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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07
#.1 씬. 커피 숍. (낮)
커피 잔 앞에 놓고 마주 앉아있는 영인과 단아.
영인 :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는데)
단아 : (그런 영인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인 : (커피 잔 내려놓으며) 하사장님 참 대책 없는 분이네요. 남부끄러운 일을 따님한테까지 알리시다니.
단아 :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거 아니에요.
영인 : 그럼 어떻게?
단아 : 조문 오셨을 때 두 분이 말씀 하시는 거 우연히 듣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엿들으려 한 건 아니었는데, 멀미약 챙겨 갔다가....
영인 : 몰랐으면 좋았겠지만, 알았다니 그건 할 수 없는 거구. 날 보자고 한 용건은요?
단아 : 어른들 일에 아랫사람이 나서는 게 외람되다는 건 알지만
아버지께서 괴로워하시는 걸 보고만 있는 것도 자식 된 도리가 아니다 싶어서 이렇게 찾아 뵀습니다.
영인 : (묘하게 미소 짓는) 워낙 대단한 집안인 줄은 조문 가서 얼추 짐작은 했지만
그런 댁 따님이라서 그런가 어쩐지 말하는 게 요즘 사람 같지 않네요.
단아 : (미소 지으며) 제 말투가 좀 촌스럽죠?
영인 : (묘한 아이다 싶고)
단아 : 어제 아버지께서 밤늦게 술을 찾으셨어요.
영인 : 그런 집안에선 술도 먹으면 안 되나보죠?
단아 : 그건 아니고, 할아버님이 계셔서 그렇겠지만 밖에 모임이 있으셔서 조금 드시거나,
집안에 제사가 있을 때만 좀 드시는 편이세요. 워낙 술도 즐겨하시지 않는 분이시라서요.
영인 : 내 탓이다?
단아 : 아니에요. 그런 말씀드리려 뵙자고 한 게 아니구.
영인 : 그러면요?
단아 : 아버지는 할아버님께 결혼하겠다고 말씀 올리셨는데, 아버지 술 찾으시는 거 뵈니까
이실장님은 아버지와는 조금 다른 생각이신 게 아닌가 걱정이 되서 이렇게 찾아 뵀어요.
영인 : 그 짐작 맞아요.
단아 : (보고)
영인 : 나 하석호 사장님과 결혼할 마음 전혀 없어요.
단아 : (당황하고) 그, 그렇지만.....
영인 : 임신하지 않았느냐?
단아 : .....
영인 : 정말 요즘 젊은 사람 아니네. 하단아씨.
그런 일 남녀 관계에 있어서 단순한 사고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단아 : (굳어지고)
영인 : 내가 너무 쇼킹하게 굴구 있는 건가?
단아 : 전 아버지께서 할아버님께 결혼 말씀 올리셨을 때는 두 분이 마음을 정하셨을 거라 생각했었어요.
영인 : 그런 마음 정한 적 없는데.
단아 : .....
영인 : 어렵게 찾아왔을 텐데 괜한 헛걸음 했네요.
단아 : 그럼......
영인 : (굳어진 단아의 표정 보다가) 아이는 어쩔거냐?
단아 : 네.
영인 : 사고는 처리를 해야겠죠.
단아 : .....
영인 : 내가 얌전한 사람 너무 놀래키고 있는 거 같네. 그러니까 뭐하러 이런 헛걸음을 해요.
어린 애들도 아니고, 나이 먹은 사람들 일인데 자기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모른 척 했어야지.
단아 :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영인 : 처리하겠다는 거요?
단아 : 네.
영인 : 그럼 어떡해? 이 나이에 덜컥 낳아?
단아 : .....
영인 : 척 보면 모르겠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단아 : 그렇지만 그렇게 쉽게 결정하실 일이.....
영인 : 하단아씨?
단아 : 네.
영인 : 연애 안 해 봤어요?
단아 : .....
영인 : 똘똘하게 처신 했나보네. 이런 사고 경험 없었던 거 같은데.
단아 : .....
영인 : 난 똘똘하지 못해서 어이없는 실수를 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이 가졌으니 결혼하자, 그럴 만큼 순진하지도 젊지도 않아요.
단아 : 저기.....
영인 : 얘기해요.
단아 : 사랑....하시는 거 아닌가요? 두 분?
영인 : 사랑하면? 그럼 무조건 결혼해야 하는 거예요?
단아 : ......
영인 : 말했잖아요? 나 그렇게 순진한 사람 아니라구.
단아 : ......
영인 : 아버지 당분간은 계속 술 드실 텐데, 모른 척 해요. 이런 일은 다 시간이 흘러야 해결 되는 거니까.
난 하던 일 미뤄두고 나와서 그만 들어가 봐야 하는데......
단아 : 저.....다시 한번 생각해보실 수는 없는 건가요?
영인 : (딱하게 보면서) 이상한 사람이네, 하단아씨.
척 보고 나 같은 사람 새엄마로 맞는 거 골치 아프겠다 싶을 텐데?
단아 : 좀 남다른 분이신 거 같긴 하지만.....
영인 : 봐줄 수도 있다?
단아 : 아버지께서 마음을 주셨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영인 : 그냥 홀린 거예요.
단아 : ......
영인 : 너무 오래 혼자 살다보니 나같이 좀 이상한 여자한테 혹 한 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단아 : (암담한 느낌으로 바라보는)
#.2 씬. 회사 여자 화장실.(낮)
영인, 변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구토를 하고 있다.
#.3 씬. 길.(낮)
걸어가는 단아, 답답하기만 하다.
#.4 씬. 여자 화장실.(낮)
영인, 손을 씻다가 고개 들어 거울을 보는.
영인 : 묘하게 마음 무겁게 만드네, 그 아이.
#.5 씬. 대학 캠퍼스.(낮)
단아, 생각에 잠겨 걸어가고 있는데. 여학생 몇이 손을 흔든다.
여학생1 : 교수님? 교수님?
단아 : (돌아보면)
여학생1,2 정도 단아 앞으로 뛰어온다.
여학생 : 선생님 가정과랑 축구 내기 하는데 교수님도 끼세요.
단아 : 아니야, 난 됐어.
여학생 : 미정이가 다리 삐끗해서 빠졌어요. 선생님, 끼세요, 네?
가정과한테 또 지면 올해만 7연패예요.
#.6 씬. 대학 캠퍼스.(낮)
단아, 여학생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고 있다. 학생들 몰려서서 응원하고 있고.
응원도 하지 않고 약간 옆에 서서 구경하고 있는 혜주.
단아, 땀을 흘리며 공을 따라 뛰고 있다.
지나가던 남교수.
남교수 : (어라하는 표정으로 발걸음 멈추는)
단아, 숨을 몰아쉬며 공을 따라 뛰고.
남교수 : (그런 단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나가던 현규, 저게 무슨 일인가 싶어 남교수 뒤로 다가오는.
현규 : 어. 올해는 처음 보네요. 하교수님 선수로 뛰시는 거.
남교수 : 답답한 게 있나보다.
현규 : (남교수를 보면)
남교수 : (옆에 서있는 현규를 보고) 대쉬를 하려면 제대로 해.
현규 : 네?
남교수 : (눈으로 단아 쪽 가리키며) 하교수답지 않잖아?
현규 : (뛰고 있는 단아를 보는)
남교수 : (단아를 보면서) 예전에 그런 날이 있었다. 아주 많이 아프고 난 다음인데,
그냥 주저앉아 울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저 인간 하루 종일 땀 뻘뻘 흘리며 산에 오르더라.
옆에서 보는 사람까지 조마조마하게.
현규 : 그 사람 죽었을 때요?
남교수 : (보고) 내가 너한테 정보 준 거 흘리지는 않았지?
현규 : 법적으로만 그런 거 아니냐구, 들이댔었어요.
남교수 : (흘겨보면서) 제대로 하고 있긴 한 거니?
