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도시 중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어간 이유는 발틱해 연안의 늪지대에
마법의 도시 처럼 단기간에 건설되었다는 도시,
이를 실현시켜 당시까지 유럽사의 주류에서 비껴나 있던 러시아를 서구화, 근대화의 길로 이끈 표트르 대제의 발자취를
직접 느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바 강 하구의 음침한 섬들 위에 도시를 건설하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조소했다지만
거침 없는 대제는 스스로 오두막에 기거하며 관리들과 노동자들을 독려했고 전 러시아에 석조 건축을 금지시키고
모든 자재를 네바 강 하구로 실어오게 하여 100개의 섬이 365개의 다리로 이어진 도시를 건설하고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표트르 대제~
한 지도자의 힘과 역량이 얼마나 위대하고 국가의 흥망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케 하면서
새삼스럽게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의 위대한 업적을 다시 생각해봤다.
흔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돌과 뼈의 도시라고 부른단다.
늪지대 전체를 돌로 메운 대공사는 각지에서 수많은 돌을 운반해와야 했고
불과 3년 동안 15만 명 이상의 인명을 희생시키고 탄생했다는 무덤 위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1703년 표트르대제가 당시까지 유럽사의 주류에서 비껴나 있던 러시아를 서구화· 근대화의 길로 이끌기 위해
핀란드 만과 네바 강 어귀의 늪지대 위에 건설한 거대한 계획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서구의 다른 곳에서라면 몇 세기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불과 50년 만에 급속하게 이루어냈다고 하며
10년 만에 늪지의 한가운데에 건물 3만 5000채가 들어섰다고 한다.
늪지대의 심연 위에 돌로 세운 도시 그리고 심연을 메우고 있는 수많은 뼈~
그래서 러시아 정교의 공식적인 축복 속에 탄생한 이 도시는 축복과 저주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표트르 대제가 여러모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늪지대 위에 도시를 건설한 것은 무척 복합적인데
우선 발트해 연안 특히 당시 수로와 육로 교통 연결의 요충지이던 네바 강 어구가 지니는 전략적 의미라고 한다.
당시 전쟁 상대이던 스웨덴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 지역을 확보하는 길 뿐이기도 하는데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유럽으로의 창구 역할을 하는 문화적 의미가 있다고 한다.
서구를 향한 피터 대제의 강렬한 열망을 응축한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인 것이다.
이 도시를 보면서 표트르 대제의 행적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알렉세이 14세 황제의 후처 나타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서
10세 때에 궁중혁명으로 크렘린에서 쫓겨나 모스크바 근교 프레오브라젠스코에 마을로 이사했다고 하는데
정규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으나 1682년 이복형 이반 5세와 공동으로 황제에 올라
이복 누나 소피아와 병립하여 정무를 보다가 왕위를 계승한 지 15년이 지난 1697년
표트르 대제는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절단을 이끌고 유럽 방문 길에 올랐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와 사절단은 18개월 동안이나 유럽에 머물렀고
표트르 대제는 유럽의 선진 문화를 둘러보며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도 했다고 하는데
네덜란드에서는 앞선 조선술을 이용하여 배를 만드는데도 참여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는 유럽의 여러 도시를 둘러보면서 운하의 도시로 알려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암스테르담은 작은 섬과 섬 사이를 다리로
연결하고 열악한 환경을 거꾸로 이용하여 당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크게 발달한 도시였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암스테르담으로 만들려고 한 것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야치 섬에는 스웨덴 군대에 위협을 줄 목적으로 지은 나무 요새가 있었는데
이 나무 요새를 돌로 바꾸어 다시 짓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직접 현장을 찾아가서 공사 진행을 살폈는데
1703년 여름부터는 아예 공사 현장이 잘 보이는 페트로그라드 섬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호화로운 모스크바 궁전을 마다하고 작은 오두막에서 생활하면서 공사를 점검했다고 한다.
오두막에는 코트와 나침반 그리고 노를 저어 이동할 수 있는 작은 보트 정도만 있을 정도로
표트르 대제는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1709년 스웨덴과 벌인 폴타바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관리들의 반대는 자연스럽게 사그라지게 되었고
표트르 대제를 지지하는 관리들과 상인들은 완성되지도 않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시가 어느 정도 틀을 갖추기 시작한 1712년에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왔는데
표트르 대제의 오랜 꿈이자 러시아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 준 계획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렇게 탄생하게 됐다고 한다.
이 유명한 표트르의 청동기마상을 받치는 화강암 대좌는 높이 12미터 둘레 30미터에 달한다고 하는데
약 66만 킬로그램에 이르는 이 화강암을 옮기는데만도 1000명과 1년 6개월 이상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 화강암이 발견된 숲에서 수도까지 13킬로미터를 처음엔 도르래로
그 다음엔 특수 제작한 거룻배로 옮겨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