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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
10대 제자중 한분인 부루나 존자가 부처님의 42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중국의 돈황석굴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답니다.
한복을 입은 모습과 두상의 형태가 인도인이 아니어서 면밀히 연구한 결과
우리민족, 한민족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지금도 인도 북부에 석가족이 사는데 성은 '김씨'라고 하며
우리의 문화와 흡사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원본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
출가의 이유가 된 생노병사
석가모니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 도솔천에서 호명보살로 계시었다. 이때 이미 십지보살(부처의 전단계)이셨다.
선정에 들어 부처의 인연이 있는 부모와 모든 환경을 비추어 보시고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게 된다.
부처가 되는 조건이 있는데 인간이어야 하고 수명이 100년 이내의 세상이라고 한다.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는 모든 생명 중에 인간 생명이 가장 완벽한 생명 즉,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이나 보살들은 영 또는 영혼의 크기를 조절하는 낙타방이라는 곳에서 인간의 영혼으로 그 크기를 줄인 후
인간의 몸을 받아야 한다. 이들의 영혼은 크기가 하나의 우주만 하기 때문에 육체와 맞게 조절이 필요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계셨지만 오직 생노병사(生老病死)만은 풀리지 않으셨다.
'왜 생명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가...'
많은 스승이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답을 얻을 수 없어 홀로 보리수 아래에서 정진을 시작한다.
하루에 콩 두알, 깨 몇알을 드시면서 6년 동안 고행하는 모습
뱃가죽을 만지면 등뼈가 만져질 정도로 긴 시간 사력을 다하였으나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이치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석가모니는 쓰러지고 만다. 그때 옆을 지나던 수자타라는 처녀가 그 모습을 보고 유미죽을 공양한다.
수자타의 유미죽(우유죽)공양
죽을 드시고 기운이 난 후 앞의 니란자나 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그 편안함을 음미하자 흐르는 강물이 가슴에서 느껴지고 이내 물과 교감을 하게 된다.
신기한 일이었다. 물생명이 가진 태초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정보들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머리의 의식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사유하였으나 얻지 못한 이치들이 가슴으로는 저절로 밀려들었다.
물은 물질 생명의 근원이다.
물은 그 모든 생명들의 나고 죽음, 변화의 정보들을 다 간직하고 있었다.
물은 어떤 에너지적 파동이든지 그것을 내면에 기록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수행법 중 수상관(水想觀)은 물을 중심에 담아 비춰보는 수행법으로 여기서 비롯된다.
석가모니는 편안함의 바탕위에 물로부터 얻어진 정보를 통해 생노병사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구차제정, 선정법들을 다 익히고서도 얻지 못했던 이치가 편안함의 바탕에서 풀리자
다시금 선정에 들어 생명의 이치를 관(觀)하게 된다.
가슴의 편안함에 '왜 태어나는가?'를 물음으로해서 12연기가 비롯되었다.
육체를 벗어나 영혼으로, 영으로 최초의 한생명으로... 다시 음기와 양기 밝은 성품이라는 에너지,
세가지 에너지가 일으키는 변화, 에너지의 근원.. 적정...!
49일 간의 사유를 통해 마침내 12연기를 정립하시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
12연기..
생명은 어디서 비롯되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한 부처님의 사유체계이다.
생명의 생노병사와 우주의 성주괴공이라는 방대하고도 신비로운 비밀... .
현재 우리가 사는 우주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세계이다.
12연기는 부처의 한생각이 에너지의 변화에 현혹되어 일으키는 무명우주의 시발을 설명한다.
무명(無明) ㅡ 행(行) ㅡ 식(識) ㅡ 명색名(色) ㅡ 육입(六入)
ㅡ 촉(觸) ㅡ 수(受) ㅡ 애(愛) ㅡ 취(取) ㅡ유(有) ㅡ 생(生) ㅡ사(死)
무명(無明) ㅡ 최초 생명의 시발을 말한다.
행(行) ㅡ 최초 생명이 존재성을 갖기 이전에 일어난 에너지적 변화를 설명한 부분이다.
식(識) ㅡ 명색名(色) 은 최초로 존재화된 생명 즉 천지만물로 세분화되기 이전의 생명에게서
일어난 변화를 설명한 부분이다.