현규 : 문상 갔을 때,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었어요. 그치만 교수님이 정보통이란 말은 안했어요.
남교수 : 어이구. 정보원 보호는 하셨다? 참도 모르겠다. 하교수가.
현규 : 너무 곁을 안내주니까 화가 나잖아요.
남교수 : (어깨 툭 치며) 어쩌면 오늘이 그날일지도 몰라.
현규 : 네?
남교수 : 다른 날 같지 않잖아? 이럴 때 제대로 해보라구. (걸어가는)
현규 : (단아를 보면. 학생들과 열심히 뛰고 있다)
그런 현규를 지켜보고 있는 혜주.
차에서 내리던 강석. 학생들과 축구를 하고 있는 단아를 본다.
강석 : (저 여자가 저런 짓도 하나 싶은 표정으로 보는데)
#.7 씬. 학교 여학생 화장실 내.(낮)
단아, 세수를 하고 있다.
#.8 씬. 학교 복도.(낮)
단아, 화장실에서 손수건으로 얼굴 닦으면서 나오는데.
현규, 수건 들고 앞에 서있다.
현규 : 에이. 다 준비해뒀는데. (손수건 뺐으며,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넨다)
단아 : (손수건을 뺏어서 손을 마저 닦으며 걸어가는)
현규 : 뒷풀이들 하러 갔는데, 안가요?
#.9 씬. 박물관 내.(낮)
단아, 거즈 들고 들어와서 서는데, 뒤 따라 들어오는 현규.
현규 : 학교 앞 놀부집에서 가정과가 벌주 산대요. 안 갈 거예요?
단아 : 너나 가서 얻어먹어.
현규 : 같이 가자구요. 승리의 주역이잖아요? 어리버리한 어시스트.
단아 : (거즈로 유리를 닦는)
현규 : 그런 건 왜 직접 하고 그래요? 애들 시키면 되는데?
(억지로 뺏으면서) 아, 진짜. 이러니까 나만 생고생이잖아요. (거즈로 유리 닦으면)
단아 : (거즈 뺏으면서) 진짜, 왜 그러니? 너?
현규 : 내가 뭘요?
단아 : 나 네 상대 아니야. 나 너 다니는 학교 선생이야.
너 이러는 거 나 우습게 보는 거거든. 얼마나 선생이 선생답지 않았으면....
현규 : (자르며, 단호하게) 처음부터 얘기했잖아요? 나한테는 선생 아니라구.
단아 : 그만두자. (돌아서면서) 너하고 이런 실갱이 정말 싫증난다.
현규 : (톤 높여서) 그러니까...... 왜 그날 날 그런 눈으로 봤어요?
단아 : ......
현규 : 이렇게 무시할 거면서. 난 그냥 친구놈들하고 농구만 하고 있었다구요.
그냥 지나쳐가지 그랬어요. 왜 벼락 맞은 사람처럼 날 그런 눈으로 봤냐구요.
단아 : 미....미안하다. 내가 본 사람 네가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 사람인척 나한테 다가오려고 하지마.
현규 : 상관없어요. 날 보면서 누굴 생각하든 상관없다구요.
그러니까 제발.....날 좀 봐줘요. 자꾸 밀어내려고만 하지 말구.
단아 : 아마 살면서 제일 미안한 사람 너일 거야. 미안해할게, 두구 두구.
그러니까 거기까지만 하자. 나 미안한 마음 말고는 너한테 줄 게 없어.
현규 : 날 그 사람 이름으로 불러도 되요. 그 사람인척 하면서 평생 살라고 하면 그래줄 수도 있다구요.
단아 : (암담하다. 눈을 감고)
현규 : (뒤에서 다가와 단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단아 : (눈을 뜨고) 어떤 사람도 그 사람이 될 수는 없어. 그래서 너는 안 되는 거야.
아니, 너는 더더욱 안 되는 거야. (걸어가는)
현규 : (고개를 떨구는)
#.10 씬. 노교수 사무실.(낮)
노교수, 강석 앉아있는.
강석 : 제가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그 족보, 어차피 맡아가지고 계시는 거면, 교수님도 이럴 권한이 없으신 거 아닙니까?
그 후손 분을 제가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짓겠습니다.
노교수 : 어디 있는지 나도 모르네.
강석 : 족보까지 맡아가지고 계시면서 어디 있는지 모르신다. 믿기지 않습니다.
노크 소리.
노교수 : 들어와요.
남교수, 자료 들고 들어오는.
남교수 : 찾으셨던 자료 가져왔는데요, 교수님. (강석을 보는, 또야 하는 표정으로)
노교수 : 이만 가주게.
강석 : 그럼, 제가 직접 찾아내서 구입을 해도 되겠습니까?
노교수 :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는)
강석 : 주민등록이 말소 됐다곤 하지만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습니다.
노교수 : 맘대로 하게나.
강석 : 찾아내서 그쪽에서 족보를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주시는 겁니다.
(일어나는) 그럼, 가보겠습니다. (인사하고 나가는)
노교수 : (외면하고 있는)
남교수 : 교수님?
노교수 : (보면)
남교수 : 저렇게 성환데, 파시면 안 되는 거예요?
노교수 :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남교수 : 후손들도 지키지 못한 족보잖아요. 교수님 꽤 큰 돈 주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사람한테.
노교수 : 그래서?
남교수 : 그 사람도 교수님한테 팔았다고 생각할 텐데. 그럼 그냥.....
노교수 : 내가 자넬 잘못 가르쳤나 보구만.
남교수 : 죄송합니다.
#.11 씬. 교정.(낮)
벤치에 누워 양 팔 머리에 받치고 눈을 감고 있는 현규. 그런 현규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혜주.
차 옆에 서서, (또는 조금 떨어진 장소에 서서) 강석, 핸드폰 버튼 누르는.
혜주 : (번호 확인하고 받는) 응?
강석 : 오빠, 학교에 왔는데 집에 갈래?
혜주 : 아니야, 나 강의 중이야.
강석 : 임마, 강의 중에 전화 받고 그래도 돼?
혜주 : 들어가는 중이야, 끊을게. (끊고, 현규를 바라보는)
강석 : (답답한 심정으로 돌아서서 차로 걸어가는)
#.12 씬. 학교 앞 길.(낮)
강석, 운전해서 오는데. 길을 걸어가는 단아.
단아, 앞에 선 버스에 오르려다가 통증을 느끼며 주저앉는다.
뒤에서 그런 단아의 모습을 보는 강석.
강석 : (지나치려다 차를 세우고 내리는)
단아 : (입술을 깨물며 무릎 꺾고 가방을 앞에 낀 채 앉아있다)
강석 : 괜찮아요?
단아 :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는)
강석 : 평소에 숨쉬기 운동 말곤 하는 운동 없는 스타일인 거 같은데. 갑자기 축구 같은 걸 하니까 그렇잖아요?
단아 : .....
강석 : 이겼어요? 축구?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려고 하면)
단아 : (손길을 뿌리치고 일어서는)
강석 : 근육이 놀란 거 아니에요?
단아 : 됐으니까 가세요.
강석 : 타요. 어디까지 가는진 모르겠지만 태워다 줄게요.
단아 : 됐어요.
강석 : 이래저래 부딪히면서 안면 튼 사이에 그렇게 까칠하게 굴 건 없잖아요?
단아 : 버스 타고 갈 수 있어요.
강석 : (보다가) 그럼 그러든지요.
걸어가서 차에 올라타고 떠나버리는.
강석 : (룸미러로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 단아를 보는)
#.13 씬. 회사 로비.(밤)
수영, 걸어가고 있으면, 뒤에서 걸어오다 급하게 다가오는 태영.
태영 : 퇴근해?
수영 : (옆을 보고) 응.
태영 : 아버지는?
수영 : 약속 있으신가보더라, 먼저 가라고 하신다.
태영 : 끝낸 거 같으셔?
수영 : (보면)
태영 : 이실장이랑?
