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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의 향기] (1) ‘꼰벤뚜알’ 영성
꼰벤뚜알, 함께 살아가며 세상에 응답하는 ‘작은형제들’
꼰벤뚜알 작은형제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수도회이며, 그 회원들을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이라 부른다. 지역 고유의 호칭 사용을 허가하는 규정에 따라 한국에서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라 부른다. ‘꼰벤뚜알’이라는 이름은 ‘공동의’ ‘수도원의’라는 뜻이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창설자의 뜻에 따라 참된 형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따라서 회원들은 형제로서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단, 성품성사에서 비롯된 것들은 예외다) 공동체의 일상과 소임에 참여한다.
‘꼰벤뚜알’이라는 명칭은 작은형제들이라는 이름에 일찍이 덧붙여졌다. 1517년 이후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개혁 프란치스칸들 그리고 카푸친 작은형제들의 등장·설립과 함께 그들과 구분 짓는 이름이 되었다. 1517년 이전까지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대중적으로, 또 공식적으로 ‘작은형제회’, ‘작은형제들’로 불렸다.
‘꼰벤뚜알’은 수도원이라는 일반적 의미에서 시대 징표를 읽고 응답하는 공동체라는 의미로까지 확장되었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세상과 교회의 필요와 요구에 응답하고자 ‘꼰벤뚜알적으로’ 그들 자신을 발전시켜온 수도 공동체에 속한 수도자들이었다. 그들은 프란치스칸 개혁 운동이 부흥하던 시기에도 꼰벤뚜알 작은형제회라는 이름으로 완전한 자치권과 독립성을 유지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다른 프란치스칸 1회와 마찬가지로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른다. 이 수도규칙은 1223년 호노리오 3세 교황이 칙서 「Solet annuere」로 인준하였다.(「인준받은 수도규칙」) 수도규칙 원본은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의 아시시 대수도원(Sacro Convento)에 보관되어 있다. 수도규칙 준수와 관련된 프란치스칸 1회 각자의 생활방식의 엄격함과 금욕적 차이는 각기 고유한 회헌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회헌은 수도규칙을 현재에 충실히 준수하며 살아가는 기준을 제시해준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2019년 총회에서 개정한 회헌을 교황청 인준을 받아 사용하고 있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의 회헌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서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작은형제들의 수도규칙과 생활을 충실히 구현하기 위해 작음과 형제애, 꼰벤뚜알 정신을 강조한다.
작음은 형제회의 이름인 작은형제회와 연결돼 있다. 작음은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이 지니기를 원했던 가난과 겸손, 단순함을 드러낸다. 성인은 이 작음의 영성이 모든 일에 있어 교회에 겸허히 순종함으로써 특별히 ‘더 작은 사람들’이 되어 살아가며 형제회의 삶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형제애는 형제회의 핵심 요소다. 형제회는 개별 수도원과 봉사자요 종인 장상들, 그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형제들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적인 가족이다. 형제애는 특별히 프란치스칸 영성과 복음적이고 사도적인 삶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꼰벤뚜알 정신은 형제회를 특징짓는 이름인 ‘꼰벤뚜알’과 연결되어 있다. 이 정신은 ‘교회의 봉사를 위한 다양한 사도직’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기본 요소다. 꼰벤뚜알 정신은 형제들로 하여금 교회의 기본적 사목활동뿐만 아니라 선교·학문·사회복지·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상과 교회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노력하게 만든다. 더불어 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직책뿐만 아니라 교황직처럼 높고 더 많이 봉사해야 하는 직책을 맡게 한다. 꼰벤뚜알 정신은 수도규칙의 완화, 특전의 남용, 느슨한 생활과 동의어로 여겨질 수 없는 영성이다.
[프란치스코의 향기] (2)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아시시 성지 ①
아시시, 800년 이어온 살아 있는 신앙의 유산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의 작은 도시 아시시를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과 그 밖의 프란치스칸 성지들’이란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이는 단순히 중세 건축물의 보존 상태가 훌륭하다는 물리적 평가를 넘어선 결정이었다.