육입(六入) ㅡ 영(靈)의 상태어서 일어나는 생명 활동에 대한 설명 부분이다.
촉(觸) ㅡ 수(受) ㅡ 애(愛) ㅡ 취(取) 는 영혼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유(有) ㅡ 생(生) ㅡ사(死) 는 육체를 갖고 있는 생명에게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비교하여 설명하면
1. 말씀의 하나님(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 무명으로 시발된 생명이 존재성을 갖기 이전 빛과 소리로만 존재하던 때.
2. 영의 하나님(하나님은 영이시라) - 식을 갖춘 생명(6식:안(보고) 이(듣고) 비(냄새맡고) 설(말하고) 신(느끼며) 의(생각함)으로 식과 명색, 육입의 상태.
3. 아담 창조의 하나님(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 - 촉수애취를 거쳐 유상화된 상태. 영은 의식으로 존재하는 생명으로 특정한 형상이 없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 함은 이미 육체를 가진 상태의 인간이었음을 말한다.
불교의 우주관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
부처님은 수행을 함에 있어 제일 첫번째로 해야 할은 중도(中道)라 설하셨다.
중도란 중심의 도로 중심(中心)을 관(觀)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생노병사의 이치를 깨달을 때 가슴에서 일어난 변화에 무게를 두신 말씀이다.
부처님이 배운 구차제정(九次第定. 선정법)과 가슴에 편안함이 생긴 이후 구차제정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중심(中心)은 '가슴바탕에 세워진 마음자리'로 명치 위 1cm, 속으로 5cm 되는 자리를 말한다.
중심(中心)이란
스스로가 갖고 있는 모든 업식이 드러나고
천지만물이 갖고 있는 생명의 정보가 서로 교감하는 자리이며
근본을 여의지 않으면서 경계와 동떨어지지 않은 자리이다.
대승선의 핵심이 바로 중관(中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中道)에 입각해서 세워진 관법이 중관법인데, 이는 선정법(禪定法)에 속하는 수행법이다.
대승의 수행체계는 중관을 통해 본성을 보는 공관법과, 중관을 통해 경계를 보는 가관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일러 삼관법이라 하는데, 그 개략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관법(선나, 선정) 중심을 세워서 그 상태를 관하는 법이다.
공관법(삼마지, 삼매) 중심을 통해 근본을 비추는 법이다.
가관법(삼마발제, 가치창출) 중심을 통해 경계를 비추는 법이다.
반야경의 조견, 오온, 개공도
조견은 중관, 오온은 가관, 개공은 공관을 말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중관법은 달마를 거쳐 5조 홍인에 이르러 전해지지 못하고 만다.
6조 혜능은 홍인을 만나기 전 이미 깨달은 상태였고 하룻밤 새에 법이 전해지다 보니 중관법을 전할 시간이 없었다.
그로인해 불법은 반쪽만 후세에 이르르게 되고 쇠퇴를 거듭하다 대승의 수행체계는 사라지게 된다.
이 후, 불음스님이 청정도론을 통해 소승의 수행체계를 정립하는데 16단계의 과정을 거쳐 아라한에 이르는 법이다.
우리나라도 원효까지 이어지다 고려에 이르러 미륵신앙으로 대체되면서 대승의 삼관법이 사라지고 말았다.
흔히, 중도를 극과 극이 아닌 '중간'의 의미로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중관의 법에는 자기제도법이 포함되어 있다.
자신의 습성과 업식을 제도하면서 중심을 진보시켜 닦아가는 점수의 수행법으로
육체를 이루는 구조물인 오장육부, 뼈, 신경 등을 순화해서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무심을 얻는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불법은 중관의 수행법과 삼관의 교육체계가 사라진 것으로써 특히 자기제도가 미흡하다.
그로인해 초심자가 처음 수행을 시작하면 몸(세포들의 습성)을 제도하지 못해 겪는 마장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각각의 근기와 몸의 건강상태에 맞춰 자기 몸을 다스리며 나가는 것이 따라가는 입장에서 수월하다.
우리 몸은 100조에 이르는 세포로 구성된 중생의 집합체이다.