수영 : 우리가 상관 할 일 아니야.
태영 : 자식인데 어떻게 상관을 안 해? 아까 회의 할 때도 보니까 아버지 눈빛 아사무사하시던데.
계속 그러고 계신 거 아니냐구?
수영 : (주위 의식하면서) 넌 말 좀....
수위, 경례하면. 태영, 수영 입구를 나서는.
태영 : 눈치가 아버지가 목매고 계신 거 같단 말야. 아버지는 자존심도 없이.
#.14 씬. 야외 주차장.(밤)
수영, 태영 차 옆으로 다가가는.
수영 : 집에 갈 거지?
태영 : 왜?
수영 : 같이 타고 들어가자구. 기름 쓰면서 뭐 하러 두 대로 움직여.
태영 : 아, 싫어. 아침에 아버지랑 같이 타고 나와야 하잖아.
수영 : 그게 왜?
태영 : 다른 때도 아버지랑 같이 타고 다니는 거 껄끄러운데 이실장이랑 바람나신 거.....
수영 : 넌.
태영 : 아, 됐어. (자기 차문 여는)
#.15 씬. 길.(밤)
운전하고 있는 태영, 수영, 각자의 차에서. 나란히 가고 있는.
교통정리하고 있는 말순. 장기는 신호 조작하고 있고.
태영 : 욕본다, 너두. 아니 저놈의 경찰서엔 쟤 밖에 없나.
하긴 설치고 싶어서 지가 나가겠다고 손 번쩍번쩍 들 거야, 쟤는.
수영 : (무심히 고개 돌리다 길에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나눠주고 있는 진아를 본다)
길에서 사람들에게 열심히 명함을 돌리고 있는 진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지 않고 간다.
수영 : (보다가 차 길 옆으로 빼는데)
태영 : (그 모습 보고, 핸드폰 누르는)
수영 : (핸드폰) 응?
태영 : 어디 가?
수영 : 먼저 들어가라.
태영 : 집에 다 왔는데, 어디 가려구?
수영 : 잠깐 일 좀 보고 들어갈 테니까 들어가. (끊는)
태영 : 일은 무슨 일을 본다구.
그사이 신호 붉은 신호로 바뀌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는 기분으로 액셀 밟는데. 무사히 신호 건너온다.
호루라기 부는 말순. 하지만 이미 길을 건너온 뒤다, 말순이 따라오기엔 먼 거리고.
태영 : (혀를 낼름거리며) 약 오르지? (뒤 보면서 신이 났다)
그러다 꽝 하는 소리.
태영 : (욱하고 앞으로 기울어졌다가 고개 들면. 가벼운 접촉 사고다)
#.16 씬. 길.(밤)
전단지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진아. 차에서 내리는 수영.
진아 : (수영을 보는)
수영 : ......
진아 : (머쓱한 표정으로) 혹시 급전 필요하지 않으세요? (전단지 내미는)
수영 : (보면, 무보증, 당일 대출, 등등의 문구가 쓰인 명함을 본다)
진아 : 아르바이트예요.
수영 : 밥은 먹고 다녀요?
진아 : 저번에 보셨잖아요? 반찬꺼리 사가는 거. 설마 그게 걱정 되셔서 일부러 내리신 거예요?
수영 : ......(돌아서는데)
진아 : 오늘 일당 이따 밤늦게 받거든요.
수영 : (돌아서서 보는)
진아 : 그래서 점심도 아직 못 먹었구요.
수영 : ......
진아 : 저번에 병원비 꿔주신 거에다 조금 더 보태시면 안 될까요?
#.17 씬. 길.(밤)
장기, 태영과 접촉 사고 난 앞 차 옆에 서있고, 태영의 차 옆에 서있는 말순.
말순 : 그러니까 신호를 지키시지 그러셨어요.
태영 : 이게 다 댁 때문에?
말순 : 아니, 제가 왜요?
태영 : (차에서 내리는. 앞 차로 다가가는. 아줌마 운전석에 인상 쓰고 앉아있는)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한눈을 팔다가.
아줌마 : (목 뒤 만지면서 차에서 내려 뒤로 가서 차가 얼마나 찌그러졌는지 보는) 무슨 운전을 그렇게 해요?
태영 : 정말 죄송합니다, 많이 다치시진 않으셨습니까?
아줌마 : 몰라요, 사진 찍어봐야 알죠.
태영 : 우선 병원으로 가시죠.
아줌마 : 지금 병원이 문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태영 : 차는 제가 완벽하게 수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아줌마 : 오늘밤은 어쩌구요?
태영 : 네?
아줌마 : 우리 남편이 차 끌고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아, 정말 어떡해, 어떡해.
내가 사고 안내면 뭐하냐구, 뒤에 와서 들입다 받는데.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우는)
태영 : 아주머니, 아주머니? 뭐 이만 일로.....
아줌마 : 아저씨가 알아요? 이만 일인지 저만 일인지.
말순 : 많이 찌그러지진 않았으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아주머니.
아줌마 : 오늘도 몇 번씩 전화 걸었단 말예요. 차 끌고 나가지 말라구.
태영 : 아니, 그렇게 걱정 되시면 직접 끌고 나가시던지.
아줌마 : (버럭) 우리 남편 택시 운전해요, 됐어요?
태영 : 아, 네.
시간 경과.
길 한 켠. 아줌마, 여전히 발 동동 구르는 느낌으로 주저앉아 울고 있고,
그 앞에 태영, 말순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 옆에 서있는 장기.
장기 : 회의들 너무 오래 하신다.
태영 : 이 방법은 어떨까요?
아줌마 : (보면)
태영 : 아저씨한테 전화를 거시는 거예요. 지금 어디냐?
아줌마 : 그래서요?
태영 : 그럼, 제가 거기로 쏜살 같이 달려가는 거죠. 가서 아저씨 택시를 탄다 그겁니다.
그리곤 아저씨랑 말을 트고 술을 드시게 한다 그거죠.
아줌마 : 우리 남편 조금 있으면 퇴근해서 올 시간이에요.
태영 : 아, 그럼 그건 안 되겠구. 그럼, 이건 어떨까요?
아줌마 : 뭐요?
태영 : 도난 사고를 당했다고 하는 거죠. 집 앞에 차를 세워놨는데 없어졌다.
말순 : 그걸 지금 수습책이라고 하는 거예요? 일 더 크게 만드는 거지.
태영 : 그랬는데, 제가 밤새 아는 공업사에 가서 감쪽같이 고쳐다가 집 앞에 세워놓으면.
말순 : 훔쳐갔다가 제 자리에 가져다 놓는 도둑의 심리는 뭔데?
태영 : 말이 안 되나?
말순 : 그럼, 그게 말이 되는 거 같아요?
아줌마 : 아, 어떡해, 어떡해, 또 한번만 끌고 나가면 이혼이라고 했는데.
태영 : (버럭) 그러니까 끌고 나가지 말라는데 왜 끌고 나오고 그러세요?
아줌마 : 이 아저씨가 지금 누구한테 화를 내고 이래?
태영 : 그니까요. 제가 왜 이럴까요?
#.18 씬. 음식점. (밤)
수영, 진아 앉아있는.
수영 : (종업원에게) 갈비 2인분 주세요.
진아 : 아니에요, 전 그냥 육개장이면 되는데.
수영 : 갈비로 주세요.
종업원 : 소갈비, 돼지 갈비 어떤 걸루요?
수영 : 소갈비로 주세요.
종업원 : (걸어가면서 주방에 대고) 소갈비 2인분이요.
진아 : (난감한 느낌으로) 그럼 빚 너무 많이 늘어나는데.
수영 : 열심히 일해서 갚아요.
진아 : 전 분명히 육개장 먹겠다고 했으니까 육개장 값만 갚을래요.
수영 : (미소 짓고)
진아 : 진짜예요. 전 소갈비 사달라고 한 적 없어요.
수영 : 알았어요.
시간 경과.
