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1998년 11월 23일
미주는 작은 모포로 무릎과 배를 덮은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승우는 운동장 한 쪽에 있는 농구대에서 미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미주가 농구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떼를 썼기 때문이었다.
미주는 골대 속으로 공이 미끄러지듯 들어가자 손뼉을 치며 파이팅! 가볍게 소리까지 질러댔다.
남자가 운동하는 모습처럼 보기 좋은 것도 드물다고 미주는 생각했다.
탄력이 살아나는 근육, 경쾌한 몸짓 순간순간 살아나는 천진난만한 소년 같은 표정
휠칠한 키 때문인지 농구공을 던지는 승우의 포즈는 농구대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미주의 얼굴은 야윌 대로 야위었다. 모포 바깥으로 내놓은 미주의 팔은 삭정이처럼 가늘었다.
참기 힘든 기나긴 전투 중에 잠시 휴식을 맞고 있는 듯했다.
11월에 들어서면서 전신을 찍어누르거나 창자를 시퍼런 낫으로 끊어내는 듯한 고통은 수시로 찾아들었다.
많은 날은 하루에 네 번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다. 승우가 떠먹여 주는 멀건 미음을
겨우 한 모금 삼켜 내다가, 간신히 몸을 추스려 화장실 쪽으로 기어가려다가 우물 속을 들여다보다가,
그리고 얕기 그지없는 잠을 자다가. 보이는 적이라면 얼마나 좋은까. 눈앞에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이것만큼 두렵거나 섬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녀석의 횡포는 무례하기 짝이 없고 정해진 시간이 없었으며 강도도 제멋대로였다.
몸 속에 있어서 절대로 도망가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제지도 받지 않는 적.
어떤 것으로도 위협받지 않는 적. 그래서 놈은 빠르게 자신의 영토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다.
몸의 세포와 장기들을 하나하나 장악해 가면서 녀석은 주인의 목숨을
멈춰 버리게 할 날을 용의주도하게 앞당기고 있는 것이다.
놈들은 이젠 진통제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잠시 주춤거리다가 곧장 안에서
날카로운 뿔로 몸 속 곳곳을 동시 다발적으로 찔러댔다. 그럴 때마다 미주는 숨도 쉬지 못했다.
숨을 쉬면 자신의 고통이 그대로 아기에게 전달될까 봐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숨을 쉬어야 태아의 뇌에 산소를 공급해 주기 때문에 간혈적으로 큰숨을 들이켜고.
이를 악물고 승우가 신속하게 조처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사흘에 한 번씩은 끝도 없는 가수면 상태에 빠졌다. 승우는 영양 링거 병에 모르핀 열 개,
10cc을 주사해서 하루 종일 아주 천천히 미주의 몸 속에 투여했다. 그것은 미주에겐 휴식이었다.
그럴 때면 승우는 밤새 미주를 들여다보거나 근육과 뼈가 저리다고 잠꼬대를 하는
그녀의 전신을 주물러 주며 밤을 보냈다.
낮과 밤 특히 정적의 성채를 이루는 밤은 진지에 두 병사만이 남아 거대한 적의 습격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싸우는 형국이었다.
미주는 상운 폐교 안을 승우와 자신만의 세계로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란이 몇 번이나 오겠다고 했지만 미주는 화를 내며 거절했다.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현대병원 내과 전문의도 내방하길 원했으나 거절했다.
그것 때문에 미주와 승우는 다투기도 했다.
승우도 꺼칠하게 말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입술로 보라색이 되어 버린,
그리고 열꽃으로 딱딱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주의 입술을 축이고 촉촉하게 만드는 노력을 잊지 않았다.
미주는 아기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을 생각했다면 일찍감치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병원에서 침대를 차지하고 앉아 자신의 몸을 의사에게 맡겨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기에게 치명적이라는 강박증을 미주는 가지고 있는 듯했다.
혼자 자신의 몸 속에서 왕성하게 크는 죽음의 그림자와 맞싸워 몸 안의 또 부위에서 자라는 생명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의지. 그 의지가 자신과 태아를 잇고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 주초에 승우는 현대병원으로 차를 몰고 가 정란이 소개한 내과의로부터 휠체어를 빌렸다.
