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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바운티호의 반란 ]
이 영화는 18세기 후반, 남태평양의 잔잔한 수면 위의 바운티호에서 실제 벌어진 반란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랜 항해와 가혹한 선상 생활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곤에 찌들은 선원들이 선장의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행위를 참지 못하고 일으키는 반란이 밀도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감독이 중간에 두 번 바뀌었는데 두번째로 선임된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만든 루이스 마일스톤도 짤렸습니다. 그래서 그 나머지 부분을 연출한 사람이 다름 아닌 주연을 맡았던 말론 브란도였습니다. 처음에는 <제3의 사나이>를 만든 명장 캐롤 리드 감독에 의해 시작되었다가 마일스톤으로 바톤이 이어졌습니다.
*물이 담긴 국자를 발로 차버리는 못된 블라이(트레바 하워드 분)
말론 브란도의 젊은 시절 근육질의 몸매와 카리스마적인 이미지를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맛이 간 블라이 선장역의 트레버 하워드 연기는 역시나 훌륭합니다. 어떤 역을 맡겨도 잘할 것 같은 믿음을 주는 배우입니다. 젊은 날의 싱싱한 리차드 해리스가 등장합니다.
일등 항해사로서 반란을 주도하는 말론 브란도는 처음엔 다소 능글맞게 굴다가 반란 후에는 고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비록 선장을 쫓아냈지만 이미 정통성을 상실하여 영국으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고(돌아간다면 군사재판이 기다린다) 바다 위를 떠돌아야하는 자신의 기막힌 처지를 비관하며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갑니다.
결국 재판을 받더라도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말론 브란도는 선원들이 몰래 배를 불살라버리는 배를 구해보려다가 끝내 목숨을 잃습니다. 허무한 마지막 장면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습니다.
<바운티호의 반란>은 여러 번 영화화되었는데, 오리지날은 35년 프랭크 로이드 연출로 찰스 로튼과 클라크 게이블 주연이었고, 그 다음이 62년 루이스 마일스톤이 연출했던 바로 이 영화입니다. 이후 1984년에 멜 깁슨, 안소니 홉킨스가 새롭게 인물들의 성격을 묘사한 영화가 나왔었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1787년 영국은 식량 문제 해결의 일원으로 영국 왕립 식물원 원예사 브라운과 바운티호의 선장 블라이(트래버 하워드분)의 지휘아래 일등 항해사 크리스천(말론 브란도분)과 50여명의 선원들은 포츠머드 항구를 떠나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남태평양의 티히티섬으로 빵나무를 구하러 떠납니다. 빵나무를 싣고 영국령 서인도 제도로 가서 심을 요량이었습니다.
항해가 시작되면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크리스천이 치즈가 없어졌다고 하자 밀스(리차드 해리스분)가 치즈를 선장의 집에 가져다주었다고 말합니다. 블라이는 선장을 도둑으로 몰았다며 밀스에게 24대의 채찍을 때리라고 명령합니다.
밀스는 24대를 맞고 기절합니다. 크리스천은 블라이에게 사소한 죄를 이렇게 다스리면 중벌에는 어떤 벌을 내리겠냐고 묻습니다. 블라이는 두려움이 최고의 무기라며, 두려움은 죽음을 이겨낸다고 냉정하게 대답합니다. 블라이는 항로를 호른으로 돌리라고 하고, 네드는 선장을 향해 피식 웃다가 돛대 위에 묶이는 벌을 받습니다.
블라이는 항해를 단축시키려고 거친 파도를 헤져나가라고 명령하고, 요동치는 배로 인해서 배 밑에서는 벌크통이 굴러 다닙니다. 크리스천은 벌크통을 밧줄로 묶을 동안 프라이스에게 배가 순풍을 받게 하라고 하여 배가 진정이 됩니다. 배가 갑자기 진정이 되자 밖으로 나온 블라이는 화를 내며 선로를 바꾸라고 하여 배는 요동치고, 벌크통을 묶으려고 밑에 있던 노만은 벌크통에 깔리게 됩니다.
크리스천은 도끼로 벌크통을 부숴 내용물을 빼내고 벌크통을 치우치만 노만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블라이에게 노만의 장례를 정상적으로 치루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블라이는 국왕의 임무를 수행중이라며 앞으로 허락없이 배를 멈추면 반역죄로 처벌하겠다고 말합니다.
