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55
8월17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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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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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0ASwjxuDW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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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베드로와 사도들이 버린 것은 사실 지극히 작고 하찮은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 말씀은 섬뜩할 정도로 강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낙타, 바늘구멍과 같은 과장법까지 동원하시면서 재물을 홀로 독점하지 말고 나눌 것을, 더 나아가서 과감하게 초월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오 복음 19장 24절)
예수님께서는 독점하는 재물, 부적절한 방법으로 축척된 재물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큰 걸림돌이 될 것임을 명확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재물은 우리 시대 우상을 넘어 하느님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돈의 달콤한 매력에 흠뻑 빠져든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인간성도 잃어버린 채, 오로지 돈돈하며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천문학적인 재물의 축척 외에 다른 대상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즉시 콧방귀를 끼거나 비웃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들과의 나눔? 가족애, 우정? 무가치한 일로 여길 것입니다. 돈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강하게 질타하시는 대상은 그냥 부자들이 아닙니다. 돈의 노예가 된 부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 자체를 폄하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권력이요 무기로 삼는 사람들, 오로지 돈밖에 모르며 돈이 최고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만 버리고 비울 것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먼저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 가난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해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그 어떤 유혹, 그 어떤 대상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대자유를 만끽하셨습니다. 그 힘으로 한 점 사심도 없이,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찾으며 열정적으로 복음 선포의 길을 떠나셨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버린 것은 사실 지극히 작고 하찮은 것들이었습니다. 낡은 조각배, 닳을 대로 닳아버린 그물, 몇 개 안되는 낚싯대...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포기를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크나큰 사랑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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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dYyHsbcYh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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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부자로 만드는 열등감, 가난하게 만드는 양식>
어제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으면서도 가진 것을 다 팔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어려워 주저하던 부자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기보다 어렵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돈의 액수에 달렸지 않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서도 외적으로는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그런 재산은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지라고 할지라도 신문지와 잠자리에 집착하여 이웃과 싸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부자입니다. 부자는 욕심이 많아서 나눔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먹는 것도 마찬가지고 권력이나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 세상 것에 집착하는 이는 부자이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것들에 집착하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돈이 없어서 돈을 모을까요? 아닙니다. 결국, 모든 집착의 원인은 ‘열등감’입니다. 자존감이 없으니 그런 것들로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보디빌딩을 할 때 어떤 개인 트레이너들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음료수에 스테로이드를 타서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개인 교습을 받다가 여자인데도 수염이 나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현상도 겪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헬스 트레이너 ‘김동현’ 씨가 ‘실화 탐사대’에 나와 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약물로 운동을 하다가 거의 성불구에 가깝게 되고 나서야 약물을 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스테로이드를 많이 복용하면 이런 증상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정자 생산 능력 저하, 성기능 약화, 심근경색, 심장마비, 급사, 전립선 비대증, 전립선암, 당뇨병, 고지혈증, 목소리 변화, (여성의) 남성화 등.” 이런 것을 알면서도 약물을 끊을 수 없는 이유는 몸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남들이 자신을 대단하게 봐주는 시선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헬스 전문 유튜버인 ‘박승현’ 씨는 고등학교 때 키 163cm에 몸무게 54kg의 왜소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05kg의 지나치게 근육이 비대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운동할 때는 사람들이 봐 주니까 한 달에 백만 원이 넘는 약물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복용하며 몸을 키운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약물을 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하니, 그는 차라리 약물을 끊게 하려면 죽음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는 이 몸을 통해서 많은 걸 얻고 있고 이것들을 버리고 싶지 않아요. 작은 몸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관심이나 사랑을 많이 받아보질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로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운동을 하다 보니까 몸이 조금 좋아졌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관심을 주고 나한테 말을 걸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거기에 미쳐버린 겁니다. 나는 한 번도 살면서 받아보지 못했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거죠. 나를 특이하게 보고 나를 대단하게 봐주니까 저는 여기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어요. 약물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요.”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굶어 죽을까 봐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다 사랑받지 못한 열등감 극복용으로 모으는 것입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주식을 50억쯤 하는 솔로인 중년이 되신 자매님이 코로나로 며칠 사이 10억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정말 죽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10억이면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이뤄놓은 것이 많지 않은데, 주식으로 성공했다는 자존심이 무너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가난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핵심은 ‘자존감’입니다. 열등감이 큰 만큼 집착이 큰 부자이고, 자존감이 큰 만큼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런데 자존감은 ‘양식’으로 길러집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담긴 양식을 잘 먹은 이들은 자존감이 큽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늘에서 오는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같은 부모의 같은 양식을 먹는다면 그 사람은 지위가 상승합니다. 자존감이 폭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게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2014년에 복자 품에 오른 분 중에 백정 출신도 있습니다. 순교자 황일광 시몬입니다. 1792년 황일광은 우연히 홍주 땅으로 이주하여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우게 됩니다. 교우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고 하느님 안의 한 형제로 대합니다. 이 때문에 그는 농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경기도 광주 분원에 있는 정약종 회장의 집 이웃으로 이주해 살면서 황사영과 김한빈 등 여러 교우와 친밀하게 지냅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황일광은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은 천한 신분을 가진 자가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배교의 대가로 주겠다고 하는 목숨도 거부하는 데 화가 나서, 더 무서운 고문을 가했습니다. 황일광은 모든 것을 굳건하게 참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기쁨으로 외쳤습니다.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겠으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결과 그는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매질을 당합니다. 