등재 기준 가운데 여섯 번째 항목이 매우 인상적이다. 아시시가 “작은형제회의 발상지로서, 타 종교와 신앙에 대한 평화와 관용의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살아있는 신앙의 유산”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아시시는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는 화석이 된 유적이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가 뿌린 다양한 가치가 8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인류의 양심을 깨우는 역동적이고 거룩한 곳임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이 등재는 아시시의 예술적·영성적 가치가 특정 종교를 넘어 전 인류의 보편적 자산임을 선포한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다.
이 거대한 영적 유산의 중심에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자리한다.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이 ‘꼰벤뚜알’은 ‘공동체’ ‘수도원’이란 뜻을 내포하는 이름이며, 이는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아시시 대수도원(Sacro Convento)을 중심으로 형제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며 성지를 수호해 온 정체성을 대변한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1230년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대성당으로 옮겨 모신 이래, 단 한 번도 이 거룩한 터전을 떠나지 않고 성인의 숨결을 지켜왔다. 아시시의 돌벽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기도의 향기와 대성당의 장엄한 전례는 바로 이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이 8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이어온 헌신과 기도의 결실이다. 이들은 단순한 관리인을 넘어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현대의 언어로 옮기고 순례자들의 영혼에 평화의 씨앗을 심는 영적 파수꾼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아시시의 성지 가운데서 대성당의 웅장함보다 앞서 마주해야 할 곳은 평원 아래의 ‘리보토르토(Rivotorto)’ 성당이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생활 양식(원 수도규칙)」을 구두로 인준받은 직후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은 이 구불구불한 개울가에 위치한 낡은 오두막에서 첫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은 이름도, 규칙도, 거창한 수도원 건물도 갖추지 못한 채 오직 복음의 기쁨만으로 가득했던 형제회의 못자리와도 같은 장소다. 리보토르토의 생활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복음만을 실행에 옮기며 살아가려는 프란치스코의 결심이 가장 순수하게 구현된 순간이었다. 비가 새고 바람이 드는 비좁은 석조 오두막 안에서 형제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완전한 기쁨’을 노래했다.
오늘날 리보토르토 성당 내부에는 당시 형제들이 기거했던 초라한 오두막이 보존되어 있다. 거대한 성당이 이 작은 돌무더기를 보석처럼 감싸안고 있는 형상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화려한 예술로 성인을 현양하면서도, 그 핵심에는 가장 가난했던 ‘작은형제들’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
순례자들은 리보토르토의 낮은 문을 통해 몸을 굽히며,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의 겸손이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생활양식이었음을 체험한다. 결국, 아시시는 도시 전체가 돌과 기도로 쓰인 하나의 거대한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문학작품이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이 전기가 바람에 흩어지지 않도록 정성껏 갈무리해 온 기록자들이다. 리보토르토의 가난에서 시작된 이 전기의 서막은 이제 아시시 언덕 위의 대성당으로 이어지며, 인류가 나아가야 할 평화의 길을 밝히는 위대한 고전이 되고 있다.
[수도원 이야기 – 기도하지 않는 성인은 없다] 카말돌리회 그리고 시토회
공지영 작가는 이탈리아 카말돌리회 수도원을 방문한 뒤 그 감흥을 「수도원 기행」 제2권(분도출판사, 2014)에 이렇게 적었다.
“활동이 많아지면 침묵이 적어지고 그 틈으로 쓸쓸함이 나를 비집고 들어서곤 했다. 그럴 때 바로 모든 커튼을 내리고 주님과 마주 보지 않으면 바로 영혼의 고갈이 시작되었다. … 전적으로 침묵과 기도의 부족이었다. 어떤 신부님이 말씀하신 때로 사막에 간 성인도 있고, 수도원의 방으로 들어간 성인도 있고, 순교한 성인도 있고 모습들은 다 다르지만, ‘기도하지 않는 성인은 없다’는 말도 떠올랐다.”
