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히2: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2: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병실의 환자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은 바로 죽음입니다. 환자들은 육체의 생명을 지키고자 힘든 치료의 과정을 견디어 냅니다. 그러나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는 말씀처럼 결국 언젠가 우리 육체는 그 수명을 다하게 되고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때가 옵니다. 실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근무하는 직원에게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는 성경 말씀을 들려주자 즉각 반응이 그러니 인생을 재미있게 보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죽음은 가능한 한 멀리한 채, 재미있고 즐겁게 사는 데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실제로 두려움의 대상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입니다.
롬5: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죽음은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다 죄의 삯으로서 사망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는 이 세상에서 인류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의 종이 되어, 의의 길 대신에 죄의 길로 나아갑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세상이 변할지라도 마귀의 종이 된 인류의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기억하고 그 해결점을 찾는 대신 곧 지나가고 말 세상 영광에 몰두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부활의 영광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주신 데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마귀로부터 해방됩니다.
빌3:10-11“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부활의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자의 삶의 푯대는 금생의 자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데 있습니다. 삶의 푯대는 일락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데 있습니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금언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 세상에 대하여는 죽고 다만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 되도록 연습하는 삶입니다. 내 자아가 사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자아가 되어서 사는 것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있느냐 아니면 주님께 있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확연히 다르듯이 항상 주님의 임재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의식을 내려놓게 됩니다. 자아의 판단과 가치관을 내어 버립니다.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해 멸시 천대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멋지고 신나게 보이는 길도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길이라면 그 길은 허망한 길이요, 멸망의 길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길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그 길은 생명의 길, 영광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서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은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현재가 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잊은 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주님만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성을 모르는 자입니다. 24. 6. 30 장기옥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