사형선고를 받고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가족들이 자기 곁으로 오지 않게 합니다. 홍주에 도착한 1802년 12월 27일, 참수터로 끌려나가 즉시 처형되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그 당시 백정이면 열등감도 있을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재물은 물론이요, 애정이나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미사 때 양반이나 상놈이나 할 것 없이 같은 식탁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부모의 자녀는 우열이 없습니다. 같은 식탁에서 같은 사랑이 담긴 음식을 먹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가난해져서 집착에서 벗어나 나눔을 실천할 수 있으려면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들만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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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23-30 :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절)고 하신다. 여기에서 낙타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다. 낙타는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 바늘구멍이 낙타의 거대한 몸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져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정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신 말씀이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신 것이다. 낙타와 바늘귀의 예가 그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한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즉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고 하신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6절)
“보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27절) 베드로가 그렇게 물은 것은 우리 모두가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물었던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이 어떤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완전히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큰 사랑으로 완전히 버린 분들이다.
“너희도 열 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28절)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부족하고 죄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결하리라는 뜻이다. 그분을 따르는 것은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배”는 하늘 나라에서 누릴 상급을 의미한다. 현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다. 즉 주님을 위해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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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건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둡니다. 건강을 위해서 무엇이든 먹고, 무엇이든 합니다. 혐오 식품을 먹기도 합니다. 돈이나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둘 때, 그 사람은 돈을 벌고자 무엇이든지 하고, 그 돈을 쓰는 데에서도 무엇이든지 합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다치게 하는 짓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건강이나 돈, 권력 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라나서는 제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최고 가치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최고 가치인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 것을 보아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백 배의 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둘 때 건강과 돈, 권력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돈을 보면, 돈을 얻기 위해서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방법을 이용하게 됩니다. 돈을 쓸 때에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방법 안에서 사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최고 가치인 하느님이라는 기준이 명확해지면 세상의 가치를 하느님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건강이나 권력 그 자체를 좇지 않고 ‘그것들이 나를 하느님께 인도하는가, 아니면 멀어지게 하는가?’를 올바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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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3-26)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말씀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들어가기가 어렵다.’가 아니라, ‘들어가지 못한다.’입니다.) 이 말씀을 해석할 때, ‘낙타’와 ‘바늘구멍’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풀이하면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낙타는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그처럼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부자’는 세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포기할 정도로,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큰 사람.(마태 19,22)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2)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처럼 굶주리고 있는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고 즐기는 사람.(루카 16,19-21)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죄이고, 그래서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3)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마태 6,24) 하느님 나라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만 사랑하고 섬긴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마태 22,37) 따라서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긴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기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느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이 아닌 무엇인가를 함께 섬기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하느님만’ 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제자들의 말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부자라는 이유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아무도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겠다.”라는 뜻입니다. 현세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구약시대 때부터 내려온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었고, 그때까지는 제자들도 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말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 희망이라는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고, 제자들 자신들도 마음속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현세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반대로 생각하면,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벌을 받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은 그런 사고방식의 정반대쪽에 있는 가르침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정신적인 청빈’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능동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이라는 말씀은, “구원은,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만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던 부자 청년의 경우,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 그래서 재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제대로 실천한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 지상에서 사는 동안 진심으로 회개하고 사랑을 실천했다면, 라자로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야 후회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 부자의 경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진심으로 회개했다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회개’는 ‘말’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삶의 변화’입니다. ‘삶’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회개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또 라자로에게 먹을 것을 조금 더 준다고 해도 그것을 회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부’를 모두 포기하는 정도의 변화가 있어야 진심으로 회개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즉 재물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3)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긴 사람의 경우에도 제대로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경우도 역시 ‘부’를 포기하는 실천이 있어야만 회개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는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모은 재물을 지키고 보존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는 집착과 욕심과 이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집착, 욕심, 이기심은 죄입니다.)