미주가 모르핀을 맞고 잠든 시간에 잠깐 틈을 낸 것이어서 긴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지만
전문의는 승우의 애기를 듣는 동안 시종일관 고개를 내둘렀다. 그런 식으로 버틸 수 있구나.
그런 상태인데도 아기는 무사히 자라고 있단 말이지. 정말 무서운 정신력이군
모성 본능이 그 힘의 원천이라고밖에 볼 수 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전문의는 초췌한 승우의 성근 미소를 보고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정말 힘드시겠군요. 하지만 선생과 이미주 씨의 상황이 그리 현명한 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아시죠?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두 분이 힘들게 하루하루를 싸웠는데
막판에 한꺼번에 무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신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암 말기 증상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악액질에 의해 체중이 뚜렷이 감소하는 게 그 징후죠.
아직 출혈은 없었습니까?
어........어떤?
위로든 아래로든 피를 쏟는 일은 없었느냐는 뜻입니다.
없었습니다.
그건 고무적이군요. 어쨌든 환자의 상태를 보고 진단해야겠지만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암세포의 침윤과 전이가 심해지면 동통이 심해지죠. 좌골 신경과 뼈에까지 전이되면
모르핀으로도 잘 수습이 되지 않는 격심한 통증이 유발됩니다.
체중이 뚜렷하게 감소된다는 게 몹시 거슬리는군요. 영양 저하로 급격히 여위는 것은
말기 증세입니다. 출혈이나 소화관 협착 등이 더 심해질 텐데 앞으로 문제군요.
그......그러면?
네 말슴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죽음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선생께서 환자를 설득해서 하루라도 빨리 저희 병원에 입원시키라는 겁니다.
강제로라도요. 이젠 아기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환자 본인도 그걸 제일 원해서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왔고요.
서울의 허 닥터와는 이틀에 한 번씩은 통화합니다. 정란 씨도 전전긍긍하고 있더군요.
저보고 뭘 어떻게든 해 보라는데 절친한 친구인 정란 씨와 남편인 선생도 못하고 있는 걸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듣자니 산달이 3월이다던데 그러면 7개월째 아닙니까?
흐으음, 그 정도라면........태아는 벌써 눈을 떴을 겁니다.
붉은 피부가 또렷하게 보이죠. 주름이 많아 노인처럼 보이지만 완전한 아기입니다.
키도 40센티미터 가까울 것이고 몸무게도 1,200 그램 정도는 될 테니까요.
선생님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방도를 찾아보죠.
네 서두르셔야 합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꺼낸 승우의 권유에 미주는 아주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렇게 힘들면 자기 혼자 있을 테니 병원이든 서울이든 당장 가 버리라면 물건을 집어 던졌다.
비명 같은 소리도 질러댔다. 승우가 갑자기 차 트렁크에서 꺼낸 휠체을 보고
미주의 심기가 상해 버려서인지도 몰랐다.
이젠 내가 저 쇠붙이에 올라 앉아야만 움직이게 됐단 말이지. 승우 씨가 손을 잡아 주고 부축해 주면
아직 산책은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나한테 단 한마디도 물어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저런 걸 끌고 오고 야단이야, 보기 싫어 당장 치워 버려!
승우는 미주가 휠체어를 보고 그렇게 화를 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닥터 박이 링거와 일회용 주사.
그리고 모르핀을 가지러 온 승우에게 환자에게 조만간 휠체어가 필요할 것이니 빌려 갔다가
서울로 돌아갈 때 반납하라고 해서 가져 온 거였다. 미주의 눈에서는 분노의 서슬이 시퍼랬다.
그러나 미주는 이번주부터 휠체어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작아진 미주의 두 발과 가늘어진 다리는 몸체와 머리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잘 일어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배만 민둥산하게 부른 가볍기 그지없는 미주를 안아 처음 휠체어에 내려놓았을 때
미주는 눈을 즈려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삶이 주는 모욕과 수모를 감당해 내려는 듯이.