블라이가 선원들의 음식을 절반으로 줄이자 선원 두사람이 블라이를 찾아가 규칙 위반이라고 따집니다. 이에 블라이는 게으른 너희들 때문에 5개월을 손해 보았다며 또 채찍질을 명령합니다. 이럭저럭 바운티호는 티히티섬에 도착합니다.
* 타히티 섬
원주민들이 바운티 호를 발견하고 소라 나팔을 불며 바닷가로 모여들고, 수백척의 카누를 타고 바운티 호에 다가갑니다. 블라이는 선원들과 보트를 타고 티히티에 상륙합니다. 히티히티 추장은 조지 왕이 보낸 선물을 받고 좋아하며, 조지 왕이 원하는 것이 빵나무(우루)라고 하자 웃으면서 가져가라고 합니다.
선원들이 타이티에서 휴식을 취하며 쉴 동안 추장의 딸인 마이티미가 크리스천과 서로 눈이 맞아 달콤한 시간을 보냅니다. 어느 날 둘이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블라이 선장은 난잡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선상 근무를 명합니다. 선원들은 현지 여인들과 뜨거운 관계로 변하고, 한 선원은 여인을 데리고 블라이를 찾아가 결혼하겠다고 말하는데 블라이는 매춘부를 돌려보내라고 말합니다.
* 추장의 딸, 마이티미-실제 그녀는 브란도와 나중에 결혼합니다
선원 세사람이 여인과 정이 들어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파도에 부딪혀 배가 부서지며 잡힙니다. 블라이는 탈영병들을 쇠사슬에 묶어 케이블 칸에 넣으라고 하고, 바운티 호는 타히티 섬에서 5달을 보내고 떠납니다. 브라운은 천 그루의 빵나무를 바운티 호의 온실에 옮겨 싣습니다. 마이티미는 크리스천에게 기다리겠다고 말하자, 크리스천은 나를 기다리면 불행해진다고 하면서 작별 키스를 하자 마이티미는 눈물을 흘립니다.
항해 중에 브라운이 물이 부족해 빵나무가 죽는다고 말하자, 블라이는 빵나무에는 필요한 만큼 충분한 물을 주라고 한 뒤 작은 국자를 돛대의 꼭대기에 매달아 놓고, 선원들은 하루에 한 국자씩만 먹으라고 합니다. 갑판 청소를 하던 탈영병 한명은 물을 먹겠다고 밧줄을 타고 올라가다 떨어져 죽고, 다른 탈영병 한명은 목이 말라 바닷물을 먹고 미쳐버리는 소동이 벌어집니다.
이런 소동 속에서도 블라이는 허가없이는 한 방울의 물도 주지말라고 합니다. 크리스천은 배안으로 들어가 국자를 가져와 물을 떠 미친 선원에게 먹이는데, 블라이가 국자를 차버리자 크리스천은 블라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깁니다.
블라이는 폭력을 사용한 크리스천을 잡으라고 하고, 크리스천은 옆에 있는 사관생의 칼을 빼 블라이의 다리와 팔목을 칼로 찌르며 한마디만 더하면 목을 찌르겠다고 말합니다. 크리스천은 무기고의 열쇠를 밀스에게 던지며 배안의 동조자에게 무장을 시키라고 합니다.
크리스천은 작은 배에 블라이와 그의 동조자들을 태우고 식량과 물과 나침반을 주며 3일만 가면 타포아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블라이는 바운티호를 떠나며 영국 해군이 반란자들을 찾아내 반드시 사형시킬 것이라며 떠들어대며 작은배에 옮겨 탑니다.
크리스천은 바운티 호를 티히티로 돌려 물과 식량을 싣고 숨을 곳을 찾아보자고 합니다. 그는 배안에서 내리지 않고 앞날을 고민하는데, 추장 딸인 마이티미는 카누를 타고 바운티 호에 올라가서 크리스천을 만납니다. 크리스천은 마이티미를 데리고 크리스찬은 타이티를 떠납니다.
한편 블라이는 천신만고 끝에 영국에 도착에 해군 조사 위원회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바운티 호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바운티 호는 티히티를 떠나 항해하다가 이름 모를 섬을 발견합니다. 먹을 것도 풍부하고 풍광도 아름답습니다. 밀스와 선원들은 블라이가 영국에 당도해서 이 반란 사실을 말하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크리스천은 이 섬에서는 만족을 얻지 못할 거라며, 우리가 영국으로 돌아가 법정에서 모든 것을 말한다면 블라이의 만행은 밝혀질 것이라며 정의는 싸워볼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크리스천이 아침에 자고 있는데 마이티미가 바운티 호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은 보트를 타고 바운티호에 올라 불길을 잡으려 하지만 소용이 없고 결국은 화상을 입고 선원들에게 업혀 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심한 화상으로 죽어가고 바운티호 불에 타며 서서히 바다에 가라앉습니다.
