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춤뿐인 조선왕조들 " 단서야 어제 집에 잘 들어갔겠지." 밤새 걱정이 앞서더라. 어제 너무 분에 넘치는 완샷 덕분이다. 흠뻑 취해 지하철 계단에서 혹여 넘어질까 노심초사이다. 단서조의 팔을 꼬옥 붙들고 전철 승차 확인한 후에야 발길을 돌린다. 2차는 청담역 10번출구 근처 치킨집이다. 각각 생맥500CC 1컵 쐬주 1병을 들이킨 것이다. 언제나 우리들은 1차의 ONE SHOT으로 술잔의 회오리를 멈추자는 백년지기들이다. 모처럼 부닥치고 있는 아쉬움의 술잔을 어찌하는가. 한잔이 더 그리워 애원하고 있는 단서조의 그 마음을 거역키도 어렵지 않은가. 무무와 둘만의 조촐하면서도 짜릿한 2차의 TWO SHOT의 자리이다.
엉까페 버쁘바 뻐드타 조단서 무무까 다섯의 백년지기들이다. 신설우이선 경전철에 오르고 우이역1번 출구에서 상봉한다. 오전 11시 출발이다. 우이암에 오르려던 계획은 휴지조각이 되는 어리석음에 할말을 잊는다. " 우리들에게 산행은 무리다. 둘레길로 향하는 것만도 대단하지 않는가 " 네 녀석들의 어거지를 더 이상 막을 수도 없다. 북한산둘레길인 21구간중에서 20구간인 왕실묘역길 → 19구간의 방학길 → 18구간인 도봉옛길 3개 구간을 걸을 것이다. 거리상으로는 5.8Km로 제대로 걷는다면 1시간 45분 정도의 코스이다.
수없이 걷고 오르던 왕실묘역 둘레길로 발길을 옮긴다. 연산군묘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선다.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이다. 성종의 두 번쨰 왕비였던 윤씨는 연산군이 세살때 성종10년에 폐위가 된다. 연산군은 성종의 세 번쨰 왕비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알고 자란다.
거창군부인 신씨가 왕세자빈으로 책정되고 13살 동갑내기 연산군과 결혼을 한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연산군은 19세 나이로 조선왕조의 10대의 왕위에 오른다. 왕과 왕후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글을 보고서야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비롯한 문신들을 대거 처형한다. 언론 활동을 억압하기도 하며 윤리관에 어긋나는 행동뿐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자는 온갖 고문으로 잔혹하게 죽인다. 사대부는 물론 친인척도 예외는 아니다. 포락(凉烙, 단근질하기), 착흉(嫂胸, 가슴 빠개기),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도 서슴이 없다. 그는 한마디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폭군이다. 생모를 폐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아버지의 후궁으로 정씨와 엄씨를 두드려 패 죽여서 젓갈로 담가버린다. 인간의 두뇌로는 상상키도 어렵지 않은가. 그 젓갈을 연산군과 아내와 딸이 함께 맛나게(?) 탐닉했을 터이다. 조정에서는 바른말을 하는 대신들이 사라지고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연산군의 가마를 메는 대신들이 많아진다. 두 차례의 사화 이후 신하들과 대화를 단절한다. 강력하게 처벌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 하니 급격하게 민심의 동요가 시작된다.
마침내 1506년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일파는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간다.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고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축출한다. 그해 11월 병사로 삶을 마감이다. 거창군부인 신씨는 연산군의 묘를 강화도에서 임영대군인 외할아버지 땅으로 옮겨줄것을 중종에게 부탁한다. 지금의 연산군 묘원이 있는 곳으로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맨 위쪽에 연산군과 거창부인묘가 있고 바로 아래에 의정궁주묘 밑에는 연산군사위묘와 연산군딸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이곳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고 적힌 석물 외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연산군은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 시대 폐주(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사료에 의하면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재위 기간의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모습이 애처럽기도 하다. 성종의 3계비인 정현왕후의 아들 적자 차남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중종이다. 성종과 정현왕후 그리고 성종의 계비 윤씨의 아들인 중종의 왕릉이 강남구 선정릉역 바로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선정릉이다.
