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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질(土質)·인종(人種)·체형(體形)으로 본 북경(北京)=연경(燕京)은?
○ 연경(燕京)은 북경(北京)이라고 한다. <북경(北京)은, 천문(天文)에 있어서는 기(箕), 미(尾)의 분야(分野)가 되고, 지지(地志)에 있어서는 우공(禹貢)의 기주(冀州)의 지역이 된다.>고 사가(史家)들은 열심히 설명(說明)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說明)은, 누구라도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할 수 있기 때문에, 솔직(率直)히 신뢰(信賴)할 수 없다.
➨ 그러나 그곳의 지세(地勢)를 보면 : <그것이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것인지를 쉽게 파악(把握)할 수 있다.> 아세아(亞細亞)와 구라파(歐羅巴)의 대략적(大略的)인 인종(人種)으로 보아도, 기원전(紀元前)의 서한(西漢)때나, 수천(數千)년이 지난 21세기(世紀) 작금(昨今)의 시대(時代)나, 별로 다름이 없다. <그때(西漢)나 지금(只今)이나,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구도(構圖)를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가(史家)들은, 지금도 <북경(北京)은 옛 연경(燕京)이며,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북경(北京)이다.>라고 친절(親切)하게, 시원하게 이야기 해 준다. 이러다보니, 연경(燕京)은 북경(北京)이며,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21세기(世紀) 오늘의 중국(中國) 수도(首都)다.>하는 것이 일반화(一般化) 내지 상식화(常識化)되어버렸다.
○ 그렇다면 : ‘북경(北京)=연경(燕京)’에 대한 <지형지세(地形地勢)…방향(方向)…토질(土質)…기후(氣候)…특이(特異)지형(地形)…인종(人種)특징(特徵)…토산물(土産物)등>도,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과 같아야 한다. 과연(果然) 그럴까?
결과론(結果論)이지만 : <결코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결과(結果)는,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것들을 나열(羅列), 설명(說明)하면, 금방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미안(未安)하고 또 죄송한 말씀이지만…인종적(人種的)으로 봐도…지세(地勢)로 봐도…
<‘연경(燕京)=북경(北京)’은, 현(現) 하북성(河北省)에 있을 수 없다.>
○ 군주(君主)의 명(命)을 받고, 사신단(使臣團)의 일원(一員)으로, 연경(燕京)을 오고 갔던 대신(大臣) 또는 관리(官吏)들이, 하루하루 걷고, 묵었던 여정(旅程)을 기록(記錄)하고, 그 지세(地勢)를 설명(說明), 기록(記錄)해 놓은 연행록(燕行錄)이라는 소중한 문집(文集)들이 있다. 이 문집(文集)들을 중심(中心)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모두 다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관심(關心)있는 부분(部分)만을 간추려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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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燕轅直指 제5권 留館錄 하 / 계사년(1833, 순조 33) 1월 26일
➨<盧溝橋記(노구교기)>편에 인용(引用)하기를 :《頓長史銳詩曰.嶺雲沈日暝烟斜.見說窮邊亦有花.應是漢宮靑塚怨.不甘玉貌委龍沙. : 장사(長史) 돈예(頓銳)의 시(詩)에서 이르기를 : 재 구름 침침한 햇빛 어두운 연기 끼었는데, 으슥한 지경을 바라보니 또한 꽃이 있구나. 응당 한(漢)궁궐 청총(靑塚)의 원한이리니, 옥(玉) 같은 얼굴 용사(龍沙)에 버려진 것 달갑지 않네.》라고 하였다.
➊ 노구교(盧溝橋) : 다음백과 / Lu kou chiao , 蘆溝橋 / 《중국 베이징 시[北京市] 남교(南郊) 융딩 강[永定江]에 놓인 다리. 베이징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8㎞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1187년에 옛날 융딩 강의 나루터가 있던 자리에 건설되었다가 청대에 들어와 재건되었다. 이 다리는 베이징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아치 다리이며 길이는 266.5m이고 11개의 아치형 구멍이 뚫려 있다.
