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작가님께서 주신글]
비 내리는 영동교
가수 주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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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TV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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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1월 5일 광주광역시에서 산동성 출신, 중국인 주금부와 한국인 정옥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3세로, 중국 이름은 저우쉬안 메이. 4남매 중 장녀다.
아버지는 주현미가 4살 때 한국으로 이민 왔다. 주현미의 국적은 대만이었으나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주현미의 친할머니와 어머니가 한국인이어서 형제들은 어려서 부터 한국문화를 접하고 살았다.
아버지는 한의사였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한약재 사업을 해서, 자연스럽게 의학에 눈을 떴다.
약대를 졸업하고 남산 초입에서 ‘한울약국‘이란 상호로 약국을 운영했는데 처방이 주로 민간요법이라 수입이 별로 많지 않았다고 한다.
가수란 직업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여 데뷔 후에도 9개월간은 약국을 운영했다.
손님들이 증상과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영양제나 항생제를 달라고 하니,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별난 약사라고 핀잔을 들었고, 약사로써 원칙을 고수하는 탓에 손님이 없어 일찍 가게 문을 닫은 날이 많았다고 한다.
* 잠시 쉬어가는 시간 *
약을 팔지 않는 약사
우리 동네에는 이상한 약국이 있다. 몇 년 사이에 주인이 세 번 바뀌었는데. 이번에 새로 온 사람은 꽤 오래 하고 있다.
어쩐 일인지 먼저와는 달리 약국 안에는 동네 아줌마들이 종일 진을 치고 앉아있었다.
지나다 보니,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수더분한 약사가 아줌마들과 얘기하는 것이 보였다.
하루는 머리가 아파 일찍 퇴근했다. 그리고 동네 약국에 들려 약사에게 상태를 이야기하고 두통약을 달라고 했다.
약사가 말하길 약은 되도록 먹지 않는 게 좋다고 한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약을 팔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망하기 십상이다. 생각지 않은 처방에 나는 잠시 약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국을 나오는데. 한 줄기 소나기를 만난 듯 머리가 상쾌하고 두통도 사라졌다.
산책을 갈 때면 그 약국 앞을 지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유리창 너머에는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말을 나누는 약사가 보였다. 동네 사랑방이었다.
사람들은 약만 구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신변의 일들을 털어놓으려고 약국에 모인다. 그렇다고 전문 상담역은 아니다. 약사는 단지 이웃의 일을 내 일처럼 정성껏 들어준다.
약사는 약으로만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병을 치유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약국은 날로 번창하는 것 같다. 그날 후로 나는 약사와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해서 약사 연예인으로 불렀다. 그래서 트로트가수로 데뷔했을 때에도 별명이 '약사가수'였다. 당시에 약대는 지금만큼 인기가 높지 않았다.
가난 때문에 아버지가 돈을 벌려고 중동에 나가자, 주현미는 동생을 키우다시피 했다. 그런데 의대를 다니던 동생이 갑자기 하늘나라에 갔다. 결핵이었다.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고 하며, 동생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있다.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동생이 먼저 생각난다고 했다.
주현미의 남편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 임동신이다.
해외공연도 같이 가고 밤업소에서도 같이 공연했다. 그래서 뮤지션이었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져서 28살 때인 1988년 결혼을 했다.
주현미는 가수와 명성을 포기해도 좋을 만큼 남편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요대상을 수상할 때 '여보'라고 울먹이며 남편을 부르기도 했다. 우리 기억에도 생생하다.
주현미는 결혼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남편과 함께 있는 모습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유는 남편의 방송 울렁증 때문이다.
그 바람에 에이즈에 걸려 두문불출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육아에 전렴하려고 당분간 활동을 접었다. 그리고 청계산 밑에 전원주택 짖고 살았다.
주현미 네 가족이 모두 음악의 길을 걷고 있다. 버클리 음대를 나와 가수로 활동 중인 아들 임준혁과 네바다 주립대학교 호텔 비즈니스 학과를 졸업하고 싱어 송 라이터로 활동 중인 딸 임수연이다.
음악인생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친구인 작곡가 정종택 씨에게서 레슨을 받아 ‘고향의 품‘이라는 노래를 처음으로 취입했다.
1981년, 중앙대학교에 다닐 무렵, MBC 강변가요제에 중대 약대 음악그룹 보컬멤버로 출전하여 입상하였다.
약사로 활동하던 당시 작곡가 정종택의 권유로 김준규 씨를 만나 메들리 곡 ‘쌍쌍파티’를 취입했는데. 공전의 히트를 쳤다.
1985년 1집 앨범 비 내리는 영동교로 데뷔하여 단번에 트로트 탑에 올랐다. 그 후에도 연이은 히트로 정상가수가 되었다.
1988년에는 '신사동 그 사람'의 히트에 힘입어 MBC, KBS 연말 가요대상을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9년에는 '짝사랑'으로 MBC 연말 가요 대상을 2년 연속 수상하였다.
사랑이 좋아 보여서
그대가 좋아 보여서
그렇게 시작한
이제는 끝이 난
눈물만 남은 내 사랑
좋은 사람 편한 사람
나만을 사랑해준 그 사람
아니죠 이제는 아니죠
모질게 변한 그 사람
사랑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못잊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그대 흔적을 지우렵니다
한때 나의 전부를
사랑이 정말 싫어서
그런거 이제 안해요
이렇게 말해도 다시 찾겠죠
이 후의 일은 많이 알려져서 여기서는 생략을 한다.
허주의 아침산책 2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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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의 신사동 그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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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랑이 좋아 보여서
그대가 좋아 보여서
그렇게 시작한
이제는 끝이 난
눈물만 남은 내 사랑
좋은 사람 편한 사람
나만을 사랑해준 그 사람
아니죠 이제는 아니죠
모질게 변한 그 사람
사랑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못잊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그대 흔적을 지우렵니다
한때 나의 전부를
사랑이 정말 싫어서
그런거 이제 안해요
이렇게 말해도 다시 찾겠죠
이 후의 일은 많이 알려져서 여기서는 생략을 한다.
허주의 아침산책 20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