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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 제국(吐蕃 帝國)의 군사제도와 전쟁 0.1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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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c 토번(吐蕃)이 역사적으로 점한 위치는 높으며 특히 8c 후반기에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라 칭해도 틀린말이 아닐 정도로 매우 강성한 제국(帝國)을 이루었다. 실제 그들의 강성함으로 인해 그들은 당(唐),남조(南詔),위구르(回紇),압바스(大食),팔라(天竺)의 연합공격을 받아야했다.(이들 국가들이 연합했다는 자료는『자치통감 권227 당기45(資治通鑑 卷227 唐紀45)』,『자치통감 권232 당기48(資治通鑑 卷232 唐紀48)』,『구당서 권195(舊唐書 卷195)』,『신당서 권217 상(新唐書 卷217 上)』에 있으며 실제 이들은 토번을 공격했으나 재상 이필(李泌)의 주장대로 연합에 성공한것인지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위구르와 당조의 동맹은 연합 성격을 띄고 있다.)
지도1):792년 후반 토번(吐蕃)의 영토
그들은 막강한 제국이었으며 유일하게 당(唐) 제국 수도를 점령한적이 있는 이민족이었다. 실상 안사의 난 이후 위구르 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실상 토번제국의 유아독존(有我獨存)시기나 다름 없었다.
이렇게 그들이 당시 강대국들로부터 속칭으로 말하자면 "다굴"을 받을정도로 강한것에는 군사적으로 강력한 면이 있었기 때문일것이다. 오늘 본인은 토번 제국(吐蕃 帝國)의 군사제도(軍事制度) 및 전쟁(戰爭)을 다루고자 한다. 일단 앞서 말해두자면 토번 군사들이 강력했던 이유는 그들은 반유목 반정주국으로서 정주국의 특징과 유목민의 특징을 모두 보유했고 그들은 정주와 유목의 장점을 잘 이용했다. 일단 이는 나중에 다시 논할것이고 먼저 토번 군사들의 무장을 보도록 하자.
『통전(通典) 卷190』
토번(吐蕃) 병사(兵士)와 군마(軍馬)는 모두 훌륭한 솜씨로 제작된 갑옷을 입는다. 갑옷은 눈만 빼고는 온몸을 감싸며 아무리 강한 활과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그들을 해치지 못한다. 싸울때는 말에서 내려 정렬해 싸우며 앞의 병사가 죽으면 뒤의 병사가 그 자리를 메운다. 그들은 끝까지 싸우며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창은 우리 중국(당제국)것보다 길고 창 끝은 매우 날카로우며 활쏘는 솜씨는 신통치 않다. 전투를 하지 않을때도 병사들을 칼을 차고 다닌다.
『신당서 권216(新唐書 卷216)』
그들은 활과 칼, 방패와 창, 갑옷과 투구를 갖고 있다....(생략)...인간과 말은 정교하게 가공된 쇠로 만든 갑옷으로 덮어져 있다.
이 2기록을 가지고 보면 대충 토번인들의 무장형태를 알 수 있다. 긴 장창과 방패를 들고 칼을 차고 다니며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정렬해 싸운다... 기록을 종합해보자면 상상되는 것은 거대한 방진을 형성한 군대이다.
그림1):마케도니아의 방진(方陣)
그들은 4~5m짜리 창과 방패로 무장하였으며 이러한 방진은 큰 효과를 가지고 왔다. 마케도니아 외에도 창 길이는 이보다 짦지만 그리스 폴리스국가들도 이러한 방진을 사용했으며 방진이 흩어지지 않는 이상 그들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이들이 진을 치고 싸웠다는 것은 『구당서(舊唐書)』에 역시 나오는데 "군법(軍法)은 엄하여 매 전투에서 맨 앞열이 모두 죽임을 당한뒤 뒷열이 진격하며"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앞렬과 뒷렬이 있다는것은 이들이 진을 치고 싸웠다라는 말이된다. 또한 이렇게 물러서지 않는 근성 덕에 그들은 방진(方陣)의 막강한 제대로 보여줬을 것이다.(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이긴것은 그리스 방진(方陣)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 크다.)
