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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은 좀 평범해서, 3편까지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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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 산맥
Day 01
6월 13일 : 생장피드포르 → 론세스바예스
6월 13일, 드디어 걷기 행련을 시작하는 날. 아침 6시에 기상, 알베르게에서 제공해준 빵과 잼을 먹은 후 전날 봐둔 인근 야산으로 향했다. 다른 순례자들은 즉시 길을 나섰으되 나는 수련을 하고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풀밭 위에 은박 매트를 깔고 그 위에서 호흡 명상을 시작. 온몸에 어마어마하게 탁기(濁氣, 탁한 기운)가 쌓여 있어서 그걸 배출하는 수련을 1시간 넘게 했다. 민박집에서 묵는 동안 제대로 수련을 못한데다가 전날 밤에 알베르게에서 수 십 명이 한 공간에서 잤으니 탁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내 경우 탁기가 쌓이면 몸속에 검은 연기가 쌓인 양 매캐한 느낌이 든다. 머리는 멍해지고 팔다리는 무거워진다. 자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만성 무기력증이 나타난다. 이럴 때는 탁기를 배출하는 수련을 해야만 몸이 개운해진다.
물론 한 번의 수련으로 몸속의 탁기가 쫙 다 빠지지는 않는다. 특히 이번처럼 며칠에 걸쳐 누적된 탁기는 빼내는 데도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래도 1시간 정도 수련하고 나니까 몸이 많이 맑아졌다.
수련을 마치고 나서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배낭을 짊어지고 전날 순례자 사무실의 할아버지가 알려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이다. 피레네 산맥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를 이루는 령(嶺)인데 해발 1,400미터 높이의 꽤 큰 산맥이었다.
가다 보니 ‘나폴레옹 길’이라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을 침공할 때 간 길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의기양양한 이름이겠지만 스페인 사람이 보면 기분이 별로 안 좋겠다 싶었다.
길은 가면 갈수록 가파르게 변했다. 나무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겹게 한 발 한 발 내딛었는데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내 배낭은 무게가 고작 12kg 정도밖에 안 됐는데도 그랬다. 한비야는 40kg짜리 배낭을 짊어지고 전 세계 오지를 누볐다는데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지 상상이 안 된다.
길은 가파르되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짙은 안개에 둘러싸인 산은 더없이 신비로웠고 안개 사이로 보이는 양떼와 말들은 이국적인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경치를 음미하기 위해 몇 번씩이나 멈춰 섰다.
12시 반쯤에 오리손이라는 이름의 알베르게에 도착. 2층으로 된 돌집이다. 가이드북을 보니 프랑스 영토 안에 있는 마지막 알베르게라고 했다. 그 앞의 나무 식탁에 앉아 빵과 과일로 요기를 했다. 한참 먹고 있는데 옆 식탁에 앉아 있던 조그마한 몸집의 대머리 아저씨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자기는 프랑스인이라면서 이름을 가르쳐준다. 내 이름도 물어온다. 내가 이름을 알려주자 수첩에 적기까지 했다(나는 그 분 이름을 금방 잊어버렸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반가워하면서 조만간 한국에 여행갈 참이었다고 말한다.
자기는 오늘밤 이곳 알베르게에서 잘 거라는 말도 했다. 아직 낮 1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순례를 그만두는 게 이상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더니, 이유를 설명하기를 산에 안개가 짙어서 아무것도 안 보여서란다. 날씨가 맑은 날 산의 경치를 즐기며 걷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안개 낀 산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로워 보이는데, 이런 날 피레네 산맥을 넘는 걸 축복으로까지 여기고 있는데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이렇게 다른 모양이었다.
이런 식의 얘기들을 주고받고 있는데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아저씨가 프랑스어로 뭐라 뭐라 말을 건다. 처음 말을 건 아저씨가 번역하여 알려주기를, 내가 어떻게 이 산티아고 길을 알고 오게 됐는지 궁금하다는 거였다.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기가 귀찮고 영어 실력도 받쳐주지 않아서 “파울로 코엘료의 책을 읽고 알게 됐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아, 그 브라질 작가!” 하면서 말하기를 그 작가가 산티아고 가는 길에 관해 가장 좋은 책을 쓴 작가는 아니란다. 프랑스에는 코엘료보다 훌륭한 작가가 많다는 투였다. 물론 나는 그 작가들이 누구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순례자》에는 코엘료가 이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겪는 2가지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 ― 코엘료가 안내자와 함께 힘겹게 힘겹게 정상에 올라왔더니 그곳에는 자동차 도로를 따라 버스를 타고 올라온 관광객들이 한가롭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더란다. 코엘료는 순간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하고 한심한 기분을 느낀다. 버스를 타면 금방 도착할 곳에 순례랍시고 힘겹게 걸어 올라온 자신이 우습게 느껴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고쳐먹는다. 그들과 나는 여행의 목적이 다른 것일 뿐이라고. 그들은 말 그대로 ‘관광’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버스를 타고 올라와 맥주를 마시며 즐기는 건 당연한 거라고. 나는 순례를 하고 있기에 이렇게 걸어서 올라온 거라고.
두 번째 에피소드 ― 코엘료는 몇 날 며칠을 계속 걸었는데도 피레네 산맥을 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코엘료가 “왜 이렇게 가도 가도 끝이 안 나오는가?”라고 묻자 안내자는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가에 대한 시험이었다”라고 대답한다.