불 위에서 익고 있는 갈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진아.
수영 : 안 먹어요? 점심도 못 먹었다면서요?
진아 : (배시시 웃는) 딱 1년만이다. 얘 먹어본지.
수영 : ......
진아 : 경찰서에서 그 인간......취직 시험 합격 한 날 먹어보고 처음이예요.
수영 : 먹어요, 타요.
진아 : 그 날요.
수영 : (보면)
진아 : 그날 경찰서 앞에서요.
수영 : .....
진아 : 아저씨가 그러셨잖아요. 사랑 같은 건 없는 거라구.
수영 : ......
진아 : 그 말이......무지 고마웠어요. 내일 아침에 어떻게 눈을 떠야 하나......막막했거든요.
근데, 아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구나. 그랬어요. 사랑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
그러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다. 어차피 없었던 거니까. 괜찮다. 괜찮을 거다, 그랬어요.
수영 : .....
진아 : 그 말이 하고 싶어서.....밥 사달라고 했던 거예요.
수영 : 어서 먹어요.
진아 : (고기 집어서 입에 넣으며) 와, 입에서 살살 녹는다.
#.19 씬. 동네 길.(밤)
태영, 말순 걸어오는.
태영 : 아, 그 아저씨 정말 한 성질 하시네. (뒤 돌아보면서) 내가 다 죄인이라는데 그렇게까지 길길이 뛸 건 또 뭐있나?
말순 : 자기 목숨보다 귀한 차라잖아요.
태영 : 그래서 내가 내 차하고 바꿔주겠다고 까지 했잖아요.
말순 : 그래서 그 아저씨 자존심 더 건드렸잖아요. 내가 도둑놈이냐, 사기꾼이냐?
없이 산다고 사람 만만하게 보는 거냐? 일장 연설 하시는 거 못 들었어요?
태영 : 나도 답답해서 그런 거지, 자존심 건드리려고 일부러 그런 거요?
말순 : 가만 보면 그쪽, 사람 성질 건드리는데 뭐 있는 거 같던데.
태영 : 그러는 댁은?
말순 : 내가 뭐요? 그 아줌마가 그래도 경찰이 같이 가서 얘기를 해줘야 더 나을 거라고 해서
따라가 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태영 : 아이고, 눈물나게 고맙네. 솔직히 댁, 성질 더럽다는 그 아줌마 남편한테
나 당하는 거 구경하고 싶어서 따라온 거잖아?
말순 : 이 양반이. 이래서 뒷간 갈 때랑 올 때랑 다르다는 거야.
태영 : 댁이 너 또 걸려라 하고 눈 요렇게 요렇게 뜨고 꼬나보고 있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런 사고를 왜 내?
나 운전병 출신이야, 이거 왜 이래?
말순 : 운전병 출신이라 신호를 밥 먹듯이 위반하나?
태영 : 댁이 이 동네에 나타나기 전까진 그런 일 없었어.
말순 : 어련하시겠어.
태영 : 뭐야? 민중의 지팡이가 선량한 시민한테 이렇게 빈정거려도 되는 거야?
말순 : 난 누가 시비 걸지 않으면 입도 안 여는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태영 : 그렇겠지. 주먹부터 나가는데 입 열 새나 있으시겠어.
말순 : 댁이 봤어? 봤냐구? 내가 입 열 새 없이 주먹부터 나가는 거 댁이 봤냐구?
태영 :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러니까 허구헌 날 깨지고 다니는 거 아니겠어?
말순 :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일껏 도와준다고 따라 나섰더니만.
태영 : 언제 도와달라고 했냐구.
말순 : 내가 댁을 다시 상종하면 나말순이 아니라, 너말순이다. (걸어가는)
태영 : 나말순이나, 너말순이나. 촌스럽기는 오십보 백보다.
말순 : (홱 돌아보며) 당신, 이혼 당했지?
태영 : 뭐? 너 조회 해봤지? 그거 직권 남용이야. 경찰이라고 신원 조회 막 해보고 그러는 거.
말순 : (어이가 없어서) 진짜 머리 나쁜 티 너무 낸다. 조회 안 해봐도 자기 입으로 부는데 뭐 하러 조회를 하냐?
태영 : 저, 저게.
말순 : 당신 앞으로 조심해. 내가 당신 차 넘버만 보이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테니까. (걸어가는)
태영 : 내가 너 꼴 뵈기 싫어서 아예 이사를 간다. 가.
(자기 머리 쥐어박으며) 아직 이혼 신고도 안했는데, 조회 소리가 거기서 왜 나오냐, 나오길.
#.20 씬. 음식점 앞.(밤)
수영, 진아, 수영의 차 옆에 서있는.
진아 : 잘 먹었어요.
수영 : 아르바이트 다른 거 찾아봐요.
진아 : 왜요?
수영 : 그런 거 좀 그렇잖아요. 없이 사는 사람들 더 힘들게 하는.....
진아 : 아저씨, 학교 때 범생이었죠?
수영 : 티 나요?
진아 : (웃고)
수영 : 그럼. (차에 올라 시동 거는데)
진아 : 저기요.
수영 : (차창 내리는)
진아 : 돈 갚으려면 어떻게 연락해요?
수영 : 우연히 만나게 되면 갚아요.
진아 : ......떼어먹어도 되요?
수영 : (차 출발 하는)
진아 : (보고 서있는)
#.21 씬. 말순의 집.(밤)
말순, 정복 차림으로 냉장고에서 물통 꺼내 벌컥 벌컥 마시는.
말순 : 오죽하면 이혼을 당했겠어. 성질 더럽지, 바람 피지, 깐죽거리지. 진작 이혼 당하지 않은 게 용타.
들어오는 진아.
말순 : 어디 갔다 와?
진아 : 아르바이트요.
말순 : 아르바이트 자리 찾았어? (코 킁킁거리며) 어, 이게 무슨 냄새야? 갈비집에 아르바이트 나갔었어?
진아 : 아니예요.
말순 : 그럼? 아르바이트비 받아서 갈비 먹고 온 거야? 그것도 혼자? 치사하게?
진아 : 아르바이트비는 내일 받기로 했어요.
말순 : 그런데 무슨 돈이 있어서?
진아 : 누가 사줬어요.
말순 : 누가?
진아 : 그런 사람 있어요.
말순 : 너 혹시....
진아 : 혹시 뭐요?
말순 : 노래방 도우미 같은 거 나가는 거 아니니?
진아 : 언니두. 그쪽으로 나설 거면 룸싸롱으로 직행하지 뭐하러 노래방 도우미를 나가요.
말순 : 그런데 누가 밥을 사줘?
진아 : 그냥 예전에 알던 사람인데, 우연히 만났어요.
말순 : 남자지?
진아 : 네.
말순 : 연애 하는 거니?
진아 : 아니에요, 언니.
말순 : 연애도 안하는데 남자가 왜 여자한테 밥을 사줘?
진아 : (물끄러미 보다가) 언니 연애 한번도 안 해 봤죠?
말순 : (무안해서) 내, 내가. 해봤어. 이 나이 먹도록 연애도 한번 안 해 봤겠냐?
진아 : 안 해 봤죠?
말순 : 아, 씻어야겠다. (욕실로 들어가는데)
진아 : 안 해본 거 확실해요, 언니.
말순 : 아니야, 해봤다니까. (문 쾅 닫는)
#.22 씬. 욕실.(밤)
말순, 거울 보면서.
말순 : 쟤가 어떻게 눈치 챘지?
#.23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책을 보고 있다. 동동,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만기 : 생각을 할 거면 생각만 하고, 공부 할 거면 공부만 해라.
동동 : 전요, 아빠 닮아서 잡생각이 많대요.
만기 : 누가 그러더냐?
동동 : 엄마가요.
만기 : 공부 안 할거면 이리 와서 할아버지 어깨나 좀 주물러봐라.
동동 : 얼마 주실 건데요?
만기 : 뭐?
