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공무원 상
김 선 구
크던 작던 상을 받는다는 것은 즐겁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노력에 따른 보상이기에 더욱 값진 것이다. 수상의 영광은 크지만 누구나 수상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상자가 되기까지에는 남다른 노력이나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
친구 K는 나와 공무원 임용동기이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보고 같이 합격했다. 순위는 내가 앞쪽이었던지 먼저 발령장을 받았다. 지방에 있는 모 연구기관에 근무하고 있을 때 그도 같은 부서로 배속되어 왔다. 둘 다 총각신세였고, 합숙소에서 침식을 같이하는 동안 의기가 투합하여 출퇴근이나 외출도 같이하였다. 얼마 후 그는 수원 소재 본원으로 전근해 갔고, 나는 강원도 대관령 오지마을로 근무명령을 받았다. 승진이라는 명분 때문이었다. 대관령 골짜기에서 한 삼년 근무 후에 수원으로 전근발령을 받아 다시 만났다. 이때는 모두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이 후 가족 간에 교류도 활발하였다.
우리는 또 다시 한 부서에서 근무하였다. 다만 전공이 달랐다. 그의 연구 분야는 우유가공이었었다. 우유를 다루기 위해서는 청결이 우선이다. 그의 연구실은 주로 백색가운의 천사들 모임 처였다. 우유를 다루는 보조원 아가씨들의 위트와 웃음 속에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반면 나의 연구테마는 쇠고기와 돼지고기의 등급설정 연구였다. 우리나라의 경제수준이 향상되고 국민들의 식생활이 개선되면서 쇠고기와 돼지고기에 대한 등급제 실시가 거론되기 시작할 때였다. 나는 전국의 도축장을 순회하며 소와 돼지고기의 분할방법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는 한편 부위별로 고기의 영양성분의 차이를 조사하는 등 바쁘게 지냈다.
그때 나의 모습은 실험연구에 종사하는 과학도라고 하기보다는 소와 돼지를 잡는 백정이나 다름없었다. 피범벅이 된 가운과 목이 긴 장화가 일상의 복장이었다.
어느 해 연말이었다. 직원회의에서 간부회의 결정사항이 시달되었다. 그해 우리기관에 배정된 모범공무원 후보로 나의 친구 K가 선정되었다고 하였다. 이외의 결과에 모두들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나 같은 존재가 후보로 거론 될 것이라곤 꿈도 안 꿨지만 평소 업무량으로 보나 노력의 성과로 보나 K보다는 나의 업적도 뒤지지 않았을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는 불공평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친구는 직장상사나 동료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술을 즐기는 성품이라 대인관계가 원활하였다. 누구든지 오래 만에 만나면 첫 인사는 언제나 “약주 한잔 할까요?”였다. 그게 그의 주특기요 친화력의 수단이었다. 다만 그에게 묘한 버릇은 화가 나면 참지 못하는 성질이었다. 심지어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엄포까지 놓기도 했으나 평소 그를 아끼는 동료들 때문에 무리 없이 지나갔다. 그러한 그의 처신은 직장 내에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를 모범공무원으로 추천하게 된 이유라 했다. 그의 마음을 잘 달래서 직장에 대한 애착심을 심어주기위한 조처라고. 당시는 기관장의 의도가 법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가능한 얘기일 수도 있었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장손으로 태어났다. 첫손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이 인삼 녹용 등 보약을 상시 대령케 했다. 그 결과 손자를 웬만한 주량은 다 소화 해 낼 수 있는 강 체질로 키워냈다. 모범공무원 이면에는 할아버지의 노고 또한 무시 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 하였다.
부친은 교육자요 재단의 이사장이었다. 집안도 좋고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유산도 많았다. 그래서일까? 혼기에 이르자 마담뚜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그의 얘기를 빌리면 삼백 번도 넘게 맞선을 보았다. 그러나 혼처를 정하지 못하여 전전 긍긍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늦게 부인을 만났다. 미스 선발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미모를 갖춘 아가씨였다.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그에게 문제라면 잦은 술자리와 잘못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질이었다. 살다보면 항상 만족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불만이 있어도 양보해야 하는 것이 미덕일터인데. 특히 단체생활에는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그처럼 불편을 못 참는 성질이 모범공무원후보 결정의 단초가 되었다. 세상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특별히 상을 배려해 주기위한 억지명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에게 천하의 농땡이가 모범공무원이라니 말이 안 된다고 놀려대었다. 본인도 그것을 부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웃기만 했다. 수상 자체를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는 눈치였다. 얼마 후 부상으로 받은 수당을 모두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탁해 버렸다. 모범공무원 수당을 삼년간 받게 되어 있어 총액으로 따지면 꽤나 큰 액수였다. 그의 통 큰 결정은 농땡이라는 불명예를 삽시간에 지워 버렸다. 그에게 모범공무원이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찬사가 이어졌다. 모범공무원으로서의 진가는 거기서 발휘 되었다.
연말이 되면 공직사회에서는 우수공무원을 선정하여 포상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나는 공직생활 중 상이라곤 별로 받아본 일이 없다. 일은 남보다 열심히 하여 상사로부터 인정은 받았지만 상복은 없었다. 내가 모범공무원수당을 받았으면 분명 살림밑천으로 써버렸을 것이다. 성실한 공무원이기는 했지만 모범공무원이 될 만한 그릇은 못 되었다.
그 친구와는 지금도 가끔 통화를 한다. 상은 받을만한 자질의 소유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임을 실감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