안내자는 정확한 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거였다. 엉뚱한 길로 가는가 하면 우회로를 따라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천천히 걸어도 8시간이면 넘는 이 피레네 산맥을 몇 박 며칠을 걸려도 못 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코엘료는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면의 고민에 빠진 나머지 풍경에 신경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풍경을 몇 차례나 반복해서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며칠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피레네 산맥을 넘다 보니 이 두 가지 에피소드가 다 이해가 됐다. 이토록 경사진 산길을 힘겹게 힘겹게 올라왔는데, 편하게 버스를 타고 올라와 맥주를 마시고 있는 관광객들을 본다면 맥이 빠질 만도 했다. 또 피레네 산맥은 우리나라의 산들과는 달라서 기준점이 될 만한 큰 산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세수대야를 엎어놓은 듯한 지형이어서 일정 높이까지 올라가기는 무척 힘들지만 일단 오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완만한 구릉지대가 드넓게 펼쳐진다. 큰 산봉우리가 없으니 지형이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신경 써서 살피지 않으면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힘든 것이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완만한 구릉을 따라 평탄한 길을 걷게 됐는데 길 좌우의 산자락에는 양떼와 염소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들의 목에 달린 종에서 나오는 딸랑딸랑 소리만이 산중의 고요를 깨고 있었다.
걸을수록 기온은 떨어지고 바람은 드세졌다. 앉아서 5분만 쉬어도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길을 잘못 들어 1시간쯤 지체하기도 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죽는 순례자도 가끔 있다던데 그 말이 이해가 갔다.
한참을 걸으니 마침내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2시간쯤 내리막길을 걸은 후 저녁 8시쯤에 론세스바예스 마을에 도착. 처음 만난 스페인 마을이었다. 이 마을의 알베르게는 강당 같은 대형 돌집에 침대가 100여개쯤 들어서 있는 형태였다. 순전히 돌만 쌓아 그렇게 큰 집을 만들 수 있다니 놀라웠다. 안내 데스크에 있는 오스피딸레로 할아버지에게 밥 먹을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내가 너의 배고픔을 사해주겠노라’는 투의 경건한 목소리로 알려주신다. 안내에 따라 찾아간 ‘바르(BAR)’에는 저녁 마실을 나온 마을 사람들과 순례자들이 섞여 있었다.
9유로짜리 ‘메누 델 뻬레그리노’(순례자 전용 메뉴)를 시켜놓고 앉아 있는데 순박한 외모의 스페인 아가씨가 말을 건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한참을 몸짓 손짓을 주고받았는데 알고 보니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호의였다. 다른 순례자들은 다 일행이 있는데 나만 혼자 앉아 있는 게, 또 더 없이 피곤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게 동정심을 유발했나 보다. 작은 친절이었지만 참으로 마음이 따뜻했다.
수비리
Day 02
6월 14일 :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
“하알레엘루우야아… 하알레엘루우야아…”
어디선가 경건한 찬송가 소리가 들린다. 이 새벽에 누가 예의 없이 노래를 부르는 거야, 생각하는 순간 환하게 전등이 켜진다.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새벽 6시. 어제 경건한 목소리로 밥 먹는 곳을 알려준 오스피딸레로 할아버지가 양 팔을 활짝 벌린 채로 찬송가를 부르고 계신다. ‘찬송가 모닝콜’이었던 셈이다. 이 할아버지는 거의 신부님과 같은 마음자세로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듯 했다. 알베르게를 찾는 순례자들을 그가 인도해야 할 어린 양으로 여기는 듯 했다. 그 후로도 수많은 알베르게에서 숙박을 해결했지만 새벽에 찬송가를 부르며 순례자를 깨워준 곳은 이곳뿐이었다.
알베르게에서 순례자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인 '오스피딸레로'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고 난 뒤, 이 길에 매료되어 순례자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알베르게의 숙박료는 대개 3유로~8유로 사이. 알베르게를 운영해서 큰돈을 벌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셈이다. 까떼드랄(성당)에서 직영하는 알베르게는 아예 무료 숙박에 무료 식사까지 제공한다.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순례자들을 돕는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 있는 모든 알베르게에는 공통된 숙박 규칙이 있는데 첫째는 밤 10시에는 문을 잠근다는 것이다. 밤 10시가 넘으면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다. 둘째는 아침 8시 이전에는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한 알베르게에서 하룻밤 이상은 잘 수 없다는 것이다. 지치고 힘들어서 하루 쉬고 싶더라도 반드시 다음 알베르게까지는 가야 한다. 물론 뚜렷한 병세를 보이는 경우는 예외다.
이러한 규칙들은 순례자들이 방만하게 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오스피딸레로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출입 시간을 지정해 놓음으로써 오스피딸레로들에게도 한 숨 돌릴 여유를 주는 것이다.
오스피딸레로 역할을 하기란 쉽지 않을 거라 여겨졌다. 우선 순례자들이 일어나는 시간인 새벽 6~7시쯤에 맞춰서 같이 일어나야 한다. 순례자들이 다 나가고 나면 침대며 화장실이며 알베르게 전체를 청소해야 한다. 오후 2시~4시부터는 다시 순례자들을 받는 일을 해야 한다. 순례자 증명서에 도장을 찍고, 숙박비를 받고, 침대를 안내해주는 일을 하는데 저녁 10시까지 계속 이 일을 해야 한다.
