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성형 AI를 통해 합성한 이미지로 불건전한 사진과 영상을 생성해서 여러 소셜미디어에 배포하는 딥페이크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최근 거의 모든 언론매체에서는 이 딥페이크 성범죄문제를 다루며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말과 내가 하지 않은 행동이 이 딥페이크기술로 만들어지고 유포되면서 정말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일은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사이트에 전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은 일반인이 딥페이크로 올라와 있어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음란행위자가 되어 버린 피해자들의 호소가 알려지면서 정말 안타까운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딥페이크라는 생성형 AI기술이 정말 너무나 무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우리가 아닌 가상의 우리를 만들어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AI기술을 통해 나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합성하고 다른 존재가 가진 외모와 목소리, 노래를 빌려 가짜 우리를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본질적 모습이 아닌 가짜 우리를 세상에 알리며 허구의 인생이 마치 우리의 인생인 듯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딥페이크 사건을 통해 이런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어쩌면 인간의 욕망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생성형 AI기술을 통해 현실과 완전히 다른 가상의 현실, 지금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인간이 구현해 내고 싶은 욕망은 어쩌면 하나님을 대적하며 인간의 능력을 과시했던 바벨탑사건처럼 인간의 교만에서 발원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적 욕망 속에 가상의 현실을 추구하는 가치관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멸망당할 영혼으로 지옥불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세상적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주 예수님을 대적하는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 우리는 주님을 대적하는 세상적 가치관의 유혹에 오염되지 않고 참 주님의 제자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멸망당할 세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 첫째는 세상적 욕심을 지닌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4,25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악의 영은 분쟁을 일으키고 그 분쟁으로 스스로를 자멸로 인도하는 것이 악한 영입니다. 하지만 악한 영도 악한 일에는 하나로 뭉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악한 영이라고 힘입어 귀신을 내어쫓는다는 누명을 쓰실 때 우리 예수님께서는 악한 영의 성격을 예를 들며 악한 영의 사역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선이시고 완전한 평화이시기에 악한 영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쫓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는 가끔 교회에서 다투는 사람들을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권을 위하여 혹은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다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이들의 명분은 교회의 일을 더 잘 해보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다보니 분열과 다툼,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토론, 세상의 지식연구 장소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토론하고 회의를 할 때 우리의 지식, 우리의 의견을 내세우며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의견이 중심이 된 이야기를 할 때 교회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갑자기 예수를 잃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을 잃은 곳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에 계셨고 또 계셔야만 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교회도 혹 예수님이 계셔야 하고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하는데 예수님을 잃고 있지나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한국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한국교회 초창기 이단에 대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이단의 원조’로 분류된 김성도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자칭 세상의 주인이라고 가르치며 ‘성주교’라는 이단을 창설했던 사람입니다. 조선 장로교회의 권사로 임직받았지만 그의 이단적인 가르침이 문제가 되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이단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기에 1925년 장로교 총회에서 출교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들어보면 그녀는 1923년 음력 4월 2일 입신하여 천군 천사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평양 일대의 신령파’로 불려졌던 그녀는 입신한 상태에서 예수와 대화를 나누며 예수님의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녀가 만난 예수님은 “재림 주님이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라며 그 재림 예수가 김성주 자신이라고 추종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처럼 열두 제자를 두었고 기도를 마칠 때에는 “새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문장으로 마치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 김성도라는 인물은 한국교회 최초의 자칭 재림 예수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실패하신 이 세상에 자신을 ‘새 주님’으로 보내셨으니 거룩한 주인 즉 ‘성주’인 자신을 따르는 것이 참된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성주교’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이단 사절 중 하나는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실제적 과일열매가 아니라 성적 타락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랑행위를 했는데 그게 ‘선악과를 따먹었다’의 원어적 의미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 잘못된 사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른 성적인 관계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구원은 죄가 없는 육체와 피가 섞이는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참된 주인인 존재와 죄를 가진 피조물 인간이 피를 섞어야 참 구원이 일어난다는 거죠. 저는 이런 이단사설을 들으며 이런 논리를 펼치는 이단이 한국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을 깨닫고 정말 놀랐습니다. 바로 통일교, JMS, 신천지 등에서 가리치는 ‘피갈음의 교리’가 이 내용이죠. 100여 년 전 일제 강점기 조선 땅에서 사람들을 미혹했던 이단 가르침이 지금 이 시대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 ‘성주교’를 따르던 무리가 계속 분열되면서 파생된 이단이 현재 한국의 이단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도 자칭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며 세상을 미혹하는 수 많은 이단이 이 땅에 있습니다. 자신이 이 땅에 재림한 예수라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온 예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분열과 다툼을 일으키고 성경 말씀을 혼미하게 만들며 결국 하나님의 자리, 예수님의 자리까지 위협하는 존재들입니다. 분열은 또 다른 분열을 낳고 다툼은 또 다른 다툼을 낳고 결국은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존재들입니다. 