다만 이들이 다른 국가들의 방진과 다른점이 있다면 일단 이동할때는 말을 타서 이동했다는점 그리고 짠파와 같은 간단함 음식을 먹었다는 점이다. 중무장보병대의 최대 약점은 바로 기동력이다. 그들은 말을 타고 이동하는 승마보병(乘馬步兵)으로서 이를 커버하였고 짠파나 육포와 같은 간단함 음식 덕분에 단기간 전쟁에서는 취사병을 거느리지 않아도 됬다.
이러한 전술은 유목민들에게서 주로 볼 수 있는것이다. 보통 방진은 정주국들이 자주 이용하는 진형이며 기동력이나 육포와 같은 간단한 음식들 역시 유목민의 특징중 하나이다. 앞서 말했듯이 토번은 반정주(半定住) 반유목(半遊牧) 국가이고 그 정주와 유목의 특징을 모두 지녔다. 이러한 토번의 승마보병은 그들의 반정주(半定住) 반유목(半遊牧)에서 나온 산물일것이다. 그들은 승마보병(乘馬步兵)덕분에 기동력 있는 중무장 보병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림2):중세 티베트의 기병과 보병
중세시대라 고대와 많이 다르지만 아마도 고대 토번인들도 창에 철을 돌돌 감아 잘 부러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또한 창 길이 역시 기록을 볼때 저것보다 더 길었으리라 본다.(당나라 창 길이가 1.5~2.5m 정도라는걸 볼때 아마도 토번의 창 길이는 3~5m정도 되었으리라 본다.)
위에 제시한 사료 『통전(通典) 卷190』에서는 토번의 갑옷을 가리켜 "갑옷은 눈만 빼고는 온몸을 감싸며 아무리 강한 활과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그들을 해치지 못한다."라고 칭할정도로 토번의 갑옷의 단단함을 말하였다. 물론 이는 과장일 가능성도 있지만 굳이 중국인이 이 기록을 과장시킬 필요는 없을것이다. 그럼 이제 토번의 갑옷을 보도록 하자.
토번의 갑옷에 대한 자료를 보자면 그들은 아주 단단한 갑옷을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헌들을 보자면 "토번의 병사들은 모두 갑옷을 입는다." 라고 칭했을 정도로 그들은 갑옷 보급률이 아주 좋았다. 이렇게 갑옷 보급률이 좋고 그들의 갑옷이 튼튼한것에는 그만한 기술이 있을것이다.
시노다 고이치(篠田 耕一)의 저서 『무기와 방어구(중국편)』을 보면 티벳이 냉단법(冷鍛法)을 최초로 개발했다고 나온다. 정확히 언제부터 티벳이 냉단법(冷鍛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6~9c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토번 문헌에서는 지굼첸포(志共布,Gri-gung btsan-po)때 이러한 발달이 있었다고 하지만.(『dPa'o gTsug-lag phreng-ba 연대기, Lhodrag판, 목판본,1545~1565』) 그것은 전설상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그러한 갑옷이 나오는것은 빨리 잡으면 남리루첸 늦게 잡으면 8c로 볼 수 있을것이다.(더불어 말하자면 이러한 철기술은 아마도 중국과 사산 왕조로부터 받았으리라 추측한다. 티벳의 지리적 이점으로 볼때 그들은 동서 아시아의 기술을 모두 흡수 할 수 있다. 실제 토번제국의 의술만 봐도 서아시아와 인도 그리고 중국 의술의 혼합체이며 그것이 독창적인 것으로 발달한것이다. 그들은 중국과 사산 왕조로부터 철재련술을 받았고 이를 나름대로 발달시켜 냉단법(冷鍛法)이라는 기술을 만들어냈을것이다.)
그림3):토번(吐蕃)의 갑옷
8~9c 토번(吐蕃)이 점거했던 미란요새에서 출토된 갑옷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냉단법(冷鍛法)을 사용해 만들어진 토번의 갑옷은 단단하면서도 잘 안부러졌고 생산속도가 빨랐다.