[ 바운티호 반란 이야기 ]
바운티호는 애초엔 군함이 아니었습니다. 1784년 건조돼 민간 상선으로 쓰이던 배를 영국 해군이 1787년 매입하고 뜯어고쳤습니다. 개조의 주안점은 화물칸 확대였습니다. 함장실조차 온실로 바꿨습니다. 직사광선이 적재물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유리도 불투명한 간유리로 바꿔 끼웠습니다.
화물칸의 습도를 유지하는 원시적 장치까지 넣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적재하려고 배를 고쳤을까요.답은 빵나무였습니다. 바운티호의 공식 임무는 측량이었으나 진짜 목적은 남태평양 특산물인 ‘빵나무(breadfruit)’ 묘목의 운송에 있었습니다. 조리하면 빵과 비슷한 맛을 내는 열매가 달린 빵나무였습니다. 묘목의 행선지는 서인도제도였습니다.
* 빵나무 열매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에게 비싼 곡물 대신 빵나무를 먹여 수익을 늘리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영국과 전쟁 끝에 독립한 미국으로부터 식량 공급이 어려워진 가운데 사탕수수 재배업자들과 무역업자들이 해군을 움직였습니다.
‘베시아’라는 상선을 사들여 군함 겸 묘목운반선으로 개조한 것도 상인들이 압력이 통했기 때문입니다.
* 대항해 시대의 범선
영국 해군은 개조된 상선의 이름을 바운티 호로 바꾸고 함장에 윌리엄 블라이를 앉혔습니다. 블라이는 적임자처럼 보였습니다. 제임스 쿡 선장 밑에서 세계를 처음으로 일주한 경험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블라이도 반겼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고 단행된 군축으로 신분이 예비역으로 바뀌어 급여가 절반 이상 깎인 뒤 무역선에서 일하던 블라이는 현역 복귀와 특별 상여 지급을 약속받았습니다.
문제는 바운티호의 근무 여건이었습니다. 이런저런 기구를 많이 싣는 통에 선원들의 주거 환경이 나빠져 불만이 차올랐습니다. 더욱이 민간인 생물학자 2명을 포함해 모두 46명인 선원 중에는 해병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당시 해병은 선상에서의 경찰 노릇을 했습니다.
* 바운티호 반란 사건의 경로, 쫓겨난 블라이 함장은 왼쪽 쿠팡으로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고, 크리스천은 오른쪽
핏케언섬으로 도주합니다. 일부는 오른쪽 타이티 섬으로 도주하였다가 나중에 사로잡힙니다.
군함의 단독 지휘는 처음이었던 윌리엄 블라이 함장은 경험 많은 항해사가 필요했는데 해군성에 의해서 임명되었던 항해사 프라이어를 못 미더워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두 번 항해를 같이 한 적이 있던 크리스천을 부항해사로 임명하여 태웠습니다.
크리스천은 보수도 받지 않고 기꺼이 승선할 정도로 두 사람은 절친이었습니다.영국에서 타히티로 가는 항로는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서 동쪽으로 가는 길이 조금 멀지만 항로가 안정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블라이는 시간을 단축시키고 타히티에서 출발할 때는 서쪽으로 항해해 결국에는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개인적인 공명심으로 험하기로 유명한 남아메리카 최남단의 마젤란 해협으로 가는 항로를 선택했습니다.
항해사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밀어붙이는 바람에 악천후 속에 결국에는 한 달이라는 시간만 허비하고 남아프리카 항로로 되돌립니다. 이 때 프라이어가 남아메리카 항로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시했으므로 그를 해임하고 대신에 크리스천을 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승조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블라이 함장의 성격은 고집불통에 독선적이라 승조원들을 가혹하게 다뤘습니다. 사소한 일도 채찍으로 다스렸습니다. 항상 독재적인 권위로 선원들을 다스리는 블라이 선장은 선원들에게 두려움 외에도 반항심을 불어넣고 부하들을 다스리는 일에서 일등 항해사인 크리스찬과 사사건건 부딪치게 됩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타히티 섬은 완전히 낙원이었습니다. 주민들은 대대로 서양인들에게 친절히 대해왔으며 블라이 일행을 격렬히 환영하며 거의 매일 축제를 열어주고 빵나무를 주었습니다. 날씨는 따뜻하고 푸르른 해변, 야자 열매, 먹을 것은 넘쳐났습니다.
