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에 대한 부당한 평가 (6)
김종서의 모반 이미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모반은 되돌릴 수 없었다. 당시 김종서는 단종이 성년이 되기전에 자신의 지위와 기반을 확고히 다져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이런 구상을 실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안평대군이었다. 단종 원년 3월 22일자의 기록을 보자.
당시 김종서의 집에 민신과 조순생(趙順生) 등이 모였다. 홍윤성도 참석했다. 주연이 한창 무르익자 김종서가 말했다. "전에 안평대군이 누옥을 찾아와 굳게 맹세했으나 보답할 길이 없었소. 속히 안평대군이 친애하는 자들이 요로에 앉도록 천거하시오." 이튿날 밤중에 김종서가 사람을 시켜 홍윤성을 불렀다. 홍윤성이 이르렀을 때 이헌로가 뒷문으로 가만히 나간 뒤 홍윤성을 들어오게 했다. 김종서는 비스듬이 누워있었고 첩 셋은 뒤에 앉았다. 강궁(强弓)을 잡은 호위 2명이 그 곁에 있었다. 김종서가 홍윤성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이같이 말했다. "너를 친자식 같이 대접하니 어제 우리들이 논한것을 누설치 말라." 이어 첩에게 술을 내오게 하자 첩이 작은 잔에 술을 부어 가지고 왔다. 김종서는 웃으며 말했다. "이사람은 술고래다. 큰사발에 부어 와야 한다." 이어 세 번 큰 사발에 부어 마시게 한 뒤 활을 당기게 하자 홍윤성이 힘껏 당겨 활이 부러졌다. 김종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술을 마시고 활을 당기는 것은 번쾌(樊)이고 어버이를 잃은 것은 오자서와 같다. 수양대군은 엄하고 어질지 못해 전혀 사람을 구제하지 못하니 남의 윗사람이 되기에 족하지 못한데도 너는 그를 섬기고 있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거칠고 더러운 무리를 포용해 도량이ㅏ 크다. 만약 백성을 다스리게 한다면 천하에 우월한 것인데도 너는 도리어 섬기지 아니하니 무슨까닭이냐? 또 이헌로는 수학에 정통한데 매양 안평대군을 일컬어 '끝까지 대군의 지위에서 늙을분이 아니다'라고 했다. 하물며 지금 임금은 어리고 국가는 불안하니 마땅히 삼가야 할것은 진퇴이다. 섬기는데 마땅한 사람을 얻게 되면 공명을 누리는데 무슨걱정이 있겠는가."
이를 통해 김종서가 이미 안평대군을 끼고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수양대군은 권람과 한명회를 통해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한명회는 의주첨절제사로 있다가 중추원첨지사오 있는 홍달손(洪達孫)을 비롯해 금군(禁軍)인 양정(陽汀)과 유수(柳洙) 등을 천거하였다. 홍달손이 수양대군에게 "선사포(宣沙浦)에 근무할 때 함길도에서 온 자가 말하기를 이징옥이 비밀리에 이경유로 하여금 함경도 경성의 병기를 서울로 운반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상황이 여의치 못하것을 알고 즉시 행동하지 않았다. 이 때 안평대군이 일행 60명과 함께 황해도 해주로 온천욕을 떠났다. 2주일뒤 안평대군의 부인 정씨가 죽었다. 안평대군은 정씨의 묘자리를 찾아본다는 핑계로 충청도로 내려가 충청도 관찰사 안완경(安完慶)과 만났다. 이 때 이헌로는 자신의 도움을 얻어 보위에 오르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의 서신을 안평대군에게 전달했다. 안평대군은 이헌로의 풍수설에 따라 무계정사(武溪精舍)를 건립했다. 실록에는 이해 10월 12-22일무렵에 거사일자를 정했다는 자세한 기록이 있다. 창덕궁 수리지연을 구실삼아 외방의 군인 수천명을 소집하도록 하고 비밀리에 황해도와 충청 해안지역의 군사를 징발해 합세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군기판사 윤처공과 녹사 조번이 군기감의 병기를 안평대군의 사저로 옮겨 거사당일에 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탐지한 권람은 수양대군에게 알리고 신속히 대처할 것을 건의했다. 수양대군은 곧 권람과 한명회를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당시왕명전달을 전담한 환관 김연(金衍)이 안평대군의 추종자인 까닭에 단종에게 이를 보고할 수 없었다. 수양대군은 임기응변으로 먼저 음모자를 제거한뒤 나중에 보고하는 계책을 세웠다. 선제공격하는 날자를 10월 10일로 정했다. 10월 2일자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안평대군쪽도 수양대군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권람이 수양대군에게 말했다. "황보인은 명공이 이미 거사하고자 한다는 것을 듣고 비밀스럽게 김종서에게 편지를 주어 이르기를 '대호(大虎; 수양을 가르킴)가 이미 알았으니 어찌해야 하오?'라고 하자 김종서가 이르기를 '대호가 비록 알았더라도 어찌할 수 있겠소'라고 했습니다. 꾀가 누설된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수양대군이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마침내 이와 같이 말했다. "저들이 비록 알더라도 회의하기를 사흘, 경영하기를 사흘, 약속하기를 사흘로 하여 모두 여드레나 아흐레는 걸릴 것이요. 만일 열흘의 기한만 어기지 않는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요. 이를 입밖에 내지말고 더욱 조심해 기다리고 다시는 와서 의논하지 마시오." 실질적인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종서와 내정한 판단력을 가진 수양대군의 운명이 분명히 엇갈리는 순간이다.ㅁ〔연려술기술〕은 이를 두고 당시 김종서 쪽의 모의 인원이 9명이었다는 식으로 기록해 놓았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토대로 한 〔연려술기술〕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하지 않은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연려술기술〕은 나아가 지략이 많은 김종서를 사람들이 '대호'라고 불렀다는 식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는 야인들이 수양대군을 '대호'라고 평한 것을 교묘하게 바꿔 놓은 것이다. 당시 하위지는 김종서를 오히려 늙은 여우라고 불렀다.
출처:조선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한다--申東俊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