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5월 2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마태 26,16-20)
-양승국 신부
< 내밀하며 지고한 사랑의 신비, 삼위일체 >
수도회 입회전 교리교사로 활동할 때나, 젊은 수사 시절, 아이들에게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칠 때,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이야기했었으면 좋았을텐데... 나름 쉽게 설명해보겠다고 머리를 짜낸 비유들이 나중에 확인해보니, 오류요 이단이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가톨릭 교리의 가장 기본이요 기초, 핵심이요 본질인 교리이지만, 너무 심오하기에 가장 모호하고 애매한 교리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34항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교리이다.”
많은 교리 교사들과 사목자들께서 올해도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시겠지요. 설명을 하고 있지만, 나도 확신이 가지 않는, 뭔가 가르치고 있지만, 나도 알쏭달쏭한... 언젠가 특별한 한 이미지를 봤습니다. 시각장애우 여러 명이 큰 코끼리의 신체부위 여기 저기를 만지면서, 각자 설명을 하고 있는 이미지였습니다. 코를 만지고 있는 분은 굵은 고무 호스라고 말합니다. 꼬리를 잡고 있는 분은 로프라고 말합니다. 다리를 만지고 있는 분은 기둥이라고 말합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제한된 우리 인간의 사고와 지혜로 크고 오묘하신 하느님의 실체를 설명하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다행스런 사실 한 가지, 우리 뿐만 아니라 당대 내놓으라 하던 교부들과 대신학자들 역시 삼위일체 교리 앞에서 고민과 갈등을 거듭했다는 것입니다. 각기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 교리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 누구도 완벽한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어떤 분들은 큰 과오를 저질렀고, 어떤 분들은 경고를 받았으며, 어떤 분들은 이단으로 낙인 찍히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이 교리에 대한 설명은 어려운 것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유념할 것은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된 그 어떤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비유라
할지라도,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신비 앞에 인간의 무지와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겸손의 덕이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 숱한 갈등과 시련, 고민과 기도 끝에 정립된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은 오늘 미사 중 ‘감사송’ 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뭔가 알쏭달쏭하며 감이 잡히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된 이런 우리의 답답함을 일거에 해결해줄 명쾌한 가이드 북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박준양 신부님께서 쓰신 소책자 ‘삼위일체론, 그 사랑의 신비에 관하여’(생활성서사)입니다.
볼륨이 작은 소책자이지만, 삼위일체 교리 전반을 아주 쉬운 언어로, 동시에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한권이면 삼위일체대축일 몇년을 편안히 넘기실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신비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특히 제 마음에 와닿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신비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하지만,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삼위일체 신비를 몸으로 살아 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 성삼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함께 하시어 내주(內住)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삼위일체적 삶’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느 한 위격에게 드리는 기도가 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 삶의 자리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더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기도드리면 됩니다. 한 위격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바치는 기도라 할지라도 이는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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