반 년 가까이 대기하는 도중 현지 여성들과 친해진 승조원들이 다른 마음을 먹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원주민 여자들과 연애를 하는 선원들이 늘어났습니다. 특히 크리스천이 원주민 추장의 딸과 사랑에 빠져 해롱해롱대자 블라이 함장이 나서 호통을 칩니다. 이 때 크리스천과 블라이가 완전히 등을 돌린 것으로 보입니다.
상당수의 승조원들이 마음속으로 타히티를 떠나기 싫어했지만 군율은 지엄한 법. 탈영한 수병 몇 명을 채찍질로 다스린 후에야 간신히 본국으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블라이의 엄격한 지휘는 계속되었고 결국 출발한지 20여일만인 1789년 4월 28일, 크리스천의 주도 하에 반란이 일어납니다. 블라이 함장 편에 선 승조원들은 18명이었는데 이들을 구명 보트에 실어 망망대해로 떠나보내고 자신들은 바운티호를 몰아 타히티로 도주했습니다.
블라이 함장과 그의 부하들은 40여일간 태평양을 무려 3,800마일(6,000km)을 방황한 끝에 피지섬 원주민들한테 도움을 받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789년 6월 14일, 티모르의 네덜란드령 항구인 쿠팡에 도착했습니다.
* 빵나무 열매
그 즉시 함장은 네덜란드 관청에 반란에 대해 보고했고 이 소식은 영국 본국에 전해집니다. 생존자들은 거의 아사 직전이었기 때문에 약 2개월은 쿠팡에 머무르면서 몸을 추스렸는데 여기서 몸이 너무 쇠약해져있던 식물학자 데이비드 넬슨이 죽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8월 20일 자카르타로 떠났으며 10월 16일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몸이 쇠약해져있던 4명이 추가로 사망합니다. 1790년 3월 14일 블라이 함장은 영국에 도착합니다. 1년여 동안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블라이 함장은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영국은 해양 국가로서 국가의 근간이 해상 무역과 제해권에 있기 때문에 해적 행위, 선상 반란에 대하여 매우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때문에 반란자들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냈습니다. 영국 해군성은 에드워드 선장이 지휘하는 군함 판도라를 파견해 반란자 색출에 나서게 됩니다. 반란자들의 말로는 뻔했습니다. 당시 지구상에서 유럽인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곳에 들어가지 않는 한, 언젠가는 발각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부가 발각되지 않았기에 이 반란 이야기가 유명해진 것입니다.
반란자들은 일단 타히티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한 무리는 (정말 멍청하게도) 타히티에 정착했고, 다른 무리는 영국 해군이 찾을 수 없도록 무인도인 핏케언 섬에 도착하여 바운티 호에 불을 질러 침몰시키고 그 곳에 정착했습니다.
1791년 3월 21일, 판도라 함이 타히티에 도착했고 승조원들과 영국 해병대가 한 달여간에 걸쳐 섬을 토끼몰이 하듯 포위하여 중심으로 수색해 들어간 결과 14명의 반란자들을 잡아들였습니다.판도라 함은 나머지 반란자들을 찾으려고 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몰랐기 때문에 사모아, 통가 등 남서 태평양의 섬들을 무작정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핏케언 섬은 해도에 아직 안 나타 있었기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반란자 색출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가기 위해 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는데 1791년 8월 30일 아침, 암초가 많기로 유명한 호주 북동부의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에서 암초에 난파되고 맙니다.
* 피켓언 섬
여기서 31명의 승조원과 4명의 죄수가 익사하고, 89명의 승조원과 10명의 죄수가 겨우 살아남습니다. 이들은 4대의 구명 보트에 나눠 타고 2년 전에 블라이 함장이 죽을 고생을 하며 겨우 항해했던 길을 그대로 재연하여 쿠팡에 도착하게 됩니다.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들은 쿠팡에서 남아프리카의 희망봉까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배를, 희망봉부터 영국까지는 군함 고르곤 함을 타고 귀향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영국에 도착한 10명의 죄수는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4명은 무죄, 6명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교수형을 당한 건 3명뿐이었습니다. 사관후보생 피터 헤이우드는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유력가문의 자제였기 때문에 좋은 변호사를 사고 한편으로는 빽을 동원했습니다.
