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種德(종덕)/덕을 심다.
☞.액자는 "종덕"이다.
槿堂, 三無齋人 梁擇東 先生이 쓰셨다. 현재 한국 서예박물관장이시다. 구미
박정희 생가와 기념관에 휘호하셨다. 현 서예계의 최고 중의 한 분이시다.
【原文】讀書 不見聖賢 爲鉛槧傭 居官 爲衣冠盜 講學 不尙躬行 爲口頭禪
원문 독서 불견성현 위연참용 거관 위의관도 강학 불상궁행 위구두선
立業 不思種德 爲眼前花
입업 불사종덕 위안전화
【語譯】글을 읽어도 성현을 보지 못한다면 紙筆(지필)의 노예일 뿐이요, 벼
슬을 하여도 백성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관복을 입은 도둑에 지나지 않는다.
학문을 가르치면서도 몸소 실천함을 숭상하지 않는다면 입으로만 참선하는
사람이 될 뿐이요, 큰 일을 일으켜도 은덕을 심을 줄 모른다면 눈 앞의 잠시
피었다 지는 꽃일 뿐이다.
【出典】菜根譚 前篇 채근담 전편
澄懷/징회/맑음에 머물다.
☞. 澄懷징회는 澄懷觀道징회관도에서 나왔다. 근당을 사사한지 삼년을 접어
들었다. 그 동안 미불과 손과정을 공부 중이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큰
용기를 내어 사랑하는 친구에게 보내기 위하여 농묵하였다.
너그러이 해량 바란다.
"종덕"은 행서(行書), "징회"는 초서(草書)다. 벽에 게첨하시어 가끔 완상하신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고 푸념해 본다.
☞.“澄懷觀道징회관도”, 마음이 맑아야 도가 보인다.
얼마나 마음이 맑아야 삶에 길이 보일까?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참 길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무한의 인생길 중, 어떤 길로 가야만 도의 길이란 말인가?
부처님은 도솔천에서 중생구제하려고 오셨다. 고 하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인간구원하려 오셨다. 고 하고, 두 성인께서 인간구원과 구제를 다 못하시고,
떠나시면서 인간들에게 많은 숙제를 주고 가셨다.
인간들은 입으로만 숙제하고, 실질적 숙제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세상은 앙심과 악심, 욕심과 자만으로 가득합니다.
잠을 자면서도 쉬지 않고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이왕에 쉬지 않고 가는 인생이라면, 끌러가는 것 보다는
내 인생, 내가 끌고 가는 것이 더 났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만을 위한 도의 길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도의 길로
덕을 베풀며 끌고 가야할 텐데,
예나 지금이나 걷는 길이나, 삶에 길이나, 힘 적게 들고 빨리 가고자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축지법을 썼다고 하지만,
지금에 사람들은 비행기. 배. 자동차를 이용한 축시법(縮時法)을 쓰고 있다.
축지법을 쓰고도 몇 년을 가도 못갈 머나먼 곳을 지금은 단 몇 시간에 가지 않는가?
옛날 축지법보다 더 빠른 자동차축시법을 쓰다가도, 교통체중으로 30분정도만 늦으면 사람들은 짜증을 부린다.
그래도, 불과 10년 전에 비하면 얼마나 빠른가?
인간은 빠른 만큼 더 빨리 가고자 하는 것에는 욕심은 끝이 없다.
그 욕심은 끝나지 않고 앞으로 계속 될 것이다.
인생이 태어남에 있어, 어느 나라에 누구 집에 태어나느냐가 아마
인생에 있어 첫 단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꿰었던, 잘 못 꿰었던 간에, 꿰어진 첫 단추를 원망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내가 부모님 선택한 것일까? 부모님이 나를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어떤 신이 점지해 주어서 내가 태어났는가?
태어나는 자식이 부모님을 선택한다고 하는 설이 있다.
이것이 정답이라고 하시는 분은, 세상 부모님 다 똑똑한 자식을 낳고 싶지만
그렇지 않은 자식을 낳아서 평생을 고생하는 부모님을 보면
부모님이 자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부모님을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아니, 무슨 소릴, 태어나는 내가 언제 부모님께 나를 낳아달라고 부탁을 한 적도, 또 다른 신에게 부탁한 적도 없다. 있다면 나도 모르게
그냥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다. 라고 항변하는 이도 많다.