그림4):토번(吐蕃)의 갑옷과 투구
전형적인 티베트(Tibet) 갑옷으로 티베트 갑옷의 형태는 5~6c로 시작하여 특별한 변화없이 오랜 세월 유지되었다. 러멜러(lamellar)형식이며 이러한 티베트 러멜러(lamellar)갑옷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것이 몽골의 러멜러(lamellar) 갑옷이었다. 그만큼 티베트 갑옷은 성능이 좋았으며 그들에 제철기술과 갑옷제작 기술은 여러나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어쨋든 철을 달구지 않고 두드려서 만드는 냉단법을 사용할시에는 일단 생산속도가 훤신 빠르고 철의 표면이 검푸른색을 띄며 단단해진다. 이러한 냉단법은 당시 여러나라에서 사용했던 소입(燒入:달금질로 불에 달군 철을 급격히 냉각 시키는것을 말한다. 철을 다루던 보통적인 방법이다.)의 단점인 "단단하나 잘 부러진다."라는 단점을 보완해주었다.(유럽에서는 13c정도부터 냉단법을 사용했는데 냉단법은 플레이트 아머를 만들때 유용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냉단법(冷鍛法)을 사용한 토번제국(吐蕃帝國)은 갑옷 생산 속도가 타국들에 비해 엄청 빨랐을태고 그러한 덕에 갑옷 보급률이 좋았을 것이다. 또한 당시 소입(燒入)을 주로하던 국가들에 비해 단단하고 안부러졌을것이고 이러한 토번의 갑옷 성능이 중국 기록에 저렇게 나왔을것이라 추측해본다.
참고로 말하자면 토번에 철이 잘 안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토번 남부와 숨파땅은 철의 산지였고 청해지방의 강족들 역시 철을 잘 다루었다. 무엇보다 출토되는 갑옷만 보아도 토번에 철이 많이 안나온다는 말은 틀렸다는것을 볼 수 있다.(『Les tribus anciennes des marches sino-Tibetaines, Melanges publ. par l'lnstitut des Hautes Etudes chinoises, XV, Paris.196』)
이렇듯 토번은 질 좋고 양이 많은 갑옷을 보유하였고 이러한 토번 갑옷은 적들의 칼과 활로부터 보호해주었으며 전쟁때 큰 활약을 보여줬을 것이다. 잘 알고 있겠으나 무기의 질만 좋아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군대의 훈련도와 정신력 그리고 그러한것을 만들어주는 군사제도 역시 전쟁을 크게 좌우하는 요소중 하나이다.
앞서 말해두자면 토번은 고대 유럽의 스파르타(Sparta)와 매우 비슷한 면을 보인다. 물론 두 국가 모두 강력한 노예제 국가(양측다 인구중 70% 이상이 노예다.)이며 전사기질이 강하여 그렇겠지만 그들은 정말 비슷하다. 스파르타에 국유노예 헬로트(Helots)가 있다면 토번에는 방금락(邦金洛)이라는 국유노예가 있었다.(『돈황학이란 무엇인가 p124』) 어쨋든 이는 나중에 논해보도록 하고『구당서(舊唐書)』를 보자.
『구당서 토번전(舊唐書 吐蕃傳)』
군법은 엄하여 매 전투에서 맨 앞열이 모두 죽임을 당한뒤 뒷열이 진격하며 중상을 입은자와 악질에 걸린자는 죽임을 당한다...(생략)... 전투에 임하여 패배한 자는 공개적으로 여우의 꼬리를 머리에 올려서 비겁한 자의 본보기로 삼아 모욕을 당하게해서 대중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해 스스로 자결하거나 전쟁에 패해한 것에 모욕을 당하여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면 양손모두 땅바닥을 집고 개처럼 짖으며 몸을 구부렸다 폈다하기를 반복했다.
다른 전사민족들과 마찬가지로 토번(吐蕃) 역시 명예를 굉장히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패배와 후퇴를 큰 수치로 여기는 이들에 이러한 정신은 매우 강력한 힘을 보여주었다.(이 역시 스파르타에서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스파르타의 전투는 테르모필라이(Thermopylae)전투 일것이다. 그 전투에서 왕과 전사들은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특히나 방진을 중점으로가는 토번 보병대에게 이러한 정신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할것이다.
토번제국(吐蕃帝國)과 스파르타(Sparta)의 다른점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이런것일 것이다.