* 피켓언 섬
재판부는 그가 어쩔 수 없이 반란에 가담했고 판도라함이 도착했을 때 즉시 투항했기 때문에 이런 '여러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여' 국왕 조지 3세에게 사면을 건의했습니다. 그는 결국 사면 받고 정규 장교로 임관까지 했으며, 몇 십년 후에는 제독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당시 언론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말이 많았습니다. 갑판 부사관 제임스 모리슨도 정상이 참작되어 사면 받았습니다. 수병 윌리엄 머스퍼랫도 결국 방면되었습니다. 1792년 10월 28일, 사형 판결을 받은 수병 3명(버킷, 엘리슨, 밀워드)이 군함 브룬스위크 함의 돛대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낙원에서의 삶이 결국 2년도 못 간 것이었습니다.핏케언 섬에 정착한 자들은 오손도손 잘 사나 싶었지만, 같이 간 원주민 남자들을 백인 남자들이 노예로 부려먹었기 때문에 몇 년 후 이들이 폭동을 일으켜 서로 싸우고 죽인 끝에 성인 남자 대부분은 사망했습니다. 1808년 미국 포경선 토파즈호가 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성인 남자 1명(존 아담스)에 여자 8명, 어린이 19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 소식은 1810년, 영국에 전해졌는데 이때는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 탓에 정신없던 시기여서 군함을 보내 잡아들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1814년에 영국 군함 두 척이 다시 핏케언에 상륙, 조사하여 보고서를 올렸는데 해군성은 반란자들이 아담스를 제외하고는 다 죽었으므로 그냥 놔두기로 하고 아담스는 사면했습니다. 크리스천은 1793년에 죽었는데 아담스는 그도 원주민들한테 살해당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후 이 반란이 누구의 책임인가가 여러 번 회자되었는데 재판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블라이 함장은 군사재판에서 무죄로 인정받았고 태평양에 한 번 더 갔다 와서 기어이 빵나무를 서인도 제도에 운반하는데 성공합니다. 그 후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공적으로 나중에는 호주 총독의 자리에 오르지만 또 반란에 연루되어 불명예 사임합니다.
* 1916년 피켓언 섬 주민들
블라이 일행이 기적처럼 귀환하는데 도움을 줬던 피지는 구조적인 비극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블라이 일행이 쉬는 와중에서도 제작한 해안지도와 마을의 기록을 토대로 마음씨 고운 영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고, 뒤따라 찾아온 영국 상인들은 원주민들에게 총을 팔았습니다. 내전으로 힘이 약해진 원주민들은 1874년 영국에 굴복하고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인들은 피지에 사탕수수 농장을 개척한다며 낙천적 기질의 피지인을 기피하고 인도인 노동자들을 대거 불러들였습니다. 오늘날 피지 인구의 절반씩을 양분하는 토착 피지인들과 인도계 피지인들은 불구대천의 원수로 피가 터지게 싸우고 있습니다. 피지에게는 블라이 일행을 도와줄 게 아니라 상어밥이 되도록 내쫓는 게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 더 브란도 리조트 ]
배우 말론 브란도는 1957년 안나 캐쉬피와 첫 번째 겷혼을 했고, 두 번째는 1960년 영화 <애꾸눈 잭크>에서 공연했던 멕시코 여배우 모비타와, 세 번째는 영화 <바운티호의 반란>에서 공연했던 타리타라는 타히티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말론 브란도의 고단하고 불운한 삶의 여정 중에도 유일한 안식처가 있었는데, 마지막 아내인 타히티 출신 타리타와 함께 한 테티아로아라는 섬이었습니다.
영화 <바운티호의 반란>의 촬영은 타히티와 옆 섬 무레아라는 곳에서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스텝들과 함께 촬영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인근을 돌아다니던 중, 말론 브란도는 테티아로아라는 섬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섬에 필이 꽂힌 브란도는 1966년과 1967년에 이 섬을 통째로 사버립니다.
1970년에는 이 섬에 12채의 방갈로, 주방으로 사용한 작은 오두막, 식당과, 바가 전부인 작은 마을을 짓습니다. 재료는 모두 현지에서 조달한, 코코넛 나무, 코폴라, 조개껍질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당시 영화에 함께 출현했던 타히티 출신의 여배우 타리타와 결혼해 함께 이 섬에 정착합니다. 이 천국에서 말론 브란도의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타히티 섬에서 북쪽으로 약 30마일 거리에 위치해 있는 테티아로아 섬은 총 1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작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퇴임 후 자서전을 집필하기 위해 오래 머물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말론 브란도는 1973년 이곳에 친환경 리조트를 지어 세상을 떠나기 전 2004년까지 직접 운영을 했고 브란도와 타리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사이먼이 <더 브란도>라는 이름으로 재단장해 말론 브란도 사망 10주기인 지난 2014년 7월 1일에 다시 개장했습니다.