로무알도와 카말돌리회
작가가 방문한 카말돌리회(Ordo Camaldulensium) 수도원은 100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철저한 침묵, 기도, 고독의 공간이다. 창설자는 로무알도 성인(950-1027년).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성인은 20세 되던 해, 친척을 살해한 아버지 대신 속죄하고자 이탈리아 클라세의 성 아폴리나레 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이내 실망했다. 수도자들의 삶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을 쇄신하려면 수도자의 삶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동료들의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된다.
어쩔 수 없이 수도원을 떠난 로무알도는 베네치아 인근에서 엄격한 은둔 생활을 하던 마리노를 만나 스승으로 모셨다. 서기 978년 무렵 로무알도는 스승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10년 넘게 철저한 은수자로 살았다. 그는 이때 황홀경, 예언적 언사, 눈물과 같은 신비적 은사를 받았다.
로무알도가 엄격한 축성생활을 한다는 소식은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3세는 그를 성 아폴리나레 대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는 기존 수도원을 개혁하기보다는 새로운 수도원을 창립해 새 출발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도원이 아레초 인근에 설립한 카말돌리 수도원이다. 뒷날 파스칼 2세 교황은 교서로써 카말돌리회를 공식 인준하였다.
이 수도회는 공동생활을 최소화하고, 개인 중심의 엄격한 축성생활을 지향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장기간의 단식, 엄격한 침묵, 독거 생활, 침묵 속에서의 노동 등을 강조했다. 구체적 삶의 방법은 초기 은수자들의 생활을 따랐고, 나머지 조직과 규율 등에 대해서는 베네딕토 규칙서를 따랐다.
그렇지만 카말돌리회 수도자들은 ‘나 홀로 축성생활’에만 매진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고독을 통해 성취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세상과 나누는 데 적극적이었다. 무료 병원을 설립하고, 빈민을 위한 숙소를 만들었으며, 순례자들을 돌보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창립자인 로무알도 자신도 여러 차례, 축성생활 안에는 활동과 관상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하자면, 이들은 ‘세상에 개방하지만 세상에 휘말리지는 않고, 세상 안에 토대를 두지만 세상 아래 매몰되지 않는’ 삶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의 깨달은 바를 세상에 알리는 복음 선포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후 카말돌리회는 더 엄격한 차원의 축성생활을 하는 분파를 통해 다양한 열매를 맺게 되는데, 베드로 다미아노의 폰테 아벨라나회가 대표적이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베드로 다미아노는 생전에 많은 저서를 간행하여 수도원의 엄격한 훈련과 고행을 강조했다. 특히 성직자의 결혼을 반대하거나, 성직매매를 비판한 그의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엄격하고 원칙주의적인 축성생활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베드로 다미아노에 따르면 축성생활은 철저히 이웃 사랑을 위한 행위였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의 완성은 고독과 독방 생활, 이를 통해 성취하는 완전한 금욕과 끊임없는 기도였다.
더 철저하게 : 시토회의 등장
이런 흐름 속에서 수도원 개혁 움직임과 관련한 또 하나의 위대한 물줄기를 프랑스에서 만나게 된다. 가톨릭 교회의 청교도, 중세의 사막 은수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시토회(Ordo Cisterciensis)이다. 베네딕토 규칙서를 ‘제대로’ 따르는 수도원이 점자 사라질 즈음, 몰렘의 로베르토(1027-1111년)는 베네딕토 규칙서를 문자 그대로 따르는 시토회를 설립한다.
중세가 배경인 영화를 보면 흰색 수도복에 고깔을 푹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손 모으고 걸어가는 모습의 수도자가 종종 나오는데 십중팔구는 시토회 수사라고 보면 된다. 시토회원은 흰색 또는 회색 복장을 하였는데, 그래서 백의의 수도자라고도 불렸다.
