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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3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마지막 주일)
십자가, 그 뫼비우스의 띠
사50:4~9상; 시31:9~16; 빌2:5~11; 눅23:44~56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파커 파머의 글을 읽으며 묵상하고 있습니다. 어제 올린 글도 우리의 “숨겨진 온전함”을 탐색해가는 글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파머는 외면과 내면, 무대 위의 삶(외면)과 무대 아래의 삶(내면)을 대조해 가면서 우리의 “온전함”을 설명합니다. 뫼비우스 띠라는 은유를 가지고 우리의 외면과 내면이 별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뫼비우스 띠는 비틀린 종이 띠 하나로 만든, 단면이 하나뿐인 띠를 말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결국 원래 방향의 “뒤집힌” 상태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서 문학과 철학에서 여러 가지 풍부한 상징으로 쓰이게 됩니다.
안쪽과 뒤쪽,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계의 소멸, 혹은 이중성의 통합, 혹은 경계 너머를 상징하기도 하고요, 그런가 하면, 시작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시간의 반복, 내면의 순환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또한, 한쪽 면이 계속 순환하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한성의 은유로도 사용됩니다.
파커 파머는 띠의 안쪽 면처럼 보이는 쪽을 따라가다 보면 띠의 바깥 면처럼 보이는 쪽이 나오고, 또 그 바깥 면처럼 보이는 쪽을 따라가다 보면 띠의 안쪽 면처럼 보이는 쪽이 나오는, 안과 밖이 따로 없는, 양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면인 이 양면은 서로를 공동 창조하는 유비로 사용하지요. 그러니까 뫼비우스 띠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든 그것은 끊임없이 밖으로 흘러나와 세상을 이루거나 변형시키는데 일조하고, 우리의 외부에 무엇이 있든 그것은 지속적으로 안으로 흘러들어와 우리 삶을 이루거나 변형시키는데 일조하는, 우리 인생 자체의 은유라고 말합니다. 파머는 말하지요. “우리 인생에서는 궁극적으로 단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한다”
저의 20대를 돌아보면, 저는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려고 했던 대학에 가지 못하고 장신대 학부에 입학했는데, 장신대 학부가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다들 저처럼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해서 온 루저들처럼 보였습니다. 거기다가 정말 가난한 신학생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엄청 위축된 상태였죠.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꾀째째 했습니다. 게다가 아주 내성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겉으로는 독특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는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를 썼는데, 그것은 나의 내면의 약함, 열등감을 가리려는 책략이었습니다. 학부를 졸업하고 신대원에 들어갔는데, 명문대에를 나온 사람들도 같이 공부를 하면서 열등감은 극치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의 내면과 외면은 완전히 따로 노는, 그야말로 분열된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온유하고 부드럽다고 했지만, 내 내면은 폭력적이고 거칠었고, 또 겉으로 보이는 똑똑하고 지적인 모습은 내면의 초라함과 두려워하는 모습을 가리는 방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저의 외면과 내면, 그 둘은 서로 서로를 도와주고 이끌어주면서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 저를 창조해갔습니다. 이대로 계속가면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갈 무렵 집단상담을 만났습니다.
제가 30대 중반에 집단상담에 참여하여 왜 그렇게도 좋았나 생각해 보면, 나의 이중성, 분열된 모습이 깨지는 해방감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감정도 드러내고 억눌렸던 것을 풀어놓으면서, 적어도 집단 안에서는 내 자신의 안과 밖이 같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게 해결되진 않았지만, 악순환의 궤도에서 빠져나오는 어떤 새로운 길을 발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안과 밖은, 때로는 격하게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를 감싸주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제가 울타리를 치고 내면과 외면을 차단하고 있었을 그때도 그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고 있었지요. 그래서 더 나쁜 나를 창조하든지, 아니면 조금 더 나은 나를 창조하고 있었습니다. 파커 파머의 말대로, 저는 언제나 뫼비우스 띠 위에서 살고 있었고, 끊임없이 바깥에 있는 것과 내면에 있는 것들이 이음새 없이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 마지막 주일인 종려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던 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어린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뒤따르며 “호산나”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노래를 불렀지요.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리고는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고난주간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고발당하고 급기야 하룻밤의 법정 선고 끝에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 주간입니다. 그런데 그 첫날은 요란한 환영행사로 시작되는 거지요. 저는 한때 고난주간의 첫 날로 종려주일을 지키는 일이 좀 거북하고 혼란스러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이었죠. 기뻐하라는 거야, 슬퍼하라는 거야? 행복한 날이야, 불행한 날이야? 잘 됬다는 거야 잘못 되었다는 거야?
