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내고장 고유 마을 이름 및 대소변이 대우 받던 시절 淸雲/이명원
나의 잔뼈가 굵어 지금것 살고있는곳은 조그마한 남쪽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얼마전 세계엑스포가 열렸던 내가 죽도록 사랑하고 자랑스러운 나의 고장 여수입니다
가까운 거리에 정겨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저 있어 아주 아름답고 마음이 확트이는 시원스러운 항구 도시이지요 오늘은 웃기면서도 웃지못할 옛날 나의 고장 이야기를 하여 보렵니다
옛날 그시절에는 대중교통이 변변치 못하여 비포장 도로에 덜커덩거리는 시외 버스로 도청 소재지 300리 길을 중간중간 들릴곳은 다들려서 6~7시간을 달려서 도착합니다. 당일 왕복도 못하고 여관 신세를 지고 2일간의 일정으로 도청일등을 보고오는 시대였습니다.
시내버스는 물론 택시도 없었습니다. 여름에는 짬을내어 5~6km 거리의 해수욕장 등을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은 굴 천정에서 물이 주르륵 주르륵 새는 캄캄한 터널을 어린자식들을 등에 업거나 손에 손 잡고 걸어서 해수욕장에 다녔고 봄 가을에는 걸어서 동백섬 나들이를 하였습니다
나들이가는 안날에는 잠을 설치면서 날이 새기만 기다려지곤 하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뱃길은 야끼다마(일본어)엔진기관이 달린 통통배가 있었지만 많지않았고 돗단배나 나룻배가 교통수단이었고 화물 수송 수단 이었습니다. 육지에서도 시내 어데를 갈려며는 아무리 먼곳도 걸어서 다녔습니다.
먼길을 다녀오는길에 大小便이 보고 싶어도 참고 기어이 집에와서 용변을 했습니다 .
그것은 거름(肥料)이 아까워서였습니다. 그때 그 시절에는 비료로 농사 짓는건 부농(富農)에서나 가능했고 빈농(貧農)에서는 고작 대소변과 소와 되지를 키운 외양간 퇴비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비료가 아주 귀했습니다. 땔감(炊事燃料)도 장작이나 갈퀴나무 솔개비 였습니다. 都市에서는 땔감이 필요하였고 농촌이나 섬마을에서는 비료가 필요했습니다.
중앙동 선창(船窓)에 정박하여 있는 돛을 내린 우다시 돗단배 에는 이웃 남해등지에서 온 빈 똥장군(대소변을 담는통)과 장작묶음(장작을 새끼로 묶은)을 가득 실은 배들이 장관을 이루고 떠있었습니다.
뭍(육지)의 화물 운반 수단도 牛馬車(달구지)와 지게꾼들의 몫이였습니다. 이윽고 장작묶음과 똥장군을 실은 소.달구지에서는 `똥퍼~, 장작이어~, 똥퍼~, 장작이어~` 왜치는 소리가 진풍경이였습니다
그것은 비료가 필요한 섬마을 사람들이 장작묶음을 대소변과 물물교환을 알리는 왜침이었습니다. 도시사람들은 땔감 장작이 필요했고 농어촌 사람들에게는 비료(대소변)가 필요하였으니 안성맟춤 교환이였지요
도시 사람들은 대소변을 폐기(廢棄)하는 수고(手苦)를 덜었고 땔감을 얻는 一擧兩得(일거양득)의 利得(이득)을 보는 셈이였고 농어촌 사람들은 비료를 확보하는 手段(수단)이였던 것입니다
知慧(지혜)롭기도 하고 한편으론 해괴망축한 물물교환 이였습니다. 이렇게 그때 그 시절의 우리 조상님들의 생활상이였고 大小便이 待遇(대우)를 받던 시절(時節)이었습니다.