잠시 옆길로 들어서 연산군 애비인 성종과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의 여성 편력을 들여다 보면 어떨까. 조선9대 성종은 10살의 어린이 나이에 한명회 딸과 결혼을 한다. 13살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왕후를 포함하여 12명의 후궁을 품에 안는다. 10살의 나이에 결혼하여 37세에 사망할 때까지 자식이 28명에 달한다. 폭군인 연산군의 가계(家系)는 폐비가 된 왕후와 두명의 후궁에게서 6명의 자녀가 있다. 여타 26명의 조선왕조들의 가계족보도 여기서 거기로 대동소이한 모습이다. 아무리 조선시대 임금이라지만 한마디로 개(犬)만도 못한 가면(假面)을 쓴 탈춤의 주인공들이 아닌가. 출연자도 조연도 감독 연출도 시나리오도 없이 백지상태이다. 오롯이 왕이라는 탈을 쓴 자신만의 셍각대로 쓰다가 찢고 또 다시 쓰는 횡포가 아닌가. 가역적으로 실체적인 탈춤은 어떤 모습인가. 탈춤으로는 이 노객의 고향인 황해도 봉산군의 국가무형문화재인 봉산탈춤이 대표적이다. 서민들의 가난한 삶과 양반에 대한 풍자 그리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횡포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봉산탈춤은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밑바닥 인생인 서민들에게는 웃음과 환희로 꿈과 희망을 주는 등대와 같은 문화예술인 것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원은 제껴 놓고 조선왕조들의 왕릉(王陵)을 살펴보자. 경주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곳곳에는 그토록 높디 높은 왕릉들이다. 넓은 대지에 언덕처럼 높은 자리에 영면중이다. " 이리 오너라 ~~~"라는 어명(御命) 소리가 아직도 능을 흔들고 있는 폼이다. 그 많은 왕릉을 몇개만 역사적 유물로 남기고 모두 철거를 해야겠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들여다 본다. " 제1조 1항 :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2항 :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통령도 장군도 똑 같은 평등한 권리를 가진 일개 국민이다. 저 세상으로 떠난 후에도 대통령으로 장군으로 특별 대우를 하고 있는 현실은 망상이며 착각이 아닌가.
곁들여 국립현충원의 대통령을 비롯한 고관대작 장군들의 넓고 높은 묘원들도 해체를 해야 할 때이다. 국가를 위하여 순직한 일반 병사들은 달랑 비석 하나가 전부이다. 일반 국민들의 공원으로 휴식처로 탈바꿈 시킴이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축구장 야구장 배드민턴장 배구장 롤라스케이트장 어린이 놀이터 수영장 갖가지 편의 시설로 업그레이드만이 정답일 터이다. 비좁은 대한민국 영토를 너무 이기적이고 편파적인 행정은 더 이상 용납키 어렵지 않는가. 잠시 잠깐이라도 이런 곳에서나마 서민들의 숨통을 트이게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하겠다. " 야 ~~~ 정말 좋구나 이렇게 시원하고 멋진 둘레길이다 " 왕실묘역길을 걸으면서 한 녀석의 부르짖는 소리이다. 하늘은 그런대로 파아랗고 새들의 밝은 노래소리도 북한산을 울리고 있다. 방학길로 올라선다. 둘레길에도 수시로 높고 낮은 산세는 여전하다. 둘레길도 산행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 이 녀석아 ~~ 이런 험한 길을 걷게 하면 못 걷겠다고 ~ 아 ~ 아 ~이고 "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 녀석이다. 계속 혼자 칭찬과 불만스런 외침의 연속이다. 그저 저녀석은 그러려니 여타 벗들은 별로 반응치 않고 귓등으로 흘릴뿐이다. " 그러면 너는 택시를 불러줄테니 ~~~까 도봉산역에서 만나자 어떠냐 엉~아 " 무수골로 이어지는 곳에서 한 마디 뱉는다. 답이 없다.
쌍둥이 전망대를 바로 못 미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막걸리 노가리 초코파이 쑥떡 누릉지등이 오늘의 간식이다. 뒤쳐진 녀석도 뒷뚱거리며 합석이다. " 야 ~ 이 대장놈아 ~ 힘들어 못 걷겠다 아까 칭찬한 말은 모두 취소다 ~`` " 야 ~~ 너무 좋다 최 ~고야 " " 너무 힘들어 못 걷겠다 " 좋다고 떠들다가 힘들어 못걷겠다는 불평의 연속 상영중이다. 다섯노객들이 막걸리 몇잔에 웃고 떠들며 즐거움을 찾는다.
쌍둥이전망대를 지나칠 수는 없다. 수십개 계단을 밟으며 올라선다. 도봉산 우이암 만장대 북한산 백운대 인수봉등이 바로 손에 잡힌다. 서울시내도 한눈에 들어온다. 건너편 수락산도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다. 전후 좌우 시원스런 정경을 가슴에 담으며 다시 내려선다. 무수골 계곡의 개울에는 얼음 지치기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두녀석이 빙판으로 내려선다. 빙판에 업드려 활짝 웃는 몇컷을 주고 받는다. 어릴 때 딩굴며 뛰여놀던 추억이 새롭기만 하다. 옛도봉길로 들어서서 도봉사 능원사를 마주한다. 힘들다고 불평하던 친구도 활짝 웃는 모습이다.
이런 저련 상념에 빠져 걷노라니 노객(老客)들의 도봉산역에 도착시간은 몇시이던가. 정상 속도의 3배 정도가 소요된 오후 3시를 훌쩍 넘긴다. 가다서다 주저앉기의 되풀이가 몇번이던가. 설악산 한라산을 뛰듯이 오르내리던 그 열정 어드메로 갔을까. 어느듯 세월은 80고개를 넘기고 있는 황혼의 늪에 젖어들고 있는 초라한 신세가 아닌가. 마음만은 하늘을 날고 있지만 축처진 노구(老軀)는 피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2022년 2월 12일 무 무 최 정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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