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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이순신 변호...병법의 근본은 농사에 전력하는 것
정경달(丁景達 1542~1602)은 전라도 장흥군 장동면 반산리 출신으로 조선 전기 구미에서 활동한 문신이고, 본관은 영광, 자는 이회(而晦), 호는 반곡(盤谷), 아버지는 정몽응(丁夢鷹)이다.
1570년 문과에 급제하여 1591년 선산부사로 도임하였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과 군민을 독려하여 왜적 방어에 공을 세웠다. 4월 28일 상주가 함락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정경달은 잠시 몸을 피신한 후 흩어져 있는 관군과 군민을 모았다. 지략을 겸비한 군민 허설(許說)과 김유일(金惟一)로 하여금 금오산에 진을 치게 하고 종일 적과 싸워 많은 병기를 노획하였다. 8월에 서산 각암으로 출전하였으며 9월에 감사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전공을 기리는 서찰을 보내왔다. 뒤이어 창석 이준(李埈), 백사 이항복(李恒福), 임당 정유길(鄭惟吉)이 의병을 일으켜 합세하니 10월 15일 선산 의병은 상주 죽현으로 옮겨 진지를 구축하고 지형과 지세를 가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7일에는 해평으로 의병 진지를 이동하였다. 11월에는 대둔사(大芚寺)로 이동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듬해 2월초에 이준 형제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여 무등곡에서 적을 섬멸하고 4월에 금오산 도선굴로 돌아왔다. 5월에 김산(金山 김천)에 주둔하니 일 년 간 적을 죽인 것이 수천 명이이었고 많은 병기를 노획하였다.
명나라 군의 영남 진격에 따라 각 고을에서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데 고을마다 식량이 바닥이 났다. 그래서 정경달이 도선굴에 비축하여 두었던 양곡으로 일부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로 충당하니 명나라 장수 유총병(劉總兵)이 식리장군(識理將軍)이라 하며 치하하는 글과 금빛 부채를 주어 선산 의병의 공적을 찬양하였다. 어사 윤경립(尹敬立), 순찰사(巡察使) 김근(金勤)이 선산 의병의 전공을 나라에 알려 크게 치하하는 서찰이 왔다. 선산의 의병 활동은 왜군을 위협하여 조령을 경유하는 주력 부대의 진출을 견제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힘이 되었다.[약력 글]
1594년 당시, 장기전이 된 전쟁으로 수군은 굶주림과 역병(疫病)으로 인해 많이 죽어나갔고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도 손을 쓸 수 없었다. 또한 이순신의 호령이 고을 수령에게 시행되지 않았고, 여러 장수가 서로 화합하지 않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에 조정에서 명망 있는 문관을 종사관으로 삼아 보낼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마침 유성룡이 이순신의 계청(啓請)을 받아들여 전 부사(府使) 정경달(丁景達)을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는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행정, 징모업무, 군수조달, 시찰, 전령, 명 장수들과의 외교 등을 담당했다.
특히 선산부사(善山府使) 재직時 능력을 발휘한 정경달에게, 이순신이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이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병사가 경작하던 토지인 둔전(屯田)을 맡겨 성공을 거두니 병기와 군량이 풍족하고 새로 만든 병선이 배(倍)가 되었다.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한산도 부근 해평농장, 순천 돌산도 흥양의 도양장(전남 고흥군 도양면 도덕리), 해남의 황원곶(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강진의 화이도(전남 완도군 고금면) 등에서 둔전을 시작하였다.
돌산도는 군관 송성(宋晟)을, 도양장은 이기남을, 화이도와 황원곶은 종사관 전 부사 정경달(丁景達) 등을 감독으로 보냈다. 또한 항만 내 평탄한 간석지에는 염전을 경영케 하며 도기도 굽게 했고, 해운업의 길도 열어줘 피난민 중 상업가를 지휘하여 무역을 행하는 이도 생겼다. 이렇게 군민이 단결하여 나중에는 양곡, 어염, 포목 할 것 없이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돼 저장된 곡식이 수만 석에 달했다. 이순신으로선 일류 병참참모를 곁에 둔 것이었다.
