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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맞는 당근을 써야 한다"
당근과 채찍은 리더가 폴로어를 독려하기 위한 대표적 수단이다.
당근의 종류와 역할에는 뭐가 있을까.
당근은 종류에 따라 그 효과가 상이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심사숙고가 있어야 한다.
가장 1차원적 당근은 돈이다.
장단점도 극명하게 갈린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일을 만난다.
첫 번째는 `275 더하기 426` 식의 일이다.
이런 일은 일의 자리를 더하고, 십의 자리를 더한 뒤,
마지막으로 백의 자리를 더하면 계산이 끝난다.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도 쉽게 알 수 있다.
생각의 품질보다는 노력의 양이 결판을 내는 일이다.
이런 일은 금전적 인센티브를 강하게 하면 사람들이 일에 집중하고 잘 해낸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창의성이 필요한
일은 고품질의 사고가 요구된다.
이런 일들은 돈이라는 당근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의 시각을 좁히고 붙들어 매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은 잘 써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기 전엔 돈이라는
당근 사용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 이미 일어나 이제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것만 남았다면 돈은 효과적이다.
두 번째 당근은 지위다.
하지만 이 역시 써야 할 때가 따로 있다.
지위는 돈보다도 훨씬 눈에 띄기 쉬워 사람들 간 비교의 잣대가 된다.
일을 잘 해낸 폴로어에게 지위 상승을 당근으로 주면
비슷한 위치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패배감과 질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특히 조직 내에서 동일한 게임의 룰에 의해
구성원들이 비교되는 이른바 `상대비교가 용이한 경쟁`에서 폐해가 크다.
다만 어떤 사람의 특별한 장점이나 독특한
재주로
`기존에는 없던 성취`를 해냈다면 얘기는 다르다.
사람들이 `롤모델`로 삼아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전에 없던 특이한 성취에는 지위가 당근이지만
기존 경쟁에 대해서는 불화의 씨앗일 수 있다.
좀 더 질 높은 당근을 한 번 알아보자.
그중 하나가 인정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에 있어서는 확실하다고 해 주는 것이다.
인정을 위해서는 별도의 이름 혹은 칭호를 사용한다.
`마스터` `명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미국 대학에서 카네기 혹은 록펠러 기금 교수나
대학 설립자 이름을 딴 별도의 칭호를 받은 교수는
급여와 직급과 무관하게 상당한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호칭 부여에는 세심한 고민이 뒤따라야 한다.
자칫 유치한 말장난이 될 수도 있다.
최고의 당근은 `미래`다.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실은 간단하다.
우리는 언제 `미래가 없다`는 말을 하는가.
시간이 없을 때다. 따라서 미래를 주는 것은 시간을 주는 것이다.
잘 하는 사람,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시간을 줘 스스로 더 창의적이 되게 해야 한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동기가 충만한 사람이고 충만한 동기가
여유로운 시간과 만나면 창조를 위한 더 없이 좋은 텃밭이 된다.
마찬가지로 동기가 충분하지 않은 폴로어들에게는 시간을 줄여줘야 한다.
그래야 일을 작게 쪼개면서 일부라도 차근차근 완수해 나가면서 조직에 기여한다.
이래저래 최고의 당근과 채찍은 시간이다.
당근은 숲을 보게 하고 채찍은 나무를 보게 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적이다.
돈으로부터 출발해 시간에 이르는 당근은
후자로 갈수록 더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당근이다.
본질적 목적에 더욱 부합된다는 것이다.
돈이나 지위는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따라갈 것이다.
"67살의 대학생 이순희 수미사 대표…
ABC서 시작해 1년 만에 중졸, 고졸,
대학까지 50년 한풀이한 동대문시장의 여걸"
1948년생, 67세의 이순희 수미사 대표는 지금 대학생이다.
동대문시장에서 스카프를 만들어 파는 사업가이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공예문화정보디자인학과 4학년에 다닌다.
5년 전만 해도 이순희 대표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었다.
2009년 4월 중졸 학력 검정고시 학원 문을 두드렸다.
첫 수업은 수학시간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50년 만에 앉은 책상은 너무나 낯설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니 수학 선생님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고 벙긋거리는 입만 보였다.
괜한 일을 시작했나 하는 순간, 두 사위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개적으로 ‘초등학교 졸업’을 알린 셈이니 어떡하나.
죽을 힘을 다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4개월 후 이 대표는 평균 88점으로 합격증을 받았다.
또 8개월 후엔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날 이 대표는 실컷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한과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가 눈물과 함께 녹아내렸다.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모를 일이건만 못 배운 한은 늘 그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평생 시달렸던 학력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날개가 달린 듯 몸이 가벼워졌다. 세상도 달리 보였다.