그 세포속에 습성과 업식이 내재되어 있어 세포를 제도하지 않고서는
감정의 들끓음, 의식의 부정성과 의지의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부처가 되기 위해 인간의 몸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제도를 통해 신경을 제어하면 가장 빠른 시기에 무상을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매법인 공관법은 혜능과 같은 상근기가 아니고서는 닦기 힘든 수행법인데
초심자가 어찌 단박에 유상에서 무상으로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수 있겠는가... .
오늘 날, 많은 수행자들이 몸을 등한시 하여 도를 얻기 전에 건강을 잃어 고생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염화미소
부처님의 열반
어느 날-하늘이 어두워짐을 느낀 아니루다는 당황하여 허둥대고 있었다.
(아니루다:부처님의 설법을 초기부터 15년동안 듣고 기억한, 부처님의 시봉.
아난은 그 뒤를 이어받은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다.
아니루다는 부처님이 사람마다 다르게 대답을 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부처님의 회상을 떠난다.
대기설법의 의미를 몰랐기에...)
왠지 마음이 가라앉지가 않고 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루다는 지나가는 승려에게 물었다.
“사문이시여! 부처님이 요즘 어디에 계신지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그 승려는 대답했다. “요즘 구시나가라에 계신다고 들었소만..”
아니루다는 구시나가라 쪽을 향해 몸을 돌리었다. 성치 못한 몸에서는 뼈 맞추는 소리가 우둑-하고 났다.
구시나가라의 하늘...
그곳에서는 천지사방으로 오색광명이 뻗어오고 있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것이 아닌가..!?’
아니루다는 마음이 심히 불안해지고 있었다.
그는 남아있는 힘을 모두 끌어 모아 정좌하여 앉았다.
그리고 부처님의 상호를 지극한 마음으로 갈망하기 시작했다.
‘많이 늙으셨구나...’
아니루다는 자기 얼굴에 그어져 있는 주름살은 염두에도 두지 않은 채 자기 가슴에 떠오르는
부처님의 얼굴에 비친 세월만 보며 탄식을 하고 있었다..
춘다의 공양
몇 가지 장면들이 스르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부처님이 누군가가 바치는 버섯 죽을 드시는 장면... 식중독 증상을 일으켜 몸져누우시는 장면 등이 보였다.
‘아니... 부처님께서... 저것을 드시면 안 되는데...!’
아니루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상념으로 느낄 수 있는 그 음식의 독성을 부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는데...’
아니루다는 두 손을 그러쥐며 그 장면을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부처님은 몸져누운 채로 미소 짓고 계시었다.
아난으로 보이는 이가 버섯요리를 제공한 사람을 향해 뭐라고 소리 지르며 질책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부처님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아니루다가 꿈에도 그리던 목소리가...
“아난아. 춘다를 꾸짖지 말아라. 내가 수자타의 죽을 먹고 힘을 내어 성도를 이루었듯이
나는 춘다의 마지막 공양을 받고 열반에 든다. 아름답지 않느냐? 그것으로 나의 삶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춘다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나의 마지막에 설계된 존재인 것이다.”
아니루다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부처님이 떠나려 하신다! 부처님이...!’
가슴에 격정이 차오르자 부처님의 영상이 사라져버렸다.
다시 마음을 추슬러서 부처님의 모습을 가슴에 세웠다.
부처님이 자세를 바로 하고 선정에 들어 계신 모습이 보였다.
일선정...
이선정...
아니루다의 가슴중심에는 부처님의 선정상태가 역력하게 찍히고 있었다.
삼선정...
사선정...
부처님은 이대로 열반에 들려고 하시는 것이었다.
아니루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부처님의 열반을 막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실제로 부처님을 찾아 뵙고 그 자비로운 상호를 마주하고 싶었다.
한 번만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새겨듣고 싶었다.
그때... 아난이 머리를 땅에 부딪히며 오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부처님이시여! 이대로 가시지 마소서! 우리를 두고 떠나지 마소서!!”
그 통곡소리는 산과 들을 진동시키는 듯하였다.
온 산의 나무들-슬픔으로 떨고 있는 뒤엉킨 뿌리들과 바위와...수 천 수 만의 흔들리는 잎사귀들과 함께 아난은...
