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의지(신뢰)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 「석가모니를 의지(신뢰)하는 사람은 부처를 깨닫는」다는 것이 문득 깨달아졌습니다.
※ 2026. 10. 26. 자다가 꿈에「영성(靈性)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이듯이」부분이 실지는 없는데 그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2시가 조금 넘었기에 다시 잠을 잦는데 똑같은 꿈을 다시 꾸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깨달음에 대해서 살펴보다 성당에 내려가서 오늘은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인데 화요일까지 살펴보니 성무일도 제1독서 지혜서 3장 9절「주님을 의지(신뢰)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하는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수녀원에 와서 미사를 바치다가「석가모니를 의지(신뢰)하는 사람은 부처를 깨닫는」다는 것이 문득 깨달아졌습니다.
190. 깨달음에도 큰 깨달음과 작은 깨달음이
누구나 다 부처님처럼 깨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체험이 다르듯이 깨달음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다 깨달음도 깨달음 나름일 것입니다
깨달음에도 큰 깨달음과 작은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반드시 어떤 경지가 있을 것입니다
즉 깨달음은 四聖諦인 네 가지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은 八正道인 진리의 바퀴를 굴리는 경지입니다
즉 죄를 한두 번만 운 좋게 짓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
즉 모든 죄를 짓지 않는 완덕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모든 죄를 짓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10계명을 지키고 7덕을 지키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수도자라면 정결, 청빈, 순명 덕을 지키는 경지입니다
즉 깨달음은 八正道로 완덕은 7덕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즉 고통을 소멸하는 참된 진리인 8가지 덕목인 八正道
즉 완덕이란 모든 죄(번뇌)에서 벗어나는 경지를 말하지만
즉 의인도 하루에 일곱 번 넘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즉 부처님의 깨달음과 우리의 깨달음은 같지 않듯이
즉 성모님의 완덕과 우리의 완덕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6년 동안 道를 닦았다고 하셨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셨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셨듯이
부처님은 깨닫기 전이 있기에 깨달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 예수님은 깨닫기 전이 없기에 전능한 신이십니다
즉 창조를 안했으면 佛性이라고 말하는 神性만 있었겠지요?
즉 창조가 중생이고 피조물이 중생이지 중생이 뭐겠습니까?
즉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 말씀해도 믿지 않으니 어찌합니까?
즉 한번 깨달았다고 진리를 어떻게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 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깨달음」: 구약성경 총15절 + 신약성경 총3절 = 구, 신약 총18절【깨달아 14 + 6 = 20, 깨달을 8 + 4 = 12, 깨닫는 10 + 5 = 15, 깨달은 2 + 4 = 6, 깨달았다 9 + 2 = 11, 깨달았습니다 5 + 1 = 6, 깨닫고 9 + 6 = 15, 깨닫게 26 + 6 = 32, 지혜와 깨달음 0 + 1 = 1, 주님에 대한 깨달음 1 + 0 = 1, 지혜와 더불어 깨달음 1 + 0 = 1, 지혜의 보고 2 + 0 = 2, 지혜의 슬기 1 + 0 = 1, 슬기 110 + 19 = 129,《지혜서 15장 3절 당신의 권능을 깨달음은 불사의 뿌리입니다. / 고린전 1장 19절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참조.
※ 2026. 10. 26. 자다가 꿈에「영성(靈性)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이듯이」부분이 실지는 없는데 그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2시가 조금 넘었기에 다시 잠을 잦는데 똑같은 꿈을 다시 꾸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깨달음에 대해서 살펴보다 성당에 내려가서 오늘은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인데 화요일까지 살펴보니 화요일 성무일도 제1독서 지혜서 3장 9절「주님을 의지(신뢰)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하는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수녀원에 와서 미사를 바치다가「석가모니를 의지(신뢰)하는 사람은 부처를 깨닫는」다는 것이 문득 깨달아졌습니다.
※ 영성시집 ‘149. 불성(佛性)과 신성(神性)’ 편 136페이지, ‘175. 완덕의 경지를 실지로 느꼈습니다’ 편 169-171페이지 참조.
【(영성시집 ‘190. 깨달음에도 큰 깨달음과 작은 깨달음이’ 편 221-222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