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결국 그렇게 막으려 했던 연맹제재가 시작이 되었다.
연맹 소속 선수, 심판들은 요동을 쳤고 연합회의 제재를 연맹 집행부에 항의를 하고 연맹책임자인 나는 어떻게 이 난관을 수습해야 하는지 도저히 답을 할 수 가 없었다.
약속하고 어기고 서약서 쓰고 어기고 도대체 무슨 수로 저들과 맞서야만 하는가?
당시 딱풀님이 이정수회장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하라 할 정도였다.
ㅋㅋ 당시 딱풀, 또풀, 떡풀, 풀 종류도 많았지요? 얼마나 인터넷으로 공격을 하는지? 공격을 하려면 내막을 알고 해야지....답변을 하다 질문이 막히면 "고소하지" 였다.
그래도 3년간을 회장으로 모셨던 분을 어떻게 전임처장이 사법적 고소를 한단 말인가?
결국 네티즌들과 백인클럽 동호인들의 항의와 원성에 "공개청문회"를 실시하자를 연맹에서 연합회에 요구를 했고 연합회는 묵살했지만 사적으로 이용대, 김현우님이 오셔서 공개청문회에 답변자가 되었다.
"연맹은 몇개의 규칙이 다르고 연합회에서 사업을 취소 했고 단체도 인정안하니 타단체에 선수나 심판으로 활동하는 여러분을 제재하는 것이다"
1. 당시 공격도우미 1명을 추가하여 규칙이 상이한 점은 연맹의 요구사항이 아닌 방송국의 똑딱볼이 아닌 공격어드벤테이지 측면에서 시청률을 위한 요구사항이었다.
2. 투바운드 쓰리텃치는 당시 1부,최강부경기는 투바운드 쓰리텃치였다.
3. 주심은 판정은 번복할 수 없다. 팀의 요구가 있을시 합의는 하되 오심이면 오심을 인정하고 추후 징계를 감수하고 현 포인트는 그대로 유지한다. 심판의 권위유지룰 위한 연맹의 규정.
당시 이용대님과 김현우님은 동대문구체육관에 오셔서 연맹 팀으로 부터 항의를 받고 돌아가서 연합회로 부터 갖은 항의를 들은 것 같다. 일명 샌드위치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연맹 박병욱상벌이사가 더이상 못참겠다 면서
"정처장 내가 연합회 이사로 들어가서 다 엎어놓고 제재를 못하게 할테니 알고 있어" 라고 하여 나는 그대로 믿었다. 헌데 10여년간 결과는 무엇인가?
그때 들어가 11년째 그곳의 혁혁한 공로자가 되어 있고 심판이사라는 직책까지 거뭐쥐고 무소불위의 족구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현재 통합협회에는 부회장인가 하는것 같더니 임원현황이 사라졌다.
지금에 와서 뭐하러? 왜? 무엇을 바라고?
지나간 일들을 다시 쓰냐고 전화가 오고 문자가 온다.
답 : 이젠 족구판을 완전히 마음적으로 접었으니 아무런 미련도 없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솔직히 다 털어놓고 내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 싶다.
연합회에서 쫒겨나온지 두달여를 지났다.
항상 들어오던 국체협의 사무처장 보조금이 중단됐다. 아!~ 이젠 류처장에게 지급되는구나 를 알았다. 하기사 당연한 것이다. 허나 안주인(마누라)은 족구판 사정을 모르니 난리가 났다.
누구 맘대로 직장을 사표쓰나? 한달내에 울엄마(장모)한테 빚진거 갚으란다.
못 갚으면 집에서 나가란다.
하기사 종로구청 공무원도 상의 안하고 사표내고 족구처장으로 가서 월급도 180만원에서 120만원으로 줄고 두번째 또 의논을 안했으니 짤려도 싸다.
족구방송이 뭐기에 장모님께 빌린 2004년도 최강전 대회예산 3,000만원
군대생활10년 공무원 8년6개월만에 장만했던 16평 연립주택 그 연립주택 담보로 대출받은 6,000만원 협찬사만 잡으면 된다 그러면 된다. 허나 잡질 못하고 모두 날아가고...
