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오늘 교회는 ‘스콜라 철학의 왕’, ‘천재적 박사’라 불리는 교회의 대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기념합니다. 13세기 초 이탈리아 지역 아퀴노에서 태어난 성인은 당시 신학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현재까지도 가장 방대하고 위대한 신학업적이라 여겨지는 ‘신학대전’을 완성하여 중세 신학의 집대성을 이루고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신학의 완성을 이루신 분입니다.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에 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신학(神學, theology)’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역사 안에서 신학의 흐름 가운데 인간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인간의 본성이 그 분과 완전히 다르다는 이유로 하느님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느님을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이성과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에 오직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하느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시며, 하느님의 ‘계시(啓示, revelation)’, 곧 공적인 드러남을 통해서만 인간은 하느님에게 대해 알 수 있고, 이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와 같은 신학의 흐름에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슬람 문명의 침략으로 잊혀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철학의 새로운 발견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이성으로 하느님을 올바로 인식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고, 그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여 그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성인의 신학적 노력은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유명하며 위대한 신학적 업적이라고 여겨지는 ‘신학대전’을 통해 완성되었고, 성인의 이 신학은 교회를 통해 교회의 학문, 곧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꼭 공부하고 익혀야 할 신학으로 인정받아 지금에 이르기까지 신학을 공부하는 이는 의무적으로 성인의 신학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분명 하느님을 직접 본 적이 없으며 그 분에 관하여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 분은 죄로 물든 우리와 다른 분이시며, 이제껏 아무도 그 분을 직접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우리의 삶 안에서 체험을 통해 하느님에 관하여 알고 있으며 또 그 분을 매 순간 사랑으로 체험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아 인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을 기념하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행동, 아니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먼 길을 한 걸음에 달려온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을 두고 예수님은 마치 그들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그들과의 친족 관계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다음의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상황을 살펴보면 이 말의 의미는 보다 더 크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 관해 들리는 항간의 소문을 접하게 됩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아들 예수는 이전까지의 목수로서의 삶을 버리고 갈릴래아를 떠돌아 다니며 제자들을 모아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다는 소문을 접해 들을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 마리아는 그 모든 일에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들려오는 아들에 관한 소문, 곧 아들 예수가 세리들과 창녀와 같은 죄인들과 어울려 안식일의 규정들도 무시한 채 먹보요 술꾼처럼 지낸다는 소식을 들려오자 그리고 이에 더해 악령에 들린 이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식을 접하자 어머니 마리아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예수의 형제들과 함께 아들 예수가 실제로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들을 찾아 나섭니다. 먼 길을 고생하며 마침내 아들이 있는 곳을 찾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아들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기쁨에 그 곳에 있는 사람에게 아들을 불러달라고 청합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오려니 기대하고 있을 때, 방 안에서 들려온 아들의 목소리를 통해 마리아는 어머니로서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그리 크지 않은 그래서 사람들이 바람과 비를 피할 정도의 아주 작은 당시 유대의 가옥 구조를 감안해 보았을 때, 예수님의 이 음성을 문 밖에 있는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 그대로 분명하게 들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마치 자신을 낳아 길러준 어머니를 부정하는 듯한 이 말에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심장이 예리한 칼로 꿰뚫는 것처럼 아프고 아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가 듣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들으라는 것처럼 이 모진 말을 해야만 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독서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의 말씀은 율법을 실체의 모습을 지니지 않은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라 밝히며 그 율법의 완성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곧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완성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율법의 완성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다음의 한 마디로 완성되는 믿음의 순종으로 이루어졌음을 전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을 이른 나이 잃고 홀몸으로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 마리아가 문 밖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먼저 그 곳으로 뛰어나가 어머니와 자신의 형제들을 만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들과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하며 항간의 소문에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불식시켜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소명이 무엇인지를 그 순간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에 눈물을 삼키며 지금 이 순간은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시겠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밝혀질 그 순간, 그 순간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실 영광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키며 다음의 말을 내뱉었던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그리고 그 말에 뒤이어 자신이 해야 할 말,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고 말씀하시면서 육적인 인간 관계를 뛰어넘어 하느님 안에서 맺어지는 새로운 혈연관계, 곧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의 한 형제임을 그 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일깨워주십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응송은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해 줍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편 40(39), 8ㄴ. 9ㄱ)
주님께 바라고 바라면 주님은 우리를 굽어보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노래를 일러주십니다. 하느님께 드릴 새로운 찬양을 우리 입에 담아주십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노래는 그 노래가 갖고 있는 새로움으로 인해 이제껏 내가 누려오던 기존의 그 무엇을 벗어나는 그래서 누군가는 마음 아파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상처받을 수 밖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아픔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려는 새로운 뜻임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을 때,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아픔으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는 새로운 계약이 완성되었듯이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오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여러분의 삶 안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서 여러분 삶 안에서 하느님의 새로운 뜻을 이루는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시편 27(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