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 있는 정조.사도세자 능과 용주사를 찾아서 ...
호남선의 완행열차.....
나주에서 용산역까지 갈려면 야간에 12시간이 걸린다.
작금의 k.tx가 2시간도 않 걸리니 감회가 새롭다.
물론 좌석이나 있을까?
통로에도 사람들이 지나갈수가 없이 빽빽히 자리를 하고 있으며,물건을 놓아 두는
양쪽의 시렁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에서도 사람들이 자리를 하고 서울까지 가야 한다
그러니 내가 66년도에 서울로 상경하였을때의 호남선완행열차안의 세태이다.
그러니 가면서 일행들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다정다감 하기도 .....
"댁은 어디 누구집에 가시나요 ?"
" 나는 딸네집에 가네요 "
서로 가지고 온 음식들도 나누어 먹고 , 전라도 사투리가 기차안을 시끌벅쩍 하게
시끄럽다. 가끔 여객전무는 왔다갔 다 한다.
나는 66년도에 고등학교 졸업식장에도 참석을 하지 않고 '호남선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서룰로 향했을까? 그것도 무일픈의 시골 촌촌 놈이 ......
고등학교는 졸업했으니, 머리는 스포츠로, 돈을 좀 준 잠바로 의기양양하게 호남선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53 여 년전의 나의 서울상경기다.
호주머니에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돈 100원이나 있었을까?
아마도 서울까지 차비가 몇 천 원 정도는 하지 않했을까? 서울의 전차가 2원50전이고 시내 뻐스가
3원이었으니 ....
작은 보자기에는 고등학교때 배운 대학에서 시험과목인 '국어,수학, 그리고 문법책등을 둘둘
말아서 손에 들고,추운겨울에 나는 상경을 하였다.
나는 가감하게 무임승차를 결행했다. 아주 당당하게,돈도 없지만, 내 젊음으로 한 번 실행해 본
결심이었다.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했으니,아주 지능적으로 실행을 하였다.
서울을 올라가면서 기차안의 표를 검사하는 '여객전무'를 유심히 동태를 살 피었다.
나는 기차안에서 도둑차를 탄 것도 마음이 불안하고, 내가 서울에 가서 무엇을 하여 먹고 살
것인가?
이리역을 지나고 충청도로 접어 들면 나의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타지의 서울에서
고립무원의 어려운 서울에서,시골촌놈이 ...
그 수많은 시골의 많은 사람들을 서울로 실고 가는데,어디서 차표 검사를 하는지?
지금 익산까지를 가는데도 검사를 하지 않고 ,기차는 소리를 내며 칙칙폭폭하며 전라도를 지나
가고 있다. 앞을 살피니 지금의 '익산역( 이리)을 거의 가려고 하는데, 어 역객전무가 차표 검사를
하며 앞으로 오고있다. 크나큰 모자에 금태의 두줄은 위엄과 권위를 보이고 있다.
나는 만약에 걸리면 죽는구나 하고 대단한 결심으로,나의 앞으로 다가오는 여객전무를 피하여
역으로 하차 하여 ,검사기 지난 뒷 칸으로 무난히 승차하여 도둑차를 차고 나는 서울로 상경하여
올라갔다. 서울역은 빠져 나갈수가 없으니, 울타리가 없는 '용산역'에서 철조망을 유유히 빠져 나가
원효로 있는 둘째누나 집에 도착하였다.
나는 왜?
1966 년도에 서울을 향하여 호남선 완행열차를 무임승차 하였을까?
그 때 그시절에 호남의 나주라는데가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산골의 '보산리'라는데는 산골짜기다.
전기 ,뻐스, 전화,라디오도 없는 산골이며,작은 아버지가 동네 반장을 하여 읍사무소에서 '라디오'를
집에 있어서 k.b.s 제일 라디오의 연속극 '강화도련님'이란 연속극이 전국적으로 인기다 좋아 나도
저녁밥을 일찍히 먹고 , 그 연속극을 듣곤 하였다.
나주읍내까지는 약4km나 되는 상중 산골의 앞 산과 뒷산이 거의 서로 닿는 지경이며, 나무를 팔려
다니는 지게꾼들이 근근히 나주에 팔아서 사는 동네이다. 논과 밭이라고 해보아야 논3마지기 밭
약 700평정도 돼지 한마리 소 한마리 ,이게 전 재산...
서울에 둘째누나가 계셔서,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여, 내가 하고 싶은 분야에서
일을 하여 살아보자. 젊음과 자신만이 나에게 있을뿐이다 .
지금 생각하여 보니 ,내 인생의 중요한 삶의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첫댓글 그 옛날이여
정말 옛날이야기 입니다
꿈을 않고 서울로 오셨네요,고민과 고통이 시작 된 날입니다.
서울에서 공부를 할려고 입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배짱이 두둑한 청년기였네요^^ 지금 생각하면 가출이군요^^
그래도 서울에 둘째 누님이 계신다는 그 하나의 의지가 되어 용기를 냈을 것 같습니다.
