고 맙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죄로부터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죄를 지었더니 사망이 왔어요. 그래서 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사망이 찾아온다. 그러니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도 없어요. 단지 죄를 무엇으로 이길 수 있느냐 예수님의 부활만이 죄를 이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이 주시는 부활의 생명을 받아가지고 죄를 이겨야 하겠습니다.
거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살고 힘써 복음을 전해서 이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서 지옥으로 향하여 달려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저 사람들 다 구원해낼 수 있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이 큰 은혜의 자리에 동참하게 되고 복을 받으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43.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나균용 목사님 설교
[요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이 누구시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이렇게 선포를 합니다. 성경 66권 전체를 다 번역해서 처음 발간했던 성경책을 구역이라고 하는데 그 구역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번역하지 않고 태초에 도가 계시니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중국성경을 보면은 태초에 도가 있었다.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그러니까는 말씀이라는 말이 바로 도다. 도는 뭐냐?길 도 자를 써 가지고 길, 곧 인생의 길, 우주의 길 이렇게 시를 얘기하는 것으로 설명을 합니다. 또 노자는 그가 지은 가장 유명한 책이 도덕경인데 오천 개의 글자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도라고 하는 게 대관절 뭐냐 이렇게 중요한 건데 우리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것을 헬라말로는 로고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그러면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하는 거는 대관절 또 무슨 뜻이냐? 로고스에는 중요하게 세 가지의 큰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로고스라고 하는 말은 우주와 자연 만물의 이치인 것입니다. 봄철이 되고 그래서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사계절이 돌아가다가 다시 또 봄철이 오고 이게 정확하게 해마다 반복을 하고 있는데 대관절 이렇게 되는 현상이 어떻게 돼서 일어나는 것인가? 그래서 우주 만물이 그냥 저절로 이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고 분명히 누군가가 계셔서 이것을 이렇게 돌리고 있다 하는 것을 이 사람들이 어렴풋이 깨달으면서 이 우주에는 분명한 이치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도 분명한 이치가 있잖아요. 그래 가지고 이 인생의 이치 이런 것도 분명히 있는데, 그래서 사람의 길 이라고 하는 글에서 이제 길 도 자를 썼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래서 이것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은 잘 몰랐지만 그래도 우리 용비어천가에도 결론은 그거잖아요. 경천근민하셔야 더욱 굳으리라 하고 임금들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이렇게 끝나고 있는데, 용비어천가 125장까지 쭉 이어지는 이 노래의 맨 마지막은 임금들에게 주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헬라에서도 똑같이 이 도를 로고스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우주에는 어떤 큰 원리가 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점을 쳤어요. 하늘의 별을 보고 날씨가 어떻게 되겠다. 이 땅에 어떤 재앙이 오겠다. 이 땅에 어떤 복이 내리겠다. 이런 거를 전부 보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세상은 하나님의 도가 분명히 있는데, 옛날 성인들이라고 하는 분들이 이 도를 찾기 위해서 평생을 바치면서 애를 쓰고 고생을 했는데 이것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오늘 그들의 후손이 된 우리가 이 도를 깨닫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요한복음을 쓴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설명할 때 예수님이 바로 로고스다. 예수님이 바로 우주의 근본 이치시다. 이 우주의 근본 이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또 이 우주의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 하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시작할 때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렇게 하죠. 그러면서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서 14절에서는 이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는데 이렇게 육신을 입고 오신 그분이 예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에 그냥 사람으로 보면은 안 되는 거고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 다른 말로 막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이것을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그렇게 말씀했으면 거기에 대한 대꾸는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이렇게 말을 해야지 되는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 하면 이루어지리라 하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이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님이 거하신다 그것이 뭐예요? 예수님의 말씀이 거하는 것이 예수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는 거죠. 그 영이 바로 성령이시죠. 그래서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을 하신 거예요.