목메어 부르짖고 있었다. 아니루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는듯한 아난의 절규에 부처님은 선정에서 깨어나시었다.
그리고는 아난을 보며 조용히 나무라셨다.
“본디 남이 없는 몸이 본디 사라짐이 없는 자리로 돌아가려할 뿐이다. 너는 무엇을 집착하여 그리 우느냐?”
아난은 눈을 들어 부처님을 바라보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어린아이처럼 말하였다.
“이대로 가시면 어찌합니까? 저희는 무엇으로 등불을 삼아 살아갑니까?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머무르시어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부처님은 아난과 대중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시었다.
“법으로 등불을 삼을 것이며 자성을 밝힘으로써 등불을 삼아라. 내게 있는 것이 너희에게도 있느니라.”
그 한마디의 말씀은 아니루다의 가슴 속을 깊이 파고 들어왔다.
‘그렇다! 진리는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이미 그것을 나는 수 천 번도 넘게 듣고 배우지 않았던가?’
부처님은 그 위신력으로 아난과 사부대중과 이곳의 아니루다에게도 최후의 설법을 하신 것이다.
아니루다가 그 말씀에 젖어 슬픔어린 황홀에 파묻혀 있는 동안에 부처님은 다시 열반을 위한 선정에 들어갔다.
일선정...이선정...삼선정...
아니루다도 정좌하여 부처님의 선정과 자신을 동조하려 애를 썼다.
할 수만 있다면 부처님의 열반과 함께 자신의 전 존재도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남김 없는 무여열반의 자리로...!
사선정...
공무변처정...
식무변처정...
아니루다는 더 이상 부처님의 선정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은 너무 낡아버렸고 그의 각성은 너무나 어두워지고 만 이후였던 것이다.
무소유처청...
비상비비상처정...
부처님은 멀리 머얼리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의식 밖의 세계로...
부처님의 心火가 전 우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모든 존재에 스며들고 있는 부처님의 광명이 사뭇 장엄하였다.
상수멸정....
열반....
드디어 부처는 사라졌다.
그의 존재성을 법계에 흩어버린 것이다.
그때 대지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그리고 아난과 사부대중도 사무친 슬픔으로 진동하였고...
쓰러져가는 토굴 속에서 쓰러져가는 한 사람-아니루다의 어깨도 진동하고 있었다.
우주를 상실한 듯 한 거대한 상실감에 빠져 오열하고 있었다.
석가모니의 몸은 준비된 관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준비된 장작더미 위에 올려졌다.
누군가 불을 붙였다.
그러나 불은 붙지 않았다. 아무리 불을 붙이려 해도 불은 붙지 않았다.
사부대중은 혹시나 다시 부처님이 일어나시려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 장면을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들 있었다.
그 때 먼 길을 달려온 가섭이 도착하였다.
법을 받은 제자 마하 가섭.
가장 수행자다운 삶을 산다하여 두타제일이라는 이름을 얻었던 가섭이 멀고 먼 길을 와서
지금 막 부처의 시신 앞에 이른 것이다.
가섭이 말했다.
“생로병사 사고를 여윈 무상존께서 어찌 이런 모습으로 누워계시나이까?”
그때-
관 속에서 부처님의 두 발이 빠져나왔다.
대중의 찬탄이 이어지는 가운데 부처님의 관이 허공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모든 대중이 찬탄하였다.
“오! 정녕 무상존이십니다. 이미 생사를 여의었습니다. 오늘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생사가 없음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오고 감이 없는 열반에 드시었음을 이제사 믿겠나이다.”
그리고 두 발에 그려진 천 폭의 회전문양이 선명하게 보이며 빛을 발하였다.
그 빛은 허공을 태우기 시작하였다.
삼매진화(三昧眞火)!
부처님 스스로 삼매의 불로 자신의 색신을 불사르는 장엄한 장면이었다.
천신들과 용신들도 그 장엄한 장면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 작은 부처님의 몸은 오랜 시간을 타고 또 탄 끝에 엄청난 양의 사리가 되어 허공 꽃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니루다의 눈물처럼-한 없이...한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소설 관2. 도서출판 연화. 한치선 지음. - 중에서.