구조가 견고하고 모양새가 매우 아름다우며, 특히 다리 양변을 따라 세워져 있는 140개의 돌기둥마다 새겨진 485마리의 사자조각은 다양하고 생생한 모습이 돋보인다. 유명한 베네치아의 여행가인 마르코 폴로가 이 다리를 '세계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다리'라고 칭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마르코 폴로의 다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1937년 7월 7일 이 다리에서 중국 군대가 일본군에 대한 저항사격을 감행하여 이를 계기로 8년간의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루거우차오 사건). 이 사건으로 루거우차오 다리는 중국 현대사에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새기게 되었다. 지금은 국가 주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루거우차오 옆에 새로 놓은 다리를 이용하고 있다(→ 루거우차오 사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➋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루거우차오(노구교, 卢沟桥)는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의 중심가에서 약 15km 떨어진 펑타이 구를 흐르는 루거우허(현재는 융딩허)에 가설되어 있는 석조의 아치교이다. 루거우차오는 금나라 때인 1192년에 완성되었고 수해로 훼손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 전체 길이는 266.5m이고 11개의 아치로 구성되어있으며 각 아치는 길이 11m, 편평률 0.69의 타원형을 이룬다. 다리의 난간에는 각각 다른 표정과 모습을 한 총 501기의 사자의 조상이 놓여 있다. 이 사자상의 수를 통행인이 정확하게 세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중국어에서는 '셀 수 없는 것'을 "루거우차오의 사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일찍이 이 곳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저서 동방견문록의 제4장중에서 이 다리를 "온 세상 어디를 찾아도 필적하는 것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라고 적었다. 이것 때문에 서구에서는 이 다리를 마르코 폴로의 다리(Marco Polo Bridge)라고 부르고 있다. 루거우차오의 이름은 1937년 7월 7일에 이곳에서 일어난 루거우차오 사건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이 격돌해 중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중략.》
➌ 노구교(盧溝橋)에 대한 현재(現在)의 역사(歷史)통설(通說)인 <다음백과 및 위키백과(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의 내용(內容)을 보았다.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서남(西南)쪽 8km 또는 15km 떨어진 영정강(永定江)위에 놓여 진 다리(橋)라고 하였는데, 원래 서력(西曆) 1,187년 ∼ 1,192년쯤에 완공(完工)된 다리였으나, 언제인지는 모르나, 수해(水害)로 파괴된 것을, 청(淸)나라 때 재건(再建)되었다고 전(傳)한다. 구라파(歐羅巴)쪽에서는 Marco Polo Bridge라고 알려져 있다고 한다.
➍ 그렇다면 : 1,986년에도 일부가 복원(復元)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수해(水害)로 파괴(破壞)된 것은 언제인지, 또 청(淸)나라 언제, 복원(復元)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만 전(傳)한다. 1,187년 또는 1,192년이라면 조선왕조(朝鮮王朝) “고려(高麗)”때의 일이다. <요(遼)·금(金)·원(元)·청(淸)나라는, 동아세아(東亞世亞)지방에 진출(進出)한 적이 없다.> 이게 중요(重要)한 것이다. 요(遼)금(金)원(元)청(淸)은 중아(中亞)와 구라파(歐羅巴)사이에 있었던 나라들이다.
➎ 노구교(盧溝橋)를 노래한 시(詩)를 보자. 盧 溝 橋 記 :《頓長史銳詩曰.嶺雲沈日暝烟斜.見說窮邊亦有花.應是漢宮靑塚怨.不甘玉貌委龍沙. : 장사(長史) 돈예(頓銳)의 시(詩)에서 이르기를 : 재 구름 침침한 햇빛 어두운 연기 끼었는데, 으슥한 지경을 바라보니 또한 꽃이 있구나. 응당 한(漢)궁궐 청총(靑塚)의 원한이리니, 옥(玉) 같은 얼굴 용사(龍沙)에 버려진 것 달갑지 않네.》라고 하였다. 이게 북경(北京)에 있다는 노구교(盧溝橋)를 노래한 시(詩)가 맞는가?