4) 강론을 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부자라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부자들 중에는 착한 부자도 있다, 또 부자는 가진 것이 많으니 더 많은 선행을 할 수 있고, 그래서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같은 말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은 자기가 가난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일 뿐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변조하는 말장난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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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도 감염병이 있었습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가 있었습니다. 전염성이 강했고, 사망률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로 감염병이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서 몇 개월이면 일상의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감염병이 있었지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행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예전의 감염병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건과 위생 상태가 좋은 선진국들도 여지없이 코로나19에 노출되었고,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어 접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코로나19는 변종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여전히 높은 감염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백신과 치료제를 통해서 감염병을 막아왔지만 이제는 감염병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건강에 좋은 식단을 만들어 먹으면 굳이 살을 빼지 않아도 됩니다. 돈 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살이 찌는 음식을 먹으면 늘 살을 빼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돈을 쉽게 써 버리는 사람은 돈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은 주기적으로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도시에 밀집해서 사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도시에는 삶의 질을 높이는 시설들이 있습니다. 직업을 찾을 기회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모였습니다. 지방은 점점 사람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도 늘어납니다. 도시와 지방이 균형 발전을 이루면 자연스럽게 거리두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없다면 감기처럼 코로나19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다행히 백신이 개발되었고, 치료제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라면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쉬운 문제, 중간 문제, 어려운 문제를 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많은 경우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믿으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믿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으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어쩌면 마음의 문제입니다.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차원 더 높은 문제를 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과는 다른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제 믿음을 넘어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문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 우리 안에 있는 ’위선, 가식, 욕망, 탐욕, 분노, 원망, 미움, 질투, 시기‘를 모두 던져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희생, 사랑, 나눔, 겸손’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내 주시는 어려운 문제를 삶으로 실천하는 신자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시는 분, 신앙이 삶의 중심이신 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가하면 쉬운 문제에 머무는 성직자들도 더러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겹게 느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질책하셨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모습이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정 안에서 신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성직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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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당신을 따르지 못하고 물러간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 19,24)
여기에서, “부자”란 단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 재물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란 단지 물질적인 재화 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가정, 재능과 지식, 이념과 신념 등 자신이 애착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재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마저도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에 대한 집착이라면, 버려야 하는 재물이요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곧 재물 때문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한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와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난과 빈곤은 하느님의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 19,2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이는 구원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자력으로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가진 재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죄인이든 자신(우상)에 대한 애착을 끊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마태 19,30)
그러니, 오늘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볼 일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것에 애착하고 있는가? 혹 나 자신의 몸이나 소유물이나 재능, 지식이나 신념이나 이상, 자기 방식의 사랑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공동체 상이나 하느님 상에 애착하고 있지는 아닌지요? 오늘 우리는 내가 바라는 가정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가정과 공동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바라고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하느님이 되셔야 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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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주님!
재물이 없어도
고집과 완고함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도
자신의 뜻으로 가득 차 있는 부자입니다.제 주장과 의견을 앞세워 물러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가늘게 부수고 부수어 당신 바늘귀에 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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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19,26)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하는 제자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낙타가 아주 작은 바늘 귀를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단순한 믿음'에서 나온다는 '묵시적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 하느님보다 재물을 첫째 자리에 놓고 살아가는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지 않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
이는 우리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으면, 우리 안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가능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잘 안 되는 것,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바로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어제와 다르게, 아니 조금 전과 다르게 '내가 변하는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변하는 회개, 그것도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하는 회개는 정말 불가능해 보입니다.내 힘,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고,하느님의 힘으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19,30)
그러니 늘 깨어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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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과 세상>
마태오 19,23-30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사람과 세상>
참된 사람은
참된 세상에서
참됨을 누리지요
착한 사람은
착한 세상에서
착함을 누리지요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누리지요
의로운 사람은
의로운 세상에서
의로움을 누리지요
함께하는 사람은
함께하는 세상에서
함께함을 누리지요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움을 누리지요
하느님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누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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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30년경,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금광에 금을 캐려는 사람이 몰려들면서 사람들이 사는 천막집이 계속 늘어갔습니다. 덕분에 이곳에서 천막의 천을 생산하던 ‘스트라우스’는 돈을 많이 벌 수가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서 군대에서 사용할 천막 10만 개를 제작해 달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빚까지 내면서 3개월 동안 여기에만 매달려 천막 10만 개를 제작했습니다. 그런데 납품 계약이 갑작스럽게 무효화된 것입니다.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자살 외에는 방법이 없다면서 매일 같이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날도 술을 마시던 중에 “엊그제 산 바지인데 벌써 이렇게 해졌어. 좀 튼튼한 바지가 없나?”라고 말하는 한 광부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재고로 쌓여 있는 천막의 천이 생각났고 이 천으로 바지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바지가 바로 지금의 청바지로, 스트라우스는 청바지 브랜드 ‘리바이스’의 창업자가 되었습니다.