첫번째로 빈부격차이다. 스파르타(Sparta)는 헬로트(Helots)든 귀족이든 왕이든 전사든 모두 검은죽(그것에 맛은 외국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죽음이라고 한다.)을 먹었다. 그들의 빈부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에 비해 토번의 빈부격차는 대단히 심했다. 귀족들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는 반면 방금락(邦金洛)들은 하루 2끼가 끝이었다.
그림5):스파르타(Sparta)의 중장보병
토번(吐蕃)은 이들과 매우 비슷했는데(무장이든 사상이든 스파르타와 많이 유사하다.) 스파르타(Sparta)의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토번은 개개인의 질을 높여 공동체전(방진으로 여럿이 뭉쳐 싸우는것)과 더불어 난전(혹은 개개인에 싸움)에도 강하였다.
두번째로는 병역의무이다. 스파르타는 병역의무는 신성한 것으로서 오로직 귀족과 전사들만이 맡게 되고 헬로트(Helots)에게는 병역의무를 주지 않았다. 있다면 그것은 잔심부름이었다. 이에 비해 토번은 토번 역시 병역의무를 굉장히 성스러운 임무로 여기고 전쟁에서 죽는것을 최고의 명예로 여겼으나 방금락(邦金洛) 역시 사람으로 쳐주어 병역의무를 맡게 하였다. 그 덕에 토번은 스파르타와 달리 많은 병력을 뽑아낼 수 있었다.(실제 스파르타의 병사가 적은것은 인구수도 있지만 헬로트에게 병역의무를 주지 않았다는점이 가장 크다. 인구중 80% 이상이 헬로트인 스파르타는 헬로트에게 병역의무를 주지 않았기에 병력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전쟁포로로서 방금락(邦金洛)이 된 방금락(邦金洛)은 팔과 머리에 수치스러운 노예 문신을 세겨야했고 그들은 병역의무를 받을수 없었다. 있다면 스파르타의 헬로트와 마찬가지로 잔심부름이었다.
전사민족 기질이 강한 토번인 만큼 그들은 '강자숭배'가 강했는데 대표적인 증거로 『구당서 토번전(舊唐書 吐蕃傳)』에는 "혈기왕성한 건장함을 중시하여 늙으면 천시하였고 어머니는 아들을 섬겼으며 아들은 아버지의 뒤에 걸었으며 출입시엔 어린자는 앞에서고 늙은자는 그 뒤에 걸었다."라고 적어두었다. 실제 토번의 강자숭배 사상은 강하였고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아비일지라도 약하면 무시하기 일 수였다. 이는 티벳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토토리 첸포의 시대에 두명의 의사가 인도에서 토번을 방문했다. 그때 그들은 병자가 집 밖으로 실려나가는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병자를 쫓아내는것이 티벳의 관습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티벳인은 "만일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그들을 문 밖으로 쫓아내지 않지만 부모가 아프면 자식들은 부모님을 쫓아낸다."라고 답해주었다.(『의사 古 gYu-thog 傳 Derge판 목판본 141』)
이 일은 마치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이야기인 고려장을 생각나게 만드는 가슴아픈 이야기지만 도덕점 관념이 없었던 티벳인들에게 늙은 부모는 그저 걸리적 거리는 쓰래기였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토번의 풍속중 하나였다. 이러한 고려장 풍속의 심각성을 알았던 송첸캄포는 16조 도덕적 규칙에 "부모의 자애로움에 대해 악하게 보답하지 말아야한다."는 의무를 강조하였으나(『Ma-ni bka'-bum, Dreg판, 목판본 2권』) 이는 중앙티벳에서 주로 실행됬지 동부와 서부에서는 고려장이 계속 발생했다. 그래서 치송데첸 역시 법전을 편찬할때 "노인을 존경심을 갖고 보호하고 그들을 불쾌하지 말아야 할것"을 넣었다. 