여러 명의 오스피딸레로가 같이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경우는 그래도 괜찮지만 혼자서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경우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무척 지친 모습으로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오스피딸레로도 그 후 몇 번 만났다. 이곳의 할아버지처럼 강렬한 아우라를 발산하는 오스피딸레로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가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오스피딸레로들의 헌신 덕분에 산티아고 가는 길은 명실 공히 ‘순례의 길’로 유지되고 있었다.
순례자에게 있어 알베르게는 단순한 숙박시설 이상이다. 밥도 같이 먹고 친구도 사귀고 하는 순례자들의 사랑방이다. 여행 경비 면에서도 알베르게는 중요하다. 가난한 이들이 크게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장기간의 순례를 할 수 있는 것은 알베르게가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하루 2만원~3만원 정도의 경비만 쓰면서 두 달 가까이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은 산티아고 가는 길이 유일했다. 비행기 티켓 값을 제외하면 국내여행보다 더 비용이 적게 들었다.
이 모든 것은 산티아고 가는 길이 천년의 전통을 지닌 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산티아고’는 예수의 12제자 중의 한 명이자 베드로의 형인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스페인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7명의 제자를 만든 후 유대로 돌아와 순교했다고 한다. 예수의 12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였다고 한다.
다시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의 친구들은 순교한 그의 시신을 돌로 만든 배에 실어 스페인 북서쪽으로 보냈다 한다. 이 배는 갈리시아 해안에 도착했고, 야고보의 스페인 제자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내륙의 들판에 묻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서기 800년경에 한 기독교 수행자가(혹은 양치기라고도 한다) 별들이 빛을 비춰주는 들판을 발견했다 한다. 그곳에서 야고보 성인의 유골을 발견했다 한다. 그 들판에 세워진 도시가 순례자들의 목적지가 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고 한다. 콤포스텔라라는 이름에는 별이 비치는 들판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산티아고 대성당에는 그때 발견한 야고보 성인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모두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전설’일 뿐이다. 성경에는 야고보 성인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는 말만 적혀 있을 뿐 그가 스페인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는 말도, 그곳에서 7명의 제자를 만들었다는 말도, 그의 시신이 돌배에 실려 스페인으로 갔다는 말도 없다.
전설의 이면에는 스페인 반도를 둘러싼 정치적, 종교적 이해 관계가 있다. 고대의 스페인은 원래 그곳에 거주하던 이베리아(Iberia)인과 유럽대륙에서 건너온 켈트(Kelt)인이 혼합된 종족인 켈티베리안의 무대였다고 하며 이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나서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8세기가 되자 북아프리카의 무어 제국이 바다를 건너 스페인 땅으로 침공해 들어오는데 그 때부터 스페인 땅에서는 북쪽의 기독교 세력과 남쪽의 이슬람 세력 간의 수백 년에 걸친 각축전이 벌어진다.
이슬람의 영향권 아래 있는 스페인 땅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위협을 느낀 로마 교황청에서는 특별한 선포를 내린다. 야고보 성인이 묻혀 있는 산티아고까지 순례를 다녀온 자는 모든 죄가 사해진다고 선포한 것이다. 또한 산티아고 가는 길에 위치한 모든 성당은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라는 명을 내린다. 전 유럽 차원에서 산티아고 가는 길 순례를 장려한 것이다. 스페인 땅에서의 기독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일종의 종교 마케팅을 벌인 셈이다.
그때부터 유럽의 순박한 민초들은 지팡이 하나, 여벌의 옷 한 벌을 가지고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물론 그 중에는 마차를 타고 호화롭게 순례를 다녀오는 부자들, 심지어는 대리 순례자를 보내는 이도 있었지만 순례자들의 대부분은 교회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박한 신앙인이었고, 산적과 무슬림의 위협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걸었다고 한다. 공중의 새들처럼 아무 것도 안 가진 채로 성당의 도움에만 의지하여 걸었다고 한다. 그 전통이 지금의 알베르게로 이어졌다 할 수 있다.
다시 행련 얘기로 돌아오면, 행련 이틀째인 이날도 무지 추웠다. 우리나라로 치면 12월 초순의 날씨였다. 스페인은 태양의 나라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에 반팔 티셔츠와 여름 잠바 하나만 준비해 간 나로서는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초여름인데 이렇게 춥다니….
이날은 아침 수련을 못 했다. 너무 추워서 10분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수련하려고 잠깐 자리를 폈다가 금방 걷어치웠다. 추위를 이기려고 쉬지 않고 걸었다.
오후 4시쯤 목적지인 수비리에 도착. 마을 이름이 날아갈 듯 가볍게 느껴진다. 이름처럼 평온한 기운이 감싸는 마을이었고 이곳 역시 해발 600m의 산마을이었다.
수비리에는 알베르게가 세 곳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싼 공립 알베르게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나라의 시골 학교 건물과 비슷하게 생긴 공립 알베르게는 시설은 남루한 대신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조리시설이 있다는 점이었다.
팜플로냐
Day 03
6월 15일 : 수비리 → 팜플로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어나 앉으니 다들 부산하게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무심코 옆 침대를 보니 웬 아가씨가 곤히 자고 있다. 어젯밤에 내가 잠들 때만 해도 비어있던 침대였다. 이곳 알베르게는 공간 활용을 최대화하려고 그랬는지 침대를 2개씩 붙여놓았는데 내가 잠든 사이 그곳에 자리 잡은 모양이다. 남는 침대가 그것 하나뿐이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웬 아가씨와 나란히 누워 잤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묘했다.