정경달은 이때의 공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그의 아들인 정명열(丁鳴說)도 정유재란 때 이순신에게 쌀과 배를 보태고 명량해전에 함께 참전하였다. 정경달은 사후에 예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선무원종훈에 올랐다. 어찌되었건 그의 부자는 이순신 장군의 뒤에서 병참보급을 훌륭히 지원해, 최상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최고의 보급참모였다.
1597년 3월 이순신이 모함으로 투옥 되자, 정경달(丁景達)은 조정에 나아가 탄원서를 내고 직접 선조 임금을 독대하여 그의 석방을 위해 종횡무진으로 노력하였다. 나이도 이순신보다 3살이나 많았고 높은 벼슬도 먼저 하였건만 아랑곳 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며 상사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1597년 4월경 이순신이 참소를 당해 옥중에 있을 때 공(公)이 서애(西厓) 유성룡, 백사(白沙) 이항복 두 분을 찾아갔더니, 그들이 묻기를, “그대가 남쪽에서 왔으니 원균과 이순신의 옳고 그름(是非)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므로, 공(公)이 말하기를, “누가 옳고 그른가는 말로써 해명할 게 아니라, 다만 보니 이순신이 붙잡혀가자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이(李) 공(公)이 죄를 입었으니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살꼬.” 할뿐이었소. 이것을 보면 그 시비를 알 수 있을 것이오. 라고 대답 하였다.
또한 “이순신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을 수 없다. 장수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정세를 살피는 것을 가지고 싸움을 주저한다고 몰아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왕께서 통제사를 죽이게 되면 사직을 잃게 된다.”고 임금께 고하였다. 이러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이순신과 정경달은 서로 존경하고 신뢰했다. 예나 지금이나 상사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변호한다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음 시편 ‘당포정이통제(唐浦 呈李統制)’는 정경달이 임진왜란 발발 3년째 되던 1594년 여름,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와 남평리 일대 둔전에서, 파종할 시기에 맞춰 농사를 관리하고, 수군진영을 점검한 후, 한산도 진영으로 돌아가려는데, 비바람이 몰아쳐 당포 수군진영 포구 다락배 뱃간에 앉아 지난날을 회상하며, 29수 116구, 운자(韻字)는 ‘陽’으로 지은, 장편의 7언시이다. 초반부는 해동의 땅 우리나라 고구려가 수황제와 당황제의 침략을 물리쳤고 이후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에도 굳건히 막아낸 자랑스러운 역사를 나열하였다.
중반부에는 미처 대비하지 못해 당한 임진왜란의 초기 약2년 동안,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과 관군, 의병, 명군의 정황을 기사시(記事詩) 형태로 적고 있다. 이에 관군과 명군의 승리로 압록강에 피신했던 임금의 한양 입성,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따른 전세의 역전으로, 소강 국면의 전쟁 상황이 이어진다.
종반부에서 자신이 직접 관리 감독하는 둔전(屯田)이 성공을 거두어 병기와 군량이 풍족하고 거북선을 비롯한 새로 만든 병선이 배(倍)가 되어 안정을 되찾았는데 조정의 늙은 관료들은 바다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는, 답답함을 드러냈다. 그리곤 現在 전쟁 소강상태에선, “농사에 전력하는 이것이 진실로 병법의 근본이라, 절기에 맞춰 바쁘게 씨앗을 뿌리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비바람 몰아치는 당포진영 다락배에서 사량도를 마주보며 회상(回想)에 젖어 있다.
<당포에서 이통제사께 바친다[唐浦 呈李統制]> 정경달(丁景達 1542~1602), 이순신(李舜臣) 종사관(從事官).
一片靑邱固莫强 해동의 조그마한 땅이 참으로 막강하였으니
向來天下不能當 저번 그때는 천하가 감당하지 못했다.