그리고 이러한 늙은 부모를 버리는 악습은 티벳이 불교화 되면서 사라졌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들은 강자만이 존재해야한다는 사상을 굳건히 믿었고 이는 스파르타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남부외지사람들을 남쪽오랑캐라는 몬(mon) 북쪽 사람들은 날것이나 먹는 북쪽 오랑캐라하여 호르(Hor:이말은 이후 위구르를 칭할때 사용된다.)라 칭하며 자신들과 별도로 취급하였고 자신들은 세상의 배꼽으로 여겨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다. 이러한 오만한 사상 역시 스파르타(Sparta)의 사상과 다를게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힘의 배경이 되어주었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또한 후퇴하지 않고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우는 그들의 모습은 적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제 군사제도를 보자 토번의 군사제도는 크게 보면 천하병마도원수(天下兵馬都元帥)인 태상룬(國相)의 지휘하에 보통 있었고 나라는 크게 6개로 나누어 6루첸으로 두었다. 이러한 군사개편은 주로 7c 가르통첸(祿東贊)이 주도하여 만들었다.(『구당서 토번전(舊唐書 吐蕃傳)』) 7c에 그는 전국을 6개로 나누었고 자신은 그 6부의 수장으로 올랐다. 6개의 부는 행정과 더불어 군사에 적용되었고(이는 티벳이 민군정일치(民軍政一治)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5개의 부를 따로 만들어 2개의 부는 "노역자의 집단"으로 만들었고 나머지 3부는 "전사 집단"으로서 국경을 수비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전사 3부를 61개의 천명 단위의 조직으로 만들어 61000명의 정예전사들을 따로 선별해냈다.
그들은 티벳 문서에서 말하는 대로 "군역에 종사하는 최고의 국민"이었고 대접은 화려했다. 그들은 "법에 의해 징발된 노역자"와는 따로 분리되었고 특별한 계층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전사 3부는 나중에 토번이 더 거대해지면서 20만정도 즉 200개의 1000단위 조직으로 나누어진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은 토번의 국력상승과 크게 연관되 있다.
그들은 "군역에 종사하는 최고의 국민"이든 "법에 의해 징발된 노역자"든 13세부터 그들은 군역에 종사해야했다. 그리고 그것은 40~50세가 되어야 끝이 났다. 그러나 보통 이렇게 끝이난 자들은 자식들에게 버림받아 과거의 영광스러운 전쟁들을 떠올리며 쓸쓸한 생으로 끝을 내야했다. 어쨋든 그들의 군사행정은 이렇듯 민군정일치였다.
전쟁에서 빼놓을수 없는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일 것이다. 토번인들은 철재련 기술도 뛰어났지만 수성이나 성 쌓는 기술 역시 뛰어났다. 이는 미란(米蘭)요새가 증명해주는데 8c에 티벳이 점거한 미란에 요새는 높이가 11m~13m일정도로 높았고 그 성벽 위에 또 2m짜리 성벽이 있었다.(『실크로드 이야기 수잔 휫필드(Susan Whitfield)저』)
지도2):미란(米蘭)요새 평면도
『실크로드 이야기 수잔 휫필드(Susan Whitfield)저』에 나오는 이 평면도는 티벳 요새의 구조를 알 수 있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들은 성벽위에 성벽을 만들었고 성 내부는 복잡한 미로같은 길로 만들어 성 안에서도 방어가 유리하도록 만들었다.
요새의 수비는 보통 3시간씩 8교대를 하였으며 적군대가 올 곳에는 미리 방책이나 나무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를 만들어두어 수성에 유리하도록 만들었다. 또 각 방책과 나무말뚝에는 소규모의 궁수부대를 배치하여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적에게 피해를 입히도록 만들었다.(『실크로드 이야기 수잔 휫필드(Susan Whitfield)저 p84』) 토번의 수성전은 쇠날요새전투나 여러 요새전투에서 이미 보여준 바이다.