이 혼란과 모순을 또 한번 펼치고 있는 본문이 빌립보서2장에 있는 소위 “그리스도 찬가”라는 노래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빌립보서는 서기57년 바울이 에베소 옥중에 있을 때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유난히 드러난 편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 2장 6절~11절은 바울의 글이 아니라, 이미 당시 교회에서 부르고 있던 “초기의 찬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종의 초기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 “그리스도 찬가”는 “하강”(케노시스: 자기비움)과 “상승(승귀)”(플레로마)이 한 노래 안에 공존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에케노센: 케노시스)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에타페이노센)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점점 하강의 곡선으로 내려오십니다. 어디까지 내려오십니까? 십자가까지. 모든 것의 “제로 지점”인 십자가까지. 그런데 이 십자가는 또 다른 상승(승귀)으로의 변곡점이 됩니다.
그러므로(연결접속사<디오>, “그로 인하여, 이런 연유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휘페륍쏘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시 상승하여 온 우주가 경배하는 하나님의 충만, 하나님의 영광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찬가는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강이 상승이요 상승이 하강이 되는 구조 말입니다. 바로 그 전환점, 변곡점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제로 포인트, 모든 값이 디폴트 되고, 모든 것이 리셋 되는 자리가 됩니다.
여러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올라감이 내려옴이고 내려옴이 올라감인 십자가의 신비는 우리 가까이에도 있습니다. 낮이 밤으로 바뀌는 그 어슴푸레한 자리를 알고 있습니까? 그때 특히 고즈넉하고 고요하지요. 밤이 낮으로 바뀌는 그 어둑하면서도 발그스레한 자리를 알고 있습니까? 그때 특히 성스럽고 고요하지요. 자연이 보여주는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밤과 낮은 매번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교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낮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래 전 어느 늦가을에 호수공원을 달린 적이 있습니다. 유난히 힘든 마음으로 달리던 날이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하찮아 보이고, 나 자신마저도 하찮아보이던 날이었습니다. 공원 주변에 많은 낙엽들이 떨어져 있었고, 저는 곧 저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느 곳에 그 낙엽을 긁어모아 담아놓은 부대자루들이 쌓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릴 때 산에 가서 낙엽을 모아 아궁이의 불쏘시개를 하던 일이 불현 듯 생각났습니다. 장작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낙엽이 꼭 필요했습니다. 무성하던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지던 모습이 마치 내 모습 같았는데, 바로 그 낙엽이, 아무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그 낙엽이, 나무에 불을 붙이는 연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때 내 안의 실패와 무가치와 어둠이, 나를 죽이고 망하게 하는 것들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살리는 연료가 될 수 있겠구나, 나의 어둠이 나의 쓰레기가 아니라 나의 연료구나! 깨달음이 왔습니다. 엄청 울면서 뛰었습니다. 그 이후로 나의 어둠 가운데서도 어떤 희망의 불빛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게는 이것이 하강과 상승의 변곡점에서 십자가가 준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우리의 무가치함, 가치 없음과 싸웁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힘들어 했던 것은, 나의 쓸모없음, 사람들에게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보여질 것 같았을 때, 자기비하감으로 힘들어 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그냥 경제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자기비하나 루저라는 좌절이 배어 있을 때 더욱 힘이 들었습니다. 이때는 내가 겪는 모든 실패나 잘못들, 가난과 경제적 빈궁은 내가 생각하는 가치 없음을 증명하는 아주 훌륭한 증거 자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에고는 우리의 무가치함을 도저히 견디질 못합니다. 매우 민감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들으면 그 말은 곧바로 나의 무가치함을 폭로하는 말로 알아듣습니다.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하던지 하면 그 일들은 곧바로 나의 무가치함을 증명하는 자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화가 나고, 실의에 빠지고, 좌절을 하게 됩니다. 뫼비우스 띠가 나쁜 쪽으로 공동 창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토머스 머튼은 “절망은 자기 사랑의 절대적 극치”라고 말합니다. 절망은 자만심이 극도로 발전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절망의 뿌리”가 있는데, 자신의 능력에 만족하지 못하면 즉시 자기비하(자기연민)라는 고약한 냄새를 피우는 꽃과 잡초를 키우는 자만심이 바로 감추어진 절망의 뿌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자신의 능력에 만족하지 못하니, 자기비하라는 꽃과 잡초만이 우리 안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요. 여기서 작동하는 뫼비우스 띠는 필연적으로 나쁜 쪽으로 악순환하는 공동 창조의 상징이 됩니다.