미주는 금방 휠체어의 위력을 실감했다. 승우가 휠체어에 미주를 태우고 바닷가까지
산책길 삼아 나갔던 것이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 저 멀리 서 있는 희고 붉은 등대와
길다란 포구, 선착장 너머로 보이는 작은 도시의 건물과 수십척의 어선들,
파도의 기울기도 넘어가는 작은 통통배들, 오와 열을 맞추어 떠있는 작은 해초류를 양식하는
희고 둥근 부표들, 그 위를 날아 다니는 물새들, 작은 어촌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장화 신은 아낙네들,
나무 어선에 페인트칠을 하는 늙수그레한 사내들, 해안 바위를 타고 올라가 릴낚시를 던지고 있는 낚시꾼들,
그것이 휠체어가 미주에게 안겨 준 생생한 삶의 풍경이었다. 차를 타고 유리창 안에서 보는 것과
한 발 한 발 사람의 발로 걸어서 오는 길과는 천지 차이가 났다.
미주는 휠체어를 혼자 밀며 텅빈 운동장을 아주 천천히 돌아 보기도 했다. 승우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다리를 잃은 대신 둥근 쇠바퀴 다리를 얻은 미주는 그래서 지금 농구를 하고 있는
승우를 비교적 밝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을 수 있었다.
미주는 자신의 전직이 영화감독임을 잊지 않은 듯 양손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6밀리 앵글을 만들어
승우의 모습을 이리저리 잡아 보기도 했다.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미주의 얼굴에 한 줄기 스산함이 스쳐 지나갔다. 미주는 승우가 던지는 주황색 농구공이
마치 그들만의 세계에서 뜨는 태양인 듯 문득문득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손뼉을 쳤다. 골
을 넣을 때마다 치어걸 처럼 두 팔을 뻗어 V자를 만들기도 하면서
승우는 튀는 공을 따라가 잡고는 미주를 돌아보았다.
이제 그만하자!
왜?
더 해!
많이 했잖아.
그럼 자유투 열 개만 쏘아 봐, 여섯 개 이상 들어가면 그만해도 되고 그 아래면 다시 열 개를 쏴야 돼.
이거 나 원 참, 무슨 농구 코치처럼 얘기하네.
맞아 바로 내가 지금 그 기분이야. 전번에 NBA 농구 보니까 휠체어에 앉아 지시를 내리는 감독도 있더라.
승우는 입맛을 다시며 자유투를 쏘는 지점에서 농구공을 머리위로 두 손으로 받쳐들고는 농구 골대을 향해 던졌다.
슈우웃! 고올..........아니 노 고올! 이봐, 잘생긴 선수 좀 잘해봐! 벤치로 쫓겨나지 않으려면 정신 차리라고!
놀랍게도 미주는 그렇게 먹는 것이 없어도 농담도 하고 제법 튼실한 소리도 쳤다. 승우는 그게 기뻤다.
승우는 공을 몇 번 튀기고는 신중하게 포즈를 잡아 던졌다. 공은 림에 맞은 다음 백보드에 튀어
다시 림안으로 들어갈 듯하다가 바깥으로 새 버렸다.
에이 아깝다. 이봐 김 선수! 왜 그래 처음 자유투 던질 땐 슈슉 잘만 집어넣더니만?
글쎄요........코치가 미인이어서 그런지 정신 집중이 잘 안 되네요.
승우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인? 미인이 운동 선수한테 골 넣어 주나? 엉? 정신 자세가 틀려먹었군.
선수가 연습 중에 여자 생각하면 퇴출감인 거 모르나?
좋아. 이제부터 골을 넣으면 이 미인 코치가 키스를 허락하겠다. 상이 다. 그럼 잘 넣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잘 할 수 있습니다.
미주는 코치가 아니라 유격 훈련장의 조교처럼 말했고.
승우는 상체를 젖히고 배를 한껏 내밀며 군인처럼 우렁차에 말했다.
하지만 세 번째 던진 공 역시 빗나가고 말았다. 승우는 죽을 맛을 본 인상으로 공을 잡으려 뛰면서
얼차려라도 줄 미주의 목소리를 기대했다. 하지만 미주는 배를 싸안고,
갑자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상체를 구부리고 있었다.
미.....미주야? 아프니?
승우가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그........그게 아니고.......