북경(北京)주변(周邊)을 노래한 시(詩)라고 하더라도, 설령(設令) 비유적(比喩的)인 표현(表現)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북경(北京) 주위(周圍)의 풍경(風景)과 시(詩)에서 이야기하는 풍경(風景)과는 일만(一萬)리 거리만큼이나 차이(差異)가 난다는 얘기다.
돈예(頓銳)가 노래한 내용(內容)은,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의 풍경(風景)은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장사(長史) 돈예(頓銳)는 무엇을 노래한 것일까? 왕소군(王昭君)과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일컫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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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원직지(燕轅直指) 제6권 / 유관별록(留館別錄)
➨ 천지산천(天地山川) : 《渡鴨江.至瀋陽.直向西南.自瀋至大凌河.稍迤而北.而間或向西.自凌河至山海關.向正南. :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심양(瀋陽)까지는, 곧장 서남(西南)향이요, 심양(瀋陽)에서 대릉하(大凌河)까지는 약간 비스듬히 북(北)쪽으로 가다가, 혹 서(西)쪽으로 향(向)하는 때도 있으며, 능하(凌河)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정남(正南)으로 향한다. 北京雖極寒.地凍不過數寸.終日大雪.隔夜無點白.依然南土風氣.豈人烟稠集.鼓發喣噓.足以敷布陽和耶. : 북경(北京)은 아무리 춰도, 땅이 몇 치[寸] 밖에 얼지 않는다. 하루 종일 큰 눈이 와도 밤이 지나고 나면, 눈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쪽 지방 기후(氣候)와 비슷하다. 인구(人口)가 조밀하여 내뿜는 입김이 따뜻한 기운을 퍼뜨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하였는데,
➊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심양(瀋陽)까지는, 곧장 서남(西南)향이요> : 반도(半島) 북방(北方) ‘의주(義州)=용만(龍彎)’에서 북(北)쪽에 있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면,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까지는 정북(正北)쪽이다.
위의 연행록(燕行錄) 본문(本文)대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후(後), 서남(西南)쪽으로 가면 : 사신단(使臣團) 수백(數百)명은, 요동반도(遼東半島) 남(南)쪽의 바다 속에 빠져 익사(溺死), 북경(北京)은 고사하고 처자식(妻子息)도 보지 못할 것이다.
1) 위 얘기는 : <당시(當時) 조선(朝鮮)은,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것이고,
2) 또한, <북경(北京)=연경(燕京) 또한,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에 없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것이다.
➋ <심양(瀋陽)에서 대릉하(大凌河)까지는 약간 비스듬히 북(北)쪽으로 가다가, 혹 서(西)쪽으로 향(向)하는 때도 있으며>라고 하였는데, <실제(實際) 지리적(地理的) 방향(方向)> : 서(西)쪽이다.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위 본문(本文)에서 말하는 대로 간다면 : 심양(瀋陽)에서 북(北)쪽으로 갈 이유(理由)가 전혀 없는, 서(西)쪽을 바라보며 가여 한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대능하(大凌河)를 만난다.
➌ <능하(凌河)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정남(正南)으로 향한다.>고 하였는데, 심양(瀋陽)에서, 어느 길을 택하든 ‘북경(北京)=연경(燕京)’은, 서(西)쪽이며, 남(南)쪽으로 치우친 서남(西南)쪽에 있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지나, 대능하(大凌河)를 건넌 후, 산해관(山海關)으로 가려면 : 계속 서남(西南)쪽을 보고 가야만 한다.