시토회 수도자의 삶은 엄격했다. 이들은 철저한 금욕과 고독, 침묵, 극도의 고행을 실천했다. 옷을 입은 채 잠을 잤고 식사할 때도 성경을 읽는 소리를 들었다. 노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교부들이나 사도들처럼 노동하며 살아가는 것을 진정한 수도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생활이 로베르토를 중심축으로 돌아갔다.하지만 당시 분위기는 로베르토와 같은 선각자가 은둔하며 한 공동체에만 집중하여 살아가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구원 요청이 쇄도했는데, 많은 수도원에서 허물어져 가는 축성생활을 일으켜 달라며 수도원장직을 제안했다.
마침내 교황이 움직인다. 1099년 우르바노 2세 교황이 교서를 통해 느슨해진 몰렘 수도원을 정상화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로베르토는 이를 받들어 시토를 떠나 몰렘의 수도원으로 가서 개혁에 힘쓰다 1111년 4월 17일 선종한다. 이어 로베르토와 함께 시토 공동체를 이끌었던 초기 멤버 성 알베리코 또한 사망했다.
그래서 시토회는 창설 회원이었던 영국인 수도자 스테파노 하딩이 이끌게 된다. 시토회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저력은 초기 지도자가 모두 완벽했다는 데 있다. 하딩은 로베르토의 정신을 계승해 더욱 엄격한 축성생활에 매진했다.
당시 수도원장은 금박으로 장식한 옷을 입었다. 수도원에서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나 하딩은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황금으로 만든 전례 용품을 모두 폐기했다. 그렇게 그는 창립자의 정신에 따라 가난을 철저하게 실천했으며 이러한 전통은 시토회의 전성기로 이끄는 발판이 된다.
축성생활의 전성기를 향하여
오늘날 역사가들은 11세기가 클뤼니의 시대였다면, 12세기는 시토회의 시대였다고 기록한다. 이처럼 유럽 수도원은 시토회를 통해 전성기를 맞게 된다. 시토회의 명성이 높아지자 입회자가 몰려들었다.
가난과 엄격한 고행은 역설적으로 그들을 영광스럽게 했다. 귀족의 아들들, 수준 높은 교육과정을 이수한 인재들이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다. 창설자 로베르토가 사망한 이듬해, 한 번에 서른 명이 넘게 입회하는 경사가 났다. 그들 가운데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이가 있었다. 시토회, 아니 유럽 교회 전체에 영향을 줄 인물이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다. 유난히 눈이 반짝이는 한 사람, 친지와 친구들을 새내기 막내로 이끌고 갓 들어온 그는 뒷날 12세기 유럽 축성생활의 전성기를 열 위대한 신비 사상가 베르나르도 성인이다.
[수도원 이야기 – 위대한 침묵] 카르투시오회
궁극의 봉쇄 수도회
수도원 개혁 바람이 거세던 1000년대 후반, 수없이 생겨난 축성생활 공동체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않는(마태 6,31 참조) 보석 같은 수도원이 있었다. 1084년 브루노 성인(1032?-1101년)이 프랑스에 설립한 봉쇄 수도회, 카르투시오회(Ordo Cartusiensis)다.
혹시 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가. 한국에서는 2009년 개봉한 필립 그뢰닝 감독의 영화 ‘위대한 침묵’의 주인공이 그들이다. 이 영화는 프랑스의 알프스에 있는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에 사는 카르투시오회 수사들의 일상을 담았다.
