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231029낮 (막6:45-52)
<45)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 졌음이러라>아멘
우리가 인생을 걸어가다 보면, 늘 우리 앞에 탄탄대로만,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걸림돌이 있고, 피곤한 일이 있으며, 마음상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걸림돌에 넘어져 상처를 입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십여 년 전에 수원 한사랑 복지센터의 지적 장애인들이 다녀갔었는데,, 센터 원장이신 이영설집사님이 명함을 주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있더라구요.. “장애는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입니다”
시각장애인으로 미국 부시대통령 보좌관을 지낸 강영우 박사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늘 간증을 할 때마다 첫마디가 “내가 장애인이라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애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입니다”
장애나 어려운 환경이나 환란이나 고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걸림돌이 아니라 하나님이 놓아 주시는 디딤돌이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디딤돌입니다. 성장의 디딤돌입니다. 성공의 디딤돌입니다. 행복의 디딤돌입니다.
우리가 환란을 만났을 때 불안해하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그것이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속의 위대한 인물들이나 우리 주변의 성공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걸림돌이라고 생각한 것을 하나님이 놓아주신 디딤돌이라고 믿고 인내하고 담대히 나아갔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들이 평안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현장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그것도 목숨이 위태롭고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한계 상황입니다. 이런 고난이 있기 전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을 체험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목숨을 위협받는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나쁜 일은 나쁜 일대로, 슬픈 일은 슬픈 일 대로, 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이루고자 하시는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 남동부에 ‘엘라배마’란 주가 있습니다. 이 주는 땅콩의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주 어느 동네에 이상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그 기념탑은 사람을 위한 기념탑이 아니라 목화를 갉아먹는 벌레들을 위해서 세운 공적비인데, 그 비문에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화를 갉아 먹었던 벌레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저들은 우리에게 번영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또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목화벌레들이여,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대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 한다”
참으로 이상한 글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목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목화를 갉아먹는 벌레들에게 감사한다고 공적비까지 세워주다니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땅콩의 주산지인 ‘엘라배마’주는 본래 목화를 많이 재배했던 곳이랍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수많은 벌레들이 나타나서 목화들을 갉아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바람에 그 해 목화 농사를 망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게 되었고, 그 동네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벌레가 어디서 나타나는 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목화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더 이상 목화 농사를 못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낙심하기 보다는 수십 년 동안 지어 오던 목화농사를 접고, 다른 대체작물로 땅콩을 심었습니다. 뜻밖에 땅콩농사가 풍년이 들어 많은 소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무렵에 화학섬유가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목화로 만든 무명옷은 팔리지도 않고 경쟁력도 잃게 되었습니다. 목화를 의존했던 사람들은 큰 타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앨라배마’ 주는 목화벌레 덕분에 일찌감치 땅콩으로 전업을 해서 그 때쯤은 경제적으로 번영의 가도를 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화벌레가 오히려 얼마나 고마운지, 목화벌레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화벌레를 보내셔서 목화농사를 망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섬유산업 개발로 목화농사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될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미리 다른 농사를 짓도록 하여 재앙을 대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던 것입니다.
요4장에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삶은 불행한 삶이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편은 여섯 번째 남편입니다. 동네 사람들 보기도 민망하여 한 낮에 우물에 물을 기르러 오는 여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로 이 여인의 삶은 180도로 달라집니다. 늘 갈증을 느끼던 그녀의 삶에 진정한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온 마을에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부인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혹시 이렇게 생각했을 런지 모릅니다.