그 아가씨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짐을 챙겨 나왔고, 나오자마자 수련할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에 호흡 수련을 1시간 이상 하고 나서 걷기를 시작하겠다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내 여행은 행련 즉 수련 여행이었기에 빠지지 않고 매일 수련하는 게 무척 중요했다.
헌데 도무지 적당한 장소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을 안 잔디밭은 오가는 시선이 많아서 곤란했고 주변의 산들은 덤불이 무성해서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이곳저곳 살펴보니 마을 상점가에 딸린 대형 주차장이 그나마 괜찮아 보였다. 이른 오전에는 상점들이 문을 안 여니까 주차하러 오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주차장의 한 구석에 자리를 깔고 수련을 시작했다.
이날도 무지무지 추웠다. 옷을 다 껴입고 침낭까지 둘렀는데도 몸이 덜덜 떨려왔다. 꾹 참고 호흡에 집중하고 있는데 왔다갔다 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허락 없이 주차장에서 이러고 있다고 뭐라 그러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어 살짝 눈을 뜨고 보니 웬 아주머니가 주차장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왔다갔다 하고 계셨다. 걷기 운동을 하는 듯 했다. 나를 보더니 한껏 미소를 지어주신다.
명상을 마친 후 마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마음 일기는 지난 몇 년 동안 해온 내 나름의 마음공부 방법이었다. 쓰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는데 우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마음이 괴로울 때는 ‘왜 괴로운가’라고 묻고 왜 사는지 모르겠으면 ‘왜 사는가’라고 묻는 식이다. 그 다음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적는다. 어떤 답이라도 좋으니 그냥 생각나는 답을 적는다. 이렇게 자문자답을 하며 글을 쓰다 보면 평소에는 생각지 못했던 통찰들이 떠오르곤 한다.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도 된다. 그 날 던진 질문은 이거였다.
내 마음의 병과 가족관계, 성장환경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답이 뭘까 궁리하고 있는데 문득 의식에 뚜렷하게 떠오르는 말들이 있었다. 호수에 돌멩이를 던졌을 때 생기는 물결처럼 고요하게 울려퍼지는 말들이 있었다. 그 말들을 적어 보았다.
성장환경과 마음의 병은 아무 관계가 없다. 성장환경은 마음의 병을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없다. 마음의 병은 오직 마음으로 온 것이니라. 공부라 할 수 있느니라.
적은 내용을 다시 읽는데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내가 나 자신을 미워할 때 하는 생각을 적은 것 같았다. 생각을 가다듬어 다시 적어 볼까 하다가 날씨도 춥고 해서 그냥 노트를 덮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10시였다.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 오전에는 추웠는데 오후가 되니까 무척 더워진다. 얇은 반팔 티셔츠만 입었는데도 끊임없이 땀이 흐른다. 처음 만끽하는 ‘스페인의 태양’이었다.
이 날은 길을 잃고 헤맨 시간이 많았다.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산길이 끝나고 작은 도시가 나타났는데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이정표 역할을 하는 노란 화살표를 잃어버렸다. 여기저기 둘러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때마침 할머니 두 분이 걸어오시는 게 보였다. 이날 목적지인 “팜플로냐!”를 외치면서 그곳이 어디냐고 묻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랬더니 할머니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거리면서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끝도 없이 말을 한다. 분위기를 보니 길 안내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심심하던 참에 좋은 구경거리 생겼네” “이 얘랑 좀 놀아야겠네” 하는 것 같았다. 길 안내를 해 줄 생각은 않고 깔깔거리며 계속 뭐라고 말을 거는데 당연히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못 알아듣겠다는 시늉을 하니까 마지못해(?) 길을 알려주신다. 그러더니 키스를 해달라고 입술을 내미는 게 아닌가. 차마 입술에 할 수는 없어서 볼에 해드렸다.
그런데 잘못된 길을 알려주신 거였다. 한 시간 이상 걸었는데도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팜플로냐로 가는 순례자 길이 아닌 자동차 도로를 알려준 게 아닌가 싶었다. 교통 표지판도 못 읽는 내가 자동차 도로를 따라 목적지까지 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는데.
할 수 없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처음 길을 잃은 그 장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되어 망연자실 두리번거리는데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 세 분이 그런 나를 유심히 보신다. 세 분이 동시에 다가와서 뭐라고 뭐라고 말을 거는데 “너, 길 잃었니?” 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되지도 않는 대화를 주고받고 나니 한 할아버지가 손짓으로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다. 대체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걸까, 궁금해 하며 한참을 따라간 끝에 도착한 곳은 그 도시의 알베르게였다. 금발의 젊은 청년이 앉아 있었는데 영어를 무척 잘 했다. 오늘 중으로 팜플로냐로 갈 계획이라고 말하니까 지도를 한 장 주면서 이렇게 이렇게 가면 된다고 알려줬고, 지도를 따라 가니 금방 노란 화살표가 나타났다.
목적지인 팜플로냐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쯤. 거대한 성벽이 인상적인 도시였다. 이때쯤 되니까 쨍 하던 날씨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큰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면서 빵과 과일로 간단히 저녁식사를 했다.