1) 그러나 위 본문(本文)에서 말하는 것은 : <능하(凌河)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는 정남(正南)쪽이다.>라고 하였다. 사신(使臣)일행(一行)이, 본문(本文)에서 말하는 방향(方向)대로, 정남(正南)쪽으로 전진(前進)한다면 : <사신(使臣) 일행(一行)은, 현재의 발해(渤海)와 요동만(遼東灣) 바다 속에 빠져, 물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2) 그렇게 되었다면, 연원직지(燕轅直指)라고 하는, 연행록(燕行錄)은 존재(存在)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물귀신(鬼神)이 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이는 곧,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이야기고,
➨<북경(北京)=연경(燕京)은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땅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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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원직지(燕轅直指) 제6권 / 유관별록(留館別錄)
➨천지산천(天地山川) :《大抵自遼至北京數千餘里.東南皆平野際海.西北則自廣寧以後.挾右醫山.或近或遠.以達于山海關.關內如撫寧縣,背陰堡等地.皆穩藉可居. : 대개 요동(遼東)에서 북경(北京)에 이르기까지 수천(數千)여리는, 동남(東南)쪽은 모두 평야로 바다에 닿았고, 서북쪽은 광녕(廣寧)이후로는 의산(醫山)을 오른쪽에 끼고, 산해관(山海關)까지 가게 되어 있는데, 그 거리가 혹 멀고 가깝기도 하다. 관내(關內)에 있는 무령현(撫寧縣), 배음보(背陰堡)같은 곳은 모두 안온해서 사람이 살 만하다.》고 말한다.
➨<大抵自遼至北京數千餘里.東南皆平野際海. : 대개 요동(遼東)벌판에서 북경(北京)에 이르기까지 수천여리는, 동남(東南)쪽은 모두 평야로 바다에 닿았고(동쪽과 남쪽 모두 평야지대로 바다에 닿았고)>하였는데,
➊ <요동(遼東)에서 북경(北京)>은, 서남(西南)쪽이기 때문에, 동남(東南)쪽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를 <북경(北京)에서 요동(遼東)>을 바라보면서 방향(方向)을 이야기하면 : 동북(東北)쪽이며, 동남(東南)쪽은 발해(渤海)바다다. <평야(平野)고 뭐고 논할 곳이 못된다.>는 뜻이다.
➋ 다만 번역(飜譯)을 바꿔, <동(東)쪽과 남(南)쪽을 분리(分離)한다면 : 동(東)쪽은 산해관(山海關)쪽으로 평야(平野)지대며, 바다이고>, <남(南)쪽은 산동성(山東省) 평야(平野)지대이며, 바다는 동남(東南)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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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원직지(燕轅直指) 1,832년∼1,833년 제6권 / 유관별록(留館別錄)
➨ 북경(北京)지방의 토질(土質) : <凡土性.自遼野至北京.皆理細而黏.每當凍解雨溽之時.膠轍難行.用以墍屋.無滲漏之患.蓋土之理細者皆沙也.微風輒揚.狀若烟霧.: 무릇 이 지방(地方) 토질(土質)은, 요동(遼東)에서 북경(北京)까지가, 모두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찰 져서, 해동(解凍) 때나 장마 때는, 바퀴에 붙어 지나가기 어렵고, 또 집 벽에다 바르면 빗물이 스며들 걱정이 없다. 그런데 곱고 부드러운 이 흙은 다 모래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치 연무(煙 霧)처럼 먼지가 인다. 雖大雪紛下.爲飛沙所混.片刻間不見雪痕.而沙河驛最甚.關內則往來車馬益多.日夜爲蹄輪所碾磨.雖無風時.紛如飛灰.着人衣帽面目.頃刻幻形變色.雖同行者.驟看不能相識. : 그래서 아무리 큰 눈이 쏟아져도 이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버리면, 이내 눈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는데, 그중에도 사하역(沙河驛)이 제일 심하다. 산해관(山海關) 안쪽은 왕래하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아서, 밤낮으로 먼지를 일으키어, 아주 바람이 없는 때라도, 꼭 잿 가루가 날리는 것같이 분분하다. 이것이 사람의 의복이나, 모자에 붙으면, 잠깐 사이에 모습을 변화시켜서, 동행자끼리도 언뜻 보면 누가 누군지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 된다. 棲鬚髮者.拭之不去.入口中者.嚼之輒索索有聲.夜宿而朝起視之.則沙能透入紙窓.積于衾上.至十襲之籠.重封之甁.亦皆透入其內.極可怪也.市肆及人家所排器物.以雞尾帚.不住拭拂.而暫停輒積. :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붙으면, 닦아도 떨어지지 않고, 입속으로 들어간 것을 씹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나기도 한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 먼지가 종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이불 위에 쌓여 있다. 