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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왕사 사적비(懶翁王師事蹟碑)
고려 말 한국불교에 큰 획을 그은 나옹왕사 사적비가 건립되었다. 이 사적비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큰스님 근찬하셨고 향토 서예가 초당 이무호 선생(대한민국 명인)께서 근서 하셨다. 이 사적비는 세계 최초로 8개의 서체로 되어 있는데 상단의 제목은 육조체이고 한시는 한문서예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목간체 글씨로, 한글시는 서간체이며 아래의 碑銘의 제목은 전서로 그 아래 글의 한문은 해서체로 한글은 정자체로 되어 썼으며 하단의 왕사의 행정을 요약하여 약술한 글의 한문은 광개토대왕비체로 한글은 판본체로 되어 있는데 서예가로서는 한국 최고임을 유감없이 발휘하셨다고 할 수 있다. 재질은 충남 보령산 오석으로 총 무게는 47톤으로 상석이 37톤이며 자대가 10톤이다. 상석은 가로가 5m, 높이가 3,4m, 두께는 0.8m이며 총 글자 수는 2678자로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 반송정에 세워져 2008.10.21에 제막식을 가졌다. 영덕에는 2006. 3.11에 풍력발전단지에 고산 윤선도시비, 2008. 6.13 신돌석 장군의 우국충정시비에 이어 이번에 3번째로 대형 사적비가 세워졌다. 이 사적비 제막식에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조계종총무원장 지관스님,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김병목 군수님을 비롯해서 2천여 명이 참석하였으며 나옹왕사의 행적에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반송정은 나옹왕사께서 20세에 출가하면서 자신의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 놓고 "이 지팡이가 살아있으면 내가 살아 있고 이 지팡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 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 곳이다.
2008.10.21(화)
愛民護國中興佛敎懶翁堂慧勤禪覺王師碑銘
愛民護國으로 衆生救濟에 앞장섰던 懶翁王師의 傳跡에 對해서는 門人 覺宏이 기록한 行狀 李穡이 撰한 楊州 檜岩寺 禪覺王師碑와 驪州 神勒寺 普濟舍利石鐘記 普濟尊者塔誌石 金剛山 正陽寺 三韓 懶翁銘浮屠 懶翁和尙語錄 等에 자세히 전하고 있으므로 이 碑에서는 重複을 피하여 王師의 愛民護國과 佛敎中興 및 海外에서 國威를 宣揚하신 行蹟의 要核만을 記錄코자 한다.
나무에는 뿌리가 있고 물에는 淵源이 있으며 事件에는 原因이 있듯이 人間에게도 祖宗이 있다 爲民先導를 實踐하신 共同社會善知識의 행장을 밝혀 우리들이 살아가는 거울로 삼고자 이 碑를 세운다. 王師의 諱는 慧勤 號는 懶翁, 舊名은 元慧, 室號는 江月軒, 俗姓은 牙氏, 아버지의 諱는 瑞具, 어머니는 鄭氏夫人이니 靈山郡 出身이시다.
1371년 8월 26일 恭愍王이 王師로 책봉하고 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라는 讚號를 올렸고 入寂한 후 禑王이 諡號를 禪覺이라 追贈하였다. 어느 날 어머님 꿈에 金色 새매가 날아와 五色이 玲瓏한 알을 떨어뜨려 품속으로 들어오는 胎夢을 꾼 다음 姙娠하여 1320년 1월 15일 慶尙北道 盈德郡 蒼水面 佳山里 佛岩谷(鵲沼 또는 鵲淵 : 까치소)에서 誕生하였다. 20歲되던 해 書堂에서 工夫하던 同學親舊의 죽음을 契機로 父母의 反對를 무릅쓰고 聞慶 大乘寺 妙寂庵에서 當代 名筆인 了然禪師를 恩師로 出家한 스님은 兩家의 鴻恩을 報答코자 徹底히 修行하며 大願을 세워 三寶 前에 發願文을 지었고 指空으로부터 받은 文殊最上乘無生戒法에 따른 六大誓願을 세웠으니
첫째는 모든 衆生과 함께 成佛하지 않으면 나 또한 正覺에 오르지 않을 것이며
둘째는 一切衆生이 겪을 모든 苦痛을 내가 대신 받을 것이며