가이드북을 읽어보니 이곳 팜플로냐 성에는 재밌는 일화가 있었다. 팜플로냐 성은 지어진 이후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철옹성인데 딱 한 번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함락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겨울에 공격하러 왔는데 팜플로냐 성이 여간해선 함락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서 꾀를 냈다고 한다. 무기를 숨기고 자기들끼리 신나게 눈싸움을 하는 모습을 연출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스페인 군인들이 같이 눈싸움을 하려고 성문을 열고 나오자 눈 속에 숨겨둔 무기를 꺼내들고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전쟁 중에 그렇게 순진하게 행동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 얘기였다. 스페인 사람들의 국민성이 그렇게 순박한가, 생각해 봤으나 남미에 가서 그렇게 많은 살육을 한 걸 생각하면 꼭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을 듯 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 30분. 문 닫기 30분 전이었다. 비옷을 입었는데도 많이 젖어 있었고 헤매는 와중에 가이드북도 잃어버렸다. 비까지 오는데 알베르게를 못 찾았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길을 알려준 분이 참으로 감사했다.
하늘이 열린 날
Day 04
6월 16일 : 팜플로냐 → 오바노스
눈을 떠서 시계를 보니 8시 30분. 전날 길을 잃고 헤매느라 피곤했는지 꼬박 10시간을 잤다. 주변의 침상은 텅텅 비어 있었다. 서둘러 짐을 싸서 길을 나서니 잔뜩 흐린 하늘이 기다리고 있다. 비온 뒤였기에 공기는 더없이 맑고 상쾌했다.
빵과 버터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본격적으로 걷기를 시작. 조금 빨리 걸으니까 20분만에 도시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곳에 와보니 대한민국의 도시들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비대한지 실감이 됐다. 팜플로냐는 스페인 북동지역에서 제일 큰 도시라고 하는데도 시내에서 20여분만 걸으면 도시를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한없이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대부분 밀밭이라고 짐작이 되나 전부 밀인지 아니면 보리도 섞여 있는지는 지독한 생태맹(生態盲)인 나로서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밀이면 어떻고 보리면 어떠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들판인 것을!
다만 문제는 수련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바로 전날 추위 때문에 수련을 못했기에 ‘오늘만큼은 반드시 수련을 하겠다’고 벼르던 참이었다. 허나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하늘에는 온통 먹구름이 가득했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비옷을 챙겨 입고 그저 걷는 일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걷기를 2시간, 작은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때마침 비도 멎었다. 이 마을에서 수련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장소를 물색해보니 근처에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 미끄럼틀 옆에 자리를 잡고 수련을 시작.
앉은 지 10여분 만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일어날 수는 없었다. 기왕 앉은 김에 끝까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행히 비옷을 입고 있었기에 가랑비 정도는 커버가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수련을 많이도 빼먹었는데 여기 와서는 비 오는 와중에도 수련을 하겠다고 앉아 있다니! 한편으로는 뿌듯했고 한편으로는 좀 우스웠다.
빗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거세졌고 30분쯤 지나자 쏴아 하는 소나기로 변했다. 1시간 가량의 수련을 마치고 눈을 떠보니 놀이터 건너편의 버스 정류장에 마을 사람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다들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동양인이 비 오는데 앉아서 뭘 하나’ 궁금했을 것이다.
내친김에 마음 일기를 쓰려고 노트를 꺼내는데 빗물이 투두둑 노트에 떨어진다. 종이가 젖으면 글씨를 쓰기 어려울 것 같아서 짐을 챙겨 일어났다.
대로변으로 들어서자 바르가 하나 보였다. 여기서라면 글쓰기를 할 수 있겠다 싶어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서툰 영어로 카푸치노 커피를 마실 수 있냐고 물으니까 카푸치노 같은 건 안 판단다. 블랙 커피와 밀크 커피 밖에 없단다(나중에 알고 보니 스페인은 커피 문화가 그리 발달한 나라가 아니었다. 포도주가 싸고 흔해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밀크 커피를 시켜놓고 구석자리에 앉아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펜을 들자마자 엄청나게 기운이 쏟아졌다. 따뜻한 사랑의 에너지가 온몸을 적시고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어리둥절한 상황이었으나 가슴 벅찬 기대감도 있었다. 나한테 뭔가 신비스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직감… 이유 모르게 차오르는 기쁨…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노트에 질문을 적었다.
- 저의 가해망상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러자 응답의 말이 돌아왔다. 누가 내 마음을 종이삼아 글씨라도 쓴 듯 선명하게 메시지가 새겨졌다. 그걸 받아 적었다.
= 순서를 지켜라. 문제는 순서가 있느니라.
아직 이 질문을 할 때가 아니라는 뜻 같았다. 그래서 엊그제 수비리 주차장에서 했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았다.
- 제 마음의 병과 가족관계, 성장 환경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즉시 응답의 말이 돌아왔다.
= 말하지 않았느냐? 아무 관계가 없느니라.
그 말과 함께 다시금 쏟아지는 사랑의 기운! 그 기운이 너무 황홀해서였을까… 마음의 무장이 해제되어서였을까…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적었다.
- 저를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
특별히 범죄를 저지른 게 있어서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다. 어릴 적부터 시달려온 신경증적인 의심에 대한 물음. 나라는 존재가 이 우주에서 용납 받을 만한 존재인지…, 혹 용납 받을 수 없는 이물질 같은 존재는 아닌지…, 어떤 신적인 존재에게 확인받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나 홀로 우주를 지배하는 ‘유일신’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이 넓은 우주에 단 한 명의 신 밖에 없다는 건 그리 신빙성이 없는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신이 있다면 이 광활한 우주만큼이나 많은 신이 있을 거라 믿었다.