원시종교에서는 아들과 딸, 장애인과 범죄형 등,
모두는 신이 점지해 준 결과의 탄생이라고 한다.
불교신자는 전생의 인연이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엘로의 능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과학은 부모 쌍방의 선택에 의한 결과라고 증명하고 있다.
즉 선택한 성적결합으로 자식을 낳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아무리 성적결합으로 수태가 되었다고 해도,
낙태기술이 발달된 지금에는 부모님이 낳기를 거부하고 낙태를 하면 그만이다.
임신을 하면 무조건 아이를 낳아야만 했을 때와는 다른 현실이 아닌가?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말이다.
지금은 어떤 종교나 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님의 선택에 따라 내가 세상에 태어난다. 내가 부모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나를 선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통계 의하면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0세라고 한다.
한 생을 초로 따지면 약 25억이란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다.
숫자로는 긴 시간일지 몰라도, 눈 깜빡 할 사이에 한 생은 끝난다.
잠시 지구에 기대어 쉬었다가 가는 인생,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할리 몬센 박사의
화학적 분석으로는 인체에는 칼슘(2.25kg), 인산염(500g),
칼륨(252g), 나트륨과 유황(168g), 마그네슘(28g), 소량의 옥소. 철. 구리가 전부다. 인간을 분해서 화학제품으로 판매한다면 현재가로 일 만원 어치도 안 된다는 이야기다.
운문스님이 “내 앞에 세존이 다시 나타나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친다면 몽둥이로
후려 갈겨 주린 개에게 주어 천하를 태평케 하리라.” 라고 한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은 이는 인간의 존귀함을 말한 것이다.
즉 우주만물 중에 인간누구나 다 존귀한 존재이지만, 그 중에 내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나의 존재가 있기까지는
남자 분이 30세 결혼을 해서 한 인간의 탄생까지는 1회사정시 정자숫자는 2-3억마리로
계산한다면, 사정한 정충숫자는 로또복권 일등당첨확율 814만분의 1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천문학적인 숫자다.
이 어마어마한 경쟁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이 내가 아닌가?
‘인생난득(人生難得)은 여침개상투(如針芥相投)’ 사람의 몸을 받아나기가 어려운 것은 바늘을 던져 겨자씨를 맞추는 것과 같다.
하늘아래 땅위에서 존귀하고 존귀한 나의 존재가 아닌가?
이렇게 존귀한 나를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준단 말인가? 그러니
내가 나를 사랑하라. 내 자신을 위한 생을 살아라, 란 뜻입니다.
내가 없는 세상은, 너의 세상이고, 너희들 세상이지,
나의 세상과 우리들의 세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똥밭을 헤매도 저승보다 이승이 났다. 죽은 대감은 살아있는 개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죽어서 천당 가는 것보다 살아 있는 여기가 더 좋다.
존귀하고 존귀한 나를 살아 있는 지금 아끼고 다듬어야 한다.
보배로운 나를 내가 만들지 않으면, 그 누가 나를 만들어 준단 말입니까?
다 같이 주어진 자연환경에서 하루하루를 어떻게 썼느냐? 따라서
어떤 사람은 판사가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호의호식하는데, 한 끼의 끼니 걱정 때문에
한 숨을 쉬는 사람도 있지 않는가?
공룡이란 힘이 쎈 놈으로부터 도도새, 나그네비들기 등, 수많은 동물이 지구상에서 멸종되었다. 육체적으로 나약한 인간이 여기에 포함되지 않고, 350만년이나 살아가고 있다. 이는 너무 신기한 일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지구를 지키면서 살아갈지는 모른다.
오늘 지금도 지구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간다는 자체만으로도 우리선조님께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지구의 주인공인 내 인생 또한 존귀한 존재임만은 틀림없다.
내 한 사람 개개인이 모여, 지구촌 65억 가족이 존재한다.
내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구촌에서 다 살아진다면, 지구에서 인간은 멸하고 말 것이 아닌가?
존귀한 내가 존재하기까지는 누구보다
부모님의 은혜는 물론, 친척과 내 이웃, 그리고 나라에 고마워 할 줄 알라.