납품 계약이 무효화 되었을 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상황이 오히려 그를 성공의 길로 들어서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악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 올바르게 사는 그래서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사는 그런 부자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시다니요.
그래서 제자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합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요? 그런 생각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기에, 자신의 삶을 바꾼다면 당연히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여유 안에서만 행하고 있는 자선은 의미 없습니다. 부자가 되어서 여유가 생겨야 선행을 하겠다는 다짐 역시 의미 없습니다.
지금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며 사는 모습은 커다란 잘못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도저히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할 상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더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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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이면 어때?>
미완성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미완성이기에 오히려 큰 가치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프란치 페터 슈베르트를 아실 것입니다. 가곡의 왕이라고 불리면서, 마왕, 송어 등을 작곡했지요. 그런 그가 미완성의 작품을 남겼는데, ‘교황곡 제8번 b단조’의 미완성 교향곡입니다.
보통 교향곡이 4악장으로 되어 있기에, 3악장 중간에 끝나는 이 곡을 미완성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사실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가 25세였고, 그로부터 6년 뒤에 생을 마감했지요. 즉, 6년이나 이 곡을 완성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사이에 다른 걸작품을 많이 완성하면서도 이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완전한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도 계속 미완성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미완성 그 자체도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니, ‘미완성이면 어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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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자는 죄인인가?>
요즘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을 새삼스레 떠올립니다. 재벌들은 죄를 지어도 감옥에 가지 않을뿐더러 가더라도 쉽게 풀려나기 때문입니다.
돈이 사람을 부립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는 말씀을 들은 한 부자가 “하느님,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의 재산 반을 당신께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재산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재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을 거두어주시길 성령께 기도드립니다.
각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포기하되 무엇을 버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버렸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유익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렸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상을 백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는 이유로 버린다면, 결코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상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 때문에”(루카 18,29. 마태 19,29) 바쳤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한가지 때문에 전체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가지 때문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를 얻을 수 있는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사실 부자가 가진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이 가려 보아야 할 참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유혹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만을 생각하면 부정을 해서라도 일등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정신, 의미, 알맹이, 즉 내용을 보면 그 생각을 한순간 이미 경기에서 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부자는 죄인인가요? 사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잘 써야 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쪼록 많이 벌되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들을 하나하나 만들기 바랍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버리고 또 버려도 버릴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우쭐대다가는 쓰러지지만 착하게 살면 나뭇잎처럼 피어난다.”(잠언 11,28)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지 않으면 결국은 하느님 나라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장례식장에 이삿짐 차가 좇아가는 일은 없답니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누리려 한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됩니다. 부디 모든 것을 얻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의 물질에 매여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입니다.
성령님,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의 모두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삶의 변화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성령이시여,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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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여정>
-만남이 구원이다!-
“주여, 이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며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 얼굴을 찾으리이다.”(다니3,41)
오늘은 고故 정훈만 세례자 요한 수사의 8주기 기일입니다. “주님, 정요한 수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요즘 아침 저녁 서늘한 가을 자연 품 안에서의 삶이 흡사 어머니 하느님 품 안에서의 삶처럼 참 넉넉하고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소공동체라지만 요즘은 12명 수도형제들 모두가 함께 하는 수도가정공동체입니다. 1-2인 가구가 대세인 요즘 12식구食口가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 대가족일 것입니다. 어제는 종일 떠나 각자 일터에서 일하며 지내다가 저녁 식사 때 함께 만났을 때의 순간적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만남이 구원이다!”