지금 내가 대면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하찮은 잡신이나 유령은 아니라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사람들이 말하는 ‘신(神)’의 반열에 속한 존재일 거라고 여겨졌다. 그가 나를 창조한 창조주일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내 존재의 비밀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뿐 아니라 우주만물의 존재의 비밀 또한…. 이윽고 답이 돌아왔다.
= 용서한다. 용서한다. 어떤 행동을 해도 다 용서할 것이다.
이 말과 함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사랑의 에너지. 평소 찌꺼기가 잔뜩 끼어있던 내 가슴이 그 순간만큼은 텅 비워진 느낌이었다. 찌꺼기가 쓸려나간 그 자리를 사랑의 기운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끝없이 눈물이 나왔다. 다시 질문을 적었다.
- 저는 간절히 변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이번 여행을 통해 변할 수 있을까요? 변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 믿음이 있어야 한다. 자기믿음을 통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 자기믿음이란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 만물을 사랑하는 자신을 믿어라.
- 제가 어떻게 하면 치유가 될 수 있을까요?
=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면 치유가 된다. 용서가 있으면 된다. 내가 나를 용서하면 만물이 나를 용서한다.
- 제가 앞으로도 당신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다시 길을 나서는데 사랑의 기운이 쏟아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하늘이 열린 느낌, 이제야 비로소 사랑의 얼굴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하늘’은 우주의 거대한 섭리에 대한 내 나름의 표현이다. 나는 특정 종교를 신앙하지는 않았지만 이 우주를 아우르는 섭리가 있다고는 믿고 있었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주관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만일 아무런 의미가 없이 그저 생물학적인 결합에 의해 인간이 태어나는 거라면, 영혼이 없이 육체만 있는 거라면 인생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그렇게 허무한 게 인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인생의 의미, 고통의 의미, 삶의 의미, 죽음의 의미, 이 모든 것의 밑바탕이 되어 주는 하늘의 섭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섭리가 이제 내게 사랑을 쏟아 부어 주고 있었다. 냉혹하게만 느껴졌던 하늘이 이제야 문을 열고 사랑을 퍼부어 주고 있었다. 나는 마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이라도 된 듯한 심정이었다. 은인의 은촛대를 훔쳤는데도 용서와 사랑을 돌려받은 장발장처럼….
《레미제라블》을 보면 난생 처음 무조건적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장발장이 비몽사몽간에 걷는 장면이 나온다.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배고픔도 피로도 못 느끼며 하염없이 걷는다. 빵 한 조각을 훔치고 19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그였다. 세상이 처벌과 응징으로만 돌아가는 줄 알았던 그로서는 처음 경험한 무조건적 사랑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나에게도 ‘사랑’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평소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던 가슴이 그날만큼은 뜨거운 물주머니마냥 변해 있었다.
그날은 저녁 늦게까지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길이 진흙탕으로 변하여 걸을 때마다 신발에 진흙이 뭉텅뭉텅 붙었다 떨어졌다 했다. 그 비를 다 맞으며 걸었지만 조금도 춥지가 않았다. 걷는 내내 가슴 속에서 한 마디 말이 울려 퍼졌다. 그 말이 나를 눈물 나게 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의 고통을 함께 하고 있다
Day 05
6월 17일 : 오바노스 → 에스떼야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내가 질문을 적으면 그 존재가 답변을 해주는 식이었는데, 맨 처음 물음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였다.
- 당신은 누구입니까?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神)입니까? 영매들이 접촉하는 유령입니까? 아니면 채널러들이 접촉하는 우주인입니까?
= 영매들이 접촉하는 유령들은 지구에 살았던 사람들의 영혼이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헤맬 때 유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주인은 우주의 인류들이라고 할 수 있는바 지구 인류 또한 그들이 보기에는 우주인이다.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은 우주에서 가장 영성이 높은 존재를 칭하는 것인바 우주인의 일부이되, 우주인들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헤매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신들은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마음의 힘으로 우주를 관장하는 존재들이다. 나는 그 신들 중의 한 명으로서 너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나타난 것이다.
- 어떤 메시지 말인가요?
= 사랑에 대한 메시지이다. 사랑, 그 위대한 힘이 필요한 시기이다. 지구가 곧 맞이할 위기를 대처함에 있어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이 사랑인바 그 사랑으로 거듭나는 방법을 너를 통해 전하고자 함이니라.
- 왜 하필 저인가요?
= 너의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네 사례가 사람들에게 선보이기 좋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 지구가 곧 맞이할 위기란 무얼 말하는 건가요?
= 그 문제는 아직 알 필요가 없느니라.
- 제가 당신을 ‘신’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 그러하니라.
- 당신이 조물주(The Creator)인가요?
= 조물주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존재라고 보면 될 것이니라.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인 닐 도널드 월시는 한때 이혼과 실직 후 노숙자로 전전하며 지냈다 한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자신의 삶에 일어난 모든 불행에 대해 항의하는 편지를 신에게 썼다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신의 응답을 받았다 한다.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그의 손을 붙들고 글을 쓰게 했는데 그 안에 신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한다.