토번군의 신호는 주로 봉화를 통해 알려졌다. 그들은 각 요새 근처와 요충지에 봉화를 설치하였고 소봉화의 경우 6~12명이 근무하였으며 대규모 봉화의 경우 수백명이 지켰다. 그들은 봉화 아래에 막사를 치고 근무했는데 봉화대위에는 봉화받침대 3개가 솟아있고 바침대에서 그 아래 막사까지 도화선이 이어져 있어 적들이 급습해도 막사에서 도화선에 불만 붙이면 바로 적들의 침입을 알릴수 있었다. 소봉화의 경우 3개의 봉화가 있었으며 2개에서 연기가 오르면 경계 3개는 적이 나타났다. 1개는 경보해제를 알렸다. 봉화에는 약 3~4주간의 식량이 비축되있었다.(『실크로드 이야기 수잔 휫필드(Susan Whitfield)저 p84』)
공성무기로는 중국의 무기 영향을 많이 받은것으로 보여지는데 아마도 그들은 충차나 투석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때로는 투석기에 석회가루와 비소를 천으로 싸서 얇은 토기속에 체워 넣어 유독 가스를 내뿜게 만드는 발연탄을 넣어 쏘기도 하였다.
그림6):당나라의 석포(石砲)
삼국사기를 보면 요동성 전투때 당나라 석포(石砲)가 거대한 바위를 300보 이상 날렸다고 한다. 당나라 공성무기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기록이며 토번의 공성무기 역시 이러한 당나라의 공성무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토번군은 창에 가연성 물질을 바르고 있다고 적의 병사들이 돌격해오면 불을 붙여 불타는 창을 적진에 던져 적진을 무너트린뒤 진격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술은 적의 진영을 무너트린 다음 방진으로서 적진을 공격해버렸기에 효과적이었던것으로 보여진다.
토번은 이렇듯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기에 7~9c 특히 8c에 막강한 제국으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들의 반정주 반유목 그리고 강력한 노예제는 그들만의 특별한 군사제도를 만들어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제대로 발휘하여 강대국으로 성장 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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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구당서 토번전(舊唐書 吐蕃傳)』
『통전(通典) 卷190』
『신당서 권216(新唐書 卷216)』
『구당서 토번전(舊唐書 吐蕃傳)』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티벳의 문화(Tibet Civilization)』
『티베트와 중국 김한규 지음』
『위구르 유목제국사 정재훈 저』
『How it's Made』
『실크로드 이야기 수잔 휫필드(Susan Whitfield)저』
『무기와 방어구(중국편) 시노다 고이치 저』
『페르시아 전쟁(Persian Fire) 톰 홀랜드 저』
『네이버 백과사전』
글쓴이:여소제(ssyeo)
=네이버 아이디=
첫댓글 지도 부분 태클들어올것 같아 미리 달아둡니다. 발해 신라의 지도가 불완전하며 신라가 북쪽으로 너무 나아간것은 본인에 실수로서 토번 위구르 당 중점에 지도임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발해 신라는 매우 건성으로 그냥...)
잘 읽었습니다. 요즘의 티벳의 이미지로는 저런 시절이 있었다곤 생각하기 어렵죠..
그러게요. 지금은 그저 눈물만...
굉장한 작품이군요... 잘 읽고 갑니다 ^^
유독 조명이 되지 않는 제국이었는데 정말 대단한 자료네요 잘읽고갑니다 ^^
으헉 발해가 저리 작은 나라였나 ㄷㄷㄷㄷ
맨위에 지도 대박읻 ㅏ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성기를 따지자면 동으로 장안(시안) 북으로 내몽골 서남부 서로 페르가나 남으로 북인도로서 아주 거대한 제국이지요. 뭐 북인도의 경우 50년 이상 지배했습니다. 팔라왕조가 위구르와 토번이 싸우는 사이에 토번을 몰아낼때까지 말이지요.
전 토번제국의 영토는 인정합니다만 거란이나 신라 발해영토의 너무 이상하게 되어있네요.
위에 덧글로 적어두었듯이 토번 위구르 당 중점으로만 만들다보니 다른쪽은 정말 대충 만들었습니다. 그냥 선하나 획 긋고 칠한수준
와. 고수분이군요. 토탈워 까페에서도 명장 가르통첸에 대한 여소제님 글을 봤는데, 이쪽 역사에서 본좌급이라 할 만합니다. 메이저 역사에 비해 티벳사를 공부하긴 더 어려울 것인데.ㄷㄷㄷ
음 정말 저렇게 막강할줄몰랐는데 ㅎㄷ......지금 티벳보면 정말 안구에 습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