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라고 어제, 오늘 너무 많은 생각을 했는데
여기 온 계기로 제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이 좀 홀가분 해지는 느낌입니다.
저는 어제와 오늘 출근 한 것이 아니고 안산에는 공원이 많잖아요.
마침 날씨가 워낙 따뜻해서 공원에서
나이든 노인 분들이 열심히 오가며 운동하시는 것을 보았고,
오늘 오후에는 “유니스의 정원”이라는 카페 겸 식당에서 오후를 보내고 왔어요.
으슥하고 외진 곳인데도 쌍쌍이 짝지은 연인들이 많이 오더군요.
그렇게 열심히 자기관리하고 삶을 즐기는 것을 보고 참 부러웠어요.
언제 오라버니하고 “유니스의 정원”에 가요.
『유니스의 정원 : 안산에서 그래도 괜찮은 분위기를 겸비한 카페로 홈페이지 참조』
아니 내일 저녁에 가요. 거기서 고기도 먹고 차도 마시고 그래요.”
“응 그렇게 하지”
“약속한 겁니다.”
“그려, 근데 왜 죽을 생각까지 했는데?”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리더니 이야기를 계속한다.
“제가 어릴 때 우리 집은 워낙 가난하였습니다.
우리 집은 동네를 거쳐 맨 안쪽 골짜기에 있었고
그 집 앞에는 지금은 조그마하지만 어릴 때는 크게 느껴지는 개울이 있었지요.
우리 집은 초가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두 채였으나 단칸짜리였어요.
안채에는 조그만 마루가 있었고 방에서 부엌으로 겨우 사람하나 들락날락할 수 있는 쪽문이 있고
부엌바닥은 맨흙이었고 앞문으로 나가면 조그만 마루가 있으며
마루에서 내려가려면 죽담의 디딤돌을 밟고 마당에 내려갈 수 있었고 방의 오른쪽에 부엌, 그때는 정지간이라고 했어요.
왼쪽에는 조그만 창고가 붙었었어요.
사랑채는 오른쪽에 있었는데 방 하나에 방의 왼쪽에는 마구간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칫간이 있었지요.
칫간 옆에 큰 감나무가 돌담 사이에 같이 어우러져 가지의 반은 마당 안으로 반은 바깥으로 뻗어있었고
그 나무 밑에 사립문이 있었으며 담이라고는 돌담으로 높이는 우리 어릴 때 키높이 정도로 아마 1.5미터는 될 겁니다.
돌담 따라 길이 있었고 사립문을 나가자마자 앞개울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한 십여개 될겁니다.
그 계단 좌, 우측은 돌로 쌓아진 길이지요.
어릴 때 감꽃이 필 무렵이면 저 아랫동네 아이들이 새벽에 우리 집 사립문밖 까지 와서 감꽃을 주워 가기도 했어요.
집 뒤뜰 밖으로 나가면 산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었고 그래서 돌담도 전체 둘레의 3/4정도 밖에 없었어요.
앞개울의 넓이는 한 20여 미터나 될 겁니다. 꾀 넓었어요.
개울을 건너면 가파르고 높은 산이었어요.
들에 나가려면 500여 미터 정도나 나가야 우리 논이 있었고 돌담 왼쪽에 비탈진 밭이 있었지요.
오른쪽으로 계곡을 따라 더 올라가면 거기에도 밭이 있었어요.
그 밭 주변에는 두릅이 많았었고 감나무도 몇 그루 있었으며
봄에는 그 주변에서 두릅도 따고 묘등 주변에서 고사리도 많이 꺾었어요.
고사리는 밭둑, 묘등 그런데 잘 자라 거는요. 몇 년 전에 갔었는데 요즘은 고사리도 없어요.
워낙 숲이 우거지다 보니 고사리의 포자가 낙엽 때문에 발아를 못한데요.
뒷산에는 취나물도 나곤 했지요.