지금 나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 것도 특별날 것 없는 범인인 내게 신과의 만남이라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대화한 그 존재가 정말로 신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라즈니쉬의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이 떠올랐다 ― 어떤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고. 그 사람에게서 사랑의 향기가 느껴지면 깨달은 사람이라고. 반대로 제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한들 대단한 초능력을 보여준들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깨달은 이가 아니라고.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을 듯 싶었다. 그 존재에게서 사랑의 향기가 느껴지면 신이라고. 제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하고 대단한 초능력을 보여줘도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면 신이 아니라고. 나는 그를 만나자마자 얼마나 큰 사랑의 에너지를 느꼈던가?
흥분을 가라앉힌 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간절히 알고 싶었지만 어느 누구도 속시원히 답해 주지 못한 마음의 고통에 대한 질문.
- 저는 제 정신이 누군가에게 침범당하고 지배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습니다. 저를 끊임없이 비웃고 놀리고 끌어내리려는 악마 같은 존재가 제 마음속에 살고 있는 느낌이 너무나 생생합니다. 그러한 두려움, 그러한 느낌이 형성된 원인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감정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 원인은 네가 알고 있지 않느냐? 가족관계에서 비롯된 오랜 상처가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상처가 지나치면 무감각해지고, 무감각해지면 마음의 병이 되고 만다. 공포심, 두려움, 모두 너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다. 마음으로 이겨내야 한다. 마음으로.
- 엊그제 질문했을 때 당신은 마음의 병과 가족관계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제는 상관이 있다고 하니 어찌 된 일인가요?
= 마음의 병과 가족관계는 밀접한 상관이 있다. 허나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니라.
- 구체적으로 어떻게 상관이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 가족관계에서 네가 겪은 마음의 고통, 고통을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 마음의 크기가 지나치게 큰 데서 오는 고통…, 의사소통 방식에 문제가 많았다.
- 어떻게 이겨내야 하나요?
= 문제는 네가 아직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풀어라. 모든 것은 사랑으로 풀 수밖에 없다.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느껴라.
- 제 정신세계 속에 있는 그 악마 같은 존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 용서하라. 그를 용서하고 마음속에서 그를 잊어버려라. 그는 네가 만든 허상이다. 네가 힘을 주지 않으면 된다.
용서하고 나를 찾으라. 내가 네 곁에 있음을 항상 기억해라. 내가 네 곁에 있다. 나를 찾아라. 내가 네 곁에 있다. 내가 네 곁에 있다.
- 저를 오랜 세월 괴롭혀 온 가해망상 또한 사랑으로 보고 듣고 느끼다 보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요?
= 상처가 깊으면 마음이 뒤틀려 병이 된다. 마음으로 풀어야 하는바 마음이 뒤틀린 증상이 너의 가해망상이며 이것 또한 사랑으로 풀 수밖에 없다. 사랑으로 풀어라.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느껴라.
- 제 마음속에 이토록 상처와 설움이 많은데 사랑의 눈으로 만물을 바라보는 게 과연 가능한가요?
= 상처와 설움이 많으나 모두 네가 마음으로 만든 것이지 어찌 그것들이 움직일 수 없는 태산과 같은 것이겠느냐? 산을 움직이는 것처럼 어렵게 생각하는 마음이 문제이니라. 산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깃털을 움직이는 거라고 가볍게 보아라. 가볍게 보면 길이 열릴 것이다.
- 어떻게 해야 가볍게 볼 수 있을까요?
=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이니 마음으로 가볍다고 생각하면 가벼워진다. 마음으로 나를 찾아라. 내가 가볍게 만들어 줌을 믿어라. 너와 함께 있다. 너의 고통을 함께 하고 있다. 너의 고통을 알고 있다.
오직 나는 알아주고 있지 않느냐? 다른 사람은 다 몰라줘도 나는 알아주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나를 믿고 나와 함께 그것들을 이겨낸다고 의념해라.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할 수 있느니라. 너의 마음속에는 그럴만한 힘이 있느니라.
“너의 고통을 함께 하고 있다” ― 이 말에 눈물이 쏟아졌다. 정말 나의 고통을 함께 하고 계시구나, 하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내가 상상해온 신은 인간적인 감정은 다 초월한 존재였다. 하찮은 인간이 겪는 고통 따위는 감정 없이 냉랭한 눈으로 바라보는 존재일 거라 여겼다. 매사에 법을 집행하듯이 냉정하게 일처리를 하는 존재일 거라 생각했다.
앞에도 썼듯이 나는 정신의 한 부분이 불구인 채로 20여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타인에 대한 의심과 피해의식이 커서 그로부터 비롯된 고통과 불협화음을 지긋지긋하게 겪으며 살아 왔다. 명상을 시작한 이후로도 이 부분만큼은 거의 개선이 되지 않고 있었다.
우선 나는 인간의 선의(善意)를 못 믿는 병을 갖고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뭐라고 말을 걸었을 때 ‘저 사람이 나한테 호의를 갖고 있어서 저런 말을 했을 거야’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저 사람이 나를 비웃으려고, 혹은 깔보는 마음에 저런 말을 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만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을 돌리려 해도 잘 돌려지지가 않는다.
의심은 상대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이어진다. ‘나쁜 자식 같으니라구, 지가 뭔데 나를 깔봐? 그리고 저런 놈한테 당하기만 하는 나는 뭐야? 너무 바보 같잖아? 아, 이런 바보 같은 내가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생각이 잘 안 돌려진다.