예전 안식년 얼마동안 광야曠野와 같은 미국 뉴튼 수도원에서 한국 수도형제들과 함께 지낼 때도 은연중 기다려지는 공동식사 시간과 공동전례기도 시간이었습니다. 얼굴들을 보면서 서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반가운 시간이었습니다. 형제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동시에 주님을 만나는 공동 기도시간과 공동 식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오늘날의 문제는 살아 있는 만남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 이웃간의 만남, 자연과의 만남, 나와의 만남입니다. 이런 살아 있는 만남을 통해 꼴잡혀 가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이런 사랑의 만남의 결여로 인한 심신의 병들입니다. 참된 만남을 통한 치유와 위로, 구원의 체험입니다. 그리하여 삶은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누구나 주님과 만남의 신비가神祕家로, 관상가觀想家로 불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은총, 만남의 행복, 만남의 기쁨, 만남의 치유와 구원등 만남의 축복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매일 평생 끊임없이 거행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살아 있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 비로소 영적 해갈에 살아나는 영혼과 육신이요 자연스럽게 나오는 주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수없이 반복하여 인용했지만 인용할 때 마다 새롭고 힘이 납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열쇠말 키워드도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판관기가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 역시 순전히 은총입니다. 주님께 주도권이 있습니다.
최초의 판관, 기드온과 주님의 만남이 실감나게 전개됩니다. 미디안족의 눈을 피해 밀을 감추어 두려고 포도수확에서 밀 이삭을 떨고 있는 기드온에게 나타난 주님의 천사입니다. 주님은 친히 당신의 천사를 통해 기드온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주님과 기드온이 주고 받는 대화가 감동적입니다. 위축되고 왜소해져 계속 주저하는 기드온을 격려하는 주님의 말씀만 소개합니다. 그대로 오늘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선별하여 받아들여도 은혜롭겠습니다. 예나 이제나 곤궁한 처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너의 그 힘을 지니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마침내 주님과 만남은 기드온이 바친 예물을 주님이 받아드림에서 절정에 도달하였고 마침내 기드온의 고백과 주님의 응답입니다.
“아, 주 하느님, 제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천사를 뵈었군요!”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죽지 않는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주님은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기드온의 이런 충격적 주님과 만남의 추억은 평생 활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찌 이런 하느님 체험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쩌다가 아닌 매일 주님을 만나야하고, 날마다 기드온처럼 ‘주님은 평화’라는 자기만의 제단을 쌓도록 합시다.
저에게 새벽마다 오두막 은수처隱修處같은 성전옆 집무실에서 강론을 쓰는 시간은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자 ‘주님은 평화’라는 제단을 쌓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도 우리에겐 참 깊은 묵상감이요 현실감 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부자의 구원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씀인데 사실 부자치고 겸손하고 마음 가난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재물의 주인이 되어 살기보다는 재물에 소유되어 사는 ‘재물의 종’이 되어 살기 십중팔구일 것입니다. 하여 제가 자주 예로 드는 다음 말마디입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를 위해 우선적 순위는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이고,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줄 최고의 선물은 하느님 믿음이다”
맘몬인 돈이, 재물이 원흉입니다. 돈이나 재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탐욕이 문제입니다.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주님의 말씀에 놀란 제자들의 응답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을 무조건 구원일까요? 꼭 그렇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탐진치貪瞋癡의 무지無知로 가득한 마음들이라면 구원 역시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과 은총의 만남이 바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꿉니다. 참으로 부자도 주님을 만나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울 때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총으로 영원한 참 보물인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재물에 대한 욕심은 사라져 초연한 마음의 눈으로 세상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세상 것들은 저절로 시시해질 것이고 주님 맛이 깊어질수록 세상 맛들도 저절로 잃어갈 것입니다. 이에 대한 수련, 라틴어 문장 넷을 소개합니다. 1.이 순간에 충실하는 것입니다(Carpe diem). 2.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Mento mori), 3.운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Amor fati). 4.‘이 또한 지나가리라(Hoc quoque transibit)’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을 기억할 때, 주님과 늘 함께 살아갈 때 윗 네 수련은 저절로 이뤄질 것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인 주님과의 만남이 구원입니다. 만남을 통한 치유와 위로의 구원입니다. 만남을 통한 비움, 버림, 나눔의 구원입니다. 만남의 선물이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만날 때 참 행복, 참 부자, 참 자유인입니다.