“오늘 운이 굉장히 좋은 날이구나, 오늘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났는데 재수 좋게도 그 사람이 바로 메시아였어. 그 바람에 내 인생이 기쁨을 얻게 되었지 뭐야” 하면서 주님과의 만남을 우연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계획하시고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 유대인들은 꺼려하는 사마리아 땅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계획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계획이 내 생각과 달라서 고민하거나 당황할 때 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통해서 크고 비밀한 일을 이루실 것’임을 믿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어촌에 조그마한 배들이 고기잡이를 떠났습니다. 이 어촌에는 고기 잡는 일 외에 다른 직업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기잡이를 나간 배들이 돌아와야 할 시간에 돌아오질 않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방향을 잃고 말았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애가 타고, 바다에 있는 사람들은 필사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가고 거친 파도소리는 요란한데 배가 들어올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 설상가상으로 마을의 한 집에서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남편, 부모 형제들을 기다리다 말고 이 불을 끄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엎친데 덥친 격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배가 들어왔습니다. 무사히 잃어버린 방향을 잡고 풍랑을 이기며 마을의 작은 항구로 돌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여 앉아서 이 두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왜 불이 났으며, 불 끄는데 누가 제일 애썼으며, 풍랑은 어땠으며 어떻게 풍랑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는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부가 일어나더니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웬 불인지 몰랐으며 배가 풍랑을 만나 방향을 잃고 어디로 항해해야 할지 몰라 사투를 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길이 환하게 솟아올라 그 불을 보고 방향을 잡고 목표로 정해서 결국 무사히 집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집에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모두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불이 나게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또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때로는 이렇게도, 때로는 저렇게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왜 불이 나야하는지? 왜 내가 손해를 보아야 하는지?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는지? 왜 내 아들이 나보다 먼저 죽어야 하는지? 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해야 하는지? 내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왜 내가 이런 사고를 당해야 하는지? 내가 왜 망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남에게 닥칠 때 옆에서 바라볼 때에는 이해할 것 같고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이런 일 당하면 고통과 슬픔에 가려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여전히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고 말씀 했습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늘 곁에서 지키시고 감싸주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한절씩 읽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48절입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젖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밤 사경이면 새벽 3-6시 사이입니다. 가장 어둡고 무서울 때입니다. 이 때 제자들은 풍랑을 만났습니다. 어디다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시간입니다. 힘겹게 노를 젓습니다. 큰 위험이 닥쳤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고난에 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지에서 산 기도를 하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위험해 처해 있는 것을, 큰 풍랑으로 힘겹게 노 젖고 있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에 처해 있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병들어 고통스러워 할 때, 인생에 큰 위기를 당했을 때, 인생의 항해를 힘겹게 노 저을 때에도 보고 계십니다. 보고만 계신 분이 아니라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고난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억울한 일 당한 현장에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병들어 아파할 때도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이 이 주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성가<눈을 들어 주를 보라> Ppt 띄울것...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며 위험과 고난을 당할 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1)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언제 어디든지 나를 보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51절입니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 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치고 큰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에는 배안에 예수님이 안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배안에 오르시자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하던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들 힘으로 세상을 안전하게 항해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마 제자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자기들이 어려서부터 잔뼈가 굵은 곳입니다. 그들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어부였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눈감고도 다닐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없이도 갈릴리 호수쯤이야 쉽게 건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풍랑을 만났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자기들 힘으로 당해낼 수 없는 풍랑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이런 풍랑은 처음 겪어 봅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얘기치 못한 일을 당합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지식으로, 돈으로, 인간관계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벗어날 수 없는 환란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항해에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나의 배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환란을 만나거든 우리는 얼른 주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 나 혼자는 안 됩니다.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고백하시고 기도하십시오.
3. 52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을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 졌음이러라>
제자들은 몇 시간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굶어 허기진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과 어린아이 여자 모두 2만 여명을 배불리 먹게 하고 12광주리나 남게 하셨던 분임을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직접 떡을 때어주고, 생선을 떼어주었습니다. 떼어 줘도 떼어 줘도 보리떡과 생선이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그 기적이 자기들 손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갈릴리 호수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위험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은 몇 시간 전에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것을 생각하고, 그 능력의 주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고 안심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풍랑에 마음이 뺏겨,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해졌습니다. 마음이 둔해졌다는 것은 믿음을 다 팔아 먹었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이 이 고난가운데서도 자기들을 지켜주시고, 건져주실 것을 믿고 안심했어야 하는데, 제자들은 그러질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은 안 되었지만, 마음이 둔하여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보니까, 아마도 그들은 불평과 원망과 낙담의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오시지, 왜 우리만 보내셨나? 밤에 갈리리 호수는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는 것을 아시면서도 호수를 왜 건너게 하셨나? 이젠 우리는 모두 갈릴리 호수에 빠져 고기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이 풍랑에서도 자기들을 능히 건지실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환란을 당하면 지금까지 함께 하시고, 축복하시고, 지켜주셨던 하나님의 역사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환경만 바라보며 낙심하며 원망하며 불안해하지 않습니까? 그 좋게만 보이던 믿음 다 팔아먹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과 계획하심을 헤아리기보다 눈앞에 닥친 고난의 현실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과 우리들이 너무나 닮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수도 없이 자기들을 위해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기억초차 하지 않으며, 어제 구원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며, 어제 애굽 군대를 홍해바다에 수장시키신 하나님이 오늘 아말렉 군사로부터 우리를 지키실 것이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40년간 먹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것이며,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7족속들도 물리쳐 주실 것이며,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믿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환란을 당해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속사적 믿음입니다.
욥은 애매히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했고, 이 환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단련하셔서 믿음이 더욱 정금같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욥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재산도 갑절로 갚아주셨고, 죽은 열 명의 자녀들 대신에 더 아리땁고 늠름한 자녀 열 명을 새롭게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50절에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큰 풍랑이 일어 버티기 힘들 때, 주님의 이 음성을 듣기를 축원합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혹 고통이 찾아들지라도, 혹 힘들게 노를 젓게 될지라도, 여러분은 마음에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 이 고통이 변하여 큰 기쁨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