더 브란도 리조트는 2016년 미국 여행 매체인 ‘트래블 앤드 레저’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리조트 1위’로 선정되었습니다. 사진만 봐도 고개가 끄떡여집니다. 에메랄드 빛 바다, 하얀 백사장 및 터키색 산호초 군락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특히 바다새가 서식하는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섬으로, ‘새들의 낙원’이라는 애칭이 있습니다.
테티아로아 섬에는 투숙객과, 직원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어 유명인사들이 파파라치를 피해 휴양을 즐기기 위해 주로 찾는 곳입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뿐입니다.
어느 철학자는 말론 브란도가 테티아로아로 들어가는 것을 두고 “그는 하나의 섬이 됐다. 하나의 고독한 섬이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곳에서 말론 브란도는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오전5시에 일어나 9시에 잠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해양농장, 태양열과 같은 친환경 관련 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밤이 되면 아무도 없는 해변을 나체로 걷거나 산책하며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섬과 섬 사이가 수심 5미터가 채 안돼, 섬 사이를 걸어 다니며 물고기를 잡을 수 도 있습니다. 브란도는 이곳에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뛰어놀았습니다.
배우로서는 끝을 모를 만큼 성공했지만 늘 고독하고 우울하고 허무했던 그 이면에 감춰진 순수하고 밝은 자아를 이 곳 테티아로아에서 비로소 찾은 것 같습니다.
[ 당시(18세기~19세기) 승조원들의 모집 방법 ]
당시 장교들 외에 승조원들의 모집 방법에는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자원하는 방법과 강제로 끌려오는 방법이었습니다.
자원 동기에 대하여는 어떤 이들은 적국 군함이나 상선을 나포했을 때 받을 수 있는 포획상금을 통해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했고, 자원 시에 받을 수 있는 장려금에 매력을 느껴 해군에 입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단순히 항구마다 붙어 있는 모병 포스터의 선전 문구-예를 들어 해군에 입대하면 럼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거나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등등-에 혹해서 자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는 빚에 몰려 빚 독촉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해군에 자원하는 특이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젊은이다운 열정으로 고향을 떠나 넓은 바다에서 모험을 즐겨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입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강제로 끌려오는 경우였습니다.
* 강제징집-끌려오는 경우
강제징집은 이렇게 시행되었습니다. 우선 배가 항구에 도착하면 함장이 부하 장교들에게 징병대를 편성하여 목표가 될 만한 일반 선박을 물색케 합니다. 그리고 타겟 선박의 갑판에 우루루 올라가 국왕 폐하의 배를 위한 승조원을 모집하겠노라고 통보를 합니다.
이때 충분한 수의 자원자가 나타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협박과 포승줄, 몽둥이와 매질 등으로 강제적으로 선원들을 묶고 자기들 배로 끌고 가게 됩니다. 그리고 함장의 주관 하에 갑판 위에 일렬로 세워 놓고 국왕폐하의 수병으로 복무하겠노라는 취지의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정식 승조원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물론 법적으로 강제 징병된 자가 해군성에 항의할 권리가 있었지만 배를 타고 떠난 다음에 항의가 도착하는 경우 수개월씩이나 걸리고 이것도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또한 배 위에선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워 찍소리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처럼 만만한 배를 골라 선원들을 끌고 가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선원들이 자주 들르는 선술집이나 여관 등을 습격하여 안에 있는 선원들을 몽땅 끌고 가는 수준으로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바다와는 거리가 먼 여관주인이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동네사람들을 잡아가기도 했고 지체높은 시의회 의원까지 끌고 갔다가 간신히 풀려나는 경우도 왕왕 있었습니다.
이래서 어느 항구에 강제 징병대가 떴다는 소문이 돌면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일체 바깥 출입을 자제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졸지에 가장이나 아들, 친지를 빼앗긴 주민들이 낫이나 쇠스랑 등을 들고 강제 징병대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 영화에서...고난의 항해 중인 블라이 일행
이런 짓은 비단 영국 선박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고 외국 선박에도 손은 대서 전쟁까지 벌어지곤 했습니다. 1807년에는 영국 전함 레오파드 호가 미국의 작은 전함 체사피크 호를 공격하여 미국 수병 4명을 납치하는 경우가 벌어졌습니다. 1811년에는 미국 상선에서 선원을 납치하자 드디어 이듬해인 1812년에 영미전쟁이 터져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무지막지한 징병 방법은 해군 강국을 표방한 수요가 많은 영국에서 자행되었고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승조원이 필요한 네델란드나 프랑스 등지에서는 외국인 용병들로 많이 충원되었다고 합니다.