분열은 분열을 낳고 결국 악한 영으로 만들어진 이단 사이비의 흐름을 보면 이런 악한 영의 특징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이 살아서 제대로 된 신앙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사역에 대해 계획하고 의논하고 진행할 때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성경말씀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말씀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며 예수님의 뜻대로 사역하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악한 영에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멸망당할 세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 둘째는 예수님을 반대하며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0절입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오늘 성경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며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24절 말씀을 보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이라며 예수님의 사역을 비방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인 권력을 쥐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종교적 지도력을 과시했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종교가 정치보다 더 힘이 있었고 모든 사회적 활동도 종교를 통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로 승인받았으며 그로 인해 영적 지도력을 권력 차원에서 보장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종교를 뛰어넘어 일상생활과 사회적 활동까지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보편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은 이 바리새인들은 종교지도자로서 누구보다 더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살며 영적 지도자로서 영적 권위를 보여주며 참된 영적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 지도자라고 하면서도 전혀 영적인 모습보다는 세속적 모습,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며 돈과 권력을 추구하며 살아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이들이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는 영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겠지만 사람들이 느끼기엔 전혀 영적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사람들에 대해 평가하는 우리 예수님의 평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을 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덧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라며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은 전혀 논리에도 맞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고 영적인 감각을 가졌다면 절대 그렇게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사역이 성령의 역사인지 사탄마귀의 역사인지 전혀 분별하지 못하였고 그런 이유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며 영적 감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영적인 사람인 듯 보여지는 사람이지만 전혀 영적이지 않고 오히려 죄악의 구렁텅이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존재가 있음을 깨닫고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마귀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해서 우리를 미혹함을 경계할 것을 권면하며 이렇게 기록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15절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영적으로 분별력을 제대로 가지지 않으면 거짓 가르침을 신비한 가르침인 듯 오묘한 가르침인 듯 착각합니다. 이단이 가르치며 보여주는 신비한 일을 영적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탄마귀는 이런 일을 통해 광명한 천사, 재림한 그리스도인 척 가장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요즘 전 세계에 여기저기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교회를 공격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원래 값비싼 명품은 짝퉁 모조품을 만들어서 진품을 오염시킵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고, ‘짝퉁’이 명품보다 더 명품 같은 것처럼, 거짓 가르침들이 교회를 넘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안목을 가진 영적 지도자들인 척 살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했고 영적 감각은 죽었습니다. 우리 또한 성령의 임재가 없다면 성령의 존재와 성령의 일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우리 속에 성령이 살아계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기면 우리는 영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임재가 우리에게 참 생명, 새생명을 허락하고 성령임재가 우리를 천국백성으로 삶아가도록 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을 느끼며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멸망 당할 세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 셋째로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1,3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에서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질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말씀하여 주시는 구절이 바로 마태복음 12장 31, 32절의 말씀입니다. 육신에 매여서 육적인 삶을 살아 결국 지옥불에 던져질 영혼은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일로 비난했고 결국은 이 일이 성령모독이라는 죄가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의 사역을 모독하며 성령의 일을 사탄마귀의 일로 매도할 때 결국 이 일은 중죄가 되고 어떤 이유에서라도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에는 ‘성령을 모독한다’라고 번역된 이 말씀을 예전 성경 개역한글판에서는 ‘성령훼방’이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성령님 자체를 모독하는 것과 성령의 일을 훼방하는 것은 둘 다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에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이기에 영적인 것을 모르면서 영적인 듯 살아가고 성령의 일을 보면서 사탄의 일로 판단하는 것은 영원한 죽음으로 내려가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신학을 정립하고 개혁교회들의 신앙고백을 정리하며 내놓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 즉, 성령을 모독하는 죄로서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하심을 얻을 수 있는 죄 즉,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 죄로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
인간에게는 용서받을 죄와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고, 그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 성령을 모독하지 않는 죄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2절입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거부하는 것, 방해하는 것이 왜 하나님 모독죄, 예수모독죄로 불려지지 않고 ‘성령모독’이라고 말하는 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죄를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부와 성자를 모독하지 않으면서 성령만 모독하는 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면 그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성령을 모독하면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존재를 다 부정하는 것이 되기에 성령모독죄는 하나님 모독죄, 예수님 모독죄와 동일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우리들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조심해야 할 이단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우면서 부여하신 권능을 이 시대 우리도 행할 수 있다며 우리가 사도의 권능을 이어받아 이 시대에 사도적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단이 있습니다. 일명 ‘신사도운동’이라고 불리는 것과 ‘빈야드운동’입니다. 그 이단 조직의 교회는 우리가 볼 때는 분명 사탄마귀의 미혹속에서 악령이 임하는 활동인데도 그들은 ‘성령의 활동’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신령한 춤이라고 말하며 발광하듯이 춤을 추기도 하고 찬양할 때 요란스럽게 서로 서로 다른 모양으로 가사를 외치고 요란한 기도를 합니다. 찬양하다가 기절하고 기도하다가 기절합니다. 