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제일(智慧第一) 사리불(舍利弗)
십대 제자 중에서 제일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한 인물이 사리불(舍利佛)과 목건련(目健連)입니다.
사리불 존자(尊者)의 산스크리트 명은 샤리푸트라(Sariputra)로 샤리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샤리란 원래 눈이 총명하게 빛나는 새를 지칭합니다. 그의 어머니의 눈이며 지혜가 마치 이 새의 눈처럼 반짝였기에 그녀를 일러 샤리(Rupasari)라 불렀으며, 게다가 그러한 모친의 영향이 컸음인지 그를 샤리의 자식이라 자신있고 당당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마가다 국 왕사성(王舍城: Raja grha)의 자그마한 마을이 우파티샤(Upatisya)인데, 그 당시 마을명은 부계(父系)의 이름을 따서 불렀던 모양인지 그의 아버지 이름도 우파티샤이고 사리불 역시 우파티샤 - 우파기사(優波祇沙) 또는 우파제사(優波提舍) -라 불렸다고 하지만, 사실 우파티샤라는 말보다 샤리푸트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는 당시의 이름을 짓은 분위기가 모계를 따르게 된 결과라기 보다는 그의 성장 배경에 모친의 영향이 지중했으며, 그만큼 두 모자가 지혜로 총명하게 빛났다는 데서 그를 샤리의 자식이라 했을 것입니다.
이 샤리푸트라에서 앞의 샤리를 음역하고 뒤의 푸트라를 의역해서 사리자(舍利子)라 했으며, 그 둘을 다 음역해서 사리불(舍利弗) 또는 사리불다라(舍利弗多羅)라 칭하기도 했습니다.
사리불은 생김새 또한 단정했을 뿐더러 브라만교의 성전 4베다를 줄줄 외울 정도로 영특했으며, 이지적이었으며 인생과 세계에 대한 깊은 사색과거부하는 몸짓으로 기성의 제도에 도전하는 일종의 반항아적인 청소년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느날 그는 절친한 친구 목건련과 함께 마가다 국 영축산(靈竺山)에서 벌어지는 큰 축전인 산정제(山頂祭)에 참가하게 됩니다. 아마 그것은 일종의 종교 의례였던 모양인데, 두 소년은 번다하고 괴기스러운 축제 분위기에 환멸을 느낀데다가 그 무의미성에 깊은 허무감에 빠집니다.
게다가 제전이 끝나고 난뒤 사람들의 발자취가 모두 사라지고 찬바람만 스산하게 이는 그 빈공간에서 느끼는 적막감과 허무감이 좀전까지 떠들석하게 일던 들뜬 분위기와 묘한 대조를 보이면서 무상감이 더욱 처절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감수성이 예민한 이 이지적인 두 소년은 당시 육사외도(六師外道) 중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하고 있는 사잔야(Sanjaya)의 문하로 출가하여 사문(沙門 ; sramana)의 길을 걷게 되며, 얼마 안 되어 들은 산자야가 거느리고 있던 250명의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 그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육사외도란 인도 정통 바라문교와 불교의 입장, 양측에서 볼 때 정도(正道)가 아닌 이단의 가르침에 따르는 여섯의 무리들을 말합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사상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과함한 실험 정신이 펼쳐지던 제자백가의 시대였으며,. 이들은 형식적이고 제사 만능적인 정통 바라문 사상에 반기를 들고 베다나 우파니샤드의 권의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등 신(神)이나 아트만(Atman)의 존재를 인정치 않았습니다.
내세도 없고 신도 없으니 마음껏 먹고 즐기자는 유물론적 쾌락주의에서부터 땅 위에 기어다니는 미물조차 밟지 않는다는 불살생의 그 아힘사(ahimsa)를 철저한 고수하는 자이나교(Jainism)에 이르기까지 가히 새로운 사상의 모험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길을 가는 출가 사문들로 즐비하였습니다.
산자야 벨라티 푸트라(Sanjaya belrati putra)는 그러한 육사외도 중 한 사람으로서 진리란 어떻게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회의론을 전개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이성과 오감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입각지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등, 어느곳 어느 때나 절대 부동의 진리란 없습니다. 더욱이 세계와 영혼, 삶과 죽음 등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죠.
그래서 산자야는 어떤 입장에 결코 서지 않는 판단 중지의 자세를 견지하게 됩니다. 해서 그의 말은 '마치 뱀장어 처럼 미끄러워 잡기 어려운 이론'으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입각지를 정하고 확실한 윤리 의식과 실천적 태도를 견지하기가 힘들었고, 회의를 위한 회의를 거듭할 뿐, 어떤 이론의 구축이나 재생산이 아예 없었습니다. 희랍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만을 일삼은 채 그런 놀이에 자신의 생명을 탕진했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의 발걸음
사리불과 목견련은, 산자야와 결별하고 누구든 믿고 따를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면 서로에게 알려주기로 약속하고 계속 구도의 길로 다시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리불은 한 수행자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처님께 최초로 귀의한 다섯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앗사지(Assaji ; 阿說示)였습니다.