그런데 우리나라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나라가 존재하려면 백성이 있어야 한다. 즉 나라를 지킬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을 때, 우리 종교지도자님들이 목숨을 건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다시 찾았습니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위급한 사항이 지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종교지도자님들은 아이 많이 낳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만,
말로 하는 다산정책보다는 실천에 앞장섬이 어떨지
신씨수씨스씨들이 앞장서야 하지요.
나는 아이를 낳지 않으면서 너보고는 낳으라고 한다면, 말이 됩니까?
헛소리 한곡을 짧게 뽑아 봅니다.
지구촌 65억 인구 중에 똑 같은 생각에, 똑 같은 몸짓하는 사람 하나 없다.
지문이나 DNA가 같은 사람도 하나 없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 아닌가? 하기야 소의 코 지문도 소마다 다릅니다. 만
옛날에 일소가 귀할 때, 축협에서 농가에 소를 어울이로 빌러 줄때
소 바꿔치기를 막기 위해서, 소 코 지문을 찍어 놓았다.
글을 쓴다고 앉았으니, 배가 고파서인지, 글 쓸 생각은 없고 밥 생각을 참지 못하겠다. 우선 아침을 먹어야겠다. 묵언마을을 떠난 날부터는 오후 불식이다.
오후 불식은 일단 저녁공양 값이 없어도 된다는 점이 좃타.
여기 양양에서는 3일에 한 번씩 밥을 한다.
오늘이 그 3일 째인 날이다. 남은 밥을 다 먹고 새로 밥을 해야 한다.
첫날 냄비로 밥을 하면서 뜸을 오래 드린 탓에 누룬밥이 반이나 되었다.
이를 버릴 수가 없어 누룬밥을 쌈아 놓았다.
냉장고가 없어 그냥 서늘한 곳에 보관을 했더니, 쌈은 밥이 쉬어버렸다.
그래도 버릴 수는 없다. 지개야는 중이니까?
공양게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공양게는,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있습니다. 이 음식으로 주림을 달래고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사회에 봉사하고 불도를 이루겠습니다.”
중이 아니라도 지개야는 아끼기로는 세상에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한다.
식중독 걱정보다는 버리면 환경오염에다, 아깝다는 생각 때문이다.
쉰내가 좀 심해서 물에 몇 번이고 씻어 아침을 해결했다.
밥맛은 근방 지어서 먹으면 제일 좋다. 식은 밥은 맛이 떨어진다.
식은 밥을 오래두면 쉰밥이 되고, 쉰밥을 기술적으로 오래두면 술이 되어 다시 먹을 수 있다.
밥도 어쩌면 인생과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도 처음탄생에서는 세상사람 누구에게나 축하와 귀염을 받는다.
잘 못 자라서 범죄인간이 되면, 누구도 그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식중독이 무서워 쉰밥을 멀리하듯이,
그러나 범죄인간도 개과천선하면, 다시 쓸모가 있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술처럼,
하이든 쉰밥을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머리가 좀 어지러워 일단은 한 잠을 자야겠다.
자고 일어나도 속이 덤덤한 것이 좋은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병원에 갈 형편은 아니다.
지개야는 어지간 아파도 병원이나 약국에 가지 않는다.
일단은 돈이 아깝다. 야생동물은 약을 먹지 않아도, 스스로 치유가 잘 된다. 인간도 애초에는 야생동물이 없지 않았나,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 수 있다. 북극에도 남극에도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가?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
인생이 가야할 길이 정해진 길은 없지만,
그래도 가야하는 인생길에는 미워도 돈이란 놈과 함께 가야한다.
죽어서 가는 길에는 돈이 뭐야, 평생을 함께 하던 몸도 버리고 가야한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은 돈을 인간의 목표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후회
순번에 관계 없이 죽도록 사랑해 보았다면,
“첫째,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남에게 많이 베풀어 보시 못한 아쉬움
둘째, 너그럽지 못했던 나의 행동에 대한 후회
셋째, 오직 돈만 쫒아 간 나날들에 후회 등을 한다고 한다.“
돈이란 놈을 잘 쓰면 만인이 춤추고, 잘 못 휘두르면, 만인에게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는 밤은 길고, 피고한 나그네에게는 길이 멀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겐 생사의 밤길은 길고도 멀어라“ 법구경
나로 인해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나로 인해 만인이 웃음을 웃게 할 수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징회관도가 아닌가
첫댓글 친구가 보내온 작품을 걸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