먹는 거라고는 여름에 부엌 천정에 대나무소쿠리에 깡보리밥을 담아 매달아놓았다가 일하고 들어오면
사기그릇에 우물물 떠다가 보리밥 한 덩어리 물에 뚝뚝말아 된장에 고추나 생마늘 찍어 먹곤 했지요.
별거 있었나요.
어느 여름날 엄마와 아빠가 보리타작을 하다가 엄마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갔지요.
그러면 아빠가 "일하다가 방에는 와 가는데" 하고 화를 내는데
잠시 후에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났었지요.
그때 내 남동생이 태어난 겁니다. 이게 우리 엄마입니다.
그때야 아빠는 언니에게 아랫동네에 사시는 할머니 모시고 오라고 고함을 치셨지요.
그때 온통 땀으로 범벅되어 숨차하는 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그 이듬해에 여름이었어요.
부모님과 언니는 같이 일 나가고 저는 동생하고 같이 놀았는데
저는 언니와 같이 놀던 데로 동생을 대리고 그 개울에 나가 고동을 주우며 놀았지요.
평소에 개울에는 물이 별로 없어서 어린 우리가 놀기에 좋았어요.
매우 더운 어느 여름 날 저는 여느 때와 같이 동생을 개울가에 대려다
물놀이 하게 놔두고 미역을 감으며 돌 틈에서 고동을 주워 띄어 놓은 고무신에 담고 있었지요.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며 소나기가 내리는데 저는 시원하고 좋았어요.
아마 산 봉우리 부근에 더 많이 내렸는가 봐요.
갑자기 개울물이 불어나 내 동생은 그만 불어난 물에 휩쓸려 익사하고 말았어요.
저도 그 때 하마터면 죽을 뻔 했지요.
저는 그때 그 충격으로 몇 일간인지 모르지만 수 날을 앓았다고 합니다.
물론 부모님에게 많이 맞기도 했고요.
그때 제 나이 5살이었던 것 같아요.
그 후 저는 지금까지 그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일부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의 아들은 집안의 기둥으로 여겼으니까요.
제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저는 늘 언니와 둘뿐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언니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둘도 없는 친구였지요.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 엄마 아빠는 늘 일하러 나가셨는데
그때 마다 저는 때를 쓰며 울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억합니다.
어린 우리들만 집에 두고 먹고 살아야한다는 일념하나로
일하러 가시는 부모님의 뒷모습에서도 눈물 자욱이 배어있었다는 것을요.
지금 제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여 온 것이 바로 엄마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옛날에는 너나 할것없이 누구나가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때는 어려서 삶이 그려려니 하며 적응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가난해서 죽도 먹기 힘든때를 회상하게 되네요.
공감도 가고 남의 속사정을 알고보면 어렵거나 안타까울때 함께 가슴을 쓰려내기도 하게 됩니다.
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요즘 사람은 모르는 과거지요.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몇십 년 전으로 되돌아 갔으니 현실로 되돌아 올려면 한참 걸리겠네요. ^*^
ㅎㅎㅎ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아련히 없어진 고향집이 생각나네요-집의 구조든 동생하고 놀았던이야기- 제일로 남동생을 잃은 이야기가 -나의 여동생을 잃은 이야기와 동감입니다-
저의 여동생은 어머니가-바닷가로 계것 하려간사이 -나와 고모 할머니와 어린여동생이 정심때- 밥을 먹는중 -반찬으로 -기 이빨을 그돼로 먹는바람에
먹에 걸려 죽었어요-- 어머니가 돌아와 한없이 우시는 모습이 평생 잊어지지않은 슬픔이 있저요--
제가 태어난 곳의 집도 없어졌더군요. 그랬군요. ㅎㅎㅎ기 이빨이라 기는 언제 먹어도 맛있는 것인데....감사합니다.
엄마의 고생스러웠던 과거와 동생을 잃은 것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다는 그 여인
다음은 또...
감사합니다.
기? 그것 뭐죠?
바닷게..ㅋㅋ 예:꽃게
사투리 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