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7일(금)
* 시작 기도
주님...
밤새도록 비존재 세력으로 인하여 몸부림치느라 잠을 자지 못하고 설쳤나이다.
이는 나의 거짓된 행위로 인함이오니 이미 진멸되어 마땅하나 한 달란트라도 맡겨 주시니 그것에 일희일비하지 아니하고 감사로 나아가게 하소서.
비교하거나 원망 그리고 시비하는 마음을 그치게 하시고 오직 기쁨과 감사로 즐거이 충성하게 하옵소서.
내 안에서는 더러운 것을 솟구쳐내는 바다와 같은 용솟음치는 마음이 있사오니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케 하시고 순전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아들을 힘입어 말씀으로 나아가기 원하오니 나의 영을 주장하사 아버지 품에 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122:1-9
제목 :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좋고 완전한 하나님의 성전.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 나의 묵상
본 시는 다윗이 쓴 시로서 15편의 성전 순례시 가운데 4편이 다윗의 시인데 그 중에 하나이다.
사실 다윗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과 같은 건물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다윗이 쓴 시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다윗 시대에 건물 성전이 없었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의 궁궐 앞에는 언약궤를 모신 장막이 있었고 그 찢어져 나풀거리는 장막을 보면서 오히려 성전에 대한 열정과 사모함이 크게 묻어나서 성전을 짓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자고 할 때에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실제로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문에 들어섰을 때 그 감격을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예루살렘은 과연 이스라엘의 도성인 것은 모든 주의 지파들이 주의 이름을 찬양하려고 그 전례대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간다.
거기에는 심판의 보좌 곧 다윗의 집의 보좌가 놓여 있다.
예루살렘의 평강을 구하며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의 복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평강이 있고 그 안에 형통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형제들과 친구를 위하여 분명하게 말하는데 너희 가운데 평강이 있을 것이다.
다윗은 주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그리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복을 비는 노래를 부른다.
다윗은 여부스 족속을 물리치고 그 도시를 다윗 성 곧 시온 성으로 명명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장막을 세워 그곳에 언약궤를 안치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언약궤를 안치하는 일을 실패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언약궤를 안치하게 된다.
그 때 언약궤 안치의 주체로서 다윗이 느끼는 감격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다윗이 겉옷이 훌러덩 벗겨지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부모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삼하 6: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삼하 6:20-21)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다윗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춤추며 뛰어 놀 정도로 시온성에 언약궤 안치하는 일을 기뻐하며 감격하였다.
이는 다윗만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하나님께 경배함으로서 이스라엘 선민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6-9절은 시인이 예루살렘의 평화를 기원하며 백성들에게 성전의 평강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청원한다.
(6절)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해야 하는 이유는 예루살렘의 평강이 곧 순례자 개인이나 가정을 물론이요 이스라엘 공동체의 평강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순례자 한 사람 한 사람의 평강이 곧 이스라엘의 평강임을 잘 아는 다윗은 그래서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그리고 너를 위하여 복을 빈다.
여기서 ‘너’로 대변되는 예루살렘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공동체인 형제들과 친구들을 뜻하는데 시인은 하나님의 집과 예루살렘 그리고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동일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건물 성전을 넘어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바로 성전이요 하나님의 집이며 이 성전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시작됨을 확증하는 것이다.
다윗은 이 언약궤를 안치한 장막이 찢어져 나풀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을 지을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히려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집을 지어주시마고 약속을 하신다.
(삼하 7:11-12)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이로 인하여 다윗은 건물 성전을 짓지 못하지만 그야말로 완전한 성전을 믿음으로 바라며 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완전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까지 미리 본다.
그저 단순히 건물 성전을 지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차원을 뛰어 넘어 완전한 성전 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며 즐거워하였던 것이다.
(행 2:25-26) 다윗이 그(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행 2:30-32) 그(다윗)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4-35)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계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사건 곧 십자가에 죽으심, 무덤에 장사되심, 무덤에서 살아나심 그리고 하늘에 오르신 승천까지 바라보며 이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노래하였다.
이는 진정한 성전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집이요 믿음으로 고백하는 참 성전이며 영원한 성전이다.
건물 성전은 구약 당시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완전한 성전은 될 수가 없었다.
그 건물 성전은 완전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건물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사흘 만에 성전을 짓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요 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오늘 본문을 통하여 다윗의 그런 믿음의 고백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오늘 우리들에게 동일하게 요구되는 믿음이다.
우리 안에는 지금도 여전히 눈에 보이는 건물 형태의 성전을 사모하며 그것을 그리는 모형과 그림자적인 신앙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 모른다.
신약시대 그것도 마지막 때를 살아가면서 여전히 구약시대인 모형과 그림자만 붙잡고 살아가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이었고 내 신앙의 실체요 민낯이었던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의미도 모른 채 여전히 구약에 그들이 받았던 물질의 복이나 형통의 복을 나도 동일하게 받고자 얼마나 애를 쓰며 몸부림쳤던가?
그것은 결국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나의 몰지각을 대변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 다윗은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과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동일시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이는 참 믿음이 아니라 현상에 나의 믿음을 빼앗겨 버리는 가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오늘도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누리고자 말씀을 통하여 그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품속인 그 나라로 나아간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았던 다윗의 믿음과 일치하며 오히려 그 믿음을 뛰어넘는 더 귀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의 선진들은 증거는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 곧 이미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히 11:39-40)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요 존재 자체이신 주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집 곧 그 나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신 은혜에 감사와 감격으로 노래한다.
이는 멀리서 희미하게 바라보며 노래하였던 다윗의 기쁨과 감격에 비할 바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은혜의 실체이며 믿음의 결정체이다.
이 은혜를 나의 주인되시는 주님께 온전히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영혼이 주의 은총을 입어 중한 짐을 벗었나이다.
그로 인하여 내가 있는 곳이 초가집이든 궁궐이든 하나님의 집이요 주의 성전이며 하나님 나라임을 고백하나이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들만 추구하고 구했던 모형적인 신앙의 눈을 열어주시고 이제 날마다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하심이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성전이며 또한 내 자신이 성전이고 믿음의 공동체가 성전임을 믿으며 오늘도 주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주님...
육신의 고통으로 곤고함 가운데 있는 주의 자녀를 돌보시고 성전 되신 주님과 함께 자신이 영원한 성전임을 분명히 깨달아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늘도 성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강권하여 주옵소서.
육신의 눈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믿음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