隋皇渡鴨全師敗 압록강을 건너온 수황제의 모든 군사를 물리쳤고
唐帝征遼合陣亡 당황제의 먼 정벌에는 죽음으로 맞서 싸워 이겼다.
廿萬紅巾殲女聖 이십 만 홍건적은 여천자 기황후가 섬멸하였고
三千拔道殞坡良 삼천의 왜구를 파랑(坡良)에서 죽였다.
達梁小醜千鋒血 달량에선 1555년 더러운 왜구가 수많은 칼날에 피로 물들었고
損竹殘兇一箭殤 손죽도에선 1587년 흉악한 왜구를 화살 하나로 죽였다.
萬世子孫長肯搆 자손이 만세토록 오래오래 이어받아
百年家國繫苞桑 먼 훗날까지 국가가 길이 뿌리 내리리라.
堯天舜日諸祥集 태평성대(太平盛代)에 모든 상서로운 기운을 모아,
君唱臣賡庶事康 임금이 선창하면 신하가 따라 부르니 모든 일이 편안하리라.
可惜廟謨顚且倒 조정의 계책이 반대로 뒤바뀌니 몹시 애석한데
只應天道變還常 오로지 하늘의 도리에 따라 변통하고 다시 행할 뿐.
倭船蔽海來充斥 왜선이 바다를 뒤덮어 가득히 몰려오니
將卒投戈競遁藏 장졸(將卒)이 창을 버리고 다투듯 도망갔다.
小礟一聲空列陣 부질없이 늘어선 진영엔 작은 돌을 쏘는 기구 소리만 들렸고
大軍三退缺人望 대군이 거듭 후퇴하니 백성들은 바라보기만 할 뿐.
兇鋒撲地閭家赤 흉적이 온 사방에서 여염집을 몰살했으며
兵火漫天日色凉 전쟁의 불길이 하늘을 덮어 태양빛이 엷어졌다.
世祿近臣逃底處 대대로 녹을 먹던 신하들은 어디론가 도망가고
叨恩名將走何方 은혜 입던 이름난 장수도 사방으로 달아났다.
忠臣只有金兵使 충신은 오직 김 병마절도사(金兵使)만 있었고
男子惟看朴密陽 사나이로는 오직 박 밀양(朴密陽)만 보일 뿐.
慶府受傷徒自悔 경상도 고을이 상처를 입으니 다만 후회하던 차에
金山小捷亦云光 금산(金山 김천)에서 작은 승리로 한줄기 서광이 비치었다.
閉戶李公兇不測 학문에만 힘쓰던 이공(李公)은 흉악함을 알지 못했고
徵兵郭氏義難忘 의로움을 참지 못한 곽씨(郭氏 곽재우)는 군사를 모았다.
商山戰敗由倉卒 상산(商山)에서는 중과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패전했으며
黃澗虛驚是刦腸 황간에서는 적의 모습에 괜히 놀라 두려워했다.
忠野輕挑宜不利 평평한 들판에 가벼운 바람 날리듯 당연히 불리하였고
王城勢急固難防 형세가 위급하여 한양도성을 참으로 방비하기 어렵더니
宗祊詎作腥塵汚 종묘사직은 결국 비린 먼지에 더럽히게 되었고
玉輦聊廵浿上湟 옥 가마 타고 압록강(浿水) 위 해자(垓子)를 돌아보게 되었다.
宮闕煙生星日暗 궁궐엔 안개가 일더니 별과 해가 어두워지고
廟陵塵合地天荒 묘릉(廟陵)엔 티끌이 쌓여 천지가 황폐해졌다.
猛將風生旗脚遍 맹장(猛將)이 바람이 일 듯 깃발을 드날리더니
義師雲合劍鋒鋩 의병이 구름처럼 모여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둘렀다.