그렇게 이자에 허덕이다 2006년도 하반기 까지 왔는데. 연합회의 방해공작에 르까프의 협찬금액은 해마다 10%줄어들고 더욱 빚이 빚을 만들어 갔다.
결국 장모님의 빚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집에서 쫒겨나고 두달 후 이혼을 당했다. 뭐라 할말이 없었다 가정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족구만을 바라봤으니?
"족구를 선택할래? 가정을 선택할래?" 했을 때
족구방송이고 뭐고 가정을 선택했어야 했다 지금에사 철이 들었다.
연립주택은 흔적도 없이 경매처분이 되었다.
이렇게 안,밖으로 최악의 상황까지 가고 있는 나를 연합회는 갖은 수단과 방법(참가팀이 없어)을 동원하여 결국 2009년 1월 9일 부로 연맹 사업중단 발표를 하게 되었다.
연합회 게시판에 "류처장님 축하합니다 연맹이 항복을 했네요!" 라고 써진 글귀를 보고 살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는 이래서 죽이는 거구나.
그래도 족구방송을 하려고 연합회 이정수회장님께 살려달라고 하였다.
허면 모든 규칙 그리고 심판 선수 연합회가 하라는대로 하라... 연맹은 아무것도 하지마라 였습니다.
그리하여 1년내내 방송하던 "르까프배 SBS족구최강전"은 스톱하고 6주짜리"임금님표이천쌀배SBS족구최강전"으로 축소하고 4인조, 쓰리바운드, 선수, 심판 모두가 연합회 룰대로 방송이 되었고 강승호가 해설을 맏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시청률은 0.86까지 올라갔던 시청률이 급감하여 0.2%로 내려가고 1년 내내 시청률이 떨어지다 0,08%까지 추락하고 방송시간대도 새볔이나 아침 출근시간으로 변경이 되었다.
허나 연맹은 할말이 없었다 족구방송이 재미가 없어서 어쩔수 없다는 것이었다.
* 당시 SBS본부장과 휘발유통 맞짱까지 갖었다. 하여 1%대 시청률만 오르면 SBS에서 중계료를 연맹에 지급하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허나 규칙이 똑딸볼로 원위치되고 시청률은 위와 같이 되면서 내 자존심이 구겨지고 족구방송을 하는 이유를 잃어갔다. 하여 당시 쎄팍쪽과 비취발리볼측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예산은 걱정 말라고!~~ 그때 까지도 족구에 애정이 떠나질 않아 거부했다... 그냥 돈 받고 비취발리볼이나 중계할 걸 후회한다.
결국 낮은시청률과 이천시홍보도 별로 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2011년으로 SBS최강전 방송은 막을 내리고 나는 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살인의 마음을 누를려면 속세를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죽으려고 비행(패러글라이딩)만 하였다. 내가 죽으면 그래도 보험이라도 딸,아들에게 돌아가니 말이다.
헌데 모진 목숨 죽지는 않고 즐기는 패러글라이딩에서 지도자에 까지 와 있으니 인생 참 하고 싶은대로 되는게 없다. 그냥 순리대로 가는가 보다.. 한미FTA 수석대사 김종훈님과 하늘을 날고 가수 박강성님과 술한잔 기울이며 "장난감병정"을 불렀다.
이렇게 편안세상 왜그리!~~ 족구가 뭐길래?!~~
PS. 족구를 세계에 내 놓으려고 하다 족구는 한문으로 足球 = 중국(한문을 쓰는 나라)에서는 축구가 된다. 아시안게임에도 명칭 때문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하여 세계홍보기간동안은 Kick ball로 내놓으려다 이곳의 지기님인 한호님으로 부터 강력한 태클을 받았다. 두달여를 설득해도 안되고 지금까지도 이 부분에 답을 못 얻었다. 족구라는 명칭으로 계속진행 한다면 아시안게임 자체가 안된다.
이어서는 다음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