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證言) - [49] 지생련 (池生蓮) - 하늘 섬기며 이 길 따르리 5. 뜻 앞에 제물 된 남편의 승화 1970년도부터 72년까지는 전 축복가정 부인 대원의 3년 임지 동원이 있었다. 1971년 8월, 남편은 경기도 지역을 순회하며 원리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포천에서의 강의를 끝마치고 안양을 다음으로 앞둔 시점이었다. 대구 구미가 임지였던 나는 서울 청파동으로 잠시 올라와 남편과 오랜만에 상봉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남편의 안색은 너무나 좋지 않았다. 남편은 피곤하다며 안양에서 저녁 7시에 강의가 있으니 4시경에 깨워 달라는 말과 함께 몸을 뉘었다. 얼마 안 있어 갑자기 남편은 토하고 싶다고 하더니만 각혈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명동 성모병원에 시급히 가서 검사를 해보니 간경화로 이미 그 주변의 장기관들이 사나흘 전에 파열되었다는 것이다. 최원복 선생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곧바로 입원 수속을 밟았다. 남편은 점점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8월 31일이었다. 의사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해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던졌다. 차마 시아버지에게는 연락할 수 없어 형제(시아주머니) 네 분에게만 연락을 했다. 중환자실과 일반 병실을 오가며 남편은 그렇게 각혈과 혈액 투여의 고통스럽고도 짧은 투병 생활을 했다. 교회 식구들과 함께 남편의 병상을 지키며 철야를 했는데, 남편은 식구들 앞에서 힘겨운 목소리로 “(참)부모님 만수무강하옵소서.”라고 유언과도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주위 모든 식구들의 가슴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마지막 떠나는 입장에서 참부모님과 당신 자신이 정이 들었으면 얼마나 들었다고 육신의 부모보다도 저토록 참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안위를 걱정할까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남편의 심정의 깊이에 사무치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김원필 선생과 상의하여 병실 환경을 좀 더 나은 곳으로 옮겼지만 남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갔다. 어느 날 병실 침대에 누워 있던 남편은 눈을 감은 채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당신과 헤어진다는 것이 참으로 믿기지 않소. 사랑하는 당신을 남겨두고 떠난다는 것이…. 당신, 어렵더라도 예숙, 진복, 진길 3남매를 끝까지 잘 길러 뜻 앞에 효자 효녀로 만들어 주세요.”라는 짤막한 여운의 말을 남기고 9월 13일 하늘나라로 떠났다. 어린 아들딸들과 나를 두고 먼저 떠난 남편을 원망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후회도 미련도 없다. 그저 뜻 앞에 최선을 다했던 남편을 모시며 살았던 것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도 아이들에게 평소 “너희들을 낳게 해주신 것만도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남편이 승화했을 때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우리처럼 공직에 몸담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건강관리 5% 책임도 뒤따른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100% 다 바쳐서 일하면 하늘이 다 알아서 책임져 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우리 자신의 5% 건강 책임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