“보시다 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참으로 주님을 만났기에 모든 것을 미련없이 버릴 수 있었던 베드로와 사도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모든 집착에서의 초연한 이탈의 자유입니다. 베드로의 물음이 웬지 아쉽습니다. 주님 자체가 최고의 보상이자 행복인데 새삼 무엇을 바라겠는지요! 참으로 주님을 만나 미련없이 버리고 비우고 나눌수록 텅 빈 충만의 행복입니다.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이 이를 은혜로이 요약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2코린8.9)
한결같이 일편단심 하느님을 사랑하여 찾으면 저절로 부수적인 것들은 따라 오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중 당신을 만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6,33-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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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의 조건을 이야기하십니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마태 19,23)
부자 청년이 슬퍼하며 떠나간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제의 묵상과 연관지어 본다면 '하느님이 아니라 재산에 의지해 구원을 얻으려는 이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풀이가 되겠지요.
이러 저러한 경로로 재산을 넉넉히 얻어 누리는 사람이라면 단지 소유한 것의 수량으로 자신의 구원이 가늠된다는 말씀이 퍽 불편할 겁니다. 하지만 물리적 수량보다는 본인이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지를 성찰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자신이 지닌 재산을 믿고 살아가는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지 말입니다.
재산이나 권력, 지식이나 능력 등 많은 것을 지니고 살면서 하느님 앞에 겸허히 자신을 내맡기고, 가난한 이들에게도 허심탄회하게 다가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런 이의 구원은 하느님도 반기실 겁니다. 역사 안에서 그런 부자가 아예 없지도 않을 테구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러기는 그리 쉽지 않아 보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마태 6,21)는데, 부자를 부자이게 만드는 것들의 속성이 우월의식, 교만, 이기주의, 탐욕, 허세와 너무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본성을 이기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만큼의 성덕을 쌓기란 더 어려울 것이니, 그런 부자가 있다면 우리도 존경하고 하늘 나라도 환영하는 것이겠지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지 보여 주십니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판관 6,15)
하느님께서 미디안족에게 핍박을 받는 이스라엘을 기드온이라는 사람을 통해 구원하시려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기드온은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주님께 솔직히 고백하지요.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구원을 능력자나 재력가, 탁월한 장수의 손에 맡기지 않으시고 이처럼 작고 미약한 존재를 통해 이루십니다. 훗날 등장할 다윗 역시 양을 치던 어린 목동에 불과했으니까요. 제 잘난 맛으로 능력과 재력을 휘두르는 이는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마련이지만, 자기 처지를 잘 아는 가난한 이는 자신을 움직이신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1코린 7,30)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은 소유에서 온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우리 모두가 구원으로 다가갈 수 있는 힌트를 줍니다.
벗님은 가진 것이 많습니까? 그렇다면 그에 따른 만족과 우월감과 허영심을 내려놓고 감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미 소유한 자본과, 타인의 시간과 능력, 세상의 시스템을 이용해 더 큰 부를 쌓아가는 중입니까? 그렇다면 그 수혜가 자신에게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협력하면 됩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마태 19,26)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하셨네."(복음 환호송)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진 부유함과 가난함의 신비로운 교환이 이 세상의 공동선을 위한 모범입니다. 이 세상 모든 형제가 함께 복을 나누어 누리며 살아가도록 주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것이지요. 이를 통해 부자도 구원을 받고 가난한 이도 생명을 누린다면, 누구도 손해볼 일 없이 모두가 행복할 겁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의 바람이니까요.
지금 우리가 부유하건 가난하건 모든 길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구원의 여정 안에서 허락하신 삶의 여건과 처지를 겸손히 받아 안고 주님께 의탁하며 꿋꿋이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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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y2-DgoO9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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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 24)
정신을
차리게 하는
바늘구멍이다.
가장
좁은 것이
가장
넓은 것이
된다.
좁은 바늘
구멍 속에서
시작되는
우리 삶의
간절함이다.
간절함에서
찾게 되는
우리 삶의
해답이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작아지는
길이셨다.
낙타도
작아지는
바늘구멍을
찾는다.
바늘구멍이
만들어가는
십자가의
삶이다.
작아지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다.
고통스럽지
않는 변화란
있을 수 없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작아지는
길이다.
바늘이
있는 곳에
낙타도 있고
부자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고
예수님도 계신다.
바늘같은
복음을
만나는
시간이다.
작아지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
만나게 되는
하늘 나라이다.
낙타와
바늘구멍
사이에
하늘 나라가
있으니
낮아지고
작아지시는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신앙이다.
우리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묶여있는 것을
풀어주는
바늘구멍이며
십자가의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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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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