‘세상은 돌지만, 십자가는 우뚝하다.’(Stat erux dum volvitur orbis.)를 신조로 하는 이들은 베네딕토의 「규칙서」 대신 자체적인 회원을 따랐으며, 철저히 은수하는 삶을 지향했다. 회헌의 정신은 1000년에 가까운 시간 사이에도 바뀌지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고독과 전례로 엮인 공동체의 하루
영화가 잘 보여 주듯, 회헌에 따른 그들의 하루는 전례의 연속이다. 전례는 묵상, 성가, 찬미가, 독서, 그리고 기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쪽 사진 아래, 성 후고(1135/40-1200년)가 작성한 카르투시오회 수도원 하루 일과를 보라.
아침기도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지는 그날의 전례력에 따라 달랐다. 물은 언제든지 마실 수 있고, 필요하면 소금도 어느 정도 섭취할 수 있었다. 반면 아침 식사는 걸렀고, 저녁 식사는 빵과 간단한 음료가 전부였다. 음료로는 차나 커피 또는 영양가 있는 수도원산 사과술 등을 마실 수 있었다.
아침기도, 찬미의 기도, 미사, 저녁기도는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주일과 대축일에는 1시경을 뺀 모든 시간 전례를 성당에서 바쳤다. 그 밖에 모든 것은 독방에서 철저한 고독 중에 이루어졌다. 이는 독방의 고독이 하느님과 더 잘 통교할 수 있는 환경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회헌 자체에서 활동 사도직을 금지할 정도로, 이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오직 기도였다. 따라서 베네딕도회와 달리 농사를 짓거나 교육 활동을 하지 있다. 천국의 사람들과 관계하고자 세속의 사람들에게서 죽는 방식을 선택했고 그래서 수도원 밖의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일반 대중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맺는 길이었다. 그들의 일인 기도가 우리 모두를 위한 중재 기도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카르투시오회 수도자는 일 년에 네 번 가족에게 편지를 쓸 수 있고, 가족들은 일 년에 한 번 방문하여 약 사흘 동안 수도자를 만날 수 있다.
거의 1000년을 이어 온 이 수도회는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23개의 공동체가 있다.
‘위대한 침묵’
영화 ‘위대한 침묵’을 다시 보본다. 이 영화 …. 어떤 이에게는 지루할 수 있다. 구성 자체가 지극히 단순하기 때문이다. 카메라 앵글 속 장면은 담담하다 못해 무심할 지경이다.
영화는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수도자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을 보여 줄 뿐이다. 어떤 효과음도, 배경음악도 없이 침묵만 가득하다. 관객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요소 또한 없다.
하지만 나에게 이 영화는 침묵의 진수를 알려 준 하나의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볼품없는 인격 때문에 가슴 톡톡 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때마다 몇 가지 덕의 부족함 때문에 걸려 넘어지곤 하는데, 특히 깊게 박혀서 뽑아내지 못하고 있는 내면의 큰 돌부리가 하나 있다. ‘침묵의 덕’이 그것이다.
돌이켜 보면 하루하루가 늘 바쁘게, ‘정신없이’의 연속이다. 날마다 아침이면 정신없이 일어나, 정신이 샤워하고, 정신없이 밥 먹은 뒤, 정신없이 수도원 문을 밀고 바깥세상으로 나와,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나만이 아닐 것이다. 많은 현대인이 사회적 존재임을 증명하려는 듯 바쁘게 산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산다. 분주하지만 외롭고, 치열하지만 고단하며, 뜨거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차갑다.
왜 차분하게 침묵하지 못하고 일에 매달려 살아갈까. 고민을 이야기하자, 한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하는 일은 당신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당신이 일을 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기다리십시오.”
내 일로 착각하고, 내가 가지려 하고, 내 것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말이 많아지고 몸이 바빠진다.
이 영화는 판도라의 상자를 닮았다. 상자의 맨 윗단에서 지루함을 발견하고 얼른 뚜껑을 덮었다면 성급했다. 상자 가장 밑바닥에, 실은 생동하는 ‘침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진짜 선물을 꺼내기를 서두르지 않는다. 지루해 보이는 수도자들의 일상을 가만히 관조한다. 그렇게 영화는 차분한 눈으로, 침묵하며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뒤를 따라간다.