退軍龍縣兵威損 물러난 군대가 임금과 떨어지니 군대의 위세가 꺾었는데
奏捷山城國勢張 산성에서 승리하여 국가의 기세가 오르기 시작했다.
關路支撑豈人力 관문의 길에서 힘써 버티었으니 어찌 사람의 힘이었으랴.
臨津走敗是天殃 임진강에서 패하여 달아난 것은 하늘의 재앙이었다.
堤防畿甸知金將 경기도 제방에서 김 장군이 나타났고
鎭拒完山有趙郞 완산(完山)에선 적을 방어한 조헌(趙憲)이 있었다.
父死子承忠節炳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뒤를 잇는 충절을 밝히었고
弟亡兄繼義聲彰 아우가 죽으면 형이 뒤잇는 의로운 명예를 드러냈다.
忠勞誰比號天闕 비할 수 없는 충정과 노고를 천제의 궁궐에 알리며
罪惡咸稱膝犬羊 개와 양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죄악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人戴聖君扶北極 사람들이 받드는 성군(聖君)을 북극성이 부여잡고
天敎諸將護南鄕 하늘이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남쪽 시골을 지키게 했다.
橫遮嶺路爲屛翰 나라의 울타리가 되고자 고갯길을 가로막고
把截閑山作保障 한산도 요처를 경비하여 안전을 보장했다.
統制將軍元倜儻 통제사 장군은 본디 강건하고 기개가 있어
扶持雄略屬搶攘 혼란함 속에서도 웅대한 계략으로 견뎌냈다.
手提神箭餘三尺 손으로 쏘는 신의 화살이 약 3척인데
撞破倭奴幾萬航 몇 만의 왜놈 배를 쳐 깨뜨렸다.
斬級不須論箇箇 하나하나 논할 필요도 없이 참급(斬級)하니
血流終見海汪汪 마침내 드넓은 바다에 핏물이 흘러 다녔다.
威風已振扶桑國 위엄 있는 풍채가 왜놈나라에 이미 알려지니
壯氣應摧日本王 응당 굳센 기운이 일본 왕을 꺾었다.
李鄭宣權同赫世 ‘이•정•선•권’이 함께 혁혁한 공을 세웠고
安金裵具共流芳 ‘안•김•배•구’가 훌륭한 명성에 함께 했다.
二三豪傑輸忠力 두셋 호걸이 충성스런 힘을 짊어지고
五十餘城保女牆 오십여 성(城)의 성곽 담장을 보호했다.
德勝凶亡關理勢 덕(德)이 이기고 흉(凶)이 망하는 것은 사리와 형세에 관계하고
仁王强敗有穹蒼 어진 왕이 이기고 강함이 패하는 것은 푸른 하늘에 따름이다.
南夷罪戾通神鬼 남쪽 오랑캐는 귀신과 통한 어긋난 죄질로
東土瘡痍徹聖皇 동방의 땅이 상처투성이가 되니 황제를 끌어들이게 되었다.
礟手雲興空冀浙 기주(冀州)와 절강(浙江)의 하늘에 구름이 일 듯, 화살을 퍼붓고
騎兵響起捲荊襄 형주와 양양 땅을 떨치던 기병이, 천지에 울려 퍼지게 되었다.
鷹飛鶴翼鏖城砦 매가 날고 학 날개 퍼떡여 성과 요새를 오살하니
雷震風馳蕩虎狼 천둥 번개치고 바람 불어 호랑이와 이리가 쓸어버리듯,
神武揚時嚴殺戮 뛰어난 무예를 드날리며 엄히 살육하는데
餘威及處走顚僵 남은 위력이 곳곳에 미치니 적이 도망가다 나자빠졌다.
奉迎龍馭回京洛 용이 수레를 몰아 서울로 돌아오니 받들어 맞이하였고
驅逐餘兇縮海傍 남은 흉악함을 몰아 내쫓으니 바다 가까이로 물러났다.
