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길
4월의 꽃향기가 사방에 가득하고 흐드러지게 핀 목련과 벚꽃이 마치 등을 켠 듯 환하게 길을 밝힙니다. 시인 엘리엇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우고 기억과 욕망을 섞으며 둔한 뿌리를 봄비로 뒤흔드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요. 제게는 다른 의미로 4월이 잔인한 계절 같습니다. 만개한 꽃들의 화사함이, 그 아름다움이 엄마가 그토록 좋아하셨던 꽃을, 봄을, 가슴 아프게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4월은 엄마가 처음 이 세상에 오신 달입니다. 봄처럼 따뜻했고, 삶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온정으로 대하셨던 엄마, 4월은 그 따스함이며 천지에 가득한 꽃들이 온통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계절입니다.
그 아련하고 애틋한 봄을 품고 길을 걷습니다. 아담한 동산이 둘리워진 작은 공원 내에 있는 산책로. 엄마가 오랫동안 걷던 길입니다. 엄마가 투병하실 때는 나 혼자 걸으며 엄마를 위해 기도했던 눈물의 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생은 긴 고난(long suffering)의 여정일까요. 따뜻한 감성을 지니셨고 진실하게 살려고 힘썼기에 유난히 고난이 많았던 엄마의 삶. 80 평생 그다지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엄마가 천국에 가신 지금, 나는 비로소 엄마와 함께 이 길을 걷습니다.
길을 걸으며 엄마를 생각하고, 엄마가 걸으며 느꼈을 아름다운 자연을 저도 느낍니다. 때론 다 말씀하시지 못한 인간적인 외로움과 아픔이 많았을 엄마의 삶을, 더 가까이서 위로하고 살펴드리지 못한 회한에 가슴 치며 눈물짓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좋으신 하나님은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말씀으로 위로와 평강을 내려주십니다.
가시기 몇 달 전 꿈에 보여주신 대로 천국의 세마포 옷을 이미 준비하신 엄마의 모습이 내게도 천국 소망을 품게 합니다. 이제 이 길은 내게 ‘은총의 길’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강렬함은 죽음조차 넘어서는 힘이 있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엄마가 가신 천국에서 우리 다시 만날 거라는 확신은 날마다 조금씩 더 커집니다. 한 번 주어진 삶은 더할 수 없는 ‘축복’임도 이제 압니다.
생명이 있는 동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지체 없이 본향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심령 깊이 스며듭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 엄마를, 그 보배로움, 소중함을 절감하지 못한 채 살아온 나날들이 회한으로 가슴을 파고들 때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엄마와 늘 함께 계셨고 그분의 성실하심은 멈춘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나의 어리석음이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방해받지 않았음을, 하나님의 섭리가 절대 틀어지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것은 실패하지 않는 사랑, 바로 헤세드(hesede)였다는 것을요.
나의 작은 믿음과 보잘것없는 효심은 길을 잃고 헤매다 비로소 그분이 주시는 은총 안에서 빛을 찾았습니다.
엄마. 이제 나눌 수 없는 언어는 버려두고, 보이지 않는 눈도 버려두고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갑니다. 회한과 그리움, 묵직한 신음마저도 흘려보내고, 그저 간절한 바람 안고 이 길을 걷습니다. 아니 달려갑니다. 날마다 걷는 이 산책로는 천국으로 이어지는 인생길이 되고, 세상에 없는 지도를 따라 엄마께로 갑니다. 우리 주님께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