인도자가 안수기도를 하는데 손에서 무슨 광선이 나가듯 기도할 때 갑자기 기절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련의 일이 모두 성령의 역사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이 분명 사탄마귀가 인간을 현혹시키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왜 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요? 제가 믿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있게 행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님께서도 인간을 대할 때 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들을 자빠뜨리고 무슨 힘으로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세우시고 건강하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잡다한 은사를 보여주면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말씀에 집중하도록 만드시고 심령이 변화되도록 만드시며 말씀을 통해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성도들이 온전히 말씀에 집중하여 말씀을 통해 변화받고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의미를 깨닫고 주의 보혈로 인해 새생명을 얻은 것을 감사하며 참된 구원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권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중요하고 권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어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어떤 권능자, 어떤 능력자가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보다 우리 주 예수님보다, 우리 성령님보다 우리의 능력이 부각되어 우리의 제자, 우리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뭔가 큰 권능이 보여지고 우리에게 뭔가 신령한 은사가 나타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을 추종하는 일이 생기고 인간인 우리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이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만 영광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보십시오. 사도 바울에게 놀라운 권능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종하며 따르려 했습니다. 그 때 바울과 바나바가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행전 14장 11,12절입니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그 밑에 사도행전 14장 14,15절도 보십시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다시 밑에 사도행전 14장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우리가 권능을 힘입고 뭔가 특별한 은사를 나타낸다면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 은혜로 그렇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며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표시이고 하나님 쓰시는 사역자들의 모습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과 은사는 복음을 전하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일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지 그냥 교회내에서 우리가 권능을 받아서 “내 영적 능력이 이 정도다”라고 자랑하면 그것은 바로 이단 사이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위치에 내가 앉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모독이 되는 중대한 사안이 됩니다. 또한 사탄마귀는 교회에서 은사를 부정하도록 만들어서 성령모독하는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이 시대에 경험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교회에는 성령의 은사가 나타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이후에는 ‘어떤 은사활동도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극단적 ‘성령은사 중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제한을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초대교회 이후 중세교회와 근현대 교회에는 성령이 존재하지 않으십니까? 성경에는 분명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성령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하신 이후에 단지 사도행전의 역사까지만 존재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하나님앞에 나와 회개할 때 용서받음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입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기도할 제목을 알지 못하지만 기도제목이 생각나게 하시고 기도하는 힘도 불어넣어 주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만드시는 분이 우리 주 성령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성령님께서는 지금은 존재하시지 않는다’ 혹은 ‘성령님의 활동은 사도행전 이후에 중지되었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성령모독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6장 13절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성령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을 방해하면 성령모독을 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귀신들의 농간에 유혹되어 귀신들이 하는 일을 성령님이 하시는 일로 착각하게 될 때 그 또한 성령모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일을 열심히 했냐 안했냐를 따지기 전에 내가 정말 성령님의 존재를 깨닫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역했는 지를 항상 점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는 일이 성공했냐? 실패했냐?’를 따지기 전에 ‘이 일이 진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인지, 성령님께서 인도하신 일인지’ 분별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별력은 하나님의 택함받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임하는 성령님의 증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령임재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예전에는 ‘성령훼방죄’로 불렸던 ‘성령모독죄’에 대해 살펴보면서 성령사역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성령의 일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서 혹시나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아닌 지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훼방’, ‘성령모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보지 못합니다. 단지 예수님을 인간의 한 사람, 우리 주변에 있는 어떤 가족중 한 사람으로만 봅니다. 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며 귀신에 들린 일로 매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살펴본 것처럼 귀신의 일을 성령의 일로 보기도 합니다. 결국 이렇게 보는 사람들의 특징은 모두 성령의 인치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면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 우리의 기도, 우리의 지식, 우리의 가치관 속에 항상 하나님께만 영광 올려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선포합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은사와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권능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과 우리 주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참 혼란스럽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성령의 일을 성령의 일로 보지 못하기도 하고 귀신의 일을 성령의 일로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일을 귀신에게 영광 돌리기도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일을 사람에게 영광 돌리기도 합니다. 정말 참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성령님을 몰라봐서 귀신을 성령님으로 착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정말 성령님을 몰라봐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거부하며 거역하는 인간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영광, 성령님의 일을 경험하며 주님께 영광을 외치시길 바랍니다. 진짜 천국 백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성령임재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