그는 가사를 단정히 차려 입고 발우를 들고 왕사성 거리에서 걸식하고 있었는데, 그 고고하고 위엄있는 모습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나아가고 물러서고, 앞을 보고 뒤를 보고, 굽히고 펴는 것이 의젓하였고, 눈을 땅을 향하였다.'
'아마 이 세상에 참다운 성자가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그런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 이 사람에게 그 스승이 누구이며 그 가름침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리라.'
사리불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앗사지는 자신은 석존에게 출가했으며, 출가한 지 얼마되지 않아 스승의 가름침을 깊이 모르오나 그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가르침을 게송으로 읊습니다.
'모든 법을 원인에 따라 생겨낳으며, 또한 원인에 따라 사라진다. 이와 같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우리 부처님은 설하시었다.'(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 如是滅與生 沙門說如是 『佛本行集經』)
사실 이것은 인연의 도리에 따라 모든 것은 모여서 사라진다는 이치를 설명한 것인데, 이 대목에서 사리자는 그만 화들짝 놀라면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 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깨닫게 됩니다.
어떤 유신론적이거나 일원론에에 입각하지 않을 뿐더러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근거가 없은 허무적멸을 말하는게 아니라 사물과 사물간의 무아의 이치를 통한 연기의 법칙으로 삶과 세계에 대힌 참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이 애타게 찾던 진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기쁜 마음에 친구인 목건련에게 달려갔습니다다. 멀리서 그가 오는 모습을 보고 목건련은 이렇게 말합니다.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매우 청정하며, 피부빛은 아주 흽니다. 벗이여, 그대는 불사의 경지에 도달한 것 아닙니까'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대로 행동하게 되면 그것은 자연스레 행동으로 절도 있게 배어나오기 마련인가 봅니다. 사리불이 앗사지를 보고서 '아, 저 사람은 성인임이 틀림없구나'하고 느낀 것이나 목건련이 진리를 깨달은 사리불의 모습을 보고 말한데서 그런 정경이 잘 그려집니다.
석가모니가 고행주의를 버린 사실에 대해서 녹야원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가 그를 가리켜 타락한 자로 지목하고 반기지 말자고 약속했으나, 실제로 석가모니가 그들에게 걸어왔을 때,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을 극진하게 영접한 사실도 그렇습니다. 석가모니의 걸음걸음이며 모습이 그들의 마음 속으로 압도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목건련 역시 사리불이 전하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 진리에 따르고자 굳은 결의를 하고, 다시 의기가 투합된 그들은 산자야를 따르던 무리 250명과 함께 석가모니께 귀의하게 됩니다. 이 일로 해서 부처님 교단은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지혜의 일인자가 된 이유
사리불은 마하가섭(摩訶迦葉)과 아난(阿難) 존자가 교단의 전면에 등장하기 이전에 목견련과 더불어 부처님의 양대 제자로 손꼽힐 정도였으며, 부처님의 여러 제자 중 지혜가 가장 뛰어나 지혜 제일(智慧第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增支部 니카야에서는 '나의 제자 중에 지혜제일은 사리불이다'라고 말했다).
증일아함(增一阿含) 「제자품(弟子品)」에서는 그를 일러 말하길, '지혜가 무궁하여 모든 의심을 결정코 이해하는 비구는 사리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부처님의 인가를 받고서 여러 비구들에게 설법할 정도였으니 그 예가 장아함(長阿含) 제8 『중집경』과 제9 『시상경』에 전합니다.
그 밖에 사리불은 당시의 일반 철학이며 종교에 대해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브라만 승려를 비롯한 외도들과 대론 끝에 절복시켜 불교로 귀의시켰으며, 부처님의 사촌 데바닷다(Devadatta)가 5백 명의 비구를 이끌고 부처님께 반기를 들었을 때도 목건련과 더불어 그들을 타일러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부처님 품으로 다시 들어오게 한 장본인도 바로 그여서 석가모니께서는 사리불을 일컬어 '나의 장자(長子)'라 했을 정도입니다.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로서 그의 이러한 특징은 대승불교에도 그대로 이어져 그는 대승경전의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특히 대승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할 수 있는『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설하는 공의 도리를 깨우치는 상대역으로 무대에 나타납니다.
게다가 『유마경』에서는 유마 거사가 사리불에게 불가사의한 해탈의 모습을 설명해 줄 정도로 그는 그 불가사의한 해탈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충만한 제자였던 것입니다(「不思議品」). 결국 『법화경』 「방편품」에서는 사리불이 앞으로 오는 세계에 깨달음을 이루어 그 이름이 화광여래(火光如來)로 불릴 것이며,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게 되리라고 수기를 받게 이릅니다.
사리불은 부처님보다 앞서서 나라카 마을에서 춘다의 간호 아래 열반에 들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70세였으며 부처님은 80세.
그의 유골이 부처님 곁으로 돌아오자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애닯아 했으며, 수닷타 장자는 탑을 세워 그의 유골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후 200년 후 아쇼카 대왕은 기원정사에 들러 사리불의 탑에 공양하고 10만금을 희사하였다고 전하여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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