편안하게 영화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그들로부터 ‘진정으로 말을 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침묵하는’ 궁극의 한 수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침묵이라는 이 선물, 더 많은 이와 함께 나눠 가졌으면 좋겠다.
참! 조언을 하나 드리자면 이 영화를 볼 때는 팝콘, 콜라 따위는 깨끗이 포기하고 마음 비우고 침묵 속에서 조용히 관람하기를 권한다. 카르투시오회 수도자의 평생 금욕과 침묵에 비하면 160분의 금욕과 침묵은 아무것도 아니다.
카르투시오회 이후 기존의 수도 규칙서와는 완전히 다른, 곧 창설자 개인의 카리스마적인 규칙을 따르는 수도회도 늘었다. 대표적인 수도회가 그랑몸회(Ordo Grandimontensis)다. 스테파노(1045-1124년)는 1100년 무렵 리모주 교외의 뮈레에 이 수도회를 설립했는데 특별한 회칙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회칙은 없다.”
그는 모든 필수품을 수도원 담장 안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하고 절대 청빈과 무소유를 강조했는데, 이는 훗날 프란치스코회 설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성직자는 철저히 은둔과 기도의 삶을 살고 수도회 관리 등은 평수사에게 전담시킨 운영 방식은 도미니코회에 영향을 주었다. 물론 중세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영향을 준 수도회가 이뿐만은 아니었다.
[수도원 이야기 – 축성생활의 정착과 발전] 베네딕토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축성생활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이는 다시 축성생활 공동체의 설립 열풍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이가 축성생활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어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도 광야에서 우왕좌왕했고 이때 하느님께서 십계명을 내려 주신 것처럼, 세속에서 탈출한 수도자들에게도 법이 필요했다. 일상에서 탈출은 했지만 나약한 인간인 만큼 마음을 바로잡아 주는 틀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중재자가 모세였다면, 6세기 초 서방의 측성생활자와 하느님을 연결할 중재자는 베네딕토였다.
로마를 뒤로 하고
베네딕토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의 농촌 마을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농촌이긴 했지만, 경제적으로 약간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모의 허락을 얻어 수도 로마에서 유학하게 되었다. 로마로 향하는 베네딕토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학문과 신앙의 중심지 로마에서 많은 것을 얻고 배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열의는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500년이 가까웠다. 조선왕조도 그랬지만 500년이라면 자칫 해이와 이에 따른 쇠퇴를 부를 수도 있을 만한 긴 시간이다. 당시 로마도 그러한 경향이 팽배했다.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나태와 향락의 기풍이 만연했다. 배울 것이 없었다.베네딕토는 절망했다. 그는 엔피데라는 곳으로 장소를 옮긴다. 그곳에서는 적은 수의 사제들이 경건한 공동생활을 했다. 이제 환경이 바뀌었다. 베네딕토는 만족했다. 나날이 사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묵상했다.
유혹, 고독과 난관
그러던 어느 날부터 베네딕토를 통해 여러 기적이 일어났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베네딕토의 반응이 의외다. 그는 기적에 대해 퍼지는 소문을 고통으로 여겼다. 베네딕토는 사람이 찾아올 수 없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꼭꼭 숨었다
이 과정에서 베네딕토는 악마로부터 큰 유혹을 당한다. 특히 정결을 위태롭게 하는 유혹이 심했다. 이에 베네딕토는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뒹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제야 악마의 유혹이 물러섰다고 한다. 이런 온수 생활은 3년간 계속되었다. 완전한 고독 속에서 명상만으로 보낸 나날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베네딕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목동을 모아 교리를 가르쳤다. 드디어 세상으로 한 발 나온 것이다. 베네딕토가 목동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지자 참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베네딕토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공동체를 만들이 함께 생활했다.
