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이 있다
- 정선희
아파트 공터 옆에 긴 장대가 누워 있다
저 장대, 나와 안면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하늘 높이를 조절하던 장대
마당의 균형을 잡으면 하늘 한쪽이 기울어지는
그런 장대의 자세는 우리 집 감나무에게서 배운 것
내 마음이 옆집 석류나무 쪽으로 기운 것을 알아서
그 애 볼 볼록하게 홍시로 채우고 싶었던 날들을 다 보아서
그때마다 엄마는
구름을 타고 앉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곤 했지만
장대가 치켜 올린 하늘엔 멍이 든 엄마도 없고
밤 도깨비 같은 아버지도 손이 다섯 개는 필요한 동생도 없고
그렇대도 인제 허공도 쉴 때가 되었지
뒷방 늙은이 같은 버려진 장대 끝에 앉아 본다
비스듬한 추억을 누가
허공 가득 풀어 놓았을까
ㅡ계간 《시와문화》(202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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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일반적인 주거형태가 되기 전에는
집집마다 마당에 긴 빨랫줄이 매어있었고 중간 쯤에 긴 장대가 떡 하니 받쳐주었지요
장대끝에는 가끔 잠자리가 앉기도 했고, 구름 귀퉁이가 걸려 있기도 했습니다
긴 장대가 빨랫줄만 받친 게 아니라 홍시를 딸 때도 쓰였고,
우듬지에 걸린 아이들 연을 내려주는 데 쓰이기도 했지요
아웅다웅했던 소싯적 가정사를 가운데 두고 뒷방 늙은이를 생각합니다
꿈을 꾸던 청소년 시절과 가정폭력에 시달린 어머니,
돌봄이 필요했던던 동생, 무책임했던던 아버지를
비스듬히 누워있는 장대에서 찾아냅니다
하늘을 보면 누구든지 비스듬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오늘부터 일주일 내내 여름장마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제발 어둡고 찌부등한 추억은 안면있게 다가서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