두 번째로 나는 신체적 접촉을 싫어하는 병을 갖고 있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선의를 믿지 못하기에 누군가 나에게 신체 접촉을 해오면 그것 또한 나를 깔보고 억압하는 행위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리면 나에 대한 친근감을 나타내는 행위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내 어깨를 두드림으로써 자신이 나보다 우월하다는 걸 과시하려고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 남자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극도로 싫어해서 어쩌다 누가 장난스럽게 내 등을 두드리거나 허리를 만지거나 하면 불쾌한 느낌이 몇 시간씩 지속되곤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되도록 사람들과 안 어울리고 혼자 지내는 걸 추구하게 됐다. 혼자 있을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누군가가 나한테 관심을 가지면서 이런저런 말을 건네는 게 버거울 때가 많았고, 오랜만에 만났다고 어깨를 두드리거나 하는 것은 끔찍이 싫어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적인 병에서 비롯된 육체적 통증을 안고 살아 왔다. 앞서 얘기했듯이 18살에 시작되어 2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가슴의 통증이다.
하루 24시간 끊임없이 지속되는 통증을 달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경험해 보지 않은 이는 모를 것이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으면 프레스로 눌리는 것처럼 가슴 통증이 극도로 심해지는데 그럴 때는 밥 먹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하는 일상 생활조차 힘들어진다. 그저 가슴을 감싸 안고 누워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럴 때면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산송장이 된 느낌이다.
18살, 통증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아픈 것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또 누군가 나를 치료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 믿었다. 이 두 가지 믿음이 다 틀렸다는 것을 알기까지 기나긴 방황과 좌절과 상처를 겪어야만 했다.
죽고 싶을 만큼 통증이 심할 때 얼굴에 미소를 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얼굴 좀 펴라. 대체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 거냐?”
세상에 불만이 많아서 얼굴을 찌푸리는 게 아니라 가슴에 통증이 심해서 얼굴이 일그러지는 거라고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반문한다.
“가슴이 아프다는 게 대체 뭔데?”
그리고 나중에 만나면 다시 똑같은 얘기를 한다.
“얼굴 좀 펴라. 대체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 거냐?”
가슴 통증이 심해서 얼굴이 굳은 거라고 다시 말해주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렇게 반문한다.
“아직도 아파?”
울부짖고 싶을 만큼 통증이 심할 때가 많았다. 그 통증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무기력감에 그저 죽고만 싶을 때가 많았다. 헌데 주변 사람들은 그 타이밍에 딱 맞춰 “얼굴 좀 펴!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라고 말하곤 했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지구에서의 인간의 삶이 얼마나 서글프고 처량해질 수 있는지 체감하는 공부를 한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사람의 선의를 못 믿고 신체 접촉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가슴 통증과 그로 인한 상처 때문’이라고 하면 변명이 될지 모르겠다. 스캇 펙이라는 정신과 의사가 쓴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글이 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상태에 놓였을 때 사람의 정서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분의 체험을 예로 들어 설명한 글인데 너무도 공감이 갔던 내용이라 그대로 옮겨본다.
나는 열여섯 살 봄방학 때 사랑니 네 개를 다 뽑았다. 그 뒤 닷새 동안 입 전체가 퉁퉁 부었었다. 딱딱한 음식은 먹을 수 없었고 액체나 아기 음식이 고작이었다. 입 안에서는 계속하여 역한 피 냄새가 풍겼다. 닷새가 지났을 때 나의 정신 기능의 수준은 세 살짜리의 수준으로 내려가 있었다. 완전히 나 중심적이 되었다. 줄곧 다른 사람들에게 앓는 소리를 하고 짜증을 부렸다. 나는 식구들이 계속 나한테만 관심을 가져줄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이 발생하자 그 일이 아주 사소한 일이었는데도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불쾌감은 극도에 달했다.
한두 주일쯤 심각한 만성 질환이나 심기 불편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내 얘기에 금방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힘든 상황이 오래 계속되다 보면 우리 인간은 자연적으로, 거의 불가피하게 퇴행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적 성장은 역류하게 되고 성숙도 온데간데없어지고 만다. 아주 급속도로 우리는 어린애가 되고 야만인이 된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내가 갖고 있는 정신적 불구에 대해 적잖이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겨우 닷새 동안의 통증에 이 정도 정신적 퇴행을 겪는 것이 사실이라면, 20년 가까이 통증을 안고 살아온 내가 만성적인 정신적 불구를 보이는 것은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위로….
이런 글을 적는 것이 마음이 편치는 않다. 저만 힘든 일을 겪은 양 엄살을 떤다는 비아냥을 들을까 걱정도 된다. 실제로 그런 비아냥을 많이 들었었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타인에 대해 ‘작은 일에 엄살을 떤다’고 비난하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이 어떠할지 진심으로 이해하지는 못한 채, 알고 싶어하지도 않은 채 그저 ‘앓는 소리는 듣기 싫다’고만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이런 태도로 세상을 사는 게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의식이 아닐까도 싶다. 힘든 얼굴을 보는 것, 앓는 소리를 듣는 것은 싫다. 귀찮고 짜증나기만 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때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은 간편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양심의 가책을 안 느끼면서 보기 싫은 것, 듣기 싫은 것을 눈앞에서 치워버릴 수 있다.
다수의 인류가 이렇게 무관심과 이기심의 껍질 안에 웅크려 산다는 것, 그 껍질을 보호하기 위해 비난의 가시를 세우며 산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글프다. 그 껍질을 깨고 나와 사랑의 길을 걷는 것은 힘겹고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나는 과연 껍질을 벗고 사랑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쉽지는 않겠지만 진인사(盡人事)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