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장 14~22절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결단]
나 자신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할 때 내게 도움을 주시는 분이나,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 분으로만 따르는 것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나를 온전히 다스리시는 분으로 여기며 따라야 합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삶의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 부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 주인되어 달라고 고백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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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묵상해봅니다.
14절부터 17절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사건은 1절부터 13절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져서 고쳐주셨고, 베드로의 장모는 완전히 나아서 예수님을 섬기기까지 합니다(14절, 15절).
그리고 16절과 17절도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주님의 사역을 포괄적으로 기록하면서 이러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이사야 53:4, 5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 사역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 영혼도 죄에서 건져내어 구원해주신 메시아(그리스도)이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쌀 정도로 몰려들자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18절).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 한 서기관과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를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서기관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어디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19절). 그런데 이 서기관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20절)시며 완곡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은 늘 예수님과 적대적 관계로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예수님께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도 많지는 않아도 간혹 있었습니다. 아마 그러한 자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등이 바리새인이고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지만, 그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본다면 이 서기관의 고백에는 예수님께서 왜 완곡하게 거절하였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 서기관은 예수님을 부를 때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 이라고 불렀는데(19절), 아마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기보다는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 선생님(랍비) 정도로만 알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는 고백으로 보았기에 완곡하게 거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지만, 요한복음 3:2의 고백은 단순한 랍비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란 표현으로 보다 구도적(求道的) 태도를 보이고 있었음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이미 꿰뚫어보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1절에 나오는 제자 중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라고 표현된 것은 열두 제자 중 하나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 중 한 명이라고 여겨지는데,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후부터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22절)고 대답하십니다.
▶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한다'는 말은 사람들은 모두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이기에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서기관이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표현된 그 사람이나 만약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예수님이 아무리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해도 따르겠다고 간절한 고백을 하거나,
아버지의 장사보다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시 고백하며 따른다면 다른 결말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베드로든, 요한이든 복음서와 그 이후의 기록을 볼 때 가족과 완전히 결별한 것이 아니었음을 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순위(Priority)의 문제이지 가족을 저버리라는 말씀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심지어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인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기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겠다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다른 것들이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단]
나 자신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할 때 내게 도움을 주시는 분이나,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 분으로만 따르는 것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나를 온전히 다스리시는 분으로 여기며 따라야 합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삶의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 부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 주인되어 달라고 고백하면 어떨까요? 아멘! 202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