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생명체는 거북이라고. 그러나 누군가는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거북이가 있다고. 세상엔 비행기도, 기차도, 자동차도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거북이가 있다. 사람이 사람됨을 잊고, 생명을 잊고, 평화를 잊고 살아가는 동안 누구보다 가장 빠르게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고 있는 거북이가 있다.
하늘이 열리는 날 개천철인 10월 3일.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등이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 오체투지 순례를 시작한지도 벌써 한 달째다. 지난 9월 2일 조계사 촛불 농성장을 시작으로 서울역 KTX 노동자 농성장,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투의 현장, 평택 대추리 이주민 마을을 찾아 함께 마음을 나누었다. 그리고 9월 3일 전북 부안 새만금에서 사라져는 생명들에 대한 사죄의 진혼을 했고, 9월 4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고제를 시작으로 가장 낮은 자세로 사람들이 잊어버린 길을 찾아 나섰다.
구례군과 남원시, 임실군, 완주군을 지나 전주에 이르렀다. 그동안 걸어온 길은 어림잡아 95킬로미터. 순례단은 온 숨을 땅에 바치는 오체투지가 생명의 실상을 바로 보고, 만물동체라는 평화의 길을 찾는 사람의 길을 함 뼘이라도 넓히는 길을 찾고자 간절히 발원했다. 순례단의 지극한 마음은 하늘과 땅이 하나이며, 천심이 민심이며, 민심이 천심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그리고 하늘 앞에 겸손함을 배웠다.
전주 아중역 인근 도로에서 시작한 10월 3일 순례도 매한가지였다. 자기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사람과 생명과 평화의 길에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 다섯 부분을 온전히 땅에 바쳤다. 생명의 진리를 담은 들숨과 날숨도 온전히 땅에 바쳤다. 서로가 서로를 연대하고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작은 발걸음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아스팔트의 열기가 피어오르는 오후에도 계속됐다.
차는 달리고, 구름은 흐르고, 새는 날고, 햇볕은 내리쬈다. 그리고 사람은 온 숨을 땅에 바쳤다. 전주 안적 삼거리에서 아중역까지 약 4킬로미터의 순례길. 끄응, 헉, 아흑….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땅에 바치는 온 숨은 그렇게 힘겨웠다. 그들의 밭은 숨소리가 순례단의 맨 끝까지 전해진 듯 하다. 순례단도 진행팀도 사진기자들도 모두들 숨을 죽였다.
그 틈을 비집고 어디선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도로 가 풀숲에서 나는 소리였다. 인공의 길과 자연의 경계에 선 도로 가 풀숲. 그곳에서도 가을이 전하는 생명이 울림은 순례단을 목청껏 응원하고 있었다. 풀숲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담배꽁초, 플라스틱 빈 물병, 노끈, 스티로폼, 빈 캔 등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도 귀뚜라미는 귀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눈에 들어온 수경 스님의 왼쪽 다리. 말을 듣지 않는 다리가 애처롭다. 수경 스님은 굽혀지지 않는 다리 대신 온전히 손에 의지해 온 몸을 땅에 내던졌다. 문규현 신부는 데일 것 같은 아스팔트에 온 몸을 맡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뒤로는 오체투지 순례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 절을 하는 사람, 합장 반배를 하는 사람 등등.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거북이는 어느덧 무리가 되었다.
순례단의 행렬에선 퀴퀴한 땀 냄새가 진동했다. 겨우 100미터 왔을 뿐이다. 달려왔다면 20초 남짓한 거리를 지나와 5분간의 달콤한 휴식시간을 가졌다. 문규현 신부는 수경 스님의 무릎을 어루만지고, 수경 스님은 아직도 뭉쳐있는 전종훈 신부의 팔근육을 걱정했다. 전종훈 신부는 수경 스님에게 부채질로 열기를 식혀주고 있었다. 종교는 다르지만 그렇게 순례자들은 한 마음으로 한 길을 찾고 있었다.
