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 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無底坑)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許)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沒死)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35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穩全)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傳播)하니라)
* 전방 부대 총기 난사 사건
최근 28사단 81연대 휴전선 GP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건은 우리 사회의 군대문화에 대한 인식전환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점과, 그리고 주범 김동민 일병 한 개인의 인격적인 문제들로 귀결되었지만, 왜 그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나?(부적응)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군대 처음 들어갔을 때 1987년부터 90년까지 전방부대 81연대와 82연대에서 근무했을 때 전방에서 겪는 어려움, 격오지 근무자들의 어려움(식량과 물 공급에 어려움과 공간의 어려움), GP와 특수부대의 어려움들을 조금씩 느껴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GP생활은 우리 나라 최북단의 휴전선의 긴장속에서 근무서는 것이 어려운 것인데, 무엇보다 좁은 공간에서 30명이 생활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문제고, 이들이 적은 물을 후방에서 받아서 사용하다보니 물을 최대한 아껴쓰는 것이 어렵고, 장마 때나 추운 겨울에는 보급이 원활하지 않으니 물이건 식량이건 나르고 사용하는 일이 어렵고, 화장실이 푸세식이라 그거 청소하느라 어렵고, 근무설 때 겨울철에는 영하 25도까지 내려가는 상황에서 근무서려니 힘들고, 여름에는 군화를 뚫는 모기 때문에 힘든 점이 있다. 그러나 많은 군인들이 이 과정을 이겼고, 나라는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일어나는 욕설, 인격모독, 각종 근무 스트레스....지금은 많이 나아졌겠지요...여하튼 모든 것은 이겨내야 할 과정이지, 총질하고 수류탄 깔 일이 아니다. 총질하고 수류탄 까는 일은 순간 귀신이 하라는 대로 하는 짓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하고 후방으로 숨어내려와 사회와 관계를 끊고 혼자 살려고 했다는 자기 폐쇄성의 문제도 그렇다.
* 오늘 말씀을 보면 사람의 힘으로 이기려 해도 이길 수 없는 더러운 군대 귀신들린 거라사의 한 사람을 보게 된다.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변화되었는지...그리고 그 사람이 사명은 무엇인지 말씀드리려 한다.
* 먼저 이 사건의 기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① 이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보여주시고,
② 거라사인의 귀신 들린 자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관심을 보게 한다. - 오직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 그 한 사람 고치고 오셨다. - 그 영혼의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③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는 주의 권세를 보여주신다.
④ 그 사회와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의 고통은 그 당시의 나라를 잃고 로마의 군사문화(군대귀신, 쇠사슬과 고랑)로 인하여 고통받는 민중의 한 아픔을 대변하고 있고, 주님은 그런 자의 고통을 치유해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거라사란?
거라사(마가와 누가)는 과거에는 제라시 또는 가다라(마태)라고도 불리웠고, 요단강 동편 갈릴리바다 남단에서 동남쪽으로 약 56km 지점, 요르단의 암만 북쪽 41.6km 지점에 있는 도시로, 이곳에 사는 주민을 거라사인이라고 불렀다 (마8:28, 막5:1, 눅8:26-27). 도시는 해발 약 370미터(1,200피트 / 1피트는 30.48cm로) 산상에 있는 마을이며, 예수님 당시에는 아마도 18,000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이 도시는 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였고, 기원전 332년쯤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세워졌다가, 로마에 점령당하여 로마의 속주 중 10대 도시(데카폴리스)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천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고, 그리스 시대에 큰 도시로 성장하여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근처에 좋은 철광이 있어 로마 제국 전체에서 아주 부유한 도시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 속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로마 제 14군단이 이곳에 주둔하였다고 하는데, 군부대가 있는 곳은 대개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폭력적이었고, 여러 이방 종교와 문화가 들어와서 사상과 종교와 문화의 혼합지역이 되어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의 순수성과 분명한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혼돈 속에서 살고 있었다(타협문화). 그래서 근처의 로마 군대를 위하여 율법적으로 먹지 말라고 한 돼지를 길러 그 고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속에서 귀신들려 고통받는 한 영혼이 무덤가에서 힘들게 살고 있었다.
- 이 이야기 속에는 부정적인 분위기가 있다.
① 한 영혼을 구원하시려 가는 예수님의 일행을 위기로 몰아넣는 광풍이 일어나고
② 낯설고 부정적인 지역
③ 부정한 무덤
④ 부정한 군대 귀신
⑤ 부정한 로마 군대
⑥ 부정한 돼지떼(레 11:7; 신14:8)
⑦ 외적 주변의 부유함과 어울리지 않는 부정한 사람 등.
그러나 핵심은 부정한 사람이다. 주님은 이 사람을 치유하심으로 거라사에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도록 하셨다.
*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의 문제
1. 그는 불안한 고독의 상황 속에 있었다.
1) 그는 상황적인 고독 속에 있었다.
① 집에 거하지 않았고 무덤에 거하였다(교제 상실).