그러면서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비하 같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절망이 아닌 희망의 상징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겸손한(겸비한)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비움이요, 제로 포인트, 모든 것이 디폴트 되는, 리셋 되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실패와 좌절과 부끄러움이 녹아내리는 자리, 그것이 망하는 쪽으로 가지 않고 흥하는 쪽으로 갔던 분기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정점”, “하나님의 자비의 정점”이라고 부릅니다. 이 자리는 우리의 모든 실패와 좌절, 무가치와 무의미, 수치와 모욕, 우리의 모든 어두움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빛 안에서 우리의 희망의 연료로 바뀌는 연금술의 신비가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가요? 우리는 종종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주님의 고난을 묘사하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본문도 “고난의 종의 노래”의 한 대목입니다. 제2이사야(이사야40~55장)에서 네 번 “고난의 종의 노래”가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읽곤하지요.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이 예언적으로 표현됩니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모욕하여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그러기에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사50:6~8상)
여기 보면, 이사야 시대, 고난의 종을 통해 표현된 주님의 고난 받는 모습은, 때리고 수염을 뽑고 침을 뱉고 모욕하여도 피하지 않았고, 그런데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수치를 당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은 것은 나를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읽고, 나도 예수님처럼 모욕주면 모욕을 당하고 때리면 맞아야지. 부끄러움을 주면 받아들여야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많이 헷갈리시는 분들입니다. 할 수 있는 걸 하겠다고 하셔야지요. 예수님은 고난을 억지로 참아내며, 하나님은 나의 의로움을 아시지, 하면서 정신 승리하신 분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런 모욕과 수치들이 하나님이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당신의 참된 가치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정신승리해서 모욕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수치를 수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즘 탄핵 당하신 분이 부끄러움을 모르더라고요. 맹자는 사단을 말하면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즉 좀 안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부끄러움을 알며, 양보할 줄 알고,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알아야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단서(꼬투리)라고 했는데, 정말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말씀이 이러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십자가를 만날 때 꼭 필요한 것은 우리의 실패와 좌절을 실패와 좌절로 만나고, 무가치와 무의미를 진정 무가치와 무의미로 만나고, 수치와 모욕을 수치와 모욕으로 만나고, 우리의 어두움을 진정 우리의 어두움으로 만나는 일입니다. 이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 우리의 에고가 극도로 싫어하는 일이라, 우리가 십자가를 못 만나는 것이지요.
우리의 무가치와 어둠을 우리가 어떻게 해보려고 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이렇게 하면 머튼이 말한 절망이라는 뫼비우스 띠의 순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이렇게 되면 우리는 끊임없는 사투라는 뫼비우스 띠의 순환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들이 내 안에 있음을 그대로 인정하고, 나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야 만나게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하강의 정점이 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둠을 희망의 연료로 바꾸시게 됩니다. 희망이라는, 자비라는 뫼비우스의 띠의 궤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절망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로 계속 순환할 것인지, 아니면 희망과 자비라는 뫼비우스의 띠로 바뀔 것인지, 그 결정적인 순간이 언제 오는가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제가 내 자신의 어둠을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고, 나의 실패와 부끄러움을 판단하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 맡겨드리는 순간 오게 되는 것을 압니다. 그때 계속 악순환 늪으로 빠질 것인지, 아니면 하강과 상승(승귀)이라는 선순환의 궤도를 탈 것인지 판가름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나의 실패와 부끄러움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가지고 나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나의 소관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힌트는 하나님의 자비/사랑에 대한 갈망입니다. 지향입니다. 나의 어떤 힘든 상황도 주님께서 거절하신 상황이 아니라는 것,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절대 당신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에 대한 지향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6세기의 교부, 니느웨의 이삭이 말했습니다.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사람보다 훨씬 위대하다. 한 시간 동안만이라도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울 수 있는 사람은 온 세상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 자기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은 천사들을 보는 사람보다 위대하다.” 주님의 사랑을 믿을 때 이 일은 가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