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 그리고 한율아!
계절이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구나. 많은 것들이 결실을 마무리하고 이어지는 계절 동안의 쉼을 준비하는 가을. 울긋불긋 다채로운 단풍을 물들였던 나무들은 낙엽을 떨구고 대부분 땅 위의 것들은 조용히 스러지기 시작하고 있어. 사실 겨울에 든다는 입동(立冬)의 절기가 엊그제 지났으니 이미 겨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어. 하지만 계절의 모습은 아주 깊어진 가을, 만추(晩秋)의 서정이 더 많이 느껴지는 듯하구나.
사실 요즘의 때는 할아버지가 ‘틈새의 계절’이라고 이야기하는 바로 그 시기인 듯싶어. 그것은 한 계절로부터 또 다른 계절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다채로운 색깔이 풍부하고 미묘한 느낌이 가득한 계절과 계절 사이의 계절, ‘제5의 계절’이 아닐까도 싶어. 늦가을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쓸쓸해진 느낌이 들고 그렇다고 초겨울이라고 말하기에는 그토록 춥지만은 않은 그 어느 한 계절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느낌의 시간이지. 떨어져 쌓여있는 낙엽이 수북한가 하면, 햇살이 좋은 언덕바지에는 아직도 스러지지 않은 풀들이 여린 풀색을 간직하고 있어. 아침으로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겨울인가 싶다가도 한낮이면 제법 따스해져서 아직은 겨울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 도시보다는 1주일쯤 계절의 모습과 느낌이 빠른 농원의 요즈음 11월 중순쯤의 시기인 이무렵이 바로 그 틈새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어. 바람이 불자 낙엽송의 노란 단풍이 우수수 떨어지는구나.
지금의 계절 이야기로 편지를 시작했는데, 오늘은 아름다운 계절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구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돌아오고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이 다시금 이어지지. 1년을 주기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절의 순환이 무척이나 신비롭지 않니? 또 변화되는 그 계절과 계절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지 않니? 도시에서는 그 느낌이 다소 무뎌지기도 하겠지만 이곳 산촌 농원에서는 계절의 모습과 느낌이 시시각각 너무도 새롭게 다가온단다. 한시도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이 시간 이 계절의 모습과 느낌. 특히나 우리나라의 기후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구분이 워낙 뚜렷해서 각 계절의 독특함이나 그 계절의 아름다움이 세계 그 어느 곳, 그리고 어느 나라의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어. 동쪽의 세계에 자리해 있고 삼 면이 바다인 우리의 땅, 작고 높은 산, 크고 작은 강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우리의 강토(疆土)는 사시사철 변화하는 계절의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이 더욱 특별하다는 생각도 들어.
예전에는 할아버지도 미처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강산(江山)이 사계절의 변화와 함께 항상 그토록 아름답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어. 할아버지는 세계의 여러 곳, 여러 나라를 다녀보면서 그들의 자연과 계절도 나름의 특색과 아름다움을 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다른 어느 곳도 우리의 자연과 강산만큼 아름답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나라의 자연과 계절만큼 아기자기하기도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곳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우리나라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때에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우리나라의 모습을 세계의 사람들에게 소개한 글을 보면 한결같이 우리나라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그 계절의 다채로움을 이야기하고 있어.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이라는 여성 지리학자는 우리를 찾아 우리나라의 방방곡곡을 돌아보고『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1897』이라는 제목의 여행기를 썼어. 그녀는 그 책에서 한국이 강산은 물론 그 계절들이 너무도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 세계적인 소설가로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방문하고 우리나라를 매우 아끼고 사랑했던 펄 벅(Pearl Buck 1982~1973)이란 미국인 여성 작가는 한국을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극찬했어. 그녀는 우리나라가 나라를 잃고 큰 어려움을 겪었던 일제 강점기 전후를 배경으로 한 소설『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살아있는 갈대(The Living Reed) 』 속에서도 우리의 찬란한 문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세하게 묘사하기도 했어.
이렇듯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를 우리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아. 하기야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나라를 금실로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三千里 錦繡江山)”이라고 말하지. 금수강산이라는 수식어는 사계절의 아름다움과 그 계절이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변화를 빼고서는 말하기 쉽지 않을 거야. 더구나 우리는 다른 동양의 나라들과 같이 계절의 흐름과 변화를 바라보면서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계절을 ‘24절기’로 나누어 부르기도 해. 그것은 1년을 12개월로 나눈 월(달/月/Month)보다도 두 배가 더 많은 숫자인 24개의 절기로 한 해의 계절이 나누어져. 그래서 하나의 절기는 보통 15일의 기간이 되고, 지금은 11월 7일에 시작된 입동(立冬), 겨울이 시작된다는 절기이지. 그리고 더 자세히는 그 절기 하나하나 15일 동안의 기간을 그 첫 시기의 5일은 초후(初候), 다음 5일은 중후(中侯), 마지막 5일은 말후(末候)의 3후의 시기로 나누어 보다 미세하고도 미묘한 계절의 변화를 살펴보기도 한단다. 우리는 한층 더 섬세하게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각각의 계절을 맞이한다고 할 수 있지.
한비, 한율아!