집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정겨운 관계가 있는 곳(home)지만, 그는 집에 없었다. 사랑하는 관계를 잃어버린 고독은 인생을 가장 힘들게 하고, 외롭게 만드는 요인이다. 사람은 집이든, 회사든 일터든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맺고, 동호회 활동을 하고, 운동하고 산행하면서 여유를 가져야 행복하다고 한다. 집이 아닌 무덤에서 거하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절망이요, 외롬이다.
(예) 제가 그 81연대에 있을 때 부대가 전방 바로 바깥이었다가 교체되어 철책근무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관사가 아파트였다가 전방으로 들어가니 있을 곳이 없어서 (좀 섭함) 일단 사무실에서 잤는데, 누우면 머리부터 무릎까지 딱 맞았다. 두꺼운 매트리스에 담요 2개 깔고, 옷 세 개를 덧입고 그 위에 담요 한 장과 두꺼운 담요 그리고 두꺼운 솜이불 등을 덮고 자면서도 덜덜덜 떨고 잤다.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날은 춥고....잠자리는 불편하고....너무 추워서 수시로 깨고, 피워놓은 난로가 과열될까봐 깨고, 얼음을 깨서 이 닦고 세수를 하기도 하면서 근무를 했다. 힘들었다.
무덤에 있으니 얼마나 힘들까?
세수를 했을까요? 못했을 것이다. 이도 닦지 않고, 머리는 산발에, 얼굴은 꾀죄죄하고, 목욕도 안하고 냄새가 풀풀나고, 오래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자기 몸에 자해하는 상황이어서 상처가 곳곳에 있고, 자해한 피가 온몸에 엉겨붙은 모습이 흉악해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무덤은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절망과 슬픔과 허무, 삶의 무의미와 두려움과 한을 심어 주는 메마른 곳입니다. 그래서 무덤은 누구나 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그곳에서 메마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무덤은 너와의 진정한 교제나 진정한 대화가 없고 자기만 아는 독백만 있는 곳이다.
마태복음에서(8장) 마태는 귀신들린 자 둘이 예수를 만났으며,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28절)라고 하였다. 즉 아무도 그들과 어울리는 것조차도 원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어울리려고 하지도 못했다.
② 말을 하지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이 사람은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살았다.
뭔가 올바로 전달되는 말을 해야 마음이 통하게 된다. 오늘 주보에도 있지만, 말이란 '마알'로 '마음의 알갱이'라는 뜻이다.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의 능력과 수준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이 사람은 제대로 된 말이 아니라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니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안되어 단절될 수밖에 없다.
(예) 가정에서도 한 사람은 말을 하고 한 사람은 소리를 질러봐라 제대로 관계가 되나....
③ 옷을 입지 않았다.
특히 옷을 오래 입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사람은 옷을 통하여 자기의 신분과 개성, 특징을 드러내고 표현한다. 옷을 입지 않는 것은 현재의 삶속에서는 정상이 아니다.
물론 옷을 입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올바른 관계가 형성될 때만 옷을 입지 않는 것이다. 올바른 관계속에서 옷을 입지 않는 것은 너와 나와의 깊은 신뢰관계, 올바른 마음 열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사람은 비정상적으로 옷을 입지 않았다. 관계가 단절된 채 옷을 입지 않으니 그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④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였다.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를 잘해야 합니다. 이웃이 있기 때문에 자기 통제도 해야하고, 이웃을 위하여서라도 통제를 해야할 때도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길 가는 것을 막고, 위협하였다. 그를 제어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를 쇠사슬로 묶고, 쇠고랑을 채웠지만, 그는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깨뜨렸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사람은 이성을 가지고 사리를 분별하고 감정과 본능을 절제합니다. 나아가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말씀으로 성령으로 자기를 묶습니다. 그러나 귀신의 지배를 받게 되면 자기를 묶을 절제할 힘을 잃고 감정대로 기분대로 행하게 됩니다. 어떤 통제도 받기 싫어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하고, 감정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여 제어할 수 없는 상태로 가게된다. 그러면 질서가 파괴되어 사회는 혼란에 빠집니다.
(이번 총기난사 사건의 김동민 일병도 그러하다.)
-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여러 관계성을 단절하고 사는 경우가 많다. 어두운 골방이나, 게임방, 술집, 도서관을 무덤 삼아 홀로 거하며 그 영혼이 허무와 죽음의 심연에서 고통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자기를 내버려두라고 외친다. 건강한 교제를 싫어하고,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구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질러댄다.
특히 교회에 와서도 그런 사랑의 관계를 잃어버린 무덤의 상황속에 그냥 있는 이들이 있다.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을 의미하고,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 외에도 형제와 자매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데, 사랑의 교제로 자기를 묶고, 말씀으로 자기를 묶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올바른 모습이 아니다.
2) 그는 존재론적 고독 속에 있었다.