동동 : 우리 반 민수는요, 할아버지 어깨 주물러 드리면 500원씩 받는대요.
만기 : 그런 건 돈 받고 그러는 거 아니다.
동동 : 우리 반 민수는 받는데요.
만기 : 그럼 넌 나 얼마 줄래?
동동 : 제가 왜 할아버지한테 돈을 줘요?
만기 : 드려요.
동동 : 드려요?
만기 : 널 이 세상에 내놔줬으니까 돈을 주려면 네가 엄청 많이 줘야 하는 거다.
동동 : 할아버지가 저 낳았어요?
만기 : 이 할애비가 없었으면 너도 없는 거다.
동동 : (궁리하는) 많이 드려야 하는 거예요?
만기 : 좀 줘야 한다.
동동 : (하는 수 없이, 만기 뒤로 와서 어깨를 주무르는) 그럼 공짜로 해드릴게요.
만기 : 진작에 그럴 것이지. 동동아?
동동 : 네.
만기 : 사람은 말이다. 자꾸 딴 생각이 들 땐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게 좋다.
동동 : 그래도 딴 생각이 나면요?
만기 : 그럼 더 많이 움직이거라.
동동 : (일어나는)
만기 : 어깨 주무르다 말고 왜?
동동 : 달리기 하려구요.
만기 : 나갔다 오거라.
#.24 씬. 마당.(밤)
동동 마당을 뱅글 뱅글 돌고 있다. 태영, 들어오는.
태영 : 야, 하동동, 달밤에 체조 하냐?
동동 : 이게 체조야? 달리기지?
태영 : 달밤에 뭐하는 짓이냐구?
동동 : 아빤, 몰라도 돼.
태영 : 이 자식이. 너 아빠 자꾸 무시할래?
동동 : (뛰기만 하는)
태영 : 왜 안하던 짓은 하고 그러냐.
동동 : 아빤 몰라도 돼.
태영 : 너 계속 그런 식으로 해라, 국물도 없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동동 : (뛰다가 주저앉아 우는)
수영, 들어오는.
수영 : (다가오는) 동동아?
동동 : (고개 드는)
수영 : 왜 그러니?
동동 : 할아버지가 딴 생각이 날 땐 많이 움직이라고 하셔서 달리기 열심히 했는데.....
수영 : (그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그런데?
동동 : 근데도.....엄마 생각이 나요.
수영 : (동동의 머리를 쓰다듬는)
#.25 씬. 강석의 집 앞.(밤)
천갑, 차에서 내리고, 기사 차에서 골프클럽 내리는.
강석의 차 다가오는.
천갑 : 지금 오냐?
강석 : 오늘은 잘 맞으셨어요?
천갑 : 다 털렸다.
강석 : (웃는) 그러니까 내기는 왜 하세요?
천갑 : 야, 야, 돈 안 걸린 걸 무슨 재미로 하냐?
강석 : 따보신 적도 없잖아요?
천갑 : 그래서 약 올라 미치겠다. 네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오늘은 좀 땄다고 할 거야.
강석 : 어머니한테 참 비밀도 많으세요.
#.26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천갑, 강석, 들어오는데, 울면서 뛰쳐나가는 혜주.
강석 : 혜주야?
천갑 : 저 놈의 자식. 왜 또 저래?
영자E : 여보.
최부장, 무릎 꿇고 앉아있는,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며 서 있는 영자.
영자 : 여보.
천갑 : 자네가 웬일인가?
최부장 : (천갑 앞으로 다가와 무릎 꿇으며) 회장님? 살려주십쇼.
천갑 : 하, 그 사람 참.
최부장 : (강석에게 매달리면서) 사장님? 사장님? 살려주십쇼.
영자 :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저 난리예요.
최부장 : 회장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사장님, 한번만 용서해주십쇼.
강석 : 일어나세요.
최부장 : (두 손을 모으고) 제가 욕심이 배 밖으로 나왔었습니다.
천갑 : 그러니까 왜 눈치껏 못 굴어.
최부장 :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다시는.
강석 : 앉으시죠.
천갑, 강석, 영자 소파에 앉으면.
최부장 :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파로 와서 앉는)
강석 : 법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최부장 : 고, 고맙습니다, 사장님.
강석 : 하지만 퇴직금은 지급하지 않겠습니다.
최부장 : 사장님. 제가 지금 나가면 어디 가서 밥을 벌어먹고 삽니까? 사장님, 한번만 용서를.....
강석 : 회사에 끼친 손해 퇴직금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최부장 : 사장님, 아직 막내 놈이 대학도 졸업 못했는데.....
강석 : 다시 한번 집으로 찾아와서 이런 모습 보이시면 법적인 조치까지 취할 겁니다. (일어나서 2층으로 올라가는)
최부장 : (천갑에게 매달리며) 회장님? 회장님?
천갑 : 난 힘없어. 뒷방 늙은인 거 몰라?
최부장 : 사모님, 사모님?
영자 : 아이고, 이걸 어째.
#.27 씬. 천갑의 방.(밤)
천갑, 옷을 갈아입고 있는. 영자 옷 받아 걸면서.
영자 : 그렇게 크게 손해를 끼친 거예요?
천갑 : 그러니까 강석이 놈이 저렇게 대차게 나가는 거 아니겠어.
영자 : 그래도 퇴직금은 줘도 되는 거 아닌가? 우리랑 고생한 세월이 얼만데.
천갑 : 당신 아는 척 하지마. 강석이 놈 직원들 딴 생각 못하게 아예 이참에 못을 박으려고 더 세게 나가는 모양인데.
당신이 뒤로 아는 척하면 저 자식 뚜껑 열려서 더 무섭게 나올지도 몰라.
영자 : 그래도 너무 모질게 하면 앙심 먹지 않을까?
천갑 : 강석이 놈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
영자 :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저럴 때 보면 오금이 저려.
천갑 : 근데 혜주 그 놈은 왜 또 그러고 뛰쳐나가는 거야?
영자 : 왜긴 왜야? 물 먹으러 내려왔다가 최부장 들어서면서 무릎 꿇고 울고불고 하는 거 보고
겁먹고 뛰쳐나간 거지.
천갑 : 지가 왜 겁을 먹어?
영자 : 아, 몰라. 내 속으로 낳은 새끼지만 걔 속도 정말 모르겠어.
천갑 : 원 생기다 만 놈 같으니라구. 빨랑 그 놈 데려갈 놈 하나 물색해봐.
시집이라도 보내버려야 마음이 놓이지 이거야 원.
영자 : 당신은, 미쳤어, 미쳤어. 행세하는 집안에서 역혼이 웬 말이야?
천갑 : 그게 안 되는 거야?
영자 : 최선생 더러 우리 혜주 짝 될 청년 하나 없냐고 넌지시 물어봤더니
본대 없는 집안에서나 역혼하는 거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
천갑 : 그 놈의 행세하는 집안에선 가리는 것도 옘병하게 많네.
영자 : 최선생이 그러는데, 이것저것 따지는 걸로 치자면 조선시대보다 더 무서우면 무서웠지 덜 할 것도 없다드라구.
돈만 가지곤 절대 행세 못한다잖아. 그래서 우리도 족보 사려고 한 거 아냐?
천갑 : 아, 그럼 강석이 저 놈부터 장가 들여.
영자 : 내가 다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천갑 : 좀 제대로 된 물건들을 갖다 붙이라고 해. 애 성질만 건드리지 말고.
당신이 최선생한테 너무 짜게 주는 거 아냐?
영자 : 짜게 주긴. 사진 한 장 가져오는데도 얼마가 건너가는데. 그, 그게...거, 거..마 뭐라든데.
천갑 : 공부 좀 제대도 해라. 뭘 그렇게 맨날 더듬냐, 더듬길.
영자 : 하여간, 이번엔 제대로 된 아가씨 찾아달라고 신신당부 했으니까 기다려봐.
