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자리Ⅱ
(계 21:1~4 & 고후 5:1~3)
오래 전 유학했던 시카고 신학교에서 주차 경험이 있습니다. 주차가 너무 어려워 매일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운전하는 것보다 주차하는 것이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차도 이렇게 거할 자리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 인간 사회에도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이것을 삶이 자리(sitz em leben)라고 칭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안정된 삶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이렇게 독특한 삶의 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신앙도 그것이 자리잡고 살 수 있는 교두보가 필요합니다. 이 신앙이 시작될 수 있는 교두보를 우리는 신앙의 자리라고 칭합니다. 신앙의 자리란 신앙이 거기에 거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그의 책 ‘신앙의 본질’에서 신앙이 실제로 나타나는 곳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신앙의 자리에 대하여 논합니다. 그는 우선 신앙의 자리로 오해될 수 있는 부분을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아닌 세계 저쪽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입니다. 에벨링은 그리스도와 세계 저쪽은 신앙의 자리가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신앙의 근거이고, 교회는 신앙의 자리라기보다는 신앙의 집결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에벨링은 신앙의 자리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라고 말합니다.
에벨링은 그의 책 ‘신앙의 본질’에서 신앙의 자리가 세계라는 표현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오직 신앙만이 세계와 관계를 맺게 하고 시간을 알리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며 실제로 모든 것에 시간이 따른다는데 솔직하게 하고 시간 구별에 주의하게 한다고 따라서 오직 신앙만이 세계를 신앙의 자리로 만들지 않을까? 신앙만이 세계를 그 본래의 것으로 즉 하나님의 피조물로 만들어갑니다. 이처럼 에벨링이 신앙의 자리는 세계라고 보는 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신앙의 자리가 만일 신앙의 자리잡고 그 생을 이어가는 공간이라고 전제한다면 신앙의 자리는 인간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리에 대한 다툼이 성경에 묘사된 적이 있습니다. 마 20:20~22에서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주의 좌편에 자리를 달라고 합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자리와 세속의 자리를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리는 세속적 자리 다툼과는 다릅니다. 천국의 자리는 다 평등하고 좋은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다 좋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예배 보는 자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오래 전에 캐나다 광림 교회에 있을 때 이 자리에 대해서 끔찍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리에 대해서 내가 경험한 신앙적 체험은 한국에 총회에 참석했다가 급하게 벤쿠버에 돌아오려고 할 때였습니다. 제가 동경에서 6시 20분, 그리고 원출발지인 인천에서 2시 10분 출발인데 저는 인천에서 6시 20분이라고 생각하고 일찍 공항에 나간다고 착각하고 오후 세 시에 나갔습니다. 도착해서 비행기 좌석을 받으러 갔더니 비행기가 벌써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노래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주일 설교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일 출발하는 표로 바꿔주겠다고 하는데 내일 출발하면 주일 날 10시 55분에 도착해서 주일 설교도 할 수 없고 예배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안됩니다 하고 꼭 오늘 가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벤쿠버에 가는 다른 비행기들도 좌석이 거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알아 봤습니다. 기도하면서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같이 동행한 두 여자 권사님이 같이 도와 주었습니다. 그분들이 하늘이 보내준 천사 같더라구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싱가폴 에어라인 담당자가 찾아갔더니 담당자가 저희에게 한 자리가 남았다고 합니다. 150만원 주고 여행사에 가서 끊어오라고 합니다. 여행사에 가서 통사정 하기를 주일에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가야만 한다고 하자 그 남은 한 자리를 끊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설교하기 위해 150만원을 쓰면서 캐나다 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비행기 타고 오면서 줄곧 자리에 대해 생각하며 왔습니다. 예약되지 않은 자리를 얻는 것이 참 힘들구나! 생각이 들면서 천국에서의 신자들의 자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이생보다도 내세를 중요시하게 여기는데 여러분에게 영생과 천국을 약속하고 있는데 여러분 천국의 자리를 예약해 놓으셨습니까? 천국 가는 티켓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를 믿는 것 뿐인데 그 티켓을 사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이제 천국갈 때 예수님께서 여러분 보고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많고 흔한 것이 자리에 대한 다툼입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있구요! 또 이미 얻은 자리를 지키지 못해 명퇴당하는 사람도 있구요. 종교계에서도 어떤 자리에 오르려고 세상 정치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꼭 아셔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리는 다 지나가버리고 없어져 버립니다. 이 세상에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자리는 없습니다. 반면에 천국의 자리는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천국의 자리 즉 천국행 고속버스의 자리를 꼭 얻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삶은 유한합니다. 어느 누구도 지금 지키고 있는 자리를 저 세상에 싸갈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시점에 인생을 마감합니다. 대통령도, 장관도, 판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인 자리 가장 궁극적인 자리는 천국의 자리입니다. 거기에 소망을 두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요한계시록 21장 3절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정답입니다. 우리가 지은 육신의 장막집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세속적인 자리는 반드시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면서 지은 신앙의 자리는 영원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지상의 일시적인 자리보다도 궁극적으로 우리 삶의 터전이 될 영원한 자리인 천국의 자리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