미주는 참혹한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노 골인에 맞춰 우렁찬 기합을 토해 내려는데
힘이 아랫배에 실리자 그만 오줌이 새고 말았던 것이다.
휠체어 밑으로 오줌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오줌 문을 열고 닫는 근육의 주름끈이 풀려 버린 듯이.
승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미주는 씨익 웃었다. 찰나였다. 만약 승우가 웃었다거나
섣부른 위로를 했다면 미주는 모욕감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승우가 당황해 하는 사이 미주는 재빨리 스스로 상황을 진압시켰다.
야아, 기분이 묘하네, 오줌 싸던 대여섯 살로 돌아간 느낌이야.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
축축할 텐데.........갈아입어야겠다.
승우는 휠체어 손잡이를 밀었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미주는 참혹한 표정이었고
승우는 허탈한 얼굴이었다. 고장이 나고 있는 것이다. 몸 속의 조절 장치가 미주의 의지와
명령에 거역하면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주가 그런 난처한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한 동안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채
바퀴 구르는 소리만을 들었다. 갑자기 미주가 밝은 목소리로 앞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거 계시 아냐? 응? 계시가 틀림없어. 나.......사실 요 며칠 전부터
몹시 목욕을 하고 싶었거든. 더운 물을 적셔서 짠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주는 것말고.
그랬니? 그럼 얘길 해야지!
시켜 줄 거야?
물론이지 미인 코치의 몸을 씻긴다는 건 선수로선 꿈도 꿀수 없는 명예이고 황홀이지.
역시 NBA에서 뛸 유명한 선수는 뭐가 달라도 달라. 나 절대 퇴출 안 시킬 거지.
그럼 끝까지 내가 책임지고 널 데리고 다닐게. 안심해도 좋아.
고마운 말씀!
근데 어째 좀 거꾸로 된 말 같다?
그제야 눈길이 마주친 두 사람은 킥키거렸다.
승우는 미주가 왜 병원을 싫어하는지 확연히 알 것 같았다.
병원에서는 이런 대화도 이런 행동도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필요시에는 요도에 관을 꽂을 테니 병원에선 오줌을 싸는 일은 없겠지만,
이런 실수를 삶의 아름다움으로 연결시킬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미주가 생각하는 병원은 그랬다. 침울한 표정으로 딱딱한 의료조치만 받는 곳,
오직 병에 찌들려 몸만 내맡기고 있을 뿐 웃음도 삶도 없는 곳, 미주는 그런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그렇게 마지막을 맞고 싶지 않았다. 살이 있는 한 끝까지 삶이고 싶었다.
뱃속의 아기도 그런 엄마를 응원하리란 것을 미주는 의심치 않았다.
그 어떤 이유로든 삶의 주연에서 조연으로 떨어지는 것, 능동적인 의지에서 수동적인 자세로 바뀌는 것, 그
것은 정말로 참기 힘든 더 없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관사 목욕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어서 우물 옆에서 물을 뒤집어쓴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승우는 물을 데이고, 혹시라도 미주가 감기에 걸릴까 싶어서 기름 난로까지 찾아와서
목욕탕 실내을 따뜻하게 했다. 또 미주가 맨발로 걷다가 타일에서 미끄러질까
바닥에 물을 적신 수건을 징검다리처럼 몇 장 깔았다.
보일러의 급탕 스위치를 눌러 따뜻한 물을 욕조에 충분히 받아 놓고,
가스레인지 위에도 물을 받은 커다란 용기를 올려 놓고 데웠다.
탱크에 기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행여라도 목욕 도중에 보일러가 나갈 것을 우려해서였다.
관사 거실에 있는 오디오 채널을 FM 음악 방송에 맞춰 놓고 승우는 이제 준비 다 됐지 하는 표정으로
둘러본 뒤 기숙사 방에 있는 미주을 데리러 갓다. 승우는 미주를 안아서 가고 싶었지만
소쿠리를 엎어놓은 듯 부풀어오른 배가 조심스러워서 휠체어에 태워 이동시켰다.
현관에서부터는 미주의 양 겨드랑이에 두 손을 끼워 부축해서는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실망하는 거 아니지?