둘째로, 로고스라고 하는 말은 우리 인생의 이치죠 우리 인생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게 아니고 저 짐승들은 본능대로 살아요. 그니까 본능대는 짐승들에게는 아무렇게나 살아라 하고 팽개쳐 놔도 자기네 본능대로 사는 거니까 그놈들은 그 본능이라고 하는 것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들은 이 본능대로 사는 게 아니죠. 우리 인생들은 그래서 옛날부터 도의라고 하는 거를 가르쳤고 도덕이라는 걸 가르치죠. 그리고 인생에 길을 가르쳤어요. 그래서 이것을 길 도자를 써서 가르치고 예의를 가르치고 부모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고 하는 이 섬김의 자세를 가르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냐 하는 거에 대해서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로고스라는 말에 셋째로, 중요한 뜻은 로고스란 말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성경에 이성 없는 짐승 본능으로 행하는 이성 없는 짐승이라는 말이 두 번 나와요. 이게 2번 나오는데 이성 없는이라고 하는 말이 헬라말로 알 로고스 로고스라는 말 앞에 알을 하나 더 붙였어요. 알은 부정사입니다. 그래서 로고스가 없는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로고스가 없는 것이 이성이 없는 겁니다. 인간은 삶에 있어서 이것이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무엇으로 판별하느냐 이것을 판별하는 도구가 2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이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이 마비되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이성을 가지고 본능으로 행하지 말고 내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본능적인 욕심이나 이런 나쁜 마음을 가지고 살지 말고 이성을 가지고 냉철하게 이것이 옳은 건가 그른 건가를 잘 판단해서 옳은 거를 택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선과 악을 판별해내는 도구가 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아야 돼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보면은 재판을 할 때에 첫째는 법률에 의해서 재판을 해야 된다. 그리고 둘째, 원칙은 양심을 따라서 재판을 해야 된다 이렇게 가르친다고 해요. 우리 사람의 의를 판단하는 거 기준은 선이냐 악이냐 의냐 불의냐 하는 것을 기준은 이렇게 이성과 양심 두 가지를 가지고 우리가 분별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러면 인간이 다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느냐 천만의 말씀이에요. 인간의 이성도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것도 타락해서 잘못됐습니다. 조금 그래도 비교적 옳다고는 할 수 있는 거지만 그러나 이성적으로 판단했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양심적으로 하면 다 옳은 거냐 천만의 말씀이에요. 양심도 부패했는데 양심이 절대로 바르게 판단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성을 살려내고 양심을 살려내고 하는 이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을 이 타락한 상태에서부터 구원해 내 주셔야지만 비로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는 물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표니 우리를 구원하는 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되는 것입니다. 곧 세례라고 말씀을 하면서 세례라고 하는 것은 육체에 더러운 것을 없애버리는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고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므로 선한 양심이 살아나 가지고 이 양심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이렇게 살아나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때 교회가 타락하니까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아모스 8장 11절에 예언해 놓은 그대로 보라 내가 이 땅의 기근을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오.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갈함이라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졌어요. 오늘날 성경은 세상에 지천으로 깔려 있지만 성경을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를 전하는 목사님들 그런 설교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이 말씀을 듣는 분들이 깨닫고 나는 그런 사람 되지 말아야 되겠다 해서 하나님 말씀을 깊이 들어가면 이 로고스가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로고스가 들어오면 여기에 인간의 이성도 찾아지는 것이고 인간의 양심도 살아나는 것이고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새롭게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에게 은혜가 충만하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44. 아브라함의 자손
나균용 목사님 설교
[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며 큰 복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복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복을 나누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3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고, 15장에서는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자손"이라는 단어가 복수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자손이라고 표현되었을 때, 이것이 여러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그 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특히 영어 성경에서는 단어의 단수와 복수가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한국어에서는 수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만 보고 자손들이라고 복수로 생각하기 쉽지만, 바울은 이것이 단수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자손이라는 표현이 항상 단수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3장과 15장에서는 단수로 나타나지만, 이후의 언급에서는 복수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장에서는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 네 자손들을 번성케 하겠다는 약속이 주어지고, 창세기 26장에서도 이삭에게 네 자손들을 번성케 하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단수로 말한 "내 자손"은 창세기 15장 5절의 말씀을 지칭하며, 그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 관한 성경의 약속들을 종합해 보면, 두 가지 유형의 자손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의 자손, 즉 혈통을 통해 이어지는 자손들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3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자손에는 이스마엘이 포함되며, 그는 하갈을 통해 태어나 후에 큰 민족과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둘째는 영적인 자손으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설명할 때, 이삭을 약속과 성령을 통해 난 자로 이중적으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은 단순히 육신의 혈통을 따른 자들이 아니라,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영적인 자손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약속의 자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며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자손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마음에 새기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지혜롭고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 유대인들이 겉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부했지만 선지자들을 돌로 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삭처럼 약속을 따라 난 자, 성령을 따라 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약속을 따라 난 자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바로 약속을 따라 난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약속의 자손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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