(톤 높여서) 근데 오늘 잃었어? 땄어?
천갑 : (급 당황 모드로 물러서며) 땄어, 땄어. 애 떨어지겠다.
#.28 씬. 영인의 사무실.(밤)
영인, 서류며 차트며, 컨셉 차트 보면서 일하고 있는.
들어오는 석호.
영인 : 아직도 퇴근 안하셨어요?
석호 : 주자창에서 기다리다가 올라오는 길이야.
영인 : 참 할 일도 없다.
석호 : 다들 퇴근 했는데 왜 이러고 있어?
영인 : 보면 몰라요. 일 하잖아요.
석호 : 가자, 운전해 줄게.
영인 : 아직 남았어요.
석호 : 내일 해.
영인 : 머리 속 뒤숭숭해서 일이라도 하려는 거예요.
석호 : (보는)
영인 : 왜요?
석호 : 너도 갈등하고 있는 거잖아?
영인 : ......
석호 : 정리하자.
영인 : 뭘?
석호 : 겁나고 싫은 거 알아. 하지만 그것도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영인 : 나 이미 정리 했어.
석호 : 아니잖아, 너? 그래서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리고 있는 거잖아?
영인 : 내일이라도 당장 병원 가서 떼버리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니까 답답해서 이러고 있는 거야.
석호 : 너.....정말.....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니?
영인 : .....
석호 : 네 속에 있는 그 아기한테?
영인 : 나 세 번이나 결혼 했던 여자야. 이런 사고 처음일 거 같아?
석호 : ......
영인 : 난 애초부터 모성본능이라는 게 없는 인간이야. 가줘, 나 일해야 해.
석호 : 왜 하필이면 너였는지 모르겠다. 네가 아니었으면 그냥 조용히 늙어 죽었을 텐데. (돌아서서 나가는)
영인 : ......
#.29 씬. 집 앞.(밤)
병도 차 와서 멈추는. 운전석에서 옆에서 코 골고 있는 주정 흔들어 깨우는.
병도 : 선배, 선배, 여기 맞아? 또 아냐?
주정 : (눈 뜨고) 어, 맞네.
병도 : 딱 두 시간 걸렸다. 무슨 나폴레옹도 아니고, 이 산이 아닌가벼를 두 시간이나 하냐?
주정 : (어깨 툭 치며) 수고 했다. 이번엔 바로 찾았다.
병도, 주정 차에서 내리는.
병도 : 내일 내려가는 거다.
주정 : 어딜?
병도 : (화들짝) 어디라니? 우리 집 같이 내려가기로 했잖아?
주정 : 내가? 언제?
병도 : 언제? 아까, 4차로 노래방 갔을 때, 친구여 같이 부르면서.
주정 : 내가 네 집엘 왜 내려 가냐?
병도 : 미치고 팔짝 뛰겠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내가 네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냐고 했잖아?
주정 : 아. 내가 진짜 취하긴 취했나보다. 야, 농담이야, 농담.
걸어오는 석호.
주정 : 어, 조카? 왜 걸어와?
석호 : 술 드셨어요?
주정 : 나야 맨날 그렇지 뭐.
병도 : 안녕하세요? 하주정 선배 후뱁니다, 저번에 문상 가서 인사드렸는데.
석호 : 아, 네. 저희 고모님 모시고 오셨군요.
병도 : 네. 선배가 취해서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두 시간 헤매고 다녔습니다.
석호 : 고생 하셨네요.
병도 : 선배? (팔 잡으며) 선배? 내일이다? 내일?
주정 : 야, 야. 나 내일 못 일어나.
병도 :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오늘 낸 술값이 얼만데?
주정 : 잘 가라. 술 잘 마셨다.
병도 : (따라 붙으며) 선배? 선배?
주정 : 너 이러면 나 너랑 안 놀아주는 수가 있다.
#.30 씬. 마당.(밤)
주정, 석호 들어오는.
주정 : (정자 가리키며) 조카, 잠깐 앉았다 들어가자.
석호 : 네.
주정, 석호 정자에 앉는.
주정 : 오빠하고 얘기해봤는데, 힘들 거 같아.
석호 : .....
주정 : 우리 집안사람이 될 사람이 아니라셔.
석호 : .....
주정 : 어떡해? 도와주고 싶었는데.....
석호 : .....
주정 : 조카?
석호 : 네.
주정 : 회사 말이야. 지금은 수영이한테 맡겨도 되잖아?
석호 : .....
주정 : 그럼, 그냥 떠나버려.
석호 : .....
주정 : 같이 살고 싶은 사람하고 다른 생각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떠나버려.
석호 : .....
주정 : 안되겠지? 조카는 죽었다 깨나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지?
석호 : ......
주정 : 그럼, 그냥 연애만 해. 왜 안돼? 그 사람이 결혼 안하면 안 된대?
석호 : .....
#.31 씬. 집 전경.(밤)
깊은 밤.
#.32 씬. 삼월의 방.(밤)
삼월, 조만 잠들어 있는.
조만 : (이불 걷어차며 자고 있는)
삼월 : (눈을 뜨고. 조만의 이불을 여며주는) 서른이나 먹은 게 잠버릇 하곤.....
(그러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33 씬. 마루.(밤)
삼월, 방에서 나와 다른 방 쪽을 보는.
단아의 방에 불이 켜져 있다. 단아의 방 앞으로 가는.
삼월 : 안 자?
#.34 씬. 단아의 방.(밤)
단아, 고개 들고.
단아 : 주무세요. 전 책 좀 보다가.....
삼월 : (문 열면서) 몇 신데 아직도..... (그러다 놀라 들어오는) 단아야?
단아, 작은 대야에 수건을 적셔 다리에 올리고 있다. 다리에 심한 흉터. 불에 타고, 꿰매고, 수술 자국까지 있는.
삼월 : (놀라 다가와 앉는) 왜? 아파?
단아 : 그냥 좀 쑤셔서요.
삼월 : (얼른 다리를 주물러주는) 왜 많이 걸었어?
단아 : 아니예요.
삼월 : 어깨는?
단아 : 괜찮아요.
삼월 : 덫 난 거 아냐?
단아 : 아직 그럴 때 안됐잖아요.
삼월 : (수건 물에 적셔 다시 올려주면서) 참 별나지. 더울 때는 그냥 저냥 넘기다가 겨울만 접어들면 덫이 나니.
어깨는 정말 괜찮은 거야?
단아 : 네. 하여간 삼월씨 잠귀도 밝아.
삼월 : 내가 너 이래서 선생 노릇 하는 거 위태위태한 거야.
멀쩡한 사람도 하루 종일 학생들 앞에 서서 가르치려면 힘든데.
단아 : 누가 들으면 중병이라도 앓는 줄 알겠다.
삼월 : (대야 들고) 뜨거운 물 다시 가져오마.
단아 : 아니에요. 이젠 거의 풀렸어요.
삼월 : 누워있어. 다시 가져올게.
단아 : 괜찮은데.....
#.35 씬. 부엌.(밤)
삼월, 냄비에 물을 끓이고 있는.
삼월 : 애기씨, 우리 단아 좀 어떻게 해주세요.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어째 저리 안 낫는대요.
한동안 무사히 넘긴다 했드만.
#.36 씬. 단아의 방.(밤)
삼월, 단아의 다리에 젖은 수건을 올려주고 주무르는.
단아 : 삼월씨 손이 약손이네.
삼월 : 회장님이 한의원에 부탁을 하시는 거 같드라. 어깨 덫 나는 거에 바를 약.
단아 : 병원에서 처방해준 연고 바르면 되는데.
삼월 : 자꾸 덫 나니까 그렇지. 아프면 아프다고 해. 병은 소문을 내야 한다는데 왜 자꾸 혼자서만 끙끙거려.
단아 : 삼월씨?
삼월 : 왜?
단아 : 난 말야. 지금 내 나이가 우리 삼월씨 나이만 했으면 좋겠다.