완행열차안의 시렁위에도 사람이 올라앉아 가는 풍경은 당시의 콩나물 열차가 그려지는
낡은흑백필름의 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촌놈이 서울의 넓은땅에서 둘때누님댁을 찾는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격이 였을 텐데 그나마 주소하나 달랑들고 가셨을 것이며
그래서 물어물어 찾아 가셨겠지요 갑자기 낮도깨비같이 나타난 동생을
본 순간 둘째누님의 표정은 어떠했을까요? 지금생각하면 참 철딱서니
없었던 일 같지요?
아님니다
이미 중학교때부터 제가 공부를 잘해서 이미 약속은 되어 있습니다
둘째누나가 똑똑해서 너는 어떻게 해서든지 서울에 와 공부를 하여 살아가기를 ...
제가 전남의 명문고등학교 광주고등학교를 입학원서를 써 놓고 시험도 못받습니다
그래서 매형이 너는 가정형편이 그러니 나주에서 공부를 하고 서울로 와서 대학을 공부를 하라고 ......
중학때부터 서울에서 공부를 할수 있는지,탐색을 하여보기도 ...ㅎㅎ
바로 그런 용기가 훗날 인생의 성공의 밑그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슴속에 묻어 두기에는 너무도 암울했던 당시의 그 추억을 반추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네 신중년연대님들과 함께 현실의 다행을 비유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리라고 짐작해 봅니다.
지금은 정말이지 그 당시에 비하면 너무도 우리나라는 잘 살고 있는것
같아요 부모님 밑에서 편안하게 무리없이 대학까지 잘 졸업하고도
사회가 어떻고 뭐가 불만이라는 요즘젊은이들을 생각해 봅니다.
글 진지하게 오늘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절때 내가 성공하였다고 생각은 하지않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의 농촌의 실태를 말씀드리고,어떻게 하여 내가 살아갈것인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젊은니까 ,젊음이 재산이며 ,꿈이 있었습니다
지금이나 예나 사람은 서울에와서 공부를 하여 봐야 .....
고향에 내려와보니,나는 이미 50여년전에 이미 서울로 상경하여 하고싶은 공부를 해보았습니다
@동구리 성공이란 기준을 큰 것에 두지 않고 보통의 사람들로써
그래도 농촌의 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공무원으로
충실한 젊음을 보냈다는 것은 성공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에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라고 옛일을 되새기며 살 수 있으니 그 고생이 헛되지 않은 거지요..
책 한 권을 사기 위해 비만 오면 뻘구덕이 되어버리는 신기촌에서 똥장군 지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던 울 작은오빠의 가슴 아픈 추억담이 떠오른 아침입니다.
같이 공부한 한진가 오너의 사망 소식에 많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 오빠..
동구리님,
우짜던지 건강하시어 행복한 삶 이어가시길요.
남자없는 여자가 , "서방보다도 돈이 좋다는 "이야기에
아내가 없고 몸도 않좋아도 연금이 있어,지금 살고 있으며, 옛젊음의 추억을 반추해보면,
내 삶이 다소나마 즐겁습니다
왜냐? 젊은 어린시절로 돌아가니 ...
감사합니다
아이고 이야님 작은 오래비님의
이야기가 가슴 뭉클해 집니다.
@차마두 고생하셨습니다 .어떤이가 야시시한 여자이야기 ......
우리실버들하고는 거리가 멀지요
우리들끼리 오손 도손 소소한 삶의 이야기 ......
서로 소통하고 아기자기하게 감사합니다
동구리님의 인생길은 한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남은 삶은 건강하고 편안하시길요~^^
감사합니다
이렇나마 나의 삶의 여정을 회상하고나면 가슴이 좀 후련합니다
그때 그시절은 이렇게 고생을하고 ....
당당하게 사신모습 참 보기 좋으네요 .
어쩜 그리 베짱도 있으시고 재미나게 사신모습 멋지십니다 .
이렇게 멋지게 사시면 되는겁니다 건강하시기만 하세요 .
징그런 완행열차타고 인천에 와서 직장 다니던 시절이 넘 그립구여 .
그때에는 젊어서 그랬는지 ...
정말 무서운거 없이, 무일픈의 시골촌놈이 서울로 와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그 다음날부터 남산에 있는 도서관에서 대학입시공부를 ........
정말로 그래서 오늘날이 있나봅니다 수선화님 감사합니다
감동적인 상경기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감동적인 상경 그리고 명문대 진학 공직자 그 역
정이 자랑스럽습니다.
건강하세유.
감사합니다
이글은 나의 자랑의 이야기가 아니고 사실 그대로 이야기를 엮어보았습니다
더 보텐것도없고, 과장이나 , 더붙인 것도 .....
이러한 나의 옛추억으로 나의 현재의 삶을 위로하고
달레어보기 위하여 ....
어떻게 보면 농경사회의 탈출기라고 하여야 할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