심지어는 겹겹으로 된 장롱이나, 두세 겹씩 봉해 놓은 병 속에까지 뚫고 들어가니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저자 가게나 인가에 벌여 놓은 기물들은 닭털로 된 털이 개를 가지고 끊임없이 털어 내는데, 잠시라도 멈추면 또다시 쌓이곤 한다. 有風則行者不能開眼.北京尤甚.都是石炭滓棄之地而成屑者.古所謂緇塵是也.加以人溺所漬.飛入口中.輒生鹹味.大街上皆洒水以浥.而亦莫之禁也. : 바람이 불면 길 가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북경(北京)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地方)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의 ‘치진(緇塵 세상 풍진 속에 분주하여 의복이 더럽혀짐)’이란 것이 곧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오줌에 젖은 먼지가 입속으로 날아들면 문득 짠맛까지 나게 되므로, 큰길에서는 모두 물을 뿌려 적시기도 하지만, 역시 아주 없애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➊ 요동(遼東)에서 북경(北京)까지, 이곳의 토질(土質)은 : <모두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찰 져서, 해동(解凍) 때나 장마 때는, 바퀴에 붙어 지나가기 어렵고, 또 집 벽에다 바르면 빗물이 스며들 걱정이 없다. 그런데 곱고 부드러운 이 흙은 다 모래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치 연무(煙 霧)처럼 먼지가 인다.>고 하였다.
<고운입자의 모래(沙)로 온통 뒤덮여 있는 땅>이란 이야기다. <이것이 메마를 때는, 바람이 불면, 가는 입자의 모래가 날려 사람을 괴롭힌다.>는 설명(說明)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現在)의 요녕성(遼寧省) 요동(遼東)으로부터,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까지의 토질(土質)이 맞는가?
➋ 이런 현상(現象)은, <북경(北京)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地方)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현재(現在)의 북경(北京) 토질(土質)을 설명(說明)한 이야기다. 과연 올바른 이야긴가?
➌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1,720년 상(上) :《自渡江至北京.地皆沙.自入遼野.往來車馬益多.沙益細.乍風輒揚.狀若煙霧. :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북경(北京)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遼東)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關內尤甚.雖無風之日.輪蹄間觸起者如灰揚.着人衣帽.在轎內.垂紗以遮.而由其細故.透入尤易.頃刻之間.堆積如丘. :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고 하였다.
1) 이곳에서도 <요동(遼東)으로부터 북경(北京)까지, 땅이 모두 모래(地皆沙)> 라고 설명(說明)한다. <북경(北京)은,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2)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는 1,720년이요, 연원직지(燕轅直指)는 1,832∼1,833년이다. 시차(時差)는 약 일백(一百)년이다. 조선(朝鮮)에서 연경(燕京)으로 가는 곳의 토질(土質), 또는 연경(燕京)의 토질(土質)이, 1,720년대와 1,832년대가 같았다는 뜻이다. 이는 지세(地勢)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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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원직지(燕轅直指) 1,832년∼1,833년 제6권 / 유관별록(留館別錄)
➨ 음식(飮食) : <飯米皆田稻老米.以其無水田.而皆旱田所種.故米性燥硬.不堪下咽.關外皆飯小米與蜀黍老米. : 밥 짓는 쌀은 모두 밭벼의 묵은 쌀이다. 논이 없어 모두 밭에다 심은 것이기 때문에 끈기가 없고 뻣뻣해서 잘 넘어가지 않는다. 산해관(山海關) 밖에서는 모두 좁쌀과 옥수수로 밥을 짓는다. 중략. 京外店鋪肴羞.皆以猪羊肉.和蔥蒜爲之.如胡盧粉湯及餠食之類.臊辣逆胃.殆不堪近口.但曉夜風雪喫之.可以禦寒. : 북경 밖의 점포에 있는 술안주 등은 모두 돼지고기, 양고기에다 파와 마늘을 섞어 만든 것이다. 호로분탕(胡盧粉湯)이나 떡 종류들은 맵고 누린내가 나서 비위에 맞지 않아 입에 댈 수가 없다. 그렇지만 아침저녁 눈보라가 칠 때 먹으면 추위를 막을 수 있다. 食肉專尙猪.羊驢雞鵝次之.牛馬則禁之甚嚴.皇城內惟有一庖.日殺數牛.以供御用云. : 먹는 고기는 돼지고기를 제일로 치고, 양ㆍ노새ㆍ닭ㆍ오리 등이 그다음이다. 마소 고기는 법금이 엄격하여, 황성 안에 겨우 1개의 푸줏간이 있을 뿐으로 하루 몇 마리의 소를 잡아 어용(御用)에 바치는 정도이다. 중략.>
➊ 수전(水田)이 없다면, 어떻게 위의 글 <(3) 연원직지(燕轅直指) 제6권 / 유관별록(留館別錄) ➨천지산천(天地山川)> 편에서 동남(東南) 또는 동(東)쪽과 남(南)쪽은, 평야(平野)지대라고 이야기하는 걸까?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의 동(東)쪽 지방은 평야(平野)지대이며, 남(南)쪽 또한 많은 평야(平野)지대가 있다.