삼월 : (울먹해지고) 못됐다, 참. (단아 머리 쓰다듬으며)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얼마나 좋고 이쁜 나인데 나만큼 늙지 못해 한스러워 하누.
단아 : (삼월의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아, 우리 삼월씨 냄새 참 좋다.
삼월 : 이젠 그만 좀 보내줘. 언제까지 이렇게 끌어안고 살 거야?
단아 : .....
삼월 : (단아의 어깨를 다독이는)
#.37 씬. 강석의 집 앞.(밤)
강석, 서있는. 천천히 걸어오는 혜주.
강석 : 임마, 나 너 가출 한 줄 알았어.
혜주 : 내가....그럴 주제나 되나.
강석 : 다시는 오늘 같은 일 없을 거야. 최부장, 다시는 우리 집에 안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혜주 : ......
강석 : 미안하다. 회사 일 집까지 끌어들여서. (혜주 어깨 감싸고 집으로 들어가는)
#.38 씬. 혜주의 방.(밤)
혜주, 방으로 들어서다가 움찔하는. 영자, 팔짱 끼고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
영자 :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나 좀 들어보자.
혜주 : (고개 숙이는)
영자 : 왜 생기다 만 애처럼 허구헌날 그러는지 이유나 좀 들어보자구.
최부장이 너 잡아먹니? 사정하러 온 사람이 너 잡아먹냐구? 왜 울고 불고 하면서 뛰쳐나가? 허구헌날.
혜주 : .....
영자 : 속시원하게 얘기나 좀 들어보자구.
강석, 들어오는.
강석 : 뭐하세요? 지금?
영자 : 쟤 때문에 열불이 나서 그래. 저래 가지고 시집이나 갈지, 누웠다가도 내가 벌떡 벌떡 일어나.
강석 : 늦었어요, 내려가서 주무세요.
영자 : 너도 그만 좀 싸고돌아. 네가 맨날 그러니까 애가 더 반편이가 되가는 거야.
강석 : (강경하게) 어머니?
영자 : 나도 오죽하면 이러겠니? 내 속으로 낳은 내 새끼한테 오죽하면 반편이 소리를 하겠냐구. (화가 나서 나가는)
강석 : (혜주 어깨 다독이며) 자라.
혜주 : 나도 알아, 내가 반편인 거.
강석 : 이 자식. 너 오빠한테 한번도 맞아본 적 없지?
혜주 : .....
강석 : 반편이 소리 다시 한번 하면 너 오빠한텐 처음으로 맞는 거야. (나가는)
혜주 : ......
#.39 씬. 천갑의 방.(밤)
천갑,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영자 화가 나서 들어와 침대에 거칠게 앉는.
천갑 :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빈병이나 고무신....
영자 : (흘겨보는) 넝마 때려친지가 언젠데 당신은.
천갑 : (얼굴 문지르며) 열 세 살 때부터 입에 밴 소린 걸 어떡해. 혜주 들어왔어?
영자 : 강석이가 찾아서 데리고 들어왔어요.
천갑 : 그럼 됐네, (영자 어깨 잡으며) 자, 자. 자자구.
영자 : 저기 우리 혜주 병원에서 바뀐 거 아닐까? 어떻게 내 배로 난 자식들이 저렇게 다르냐구?
천갑 : 혜주 집에서 낳았잖아? 병원 가려고 나서다가.
영자 : 아, 맞다.
천갑 : 당신 요즘 컨디션 너무 안 좋은가보다. 그런 것까지 깜빡 깜빡하구.
영자 : 오래 되서 그렇잖아?
천갑 : 아무리 오래 됐다구, 지 새끼 어디서 낳은 줄도 몰라? 오래 전에 만난 나, 남편이라고 알아봐주는 게 고맙다.
영자 : (버럭) 아, 붙어사는데 그걸 몰라?
#.40 씬. 회사 전경.(낮)
석호E : 무슨 말이냐?
#.41 씬. 석호의 사무실.(낮)
석호, 책상 앞에서 일어서는. 그 앞에 서있는 수영.
석호 : 이제 와서 대출을 못해주겠다니?
수영 : 은행장 결재 단계에서 보류 결정이 났답니다.
석호 : 보류라니?
수영 : 다시 검토를 해 보겠다고 합니다.
석호 : 언제까지?
수영 : 확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석호 : 사람들 무슨 일을 그렇게 해.
#.42 씬. 수영의 사무실.(낮)
수영, 들어오는. 책상 앞에 앉아 양미간을 누르는데, 들어오는 태영.
태영 : 어떻게 된 거야? 오늘 진성 결재 해주기로 한 거 안 된다는데?
수영 : 대일부터 결재 했다.
태영 : 그럼 어떡해? 진성 이사장 길길이 뛰면서 전화해서 난린데.
수영 : 대일은 세 번이나 미뤄뒀던 거라 어쩔 수 없었다.
태영 : 진성 이사장 몰라서 그래? 당장 올스톱 시키겠다고 저러는데 현장에서 일을 어떻게 하냐구?
수영 : 네가 가서 설득 좀 해봐.
태영 : 그것도 몇 푼이라도 들고 가서 하는 거지. 직원들 월급 밀렸다고 죽는 소린데.
아니, 죽는 소리가 아니야. 정말 그 쪽도 죽을 맛일 거라구.
수영 :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고 사정 좀 해봐라.
태영 : 빈손으로 가선 씨도 안 먹힌다니까.
수영 : 대출 건이 보류 됐다.
태영 : 뭐야? 다 끝난 얘기였잖아? 대출 받아서 우선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던 거 아니냐구?
수영 : 담보가가 높이 책정 됐다구 윗선에서 재검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대.
태영 : 지금에 와서 그러면 어떡해?
수영 : 그래서 아버지가 은행장 만나러 나가셨어.
태영 : 아,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진작 이천갑 회장하고 손을 잡으셔야 한다니까.
차일피일 미루다, 정말 부도라도 나면 어쩔 거야?
#.43 씬. 강석의 사무실.(낮)
강석, 전화 중. 천갑 팔짱 끼고 앉아있는.
강석 :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철회가 아니라 보류라는 건 확실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제휴 후에는 바로 대출이 나오는 걸로 처리해주십쇼. 네. 그럼. (수화기 내려놓는)
천갑 : 그 치들 발등에 불 떨어졌겠구나.
강석 :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천갑 : 야, 야.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그 집 종택 있잖냐?
강석 : (다가와 앉고)
천갑 : 제휴 조건으로 그 종택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 어떨까?
강석 :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버지.
천갑 : 똥줄이 탈 때, 미친척하고 종택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야. 값은 제대로 쳐주겠다고 하면서.
강석 : 죽으면 죽었지 그럴 양반이 아닌 건, 아버지가 잘 아시잖아요?
천갑 : 안 되겠지?
강석 : 제가 쓸만한 데를 알아보고 있으니까 그쪽엔 침 삼키지 마세요.
천갑 : 지금 서울 본가도 담보로 들어가 있다니까 하는 소리야. 너도 가서 들었잖아?
그 뭐 사당인가 뭔가 하는 걸 서울 본가로 옮겨서 종택이라는 건 명색만 있는 거라고 그 노친네들이 안 그러디?
명색만 있는 종택이니까 미친척하고 파십쇼 하자는 거지 뭐.
강석 : 돌아가신 분도 그렇고 대대로 조상들이 그 집에서 태어났다잖아요.
하회장이 혀를 물고 죽으면 죽었지 그 집을 내놓겠어요.
천갑 : 얼마나 걸릴까?
강석 : 뭐가요?
천갑 : 그치들 백기 들고 살려주십쇼, 하고 기어들어올 때 말이야?
강석 :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44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최선생, 영자 마주 앉아있는. 영자, 젊은 여자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최선생 : 이런 댁에선 함부로 여식의 사진을 밖으로 내돌리지도 않는데
저하고 워낙 각별하시다보니 어렵게 내놓으신 겁니다.
