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스님 법문(범어사 조실)
걸림 없이 살고 쓸데없는 생각만 멈춰라.
우리는 보통 법문이나 설법이라고 하면 말로 하는 것인 줄만 압니다.
말로 법문을 해야 법문 잘 들었다, 멋지게 들었다고 합니다. 법문은 말이 아닙니다.
물건을 운반하는 기구가 있듯이 말이라는 기구를 통해 뜻을 전달할 뿐입니다.
뜻이 전달됐다면 말이란 필요 없습니다. 뜻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 말이 없으면
오늘 아무 법문 안 하시는구나 하고 섭섭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워낙 형상, 소리, 모양에 집착하다 보니 뜻은 소리가 아닌데 소리로 착각을 하고
말로 설법을 하지 않으면 법문을 안 한 줄 안다 이 말입니다.
뜻을 알아차렸다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이 있죠? 대중들을 향해 항상 귀로 들을 수 있는 법을
설해 오신 부처님께서 어느 날은 그날따라 아무 말 없이 꽃 한 송이만 들어 보이셨어요.
대중들은 무슨 말씀을 하실 건가 싶어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 말씀이 없어요.
그러니 대중들은 알 수가 없지요. 그런데 그 중에 오직 한사람, 가섭 존자만이 빙긋이 웃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리고 마음으로서 마음을 전한 것이죠.
결코 복잡하고 어렵지 않습니다. 둥근 달이 있는데 그 달을 못 보니까
달을 보게 하기 위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법문입니다.
그런데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합니다. 달을 봤으면 손가락은 필요 없습니다.
어떤 선지식이 달을 가리키기 위해 어떤 때는 손가락을 사용하고
또 어떤 때는 나무 막대기, 혹은 쇠막대기 등을 사용했는데 부처님의 뜻을 알지는 못하면서
손가락, 나무막대기, 쇠막대기를 달달 외우면서 나는 부처님 뜻을 안다라고 하면 그것은 바보짓입니다.
쇠막대기를 통해 달을 보라고 했지 누가 쇠막대기를 외우라고 했나요?
경전을 아무리 달달 외우더라도 소용없고 불문에 들어왔으면 부처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범어사는 선찰 대본산입니다. 선(禪)이 뭡니까? 이것은 핵심입니다.
불법승을 깨달은 자리가 선입니다. 선이라 하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서산 대사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마음(禪是佛心)’ 이요 ‘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敎是佛語)’이라고 법문했습니다. 부처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곧 중생의 마음입니다.
중생이라고 하면 삼독심도 있고 온갖 번뇌 망상이 많은데 이 중생의 마음이 부처님 마음입니다. 이상하죠?
달마 대사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법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많은 경전도 있었고 사찰과 승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달마 대사는
“부처님의 참된 뜻은 사람 사람마다 자기 마음을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고
그 마음을 보도록 가르친 것이 불교다. 그런데 그 마음을 보지 않고 경전이나 불상만 쳐다보고
자기 마음을 닦지 않았다면 부처님의 뜻을 위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이 깜짝 놀랐죠. 저 사람이 불법을 전하러 왔다고 하면서
불교를 비방하는 사람이라고 중상모략 해서 나중에 독 사발을 받았어요.
말에 집착하지 않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가르침을 설했던 분이 달마 대사입니다.
경전이나 불상에 집착하는 헛된 착각에서 벗어나 일상생활 중에 차 마실 때 차 마시고
손님 대할 때 손님 대하는 것이 불교라는 말입니다. 일체처, 일체시에 일상생활을 해 나가되
다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아라. 쓸데없는 생각하다 보면 구름처럼 안개처럼 가리게 되니까
제일 가까운 것이 안보입니다. 멀리 있는 것을 보려고 하지 말고 가장 가까운 것을 봤을 때
가장 먼 것과 일치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의 고통이나 괴로움이 무엇인가 깊이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돈, 명예, 권력이 고통의 원인 같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감정이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욕을 들으면 욕을 들은 대로 화가 나고
칭찬을 들으면 또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자기감정을 소화시키지 못해서 고통 받는 게 사람입니다. 감정을 소화시키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면 감정을 소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결국 “부처님하고 중생이 똑같지만 중생은 번뇌 망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수도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의 번뇌 망상을 녹이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닙니까.”하고 결론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맞는 말은 아닙니다.
그 말대로라면 10년 전에 공부를 시작했다면 지금 번뇌 망상이 다 녹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대로 있거든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지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뭘 모르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번뇌 망상이 있기 때문에 번뇌 망상을 녹여야 된다는 생각이 잘못입니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겁니다. ‘저는 많은데요.’ 하겠죠? 그것은 착각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번뇌 망상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나겠습니까?”
선지식이 껄껄 웃으며 “미친놈아!”하거든요. 그러자 제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번뇌 망상이 많아 그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는데 왜 미친놈이라고 합니까?”
“없는 것을 있다고 하니 그러지. 허공에 페인트칠을 해 봐라. 허공에 아무리 칠한들 칠해지냐?”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듯 실제로 번뇌 망상이 없습니다.
그림자 살짝 비친 것일 뿐인데 그림자에 사로잡히니까 문제입니다.
마치 호수에 비친 달을 붙잡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감정에 사로잡히면 현실이 안 보입니다.
현실을 볼 때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나요? 기술이 필요 없죠.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생각만 털어 버리면 됩니다.
단지, 놓치지 말고 현실을 바로 보라 이 말입니다. 우리는 몸은 현실에 있는데 머리 속엔
지나간 과거, 오지 않는 미래로 가득 차 현실이 안 보입니다. 이렇게 슬픈 일이 어디 있어요?
먼 곳이라면 할 수 없지만 제일 가까운 자리를 못 보니 말입니다. 깨친 선지식에게 물어보면
“나는 가장 가까운 곳을 바로 봤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가려서 안보입니다. 생각이 생사(生死)입니다.
화두는 “지금 이 자리를 바로 보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갖 생각을 하다 보니, 목전(目前)의 이것이 안 보입니다.
처음엔 뭔가 나올까 싶어 눈감고 있어 보지만 아무리 찾아도 도저히 안 나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기진맥진해 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모든 생각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을 때,
그때 법당에서 덩~ 종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차 이제 보니 종소리구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종소리였는데 몰랐구나 하고 웃음이 나오게 됩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불법이고 진리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몰랐을 때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제 생각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생각에서 벗어나서 밥할 때는 밥하는 모습, 일 할 때는 일하는 모습,
항상 그때그때 목전과 하나가 되라 이 말입니다. 수행이라고 특별한 모습, 특별한 장소가 없습니다.
목전을 똑바로 직시하면서 10년을 한다면 10년 후에는 얼굴이 확 달라집니다.
생사해탈 해 버려요. 이게 거짓말이 아닙니다. 선의 뜻이 이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