셋째는 모든 衆生의 昏昧함을 智慧로 바꾸어 줄 것이며
넷째는 一切衆生이 겪을 災難을 安穩으로 바꾸어 줄 것이며
다섯째는 모든 衆生의 貪嗔癡三毒을 戒定慧三學으로 바꾸어 줄 것이며
여섯째는 모든 衆生이 나와 함께 無上正覺에 이르도록 하여 주소서 라고 발원하였다
1344년부터 4년간의 精進 끝에 크게 깨달음을 證得하였고 1348년 求法次 中國 가서 北京市 宣武區 法源寺에서 指空和尙을 親見하였다. 指空이 묻되 어디서 왔는가? 高麗에서 왔습니다. 배를 타고 왔는가? 아니면 神通으로 왔는가? 神通으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神通을 나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왕사께서 指空의 앞으로 나아가 合掌하고 섰다. 指空이 또 묻기를 네가 高麗로부터 왔다하니 東海의 어느 쪽에서 보아야 한눈으로 고려를 볼 수 있겠는가? 스님께서 아직 보시지도 않았거늘 어찌 境地를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너로 하여금 이곳으로 오게 하였는가? 제 스스로 왔습니다. 무엇하러 왔는가? 高麗佛敎와 民生을 위해서 왔습니다하니 指空 曰 汝今如是하니 吾亦如是라 認可하고 곧 大衆에 참여시켰다
1350년 8월 杭州 淨慈寺로 가서 平山 處林禪師로 부터 다시 印可를 받고 受法弟子가 된 후 補陀 洛迦山을 거쳐 阿育王寺에서 悟光長老를 明州에서 無相과 枯木和尙을 1352년에는 婺州 伏龍山에서 千岩和尙을 松江에서 了堂과 泊庵和尙 등 諸方의 善知識을 두루 親見한 후 1355년 10월 15일 다시 法源寺로 돌아왔다 1356년 10월 15일 元나라 順帝의 命으로 元都의 廣濟寺에서 開堂說法을 가졌다 1358년 봄에 歸國한 후 五台山과 漢城에서 1361년에는 神光寺 九月山 龍門山 元寂山 1366년에는 金剛山, 1367년에는 淸平寺에서 1369년에는 다시 五台山에 住錫하였다. 1370년 봄 檜巖寺에서 受法師인 指空和尙의 舍利를 傳해 받았다. 그 해 4월 15일 廣明寺 夏安居에 참여 하였으며 같은 해 9월 國家에서 施行하는 工夫選을 主管하였고 1371년 8월 28일 檜岩寺를 떠나 9월 27일 順天 松廣寺에 到着하여 住錫하던 중 1372년 가을 忽然히 너의 나라 三山兩水之間에 절을 지으면 佛法이 大興하리라는 指空의 指示를 회상하고는 檜岩寺의 住持가 되어 指空의 舍利塔碑를 세우고 重創佛事를 하였다. 1375년 9월 禑王의 卽位와 함께 王師職을 辭退 하였으나 王은 卽時 職印과 함께 反戾하였다
1376년 4월 15일 檜岩寺 重創佛事의 落成法會를 마치고는 다시 辭退書를 上達하였다. 그 이후로 더욱 王師의 道德을 흠모하여 서울을 비롯한 諸方의 信男信女가 檜岩寺로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佛敎가 興盛하는 大會上을 猜忌한 儒生의 무리 중 司憲府 臺諫이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位置한 檜巖寺에 佛子들의 往來가 繼續되어 分別없는 盲信으로 家業을 廢할 지경에 이를까 두렵다 하며 이 期會에 懶翁會上에 信徒들의 接觸을 禁할 것을 奏請하였다. 마침내 敎旨를 내려 멀리 떨어진 密陽 瑩原寺로 移錫케 하여 護送官 卓詹으로 하여금 배로 護送하던 중 疲勞를 빙자하여 며칠 쉬어 가기를 請하여 神勒寺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1376년 5월 15일 辰時 袈裟長衫을 갈아입고 佛前에 香을 피운 후 驪州郡守와 大衆을 불러 앉히고 王師職印을 郡守에게 傳한 다음 慧命護持와 愛民護國 그리고 出家初志를 잊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咐囑한 다음 조용히 入寂하시니 世壽는 57歲요 法臘은 38夏였다. 入寂하실 때 五色瑞雲이 山頂을 덮었고 王이 下賜하여 스님이 타고 다녔던 白馬는 3日前부터 먹지 않고 슬피 울었다고 전한다. 茶毗한 후 火葬場 灰中에서 齒牙와 頂骨 및 舍利 155顆와 祈禱 끝에 茶毗場百步 境內의 나뭇가지와 上에서 分身舍利 558顆를 收拾하여 舍利塔은 檜岩寺에 齒牙 및 頂骨은 神勒寺에 各各 奉安하였다. 王師行跡의 要核만을 以上과 같이 略述하고 다음과 같이 銘하는 바이다.