목욕물에 향수나 장미 꽃잎은 못 뿌렸어 찾아봐도 없더라.
시골에서 그런 호사까지 바라면 되겠니? 아구........구구구..........너무 기분 좋다.
물 온도를 아주 잘 맞췄네. 매끄럽게 살갖에 딱 달라붙는 기분이야.
미주는 조심스럽게 욕조 물에 몸을 담갔다. 실내는 수중기로 반쯤 찼다. 미주는 그게 다행스러웠다.
몸은 온통 비쩍 마르고 배만 볼록한 외계인 같은 흉한 몰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까.
승우는 욕조에 걸터앉아 앙상하게 드러난 미주의 어깨에 물을 끼얹으며 매만졌다.
잘 안 보이는걸? 수증기 좀 빼 줄까?
괜찮아. 꼭 안개꽃 속에서 목욕하는 것 같은데 뭘. 살아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가끔이지만 이런 순간이 있어서일 것이다.
부드럽고 따스한 물과 물방울 손가락과 어깨을 타고 내리는 물줄기,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 그 사람의 숨결, 바닥과 벽을 가볍게 치는 듯 한 울림 수증기가 오르면서
혈색이 없던 미주의 뺨과 귓볼을 물들였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물의 갈래들이
온도에 따라 힘의 파장크기에 따라 미묘하게 살아 움직였다.
미주는 어깨와 가슴 밑을 만지다가 살갗을 뚫을 듯 치솟는 뼈가 만져지자 착잡해졌다.
어느 순간 몸에 와 닿는 승우의 손도 부담스러워졌다. 승우는 재빨리 선수를쳤다.
아하 그렇군, 이제야 알았다.
응? 승우 씨 뭐?
네 살들이 어디로 빠져 달아나나 했더니만 전부 다 배 있는 쪽으로 가서 숨어 있었구나.
남산을 만들려고 말이야.
쉿!
응? 그런 일급 비밀을 함부로 발서하면 안 되지.
그런가?
나의 살이 모두 배 쪽으로 몰려간 까닭은? 나의 배를 절대로 적들에게 알리지 마라! 는 애기도 못 들었어.
유명한 애기들인데. 아무튼 쥐도 새도 몰라야 돼. 왜? 우리 주미가 내 살로
이불을 만들어 쓰고 꿈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면 적들이 이불을 뺏앗아가 버릴지도 모르니까.
아니, 그럴 수가! 그런 심오한 뜻이?
흐응, 생명의 비밀 세계에 있는 초특급 비밀이지,
남들이 보았다면 욕실에서 장난치는 10대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 자신의 몸을 눈으로 확인하고 사랑하는 남자에게까지 보여 줘야 하는 슬픔과
우울함을 기화시키는 데는 그런 농담과 킬킬거림밖에 없다는 것을 미주와 승우는 잘 알고 있었다.
승우는 미주의 머리부터 감겼다. 샴푸로 거품을 내서 머리카락을 비비고 두피을 부드럽게 마사지한 다음
새로 가져 온 물로 머리를 헹구었다. 승우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가볍게 숨도 가빠 왔다.
힘들지?
아니 넌?
난 가만히 있기만 하는데 뭘,
조금이라도 아픈 것 같으면 바로 애기해.
응,
미주는 승우에게 등을 맡기면서 저린 코끝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아프다는 거, 아프면 사람은 어려지고 싶은 걸까. 부모의 보호을 받던 어린 시절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싶게 되는 걸까. 그 단순함 속에 삶은 슬프고 아늑한 꿈과 순수를 숨겨 둔 것일까.
승우랑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사실은 내가 이렇게 해주고 싶었는데.
어리광부리는 이 사내를 목욕탕 속에 집어 넣고 등을 박박 밀고 머리도 벅벅 감기고,
갑자기 차가운 물도 확 뒤집어씌우는 장난을 치면서 승우을 깨끗이 씻겨 주고 싶었는데.
정작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러지 못하고 이젠 그렇게 해 줄 가능성도 사라져 버렸는데,
내가 거꾸로 승우에게 어린 여자처럼 되어 버렸다니.