김포불교환경연대 지관 스님이 징을 들었다. 오체투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징소리. 징글징글하기도 하건만.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는 묵묵히 장갑을 낀다. 이어 순례단들과 참가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끄응…. 다시 온 숨을 땅에 바치기 시작했다.
하루 순례길이라야 고작 4킬로미터 남짓. 한 시간이면 누구나 걸어갈 거리다. 세 발자국 걷고 나면 온 숨을 땅에 바친다. 그렇게 100미터를 가면 5분을 쉰다. 100미터 거리 동안 스물일곱 번의 오체투지. 하루 동안 약 1000번을 땅에 온 숨을 바치는 셈이다. 누구하나 쉽게 마음 내지 못했던 순례였다. 허나 순례단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을 잊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이날 대전 촛불 모임의 참가자와 서울 삼각산 화계사, 전주 평화동 성당의 하루 순례 참여자 등이 오체투지를 했고, 유모차를 끌고 오는 등 가족단위 참여자 역시 많았다. 여섯 살 여자아이도 다섯 살 남자아이도 그럴 듯하게 오체투지를 해냈다. 그리고 전동차 두 대가 조용히 순례단을 뒤따랐다. 장애인들은 징 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사진을 통해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이 이렇게 다르네요. 몸으로 보여주시는 사람들 모습에 감동했어요. 오늘 길거리에 벌레를 보고 저도 모르게 피하는 제 모습에 놀랐어요.”(우복녀 씨, 강릉)
“요즘 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책이 아닌 그들만을 위한 정책을 내놓고 있는 것 같아요. 수경 스님의 말씀처럼 오만과 독선이 지나친 거죠. 그들에게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가르쳐 주고 싶어 매주 토요일마다 참가하고 있습니다.”(한근춘 씨, 안양)
“밑으로 더 밑으로, 그리고 땅에 몸을 대니 마음이 낮아지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성직자들께서 ‘끙끙’ 앓는 소리가 뒤에까지 들릴 때는 마음이 아팠어요. 제 오체투지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길 바란 뿐이에요.”(김운주 씨, 전주)
“울산서 아침에 출발해 다섯 시간이 걸렸네요. 맞벌이 하는 아내와 겨우 휴일이 맞아 이렇게 찾아 왔어요. 두 성직자 분들이 찾고자 하는 길에 조그만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조재훈-최선영 씨, 울산)
수경 스님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와 김포불교환경연대 지관 스님 등 10여 명의 순례단과 지리산 노고단에서 11월 1일 계룡산 신원사까지 약 200km구간을 약 2개월에 걸쳐 오체투지 순례를 계획하고 있다. 정말이지 느려터진 거북이다. 언론을 통해 만 천하에 알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누군가는 가야만 하는 길, 누군가는 찾아야만 하는 길, 누구나 다 알아야만 하는 길이기에 길을 나선 것이다. 느려도 한 걸음씩 길 위의 진리를 더듬어야 하는 법이다.
모두가 더 주먹을 움켜쥐려하고 있다. 더 소유하려는 마음 때문에 욕심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툼과 시기, 미움, 질투가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뭇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다. 꽉 쥔 주먹 속 모래알은 스르르 빠져나가기 마련. 이제 주먹을 펴야 한다. 펴지 않으면 움켜 쥘 수도 없다. 쥐면 그 뿐 주먹을 펴면 파란 하늘이 다 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공(空)이다.
지금 누구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거북이가 걷고 있다. 뭇생명들을 위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기 위해,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위해 느려터진 거북이가 누구보다 빠르게 걷고 있다.
“내가 변한 만큼이라도 세상이 변하고/나와 인연이 닿는 생명들과 선한 기운을 나누게 하는/평화의 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세상에서 가장 힘겹고 외로운 누군가가,/땅바닥에 엎드려 자신과 같이 어깨를 들썩이는 걸 알고/작은 위안이라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 수경 스님, ‘기도-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