우리의 사계절 ‘봄여름가을겨울’의 이름을 한번 나직하게 읊조려 보려무나. 그 이름의 어감이 참으로 살갑고 다감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니? 春夏秋冬(춘하추동)이라는 한자어의 계절 이름에서도 아주 독특한 어감이 느껴지고, Spring Summer Autumn Winter라는 영어의 사계절 이름에서도 나름의 독특함이 묻어나. 하지만 우리가 부르는 계절 이름은 다른 그 어느 것보다도 더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그 계절의 느낌과 분위기가 묻어나는 듯해. 또 새봄, 한여름, 늦가을, 겨우내와 같은 말도 한번 조용히 말해보려무나. 무척이나 밝고 맑고 좋은 기분이 느껴지지 않니? 이토록 매혹적인 말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계절의 이야기를 시작해서 좀은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는 듯하지만, 이참에 우리의 계절 못지않게 아름다운 우리의 말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꾸나. 모든 언어가 그 언어가 고유하게 가지는 특징과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한글로 표기하는 우리의 말보다 더 곱고 아름다운 말은 아마도 이 세상에 없지 않나 싶구나.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한율이가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선택하여 학급 발표를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세종대왕께서 창제한 우리글 한글 덕분에 우리는 우리 고유의 말을 말하면서 그것을 가장 독창적이고도 완벽한 글이라는 한글로 적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어.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풀과 나무, 그리고 햇살, 바람, 비, 구름, 노을, 윤슬, 해와 달, 또 꿈, 벗, 멋, 품, 사랑, 기쁨, 즐거움, 그리움, 아름다움, 쓸쓸함, 숨결, 숨바꼭질, 개구쟁이, 어깨동무 따위와 같은 우리 말을 한번 말해보고 그것들을 써보려무나. 아늑하다, 소슬하다, 따사롭다, 푸짐하다와 같은 말, 그리고 가슴팍, 허리춤, 겨드랑이, 어깻쭉지, 종아리, 팔꿈치와 같이 우리 몸체의 일부분을 지칭하는 말. 또 깔끔, 말끔, 살랑살랑, 알콩달콩, 뽀글뽀글, 살며시, 틈틈이, 골똘히, 새근새근, 퐁당퐁당, 풍덩풍덩, 울그락불그락, 울긋불긋과 같은 의태어와 의성어. 한자로 만들어진 우리말 소박(素朴), 찬란(燦爛), 다채(多彩), 행복(幸福), 환희(歡喜)...
이처럼 아름다운 우리의 계절들, 그것을 말하고 쓰는 우리말의 아름다움, 그뿐만이 아닌 우리가 쓰고 말하는 수도 없이 아름답고 예쁜 우리말을 생각하면 할아버지는 무조건 기분이 좋아진단다. 그리고 이런 우리말로 한비와 한율에게 편지를 쓰는 할아버지는 아주 행복하단다. 오늘 계절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생뚱맞게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는 끝맺음을 하게 됐구나. 우리의 계절의 독특함, 강토와 강산의 아름다움을 좀 더 새로운 눈길로 자랑스럽게 바라보기를 바래. 또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해서는 더 큰 자부심을 느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자랑스럽게 사용하기 바란다. (2022.11.10.)
첫댓글 순우께서 잘 예를 들어 설명해주신 바와 같이 우리말과 우리 한글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말과 글입니다.
그런 점을 잘 가르침을 받는 손주들은 할아버지 잘 만나서 행복하겠구요.
그리고 사진으로 보는 나래실의 사 계절 풍경이 참으로 멋지군요.
그동안 세계유명 관광지를 두루 다녀보기는 했지만 대체로 한 계절의 명승지였지, 사계절 아름다운 곳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네요. 그래서 내가 얻은 결론은 금수강산이 최고야 이지요.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가능하면 자연과 가깝게 지내다 가는 것이 좋은 것 같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마음도 몸도 깨끗하게 살다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순환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얼마나 반복될지 모르지만, 백년은 살 것처럼 그냥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며 살고 싶네요.
우리말을 찾아 가꾸고 활용하는 자세를 큰 소리 박수로 화답합니다. 더구나 많은 독서량을 통해 살아있는 지식으로 손녀를 가르치니 얼마나 보기에 좋습니까? 이런 배경에는 이른 시절부터 다양한 독서가 그 바탕이 되었으니, 감히 범인은 범접하지 못할 경지에 이른 느낌입니다. 농원에 이르는 길에도 만추의 느낌이 가득하니 전번 방송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또 다른 풍광이네요~ 계속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자연과 인문이 함께 하는 곳, 나래실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80년대만 해도 미국이나 유럽의 가을 풍경에 매료되었으나 이젠 잘 가꾸고 많이 보살 핀 덕분에 우리나라만큼 다양하고 멋있는 풍경을 발견하기 쉽지 않아요. 사계절 풍경이 뚜렷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우리 후손들은 복 받은 세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단, 어른들의 터무니없는 과욕과 무원칙주의 같은 위험에 휘둘리지만 않는다면.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넉넉한 인심을 물려주고 싶군요. 그런 측면에서 순우는 모범적입니다. 이곳에서 방송을 보진 못했지만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