사람은 기본적인 생존 욕구(오감과 성욕 등)이 있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욕구, 소속감의 욕구, 나아가 자기 실현의 욕구도 있다.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 정체성이 흔들리고, 인생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상실하였고, 자기 실현을 할 수 없음에 대하여 깊은 좌절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 인생이 왜 여기까지 오게 되어 자기 인생의 꿈이 실현되지 못하고, 이렇게 밖에 살수가 없는 것인가, '나같은 자는 쓸모없는 자'라고 삶의 자긍심은 잃어버린 채, 결국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만들면서(자학), 자기 증오, 자기 학대, 자기 환멸, 자기 포기의 삶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런 한 사람의 좋지 않은 영향력은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피해를 주고, 다른 사람의 삶에 위기를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가정, 조직, 사회를 만들게 된다.
(예) 살다보면 또 상담하다보면,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화를 내고, 자포자기하여 낙심한 채 술과 도박, 방향성없는 막가는 삶을 살기도 한다. 이겨야 한다.
3) 그는 영적 고독 속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귀신에게 잡혀 있었다. 귀신을 인격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니 그의 영혼은 갈수록 황폐화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군대 귀신에 붙들려 있었다. 이 군대(legion)는 로마 군인 6000명으로 구성된 군단 이름입니다. 이를 볼 때 이 사람 속에 6000마리나 되는 떼귀신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영혼은 죽었으며, 영적 고독속에 살아간다. 세상적으로 부족한 것 없이 살아도, 근본적인 영적 고독, 영적 허전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고아의 심정'이라고 한다. 부모가 없는 고아는 다 가진 것 같아도 뭔가가 허전한 것이다.
(예) 네덜란드에 한국인이 500명 사는데, 입양아가 3천명이란다. 좋은 양부모 만나서 공부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사회적으로 안정되었지만, 부모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허전함, 그 삶의 고독을 이길 수 없어 부모를 찾고자 한국에 연락을 하여 만나는 장면이 얼만 전에 티비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이와 비슷하다.
어거스틴 - 주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둠이었음을 고백.(고백록)
* 그러나 문제가 아무리 커도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오시면 해결된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첫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29절)하셨다.
예수님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역사하고 있음을 간파하시고 당장에 귀신에게 명하셨습니다. 귀신만 쫓아내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귀신은 거라사인의 속에서 역사하는 것뿐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를 믿거나 주와의 참된 교류를 하기 싫어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지적 이해와 동의(시인)하고, 영접하고, 맡기는 것(의탁)인데, 귀신은 지적으로 알고는 있으나 참 믿음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 나를 괴롭게 말라’
이렇게 강하게 반발하며 관계성을 끊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31절을 보면 심판받아 무저갱(사단을 포함한 영들의 감옥 / 계20:1,3)으로 들어갈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이런 귀신들을 몰아내고, 물리쳐야 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로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4-17). 진리의 허리때,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말씀)의 무기로 싸워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한다. (세 가지 무기 : 예수의 이름, 보혈의 능력, 말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까이 해야 한다.
마음의 빈자리에 예수를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모시지 않으면 귀신이 자기가 들어와 주인인체 합니다.
둘째, 네 이름이 무엇이냐?(30절) 물으셨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왜 그에게 이름을 물으셨을까요?
이름은 구약성경에서부터 보면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 정체성을 뜻합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시는 것,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시는 것, 시몬을 게바(반석)으로 바꿔주시는 것은 그의 삶의 변화를 가리키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후사), 지체,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엡 3:6). - 어제 문자로 다 보냈는데..받았는가?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숨겨진 귀신의 정체를 폭로하시고, 그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기 원하고, 그의 삶이 변화되기 원하시기에 그의 이름을 물었다. 물론 겉으로는 군대귀신이 대답하였지만, 결국은 귀신이 떠나고 그 사람은 본래의 자기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귀신이 떠나니 그는 옷을 입었다.
귀신이 떠나니 정신이 온전하여졌으며,
귀신이 떠나니 예수의 발 아래에 앉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떠나니 이제 사람같고, 이제 주와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였다.
- 주의 발아래 앉는 것이 신앙의 기초다.
믿음생활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가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주의 발아래 앉아 시작하는 것이다.
(신 33:1-3) "1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2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 하나님과의 만남의 모습이요, 관계의 올바른 모습이요, 복받는 비결이다.
(눅 10:39) 마리아 -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42절).
→ 예수안에서, 믿음안에서 올바른 자기를 세우고(정체성 확립), 주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자!
셋째,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39절)
정신이 온전하여진 거라사인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인 자세이다.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이렇게 되길 바란다.
그러나 주님은 집으로 보내시며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는 새로운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큰 일 행하심에 대하여 일일이 고하며, 예수를 자랑하고 복음과 그 은혜, 그 사랑을 알려야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그 집에 가면 좋겠지만, 그 지역 사람들은 돼지들의 몰살 때문에 떠나가기를 원하였기에, 대신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람은 바로 고침받은 그 사람인 것입니다.
→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그 사랑을 증거하고 알리는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자!
나 때문에 예수믿고, 직분갖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일꾼이 나오도록 힘쓰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