북경(北京)주변(周邊)은, 수전(水田)이 없어, 밭(田)만 있었는데, 이것도 아주 적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지세(地勢)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은, 현재(現在)의 북경(北京)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➋ 북경(北京) 밖에서는, <돼지고기와 양고기>가 술안주로 많았고, 특히 ‘돼지고기를 제일로 치고, 양ㆍ노새ㆍ닭ㆍ오리’등의 고기요리가 있었는데, 소고기는 엄격(嚴格)하게 규제(規制)하고, 어용(御用)으로만 바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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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燕 轅 直 指 卷 六 / 留 館 別 錄 / 人 物 謠 俗
《滿人皆豐碩.生子多至七八者多.似其旺運未替也. : 만인(滿人)은 모두 헌칠하게 크게 생겼고, 아들을 일곱 명까지 낳은 사람이 많았으니, 그들의 왕운이 아직 쇠퇴하지 않은 듯하다. 중략. 無論漢滿女多美色.而關外素稱尤多美者. : 한족 여인이든 만족 여인이든 막론하고 대부분 예뻤으며 관외가 더욱 미인이 많다고 일컫는다. 중략. 女人三十以上.擧已衰謝.蓋夙成而早衰也. : 여자들이 30세 이상이면 거의 다 노숙해 보이니, 이는 대개 일찍 성장하고 일찍 노쇠하기 때문이다. 無論男女.多白晢豐腴者.以常食肉故也 : 남녀를 물론하고, 살결이 희고 뚱뚱한 사람이 많은데, 이는 평소 육식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
➊ <滿人皆豐碩.生子多至七八者多.似其旺運未替也. : 만인(滿人)은 모두 헌칠하게 크게 생겼고, 아들을 일곱 명까지 낳은 사람이 많았으니, 그들의 왕운이 아직 쇠퇴하지 않은 듯하다.> 만인(滿人)은 곧 청인(淸人)이며, 여진(女眞)이고, 말갈(靺鞨)이며, 물길(勿吉)이며, 읍루(挹婁)고, 숙신(肅愼)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구라파(歐羅巴)계열(系列)의 인종(人種)으로, 산해경(山海經)의 주석(註釋)과 회남자(淮南子)전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이들은,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던 인종(人種)들이다.> 고조선(古朝鮮)의 일원(一員)이었으며, 고조선(古朝鮮)의 통치(統治)를 받았다.
➋ <無論漢滿女多美色.而關外素稱尤多美者. : 한족 여인이든 만족 여인이든 막론하고 대부분 예뻤으며 관외가 더욱 미인이 많다고 일컫는다.> 여기서 관외(關外)란 산해관(山海關) 밖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朝鮮) 땅에서도 이와 같은 예(例)가 있다.