* 영화에서...
[ 당시 승조원들의 생활 ]
< 대표적인 처벌 - 채찍질(Flogging) >
당시 함상 위에서 시행된 벌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처벌은 영화에서도 등장하지만 채찍질(Flogging)이었습니다. 이는 보통 본보기가 되라는 의미에서 오전 11시 경에 배의 전 승조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지곤 했습니다.
* 영화에서...채찍질 당하는 밀스(리차드 해리스 분)
어떤 범죄나 규율 위반이 채찍질의 대상이 되는지, 그럴 경우 몇 대나 채찍질을 가할 것이지 등에 대한 것은 함장 마음대로였습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12~24대 정도가 일반적이었다고 하는데 깐깐하거나 잔혹한 성격의 함장들은 72대 이상을 때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사용된 채찍은 아홉 가닥의 채찍 끝에 마디가 달려있는 물건이었습니다. 이것으로 6대를 맞으면 등의 피부가 까지기 시작하고 12대를 맞으면 평생 끔찍한 흉터가 남으며, 24대 이상을 맞으면 건강한 사람도 기절하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하물며 72대 이상을 맞으면 최소한 몇 주 동안은 침상에서 누워 지내야만 했으며 심하면 목숨을 잃기도 했다고 합니다.
채찍질을 하는 경우에는 현장에 반드시 군의관이 임석해야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권투 경기에서 닥터스톱 제도와 마찬가지로 당사자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는 채찍질의 집행을 중단할 수 있도록 건의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채찍질은 어떤 규율 위반에나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도둑질, 만취, 게으름 등 함장의 자의에 따라 채찍질을 가할 수 있었고 거친 말투나 욕설 등에 대하여도 함장이 마음대로 벌을 가할 수 있었던 끔찍한 시대였습니다.
* 영화에서...
< 승조원들의 먹걸이 >
15세기 말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된 ‘신항로의 개척’은 비단 배의 운용과 항해술뿐만 아니라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식생활 측면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수개월 동안 육지 한번 밟지 못하고 항해를 계속해 나가는 현실에서 어떻게 몇 달 동안 보관해도 변하지 않는 식료품을 확보하는 문제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 가장 기본적인 주식, 벽돌비스킷
기본적인 주식으로는 빵이 요구되었으나 빵은 습한 환경에서 곰팡이가 쓰는 등 오래가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빵을 굽는 방법도 생각해 봤으나 빵의 재료인 밀가루의 변질문제가 대두됐고 목조 선박에는 항상 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굽는 방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비스킷이었고 이는 오랫동안 대용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선박용 비스킷은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최소 2번, 심하면 4번까지도 굽기 때문에 그 딱딱함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벽돌 비스킷’이란 이름으로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승조원들은 그 비스킷을 그냥 먹기 보다는 차나 커피, 수프 등에 적셔서 약간이나마 부드럽게 해서 먹곤 했습니다.
* 영화에서...
* 소금에 절인 고기(염장고기)
벽돌비스킷 다음으로 대항해 시대의 음식은 절인 고기였습니다. 신선한 고기를 맛 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살아있는 가축을 통째로 배 안에 싣는 방법이 있었으나 이는 배의 공간 문제나 가축의 먹이 문제 등을 고려할 때 거의 불가능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빵과 마찬가지로 냉장고가 없던 시대에 소금에 절인 고기만을 섭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염장고기는 19세기 중반 이후 통조림 제조 기술과 냉장고 등이 등장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 주류-럼주
당시 승조원들은 선상 생활의 고달픔을 달래기 위하여 술이 반드시 필요했을 겁니다. 더구나 싣고 다니는 물도 이끼가 끼는 등 변하기가 일쑤여서 처음에는 맥주를 싣고 다녔습니다.그러나 이 맥주도 한 달 반 정도 지나면 시어지기 시작했고, 승조원들은 맥주가 변하기 전에 마시다 보니까 금방 동이 나버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했던 것이 도수 높은 술인 럼주였습니다. 럼주란 사탕수수 즙과 당밀을 원료로 하여 약 40도 이하로 증류한 술입니다. 17세기 초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이래, 럼은 힘든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하류층이나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 노동자들이 한 잔 술에 취해 잠깐 동안 시름을 잊는데 그만이었습니다.