風掃乾坤淸舊闥 하늘땅에 바람 부니 옛 터전이 깨끗해졌고
令行朝野振頹綱 명령에 따라 조정은 물론 민간의 무너진 기강이 바로 세워졌다.
仁儲奉廟還宮殿 어진 마음으로 궁궐로 돌아와 묘당을 받들어 모셨고
賢相隨班佐廟廊 현명한 재상들이 조회에 참석하니 관료들이 차례로 줄을 섰다.
知我聖君忠有効 우리의 성군(聖君)에게 충성을 다짐하는데
感吾皇上德難量 우리의 황제에게 느끼길, 덕(德)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堪嗟刑賞乖輕重 한스럽게도 형벌과 포상의 경중이 어긋나고
不是恩威太抑揚 크게 억누르거나 찬양하는 것이 은혜와 위엄이 아닌데
白首不知馳戰陣 늙은 관료들은 전장의 상황을 알지 못하니
滄波何事駕風檣 푸른 물결 속에서 무엇 하려 돛배타고 달리랴.
三年賊窟雄心死 삼년 동안 도적의 소굴 되니 웅장한 마음이 사라져
廿朔兵塵元氣傷 스물 달 동안 전쟁터의 티끌로 원기가 상하였다.
受命只堪殲府地 명령을 받아 오직 고을 땅을 다 섬멸하니
臨危何忍去吾疆 위기에 임해 우리의 국토를 돌보지 않는다면 무엇을 참으랴.
洛東已獻零兇䤋 낙동강은 이미 흉악한 놈들의 손에 떨어졌고
海上還調戰艦糧 해상에는 전함의 보급을 위해 다시 조정상태로 들어갔다.
邑渴民飢徒費慮 고을은 목마르고 백성은 굶주리는데 헛되이 사용하고
人輕責重只招謗 무거운 책임을 가벼이 하면 비방을 초래한다.
惟思奉贊將軍令 생각건대,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준수하니
不念勞傷從事狂 미친 듯 일하다가 상하는 과로는 생각지도 못하네.
危悃崢嶸懸斗極 가파른 산에 북두성이 걸려 위태한데
孤身漂泊寄滄浪 외로운 몸 떠돌며 창랑(滄浪)에 맡긴다.
蛇梁堡外顚風作 사량보 밖에는 돌개바람 일어나고
唐浦城邊大雨滂 당포성 가에는 큰 비가 퍼붓네.
獨倚篷窓心咄咄 홀로 배에 의지하니 마음이 뒤숭숭해도
橫磨長劍意堂堂 길고 큰 장검이 대저 당당하도다.
舟師已整成芳約 수군은 이미 정비되어 꽃다운 약속 이루었고
大將方期棹戰艎 대장은 바야흐로 거북선을 몰기위해 기다린다.
一劍直將屠醜穴 한번 곧바로 검을 휘두르면 왜놈의 혈(穴)이 죽어,
千帆應見沒茫洋 천척의 돛배를 보니 드넓은 바다에 가라앉는다.
初爲汲汲呑舟計 먼저 배를 집어 삼킬 계획에 골똘하더니
終作區區拒轍螗 마침내 의기양양하게 함부로 달려들었다.
臨戰逗遛雖有責 전장에 머물러 있다고 비록 꾸짖는다하여
提師輕進戒無妨 군사를 이끌고 가벼이 나아가면 경계에 무방비가 된다.
務農固是兵家本 농사에 전력하는 이것이 병법의 참된 근본이라,
播種要令趁節忙 절기에 맞춰 바쁘게 씨앗을 뿌리는 것이 중요하다.
論賞亦當均厚薄 당연히 전공(戰功)의 경중에 따라 죄다 논상(論賞)해야 하며
臨刑先可示慈詳 형벌에는 먼저 어질고 바른가를 보아야 한다.
舟中吟罷長回首 배 안에서 시를 읊조리며 하릴없이 고개 돌리니
風雨茫茫鎖戰塲 비바람에 망망한 전쟁터가 잠기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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