銘曰
愛民興佛 願力으로 多劫修行 功德닦아 大海같은 誓願으로 寧海땅에 誕生할때
金色새매 알을주는 胎夢으로 托胎할세 牙瑞具를 아버지로 鄭夫人을 母親삼다
四書三經 通達하여 經世智略 卓越한들 슬프도다 나의친구 夭死함을 어이할꼬
生也一片 浮雲起요 死也一片 雲滅일세 出家時에 父母挽留 뿌리치고 떠나갔다
四佛山의 妙寂庵서 了然禪師 恩師삼고 削髮染衣 得度한후 如救頭燃 精進하다
求法中國 法源寺서 指空和尙 親見하고 築着榼着 啐啄同時 廓徹大悟 하신후에
指空和尙 認可하되 汝今如是 吾亦如是 懶翁答曰 迷則衆生 悟則塵刹 本自法身
平山處林 更印하여 受法因緣 맺으시고 文殊菩薩 無生戒를 王師께서 繼承하다
上求菩提 禪敎兼修 六大願을 頓發하니 一切衆生 共成佛道 一切衆生 苦報代受
一切衆生 智慧明達 一切衆生 往生極樂 一切衆生 三學具足 一切衆生 同成正覺
廣濟寺서 開堂하곤 求法길을 廻向하고 傳法위해 歸國하여 恭愍王의 王師되어
工夫選을 主管하고 愛民護佛 잊지않다 世壽五七 法臘三八 王師職을 辭任하고
大衆에게 咐囑한後 跏趺하고 入寂하니 王賜白馬 絶飼悲哭 五色瑞雲 山頂덮다
檜巖寺에 舍利塔을 神勒寺엔 頂骨奉安 王師寂後 六三二年 平和적인 南北統一
하루속히 이루도록 해마중의 盈德땅에 四部大衆 뜻을모아 이貞石을 세우노니
東海바다 枯渴하고 虛空界가 다하도록 毘盧遮那 眞法身이 온國民을 지켜지다
佛紀2552年(2008) 10月 21日
大韓佛敎曹溪宗總務院院長 伽山 智冠 謹撰
艸堂 李武鎬 謹書
[參考資料]
․축착합착(築着榼着) : 축착합착이란 축대의 댓돌이나 맷돌을 쌓을 때 돌의 위쪽 아래쪽 아귀가 착착 들어맞는 것인데, 여기선 화두와 하나가 되어 화두 삼매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데 공부란 선지식과 배우려는 사람의 시절인연이 맞아야 한다.
․줄탁동시(啐啄同時) :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면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알을 쪼아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뜻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넓힐 확’, ‘통할 철’, ‘클 대’, ‘깨달을 오’자로 철저하게 크게 깨달음을 말한다.
․삭발염의(削髮染衣) :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승복)
․돈발(頓發) : 조아리고 발원함
․부촉(咐囑) : 분부하고 부탁함
․가부(跏趺) : 책상다리를 하고 앉음
․절사비곡(絶飼悲哭) : 먹이를 먹지 않고 비통하게 우는 모습
․왕사백마(王賜白馬) : 왕이 내린 흰말
․시기(猜忌) : 뛰어난 능력을 샘하여 미워함
․법랍(法臘) : 스님으로 활동한 햇수(세납=나이)
․다비(茶毗) : 불교식의 화장
․탁첨(卓詹) : 고려 말의 호송관
盤松亭記
寧海에서 西北에 位置한 이곳은 앞으로는 七寶山 끝자락이 松川에 닿고 뒤로는 兄弟峰이 감싸안은 여기에 마을을 형성하니 이름하여 盤松亭이라. 懶翁王師는 1320년 1월 15일 隣接한 蒼水面 佳山里에서 出生하여 愛民護國과 佛敎中興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高麗末 王師에 冊封된 스님이 20歲에 出家할 때 이곳에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움이 터고 落落長松으로 성장하여 居住民들의 精神的 守護址가 되면서 俗稱 마을 이름으로 불려 졌다. 영덕군은 2008년 10월 21일 여기에 사적비를 세우고 반송 한 그루를 다시 심으면서 整備事業을 試作하여 2010년에 總事業費 9億圓으로 盤松亭을 세웠다. 亭閣 앞에는 小公園을 조성 쉼터를 짓고 왕사가 入寂時 머물렀던 居處의 이름으로 命名하였다. 竣工에 즈음하여 智冠 前 曹溪宗總務院長과 그간 物心 兩面으로 후원해준 金炳睦 郡守님의 功勞를 기리고 爲民先導를 實踐한 王師의 자취를 길이 世傳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간의 過程을 略述하여 새긴다.
불기 2554년 월 일
懶翁王師記念事業會 會長 佛國寺 住持 李性陀 謹記
世界文化藝術發展中央會長 成均館 典仁 李武鎬 謹書
[정자] 20. 영덕 반송정
▲ 나옹선사가 출가하면서 꽂은 소나무 지팡이가 반송(소나무)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창수면 신기리에 자리한 반송정이 싱그러운 초록과 어우러져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
▲ 나옹의 당호를 따 반송정 앞에 지은 육각형의 작은 정자 강월헌. |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
▲ 고려말 공민왕 때의 나옹선사가 1355년에 창건한 고찰 장육사는 운서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
리톱스 '줄리'가 흰 꽃을 피웠습니다.
첫댓글 윤선생님, 리톱스 '줄리'의 하얀 꽃이 무척 예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