어느 날 인근의 수도원 원장이 서거했다. 그러자 수사들은 베네딕토를 찾아와 후일 원장에 되어 주기를 청했다. 베네딕토는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수락한다. 그리고 원장이 되자마자 엄격한 축성생활을 요구했다. 수도원 개혁에 나선 것이다.
타성에 젖은 일부 수도사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지금까지 잘 생활해 왔는데, 갑자기 엄격한 수도원장이 와서 우리를 못살게 군다.”고 수군거렸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결국 일을 내고 만다. 점심 식사 때 독약을 넣은 포도주를 권한 것이다. 그런데 베네딕토가 포도주를 마시기 전 성호를 긋자 잔이 깨졌다. 이 이야기는 베네딕토의 초기 수도원 생활이 얼마나 큰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어쨌든 그러는 사이 수도자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모두 베네딕토가 성덕으로 이끈 결과였다. 수도원 하나로는 모든 수도자를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베네딕토는 수도원 수를 늘려 나갔다. 분가한 수도원에는 신뢰할 만한 성덕 있는 수도자를 원장으로 보냈다.
몬테 카시노와 규칙서
성인은 이후 525년 무렵 이탈리아 나부의 몬테 카시노에서 새롭게 축성생활을 하려고 마음먹는다. 몬테 카시노 인근 주민들은, 그리스 신 아폴론에게 바친 신전이 있을 정도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 베네딕토는 이 신전을 곧장 파괴하고 성덕의 모범으로써 마을 주민을 모두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5년 뒤에는 이곳에 성 요한 세례자 성당과 성 마르티노 성당 그리고 수도원을 세웠다.
실로 서방 수도원의 명실상부한 발상지로 일컬을 만하다. 베네딕토는 이곳에서 금욕 생활, 기도, 공부 그리고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한 명의 원장을 둔 공동체 생활을 규정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이 「규칙서」(Regula)는 오늘날 모든 수도회 규칙의 모태가 된다. 베네딕토가 오늘날까지도 ‘축성생활의 사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규칙서」에 따르면 수도자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수도원은 주님 섬기기를 배우는 학원이다. 공동생활을 명백히 규정한 이 규칙은 순명을 최대의 덕으로 삼았다. 또 재산의 사유화를 금지했으며, 평생 한 수도원에 머무르기를 요청했다. 나아가 교회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명시하고 특히 전례를 중요시하도록 했다.
눈여겨볼 점은 축성생활의 중심을 ‘성무 일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그러했듯이 수도자의 하루도 기도와 독서와 노동으로 채워졌다. 「규칙서」는 특히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를 하루에 두세 시간 하도록 요구한다.
오늘날의 신앙인에게 베네딕토의 「규칙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감동적인 내용을 담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글을 소개한다. “서방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이며, 저의 교황 본명 주보이기도 하신 베네딕토 성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라며 시작하는 이 글은 성현주 마리아 폴 수녀(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가 번역했다.
“오늘날 진정한 진보를 찾는 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 여정에 안내의 역할을 할 빛이 될 수 있는 베네딕토 성인이 쓰신 「규칙서」에 귀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위대한 수도승이신 성 베네딕토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참스승이시며, 그가 세운 학교 교과서인 「규칙서」에서 우리는 참인간성을 잘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한국베네딕도회협의회 엮음, 「교부」(코이노니아 선집 6-1), 들숨날숨, 2017).
평생을 기도와 노동으로 지낸 베네딕토 성인은 547년 3월 21일 선종했다. 마지막 때에 성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하지만 성인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았다.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제대 앞에 서서 팔을 벌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 품에 안겼다.
성인의 삶은 입에서 입을 거쳐 당시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많은 신자가 축성생활의 잣대이자 올바른 신앙의 전형이었던 그의 삶을 기억하고 따르기를 원했다. 8세기 말부터 7월 11일을 그의 축일로 기념해 왔으며,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4년 10월 24일 베네딕토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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