➨ <함관(咸關)의 남쪽과 북쪽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관북(關北)의 여자(女子)들은 “체구가 크고 살갗이 희며” 베 짜기를 잘하여 상납(上納)을 바치는데, 항시 양기(陽氣)를 피하여 흙집에서 베 짜는 일을 한다. 한 해에 2단(端)을 짜는데 그 값이 돈으로 치면 수백 금에 해당한다. 중략.> 고 하였다.
➌ <女人三十以上.擧已衰謝.蓋夙成而早衰也. : 여인(女人)들이 30세 이상이면, 거의 다 노숙해 보이니, 이는 대개 일찍 성장하고 일찍 노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종(人種)의 특징(特徵)은, <전형적(典型的)인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아랍 인종(人種)들의 특색(特色)이다.> 이러한 면(面)을 살펴보면 : ‘북경(北京)=연경(燕京)’은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북경(北京)=연경(燕京)>이다.
➍ <無論男女.多白晢豐腴者.以常食肉故也. : 남녀를 물론하고, 살결이 희고 뚱뚱한 사람이 많은데, 이는 평소 육식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고기(肉)를 많이 먹는다고 백인(白人)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종(人種)자체(自體)가 백인(白人)계열(系列)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형(體形)을 가진 사람들은 아세아(亞細亞)중에서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그 서남(西南)지방뿐이다.
➎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 《淸人大抵豐偉長大.而間有面目極可憎者.羶臭每多襲人.言辭擧止.全無溫遜底氣象. : 청인(淸人)들은 대개 몸이 살지고 큰데 그중에는 얼굴이 몹시 가증스러운 자도 있다. 누린내가 많아서 사람에게 풍기기도 한다. 언사와 행동이 전혀 공손한 기상이 없다. 漢人則頗加斂飭.外貌亦稍端正.而南方人輕佻狡詐.面形尖薄.氣稟然也.語操南音與尋常漢人絶異.雖於自中言語.亦不能盡通.如我國所謂遐方使土俚矣. : 한인(漢人)은 상당히 몸을 단속하고 외모도 좀 단정하지만, 남방 사람은 경솔하고 간사하며, 얼굴 모양도 뾰족하고 얇으니, 이것은 기품이 그러한 것이다. 말투는 남방 음성이어서 보통 한인과는 아주 달라서 자기들끼리도 말이 다 통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먼 지방의 사투리와 같다. 중략. 淸人則稱滿州.漢人則稱蠻子.滿州本女眞之號.稱之以此.固其宜矣.而其稱蠻子者.有未可曉矣. : 청인(淸人)은 만주(滿洲)라고 하는데, 한인은 만자(蠻子)라고 부른다. 만주(滿洲)란 본래 여진(女眞)의 이름이니, 이렇게 부르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그런데 만자(蠻子)라고 부르는 것은, 알 수가 없다.》
1)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와 연원직지(燕轅直指) 기록(記錄)의 시대적(時代的) 차이(差異)는 약 일백(一百)년이 넘는다. 비록 일백(一百)년이 넘는 차이(差異)가 있으나, 인종(人種)은 똑같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누린내(전취 : 羶臭)는, 동아세아(東亞世亞)인은 거의 없다. 소위 ‘암내’라고도 하는 누린내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구라파(歐羅巴)인들의 특색(特色)>이다.