담배사이시요 담배 요~ 찹살떡 ~내일아침 동아일보요~ 낮,또는 밤거리 그시대 그시절 의 정겨운소리들 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시대에 사시다가 지금은 얼추 다 고인(故人)이 되신분들이 그립습니다
이러한 팍팍한 삶속에서도 자식들을 키워내시며 굳세게 살아가신 우리고장 윗대 어르신들께 진심으로 머리숙여 경의(敬意) 를 表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라져가는 내고장 고유마을 및 점포이름 (전남 여수펀) |
길 및 마을이름便~
나까마찌(중정中町
일본어)
(중앙동 진남상가)
오사까도오리(대판통 大坂通 일본어)
(중앙동 대판통)
상까이(삼층
三層 일본어)
진남로에서 군자동으로올라가는 좌편의집)
잉그부 (영등동)
세철(신월동)
닭머리 (동산대교 입구)
벅수거리 (진성여고입구 큰 도로변에 벅수가 있었음))
욋골 (석천사 아래마을)
골샘골(동초등교옆마을)
큰샘골(군자동입구마을)
쫑대(천일약국근처에 유사시에 치는종이 매달려있었음))
고소대(한신 아파트옆산 봉우리에있었음)
닭전머리(여수전남병원앞도로닭시장)
개장터(전남병원 위다리밑의 개시장)
미나리깡(여수전남병원자리가 미나리논이었음)
샛구지 (화양면동내이름)
하구바우(연등동하천 가 의 바위)
보지산 (한산사 입구 좌편의 산)
곰챙이 (웅천)
향교(군자동 소재)
삼양사 앞길(해양공원 길)
쫑포(해양공원 종화동)
깡통부대마을(럭키엘지아파트앞 도로변의 걸인마을)
잉구부당산거리(연등동가는윗길 도로
객사 (진남관)
큰굴 작은굴(만성리로 가는터널)
둔덕재 (라온유 아파트 옆 고개)
민들레미 재(중앙하이즈a앞고개)
쌍봉(여천초등교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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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고무공장(여수 전남병원앞 연등천다리옆 고무공장이있었음)
영단다리(서교동전화국 자리에 식량관리소가.있었음 그앞 다리)
벽목아지(남산동 파출소 근처 유흥주점마을)
판장(중안동어시장)
부산뱃머리(중앙동 파출소옆 선착장)
카페리 뱃머리(신항의 부산 왕복 선착장)
세철 공동묘지(신월동 위 뒷산)
오림동 공동묘지(진남종합운동장 앞산)
헌병대(관문동 구kbs입구도로변)
다다미집(진남로도로변)
장 도가(진남로 옆도로변)
솜집(진남로에 있었음)
돌산 뱃머리(중앙동 해양공원쪽선착장)
기환정(박람회장)
감자공장(여수전남병원 윗쪽)
전기회사(구.충무동파출소 위)
화장터(영등동 윗길가에 하장장이 있었음))
상해 염색집 (외한은행 앞길 카도)
사장터 (광무동 弓場)
봉산동 미나리깡
남산동 미나리깡
이강산 (진성여중고
밑의산)
OK사진간 가이당
(대판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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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토음식便 ~
고향초밥
여수식당
명성식당
노래미식당
백년초 (정종집)
은하식당(정종집)
나주식당
장복식당
한일식당
우래식당
여흥식당
일이삼 (정종)식당
순천식당
창일식당
~ 양화점便 ~
화신 양화점
중앙 양화점
~ 병원便 ~
강 의원
손 산부인과
적십자 병원
주 내과
지 안과
재중 병원
순천 병원
윤성록 의원
동아 의원
손 내과
평화병원
황 의원
박 이빈후과
박 산부인과
~ 요정便 ~
해남장
삼성장
락원장
앵두나무집
~ 제과점便 ~
메이지제과(백양제과)
기무라이야 제과(가나다제과)
여수제과
에도야 빵집
중앙제과
평화당제과
화월당제과
제일제과
제일제면
여수제면
동광제과
명신제과
길삼바우 제과
화성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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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방便 ~
귀거래 다방
쌍봉 다방
월세계 다방
역전 다방
옛날 다방
큰샘골 다방
녹음다방
~ 여관便 ~
금강호텔 (일제때
중안동노타리승강기가 설치되어있었음)
동일여관
구봉여인숙
국화장여관
남흥여관
금성여관
~기타~
고려농방
천일방앗간
시민방앗간
전남 미싱
여수극장
동성극장
중앙극장
시민극장
태평극장
국제캬바레
녹수장 캬바레
여수주위의산便~
고락산
구봉산
호랑산
장군산
마래산
영취산
유명?인사
성배
옥실이 |
이밖의 여수에 대하여 더 아시고저 하신다면 다음에 방문하셔서 청운수필및 우리들이야기 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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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옛날 그시절의 이야기 잊지도 안고 잘 쓰셨습니다
그 추억에 잠겼다가 갑니다 감사합니다
옛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말들이군요......^^
사라져 가는 고유어들이 안타깝기도 하죠
좋은정보 고맙습니다
젊은날 호남 에틸렌서 근무를했는데..
고향이 여수.. 애향 여수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좋은정보에 머물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
비는 내리지만 오늘도
님의 애향심에 탄복하고 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