한 남자에게 편안한 잠과 휴식도 주지 못하는 자신의 몸도 주체하지 못하는 여자.
미주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지만 가득 찬 수증기 때문에 승우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승우는 그 사이 비누 거품을 낸 타월로 미주의 어깨를 문지르고 팔 구석구석을 밀었다.
흐흐잇, 간지러워!
그래도 겨드랑이 벌려 봐!
부.....부끄럽게 어떻게 겨드랑이를 벌려.
헛 또 왜 이러나?
내 말은 겨드랑이라고 겨드랑이! 팔을 조금만 위쪽으로......
이렇게 쳐들면 되지? 웃키키! 웃키키? 자기 아직 몰랐어. 그쪽이 내겐 제일 민감한 성감대야. 자극 하지마,
오호, 그랬어. 그럼 더욱 가만둘 수 없지. 읏캐캐캐........캐캐!
제발.........제발 거긴 가만 둬 내가.........내가 할게 승우 씬 잠시 쉬어.
그러자
어후 네가 물 속에서 망둥이처럼 펄쩍거리니까 내 힘이 달린다 달려. 그렇지?
아직 나 힘 세지?
미주가 발그스레해진 뺨으로 물기 젖은 입술을 쳐들자 갑자기 승우가 깊게 입술을 맞춰왔다.
승우의 혀가 미주의 가지런한 치아를 훑고 혀끝을 감았다.
승우는 자신의 몸 속에 담긴 풍부한 시간을 넣으려는 듯 뜨거움을 미주의 입 속에 흘려 넣었다.
간절하게 내 시간을 가져 가. 내 시간을 가져 가, 하고 승우는 퍼덕거렸다.
미주을 안고 싶은 건강한 남자의 강한 열망이었다. 그의 근육이 팽팽해졌다.
그들은 몇 개월 동안 부부 관계을 전혀 갖지 않았다.
미주도 그를 안고 싶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몸 깊이 들이고 다시는 빠져 나가지 못하게 가두고 싶었다.
하지만...........그녀는 아득해졌다.
절망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렸다. 자신이 건강한 여자라면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몸을 뜨겁게 받아들여 그를 편안하고 달콤한 잠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주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무리가 따르고 아이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그만둬! 제........제발!
미주는 와락 승우를 밀쳐냈다. 그녀의 눈빛에는 분노 같은 게 스며 들었다.
안타까움과 자신을 향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였다.
미안해 미주야 미안해 ................네가 너무 예쁘 보여서! 그
말은 자기가 해야 할 것이다. 미주는 재빨리 바가지에 물을 담아 주르르 머리위로 쏟아 부었다.
눈물이 함께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주는 계속해서 머리 위로 물을 쏟아 부었다.
승우는 낭패스런 감정에 휩싸여 자신이 벌인 일을 어떻게 수습할까 전전긍긍하는 표정이었다.
말이지!
으응?
선수가 예쁜 코치를 목욕시켜 주는 것도 모자라서 다 가지려고 하는 건 엄큼 씨고 언감생심이야.
쯧 주제을 알아야지! 무릇 멈춰 설 때를 알아야 한다 그 말씀이야.
그래......
그렇지 바로 그거야. 반성했으면 얼릉 더운물을 날라 와, 맑은 물로 한 번 헹구고 목욕 끝낼 거니까.
승우는 허둥지둥 가스레인지 위에 있는 더운물을 가지러 갔다.
사실 미주는 말하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힘든 내색을 해서 승우가 몹시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는 게
더 힘들고, 병원에 가자고 하는 게 너무나 싫어서 애써 안간힘을 쓰며 맞장구를 계속쳤다.
그리고.......일단 그런 기분에 잠기면 바닥없는 늪으로 빠져 들게 될까 봐 무서웠다.
미주는 뜨거운 물을 양동이에 옮겨 담는 승우를 향해 애교 있게 으름장을 놓았다.
한 번만 더 그랬단 봐라. 당장에 내쫓아 버릴 거야!
첫댓글 정말 가슴아픈 글이네요
암은 굶을수록 암이 힘을 못쓴다던데...그러다 기적처럼 낫었으면 좋겠어요...감사합니다
이순간만은 정말 행복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