특히 도수가 40도나 되어서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럼은 고된 선상 생활에 시달리던 뱃사람들에게는 ‘선원들의 술’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영국 해군은 1655년에 스페인령 자마이카 섬을 공략하여 서인도 제도에 거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자마이카에서는 유럽과 달리 맥주도 와인도 브랜디도 구하기 어려웠던 반면, 사탕수수 산지인 만큼 무진장하게 공급을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 타이티 섬
[ 대항해 시대의 치명적인 질병 - 괴혈병 ]
당시 뱃사람들의 배에는 비타민 C가 들어가 있을 음식이 전무했습니다. 대부분이 술이라든지 소금에 절이거나 말린 고기, 벽돌 비스킷, 상한 물 같은 것뿐이었고 신선한 과일은 없었습니다.
15세기 이전의 선원들은 대양항해가 별로 없이 육지 주변을 주로 항해하며 자주 항구에 들렀기에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대항해시대 이후 대서양이나 태평양의 먼 바다를 횡단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선원들에게는 괴혈병의 발병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당시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해군들 사이에서도 이 괴혈병의 공포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1780년대에는 1,600명의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중 60명만이 전투에서 싸우다가 죽은 수이고 나머지는 전부 괴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쯤 되면 당시 선원들에겐 자기가 - 당시까지는 원인이 알려지지도 않은 - 괴혈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병이 괴혈병만큼이나 더 무서웠을 듯 합니다.조금 더 정확한 기록이 있는데 1740년 영국 해군이 아메리카 식민지 원정을 위해 파견한 조지 앤슨 제독이 이끌었던 함대에는 총 1955명의 군인과 선원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세계일주를 성공한 후 4년 후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634명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이 중 전투로 죽은 사람이 4명, 열병과 이질로 죽은 사람이 320명, 절반 이상인 997명은 모두 괴혈병으로 죽었습니다.이러한 괴혈병의 막강한 힘 앞에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았는데 술을 한 병 원샷한다든지, 목만 남기고 땅에 파 묻는다든지, 황산을 마신다든지 같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썼지만 나을 리가 없었습니다.
* 영화에서...
또한 이 병이 냄새 등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여서 배 내부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등의 노력도 해 보았지만 효과가 없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그러던 중 1747년 영국 해군 군의관 제임스 린드 박사는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괴혈병 환자들을 서로 나누어서 각기 다른 치료법들을 적용해본 결과 레몬과 오렌지 같은 과일을 먹은 환자들의 증상이 완화되어 갔고 결국 치유까지 된 것을 발견합니다.린드는 이후 1753년에 논문을 통해서 오렌지와 레몬과 같은 과일이 괴혈병을 낫게 해줄 수 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당시 영국 의학계는 린드의 의견을 어떻게 그런 과일 따위가 괴혈병을 치료하겠느냐면서 철저하게 무시하였습니다. 영국 해군 또한 린드의 연구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비용적인 측면이 겹쳐 적극적인 대응에 미온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해군 수뇌부 역시 괴혈병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과일을 사서 보급해줌으로써 나가는 비용이 괴혈병으로 죽는 숙련된 수병들 때문에 발생하는 손실에 비하면 매우 적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기한 조지 앤슨의 4년 간의 세계일주에서 괴혈병으로 잃은 인원이 1000명에 육박했는데 이 정도 숫자면 1급 전투함 3~4척을 조함할 수 있는 병력입니다.
더구나 군함의 수병이나 상선의 선원은 어느 정도 이상 숙련되지 않으면 아무런 쓸 데가 없기에, 이만한 인력 손실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만한 숫자의 숙련인원을 순식간에 복구하고 채우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괴혈병의 정확한 발병 원인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오류와 실수를 반복하는 삽질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소금절임 양배추-자우어쿠라우트
이런 신선한 채소나 과일을 섭취하면 괴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실천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제임스 쿡 선장이었습니다. 1768년, 1772년, 1776년의 세 차례 장기 항해 중에서도 쿡 선장의 함대에서는 괴혈병으로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 제임스 쿡 선장
보급할 때마다 채소, 과일을 꽉꽉 채우고 틈만 나면 상륙해 신선한 식품들의 확보에 열성적이었으며 배의 위생관리에 철저히 신경 쓴 덕택이었습니다. 특히 한번 항해를 나갈 때마다 양배추 소금절임인 자우어크라우트를 3톤가량 준비해서 괴혈병에 대비했으며 선원들이 반드시 양배추를 섭취하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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