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소설 [일루전;ILLUSION]
제1부 폭동 전후(36)
4. 녹향에서(3)
-------------------지난 줄거리-----------------------------------
매리가 양수에게서 첫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향촌동에 새로 생긴 음악다방 녹향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당시 대구 시내에는 보통 다방도 희귀했다. 그래서 매리는 다방에도 드나들어 본 적이 없었다. 녹향에 들어가 보니 극장 같았다. 어둡고, 개인별 푹신한 소파식 의자에 몸을 묻고 음악 감상하고 있으니 양수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그럴 때 양수가 그의 뒤에 나타나 그를 이끌었다. 그들은 빈 자리를 찾아 나란히 앉았다. 잘 알 수 없는 연주 음악이 흘러 나왔다 지루하게. 그 사이 양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내는 매우 조용했다. 그러다가 인터미션 30분을 알리는 안내가 있자 불이 켜지고 경쾌한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불이 밝았다. 이 전력은 어디서 공급받나. 전력이 부족해서 난리인 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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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제야 여기저기 소근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양수가 앞 무대 쪽을 향해서 손을 들었다. 여기저기 몇 군데서 손을 드는 것이 보였다.
진행자는 그 손을 드는 곳을 향해서 의자 사이를 천천히 걸어다녔다.
이러저리 돌아다니는 그를 기다리기가 안 되었는지 양수는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가서 쪽지 한 장을 집어가지고 돌아왔다.
“듣고 싶은 곡이 있습니까?”
양수는 비로소 매리에게 말을 걸어 물었다.
“저는 아는 곡이 없는데요. 베토벤의 월광곡 같은 것도 들을 수 있나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어떤 곡인지 들어본 적이 없어서……. 후훗.”
“처음 들으면 좀 무겁고 지루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 신청해 볼게요. 한번 쯤 귀로 경험해 두는 것은 좋으니까요. 공부하는 기분으로. 흐흐흐. 그런데 바로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신청자가 많으면 한 참 기다려야 하니까요. 게다가 긴 곡이라……, 함께 가벼운 왈츠곡도 한 곡 신청해 둘게요. 요한 슈트라우스곡인데 ……. 그리고 으음…… 음료수는 무엇으로 할까요? 여기 칼피스가 마실 만하던데.”
“예, 선생님이 알아서 주문해 주세요.”
잠시 후에 레지가 긴 유리잔에 칼피스를 담아가지고 왔다. 유리 빨대로 빨았더니 혀를 감미롭게 자극하는 액체가 입안에 가득 흘러들었다. 매우 로맨틱하도록 달콤새콤한 맛이 정신을 맑고 황홀하게 했다.
경쾌한 행진곡과 함께 흥겨움도 함께 했다.
양수가 지금 들리는 이 곡은 역시 슈트라우스의 곡인데 ‘라데츠키의 행진곡’이라고 했다.
그의 고향집에는 레코드와 레코드판이 몇 장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말을 했다.
“몇 장이나 되나요?”
“자랑할 만큼은 아닙니다. 고작 스무 나믄 장……쯤 될라나? 모두 왜놈 시절 일본 땅에서 고학할 때 어렵게 어렵게 사 모은 것들입니다.”
올 추석에 고향에 돌아가게 되면 아마 4년 만에 처음 가게 되는 거라면서 그때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와야겠다고 했다.
진행자가 우리 가까이 오더니 허리를 굽히고 양수를 향해서
“월광을 신청하셨지요?”
하고 아주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렇습니다.”
“판은 있는데요. 거의 매일 돌렸거든요. 오늘도 좀 아까 돌렸어요. 그래서 양해해 주실 수 있다면…….”
“음악 공부하러 오는 분이 많은가 봅니다. 하하. ……. 알겠습니다. 다음 날 베토벤 공부하기로 하고 다른 곡을 듣겠습니다.”
양수는 그러더니 그에게 왼손의 엄지와 검지의 손가락 끝을 마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그러자 상대방은 역시 왼손의 장지와 검지를 꼬아서 들어보였다. 매리는 그것이 ‘오케이’, ‘알았음’ 하는 수신호라고 생각했다.
----------------3월 7일 (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