가슴에 새기는 부처님 말씀
사귐이 깊어지면 애정이 싹트고 사랑이 있으면 고통의 그림자가 따르나니
사랑으로부터 시작되는 많은 고통의 그림자를 깊이 관찰하고
저 광야를 가고 있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자기가 아는 대로 진실만을 말하며,
주고받는 말마다 악을 막아 듣는 이에게 편안과 기쁨을 주어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다.
그러므로 기쁨과 슬픔을 가다듬어서 선도 없고 악도 없어야 비로소 집착을 떠나게 된다.
지난날의 그림자만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면
꺾어진 갈대와 같이 말라서 초췌해지리라.
그러나 지난날의 일을 반성하고 현재를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몸도 마음도 건전해지리라.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기다리지도 말라.
오직 현재의 한 생각만을 굳게 지켜라.
그리하여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진실하고 굳세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 낯이 두꺼운 사람,
중상모략이나 일삼고 남을 헐뜯는 사람, 뻔뻔하고 비열한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삶은 너무나 쉽고 간편하다.
부끄러워할 줄 알고 그 영혼의 순결을 지켜 가려는 사람,
매사에 신중한 사람, 언제 어디서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는 사람,
이들에게 있어서 삶은 너무나 힘든 고행의 길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걱정이 생기고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생긴다.
그러므로 사랑과 즐거움을 두지 않으면 걱정도 두려움도 없다.
사랑은 미움의 뿌리.
사랑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로우니
근심과 걱정 속에 착한 마음 사라진다.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거든 국경을 튼튼히 지키듯 자기를 단속하여 악에 물들지 않게 하라.
무익한 천 마디의 말보다는 들어서 마음이 안정되는 한마디가 더 유익하다.
모든 중생은 갖가지 애정과 탐심과 음욕 때문에 생사에 윤회한다.
음욕은 애정을 일으키고 애정은 생사를 일으킨다.
음욕은 사랑에서 오고 생명은 음욕으로 생긴다.
음욕 때문에 마음에 맞거나 거스름이 생기고,
그 대상이 사랑하는 마음을 거스르면 미움과 질투를 일으켜 온갖 악업을 짓는다.
그러므로 중생이 생사의 괴로운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정의 갈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며, 자기와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인없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다만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이 있을 뿐이다.
철없는 아이가 수면에 비친 달을 건지려 하는 것을 보고 어른은 웃는다.
무지한 사람은 달을 건지려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영원한 실재라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은 언제나 늙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을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과거에는 게을렀어도 이제는 게으르지 않는 사람,
그는 마치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달처럼 세상을 비출 것이다.
일찍이 자신이 지은 악업을 선업으로 덮은 사람.
그는 마치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달처럼 세상을 비출 것이다.
새가 휴식을 취할 때는 반드시 편안한 숲을 선택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반드시 훌륭한 스승을 선택하여 배우라.
그러면 그의 학문이나 안목이 저절로 높아질 것이다.
좋은 친구는 부모처럼 여기고 나쁜 친구는 원수처럼 여기라.
소나무 숲에서 자라는 칡넝쿨은 저절로 천 길을 솟는다.
그러나 넝쿨 속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석 자도 자라지 못한다.
그러므로 스승과 친구를 가릴지어다.
건강은 최고의 재산이며, 만족은 최고의 보배이고,
신뢰는 최고의 벗이며, 열반은 최상의 즐거움이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고독함이 있나니.
태어날 때는 혼자서 오고, 죽을 때도 혼자서 가며,
괴로움도 혼자서 받고, 윤회의 길도 혼자서 가는 것이니라.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어떤 한 가지 견해나 입장에 근거하여
'다른 것은 모두 별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고 본다면
이는 진리의 길을 가는데 장애가 된다.
그러니 보고 듣고 배우고 사색한 것에 너무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지혜에 관해서도 도덕에 관해서도 편견을 가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나는 남과 동등하다. 나는 남보다 못하다. 나는 남보다 뛰어나다.'
이런 생각조차도 하지 말아야 한다.
하늘만 보고 걸으면 넘어지기 쉽고,
땅만 보고 걸으면 방향을 잃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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