2) 만인(滿人) 곧 청인(淸人)들은, 만자(蠻子)라고 하면서, 오랑캐 곧 미개(未開)한 종족(種族)으로 취급(取扱)받았다는 이야기다. 청인(淸人)은 곧 여진족(女眞族)이다. 이들의 몸에서 누린내(羶臭)가 나서 못 견딜 정도(程度)라고 하는데, 전형적(典型的)인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러시아인>들의 특색(特色)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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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齎或見女娘馳馬者.頭着藤笠.左右七步倒掛.尸掛之法.極其蹻捷.謂是漢女之貧者.無以資生.以此得錢云.路上乞女.亦多漢女. : 길에서 더러 여자가 말 달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여자는 머리에 등립(藤笠)을 쓰고 좌우로 7보(步) 간격으로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였는데 그 방법이 매우 재빨랐다. 이는 가난한 한족 여자로서 생활할 길이 없어, 이런 짓을 해서 돈을 얻는다고 한다. 노상에서 걸식하는 여자 중에는 역시 한족 여자가 많았다. 중략. 自遼至西.地皆平衍.一風一雨.沙移失路.故往往植柳以識路. :요동에서부터 서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평탄하고 넓다. 그래서 바람이 한번 불거나 비가 한번 오면 모래가 이리저리 옮겨져서 길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이따금 버드나무를 심어서 길을 식별하게 했다. 중략. 婚姻之禮.男女幼時約婚.未成禮.而男子死.猶且終身守寡云. : 혼인하는 예절은, 남녀가 어렸을 때 약혼하며, 성례(成禮)하지 못한 채 남자가 사망하게 되면, 그 여자는 종신토록 수절(守節)한다고 한다.》
➊ <路 上 乞 女. 亦 多 漢 女. : 노상에서 걸식하는 여자 중에는, 역시 한족 여자가 많았다.>
➋ <自遼至西.地皆平衍.一風一雨.沙移失路.故往往植柳以識路. : 요동(遼東)에서부터 서(西)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평탄하고 넓다. 그래서 바람이 한번 불거나 비가 한번 오면, 모래가 이리저리 옮겨져서 길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이따금 버드나무를 심어서 길을 식별하게 했다.>
이 얘기는 요동(遼東)으로부터, 요서(遼西)지방 곧 북경(北京)까지의 땅은,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것을 증거(證據)해 준다.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모래(沙)가 이리저리 이동(移動)하면서 모래구릉(丘陵)을 만들고, 이리저리로 옮겨진 모래 때문에, 길이 없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길 주변(周邊)에 느릅나무(楡)=(柳)를 심어, 이정표(里程標)로 삼는 것이다.
특히 3월쯤에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 모든 것들이 다 변해버린다. 그래서 고속도로(高速道路) 또는 포장(鋪裝)된 도로(道路)변에는 검정색의 ‘콜타르’를 살포(撒布)하여, 모래가 날리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은 이치(理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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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歷史)는 한 사람의 통치자(統治者)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구성원(構成員) 모두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社會)에서 일어나고 있는 초유(初有)의 “국정농단사태”는, 통치자(統治者) 한 사람의 욕심(慾心)과 무능력(無能力)으로 인한 과오(過誤)로 인해, 수많은 구성원(構成員)들이 피해(被害)를 입고, 국정(國政)에까지 미쳐, 혼돈(混沌)의 사태(事態)를 만든 것이다. 지도자(指導者)를 선출(選出)한다는 것이, 구성원(構成員)들에게 가장 중요(重要)한 일이란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2016년 12월 0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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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나라 연경이 사막지대인 신강성 천산 그어디쯤있었다하더라도 조선사를 이해하는데 해결불가한것이 바로 병자호란 일겁니다. 왜? 거리가 너무 멀다는것이죠.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군에게 대가리박아가며 항복한것이 조선의도읍지인데 연행사신들이 연경에간 연행록을 근거로들면 너무멀어서 군사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연경이 오늘날 내몽고의 호화호특이라면 병자년의 호란정도는 해결이됩니다. 그렇지만 이곳은 연행록의 여정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해보입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요?
안녕하세요. <대부여>님!
연경을 찾아보면 : 고전에서 연경을 찾다보면 그들의 인종이나 체형등과 주변의 지세등은 분명 대륙의 먼 서쪽지방을 말하고 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군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했다는 사실이 정말로 역사적 사실인가? 하는 거지요.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투지방의 호화호특 정도라면 황하를 도하하여, 일사천리로 조선의 황도를 향해 내려 꽂을 수 가 있지요. 그런데 전의 말씀드린 대로, <황중(湟中)지방을 언제나 수복할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적은 기록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청은 지금 청해성 서녕 동쪽 "황중"까지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당면과제는 바로 '연경'과 '장안'과의 '여정'문제입니다.
너무 멀다는 것이죠.
우선은 북경이나 연경에 대한 그 지리적 위치를 기록과 매치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고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찾다보면 뭔가 좋은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관심과 성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