영자 : 그렇겠죠. 우리 애 사진은 보고 뭐라세요?
최선생 : 남자 인물 좋은 거야 뭐에 쓰겠냐고는 하셨지만 그래도 못생긴 것보단 낫다시더군요.
영자 : 어머, 어머, 우리 애가 마음에 드시긴 하셨나보다.
최선생 : 워낙 고매한 학자 집안이시라 속내를 잘 드러내시지 않는 사모님이시지만
젊은 애들끼리니 교류 삼아서 한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치만 두 사람이 만나는 건 절대 말이 새면 안 된다고 못을 박으시더군요.
영자 : 아이고, 그래야죠. 저희 쪽도 누구누구 집 딸과 선 봤네 어쩌네 하는 소리 밖으로 새나가는 거 노코멘트거든요.
최선생 : 여사님. 그럴 때는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하는 거라고 제가....
영자 : (당황하고) 어머, 어머. 저는 최선생님 고생하셔서 웃겨 드리려구 유머로 한 건데.
최선생 : 다른 데 가선 그런 유머 하지 마세요. 그리고 웬만하시면 영어 사용하지 마세요. 경망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영자 : 그럼요, 제가 최선생님 앞이라 편해서 사용하는 거지 저도 아무 때나 잉글리쉬 하는 거 진짜 웃기더라구요.
최선생 : (진짜 이 아줌마가 싫다) 그냥 영어라고 하세요.
영자 : (깔깔 웃으며) 어머, 어머, 이것도 유먼데.
최선생 : 안 웃긴다니까요.
영자 : 근데 이 아가씨 이 눈 한 거 같지 않아요? 코도 좀 그렇구.
최선생 : 그래서 마음에 안 드세요?
영자 : 아, 아니에요. 최선생님은. 별로 티도 안 나고, 비싼 데서 했다 싶어서 그런 거예요.
최선생 : (버럭) 그럼 이런 댁 아가씨가 싼 데서 합니까?
#.45 씬. 남교수 사무실.(낮)
남교수, 단아 차 마시고 있는.
남교수 : 그렇게 팔라고 안달바가진데 그냥 파시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가 교수님한테 한 소리 들었다.
단아 : 그런 말씀은 뭐하러 하셨어요?
남교수 : 그 싸가지가 팔라고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 성화지. 교수님 형편도 어려우신 거 알지. 그래서 그냥 해봤다 왜.
그 후손 찾아내서 지가 살 테니까 그 때 가서 딴 소리 하지 말라고 그러잖아.
어차피 팔리게 생긴 거 같은데, 교수님 형편이나 풀리셨으면 싶어서 그래봤어.
단아 : 쥐어 박히지 않은 게 다행이세요.
남교수 : (킥 웃으며) 하긴 한대 치시고 싶은 표정이시드라. 근데, 걔 말야?
단아 : (보면)
남교수 : 깐깐하게 생긴 게 몸 함부로 굴리고 다닐 애 같진 않은데.
호텔에서 그것도 대낮에 그러고 있는 거 보면 싹수가 노랗지?
단아 : 싹수가 노란 거 아시면서 교수님께 족보 팔라고 하셨어요?
남교수 : 내가 원래 좀 생긴 남자애들한테 약하잖니? 그래서 내가 아직 싱글인 거구.
노크 소리.
남교수 : 네.
현규, 들어오는. 차키 남교수에게 건네는.
현규 : 스페어 타이어로 갈고 빵구난 타이어는 넣어놨으니까 그냥 넣고 다니지 마시고 꼭 떼우세요.
남교수 : 고맙다. 밥 사줄게. (일어나며) 나가자.
현규 : 나중에요.
남교수 : 왜? 강의 있어?
현규 : 아르바이트 가야 해서요.
남교수 : 아르바이트 하니?
현규 : 네. 장가 가려구요.
남교수 : (웃으며) 아르바이트 해서 장가 가려구?
현규 : 네. 색시 반지 살 돈 벌려구요. 가겠습니다. (나가는)
남교수 : 난 쟤 진짜 마음에 들어. 생긴 것도 쌈빡하고 또 애가 무엇보다 단정하잖아?
단아 : 부추기지 마세요. 여린 애예요.
남교수 : 여린 애 마음을 왜 그렇게 아프게 하는데?
단아 : 저 강의 들어가요. (책 들고 나가는)
#.46 씬. 커피숍. (낮)
현규, 커피 나르고 있는.
길에 서서 커피숍을 바라보고 있는 혜주.
#.47 씬. 마당. (밤)
정자에 앉아있는 만기, 석호, 수영, 태영.
석호 : 결정을 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만기 : ......
태영 : (일어서며) 할아버지, 더는 망설이실 시간이 없다니까요.
석호 : 앉아라.
태영 : 아버지도 두루뭉술하게 말씀 하지 마시구, 확실하게 말씀을 드리세요.
현장은 공사도 중단 된 상태라구요.
만기 : 사옥 담보로 대출을 받기로 했다고 하지 않았냐?
석호 : 그게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영 : 보류 됐다고만 하고, 언제 대출을 해줄지 확답을 주지 않습니다.
만기 : ......
태영 : 할아버지, 이러다 정말 부도 맞아요, 우리.
까딱 잘못하다간 몇 천도 못 메꾸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구요.
만기 : 생각을 좀 해보자.
태영 : 생각하실 틈이 없다니까요. 하청 업체 사장들 전화에 울렁증이 다 생기려고 한다구요, 할아버지.
석호 : 앉으라니까.
태영 : 지금 제가 앉고 서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만기 : (일어서는)
태영 : 할아버지. 어차피 길은 하나예요. 다른 방법도 없으면서 시간만 끄시면.....
만기 : (집 안으로 걸어가는)
태영 : 할아버지.
수영 : (잡는) 그만해라. 네가 안 떠들면 할아버지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실 거 같니?
태영 : 답답해서 그렇잖아, 답답해서.
#.48 씬. 만기의 방.(밤)
잠들어 있는 동동, 앉아있는 만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49 씬. 만기의 방.(아침)
만기, 석호, 수영, 태영, 동동, 각자 상 앞에 놓고 식사 중이다.
동동 : (어른들 눈치 보고 있는) 할아버지?
만기 : 왜?
동동 : 밥 먹을 땐 말 하는 거 아니에요?
만기 : .....
동동 : 어제까지는 안 그랬잖아요?
만기 : 어른들이 다 생각 할 게 있어서 그랬다.
동동 : 네.
만기 : 답답했냐?
동동 : 조금이요.
만기 : 하고 싶은 말 있냐?
동동 : 저 오줌 마려운데 나갔다 와도 돼요? 할아버지 아직 진지 드시고 계셔서 안 되는 거예요?
만기 : 나갔다 와도 된다.
동동 : 네. (일어나며) 쌀 뻔 했네. (나가는)
만기 : 이천갑 회장한테 언제 만날 수 있는지 연락을 해봐라.
석호 : 아버님.
태영 : (화들짝) 할아버지. 진짜 결정 잘 하신 거예요.
수영 : ......(조금 안심이 되는)
#.50 씬. 한정식 집 룸.(낮)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는 만기, 석호. 그 앞에 천갑, 강석.
만기 : 생각을 좀 하느라 시간을 끌었습니다.
천갑 : 결정을 하셨습니까?
만기 : 어려울 때 도와주시겠다고 하니 염치없지만 도움을 구할까 싶습니다.
강석 :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만기 : (강석을 보는)
강석 : 저희는 시간을 오래 끄시기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쪽과 제휴를 결정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회사 내부적으론 **건설과의 제휴는 없었던 일로 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만기 : (굳어져서 보는)
석호 : (당황하고)
천갑 : (야, 야, 하는 표정으로)
강석 : 죄송합니다. 어른께서 보자고 하시니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게 도리다 생각하고, 이렇게 나왔습니다.
느긋한 강석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만기의 표정 대조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