서울 동대문구 제일평화시장 내
이순희씨의 매장을 찾았다.
매장의 스카프·머플러는 이탈리아, 중국에서 수입하기도 하지만
이 대표가 디자인한 제품이 많다.
푸른색 무늬의 스카프를 두르고 파란 안경을 쓴
이 대표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이 대표가 동대문 밥을 먹은 것은 딱 30년이 됐다.
사업을 하던 남편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빚더미에 앉았다.
넋 놓고 앉아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남편 손을 끌고
동대문 광희시장에서 옷장사를 한 게 출발이었다.
억대 빚을 안고 시작해 서울 강남에 4층짜리 건물,
아파트, 상가 지주권 등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상가 지주권은 매장 하나가 5억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3남매 잘 가르치고 딸은 유학까지 보냈다.
“남편 원망하고 부모 원망하고 팔자 타령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더라. 내가 나가서 먹고살자 생각하고 나섰다.
처음 10년은 힘들었다. 빚 돌려 막아야지 이자 부어야지 정신이 없었다.
날마다 기도했다. 건강하게만 해달라고. 그래야 열심히 뛸 수 있으니까.
남들이 안 하는 보세 옷이 좋아 떼다 팔았는데 장사가 아주 잘됐다.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돈 셀 틈이 없어
가방에 쓸어 담아 은행으로 가져가곤 했다.”
장사가 잘되자 매장을 몇 개 늘렸다.
동대문 상권이 커지면서 임대매장의 권리금이 치솟기 시작했다.
당시 한 매장에 권리금이 1억원까지 붙었다. 앉아서 수억원을 번 것이다.
사람들이 임대권을 사들이기 시작했지만 이 대표는 달랐다.
권리금은 언젠가는 내릴 것이란 생각을 했다.
임대권을 팔아 집을 사고 지주권(토지 지분)을 샀다.
끼니도 거를 만큼 가난했던 어린 시절 누구보다
집 없는 설움을 절실하게 겪었던 때문인지
집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권리금 거품이 꺼질 때 이 대표는 웃을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가 동대문 상가를 덮쳤다.
800원, 900원 하던 달러환율이 2000원까지 치솟았으니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이 대표도 부도 위기에 몰렸지만 위기대처 방법은 달랐다.
“남편에게 ‘빈손으로 시작했으니 망해도 제자리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말하고 이탈리아로 가서 돌파구를 찾아보자고 했다.
스카프 사업을 할 때였는데 이탈리아의 컬러가 너무 좋았다.”
원색 위주였던 한국의 컬러에 비해 이탈리아의 색은 은은하고 세련돼 보였다.
이탈리아 스카프 샘플을 들고 무작정 강남 현대백화점 본점 매니저를 찾아갔더니
“좋다”면서 행사 코너의 매장을 내줬다.
대박이 났다. 하루 매상이 700만~800만원에 달했다.
색깔을 보는 눈이 남달랐던 것이다.
이렇게 한 고비를 넘었다. 처음엔 손님에게 인사도 못할 만큼
숫기가 없었던 이 대표의 사업 노하우를 들어보자.
1. 유행을 좇지 말고 유행을
만들어라.
“남들과 똑같은 것은 하기 싫었다.
남들이 유행을 좇아갈 때 나는 다른 것을 찾았다.
스카프·머플러도 남들이 만들어진 것을 팔 때
나는 원단시장 쫓아다니며 직접 만들어 팔았다.
장사가 안 될 때는 강남의 백화점을 둘러보고 원단시장을 돌아다녔다.
트렌드를 연구하고 업그레이드를 시켰다. 컬러만 봐도
다음엔 뭐가 되겠다 보이더라. 내가 선택한 컬러는 전부 히트쳤다.”
2. 손님을 친구로
만들어라.
“손님이 오면 무조건 커피를 권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되더라.
30년 단골도 많다. 환불, 교환? 무조건 해준다.
지금은 그냥 가도 다음번엔 손님이 된다.”
3. 나를 먼저 가꿔라.
“내가 예쁘게
하고 있어야 손님도 오고
내가 웃고 행복해야 손님도 즐겁다.”
4. 긍정 마인드를 가져라.
“장사가 안
된다고 우는 소리 하지 말고
‘잘된다 잘된다’ 말해야 복이 들어온다.”
5. 남편을 최고로 모셔라.
“집안이
화합해야 장사도 잘된다.
내가 남편을 높여줘야 남도 높여준다.”
6. 손님 취향을 먼저 파악해라.
“손님이
들어오는 순간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살펴라.
손님의 취향에 맞춰 물건을 권해라.”
7. 물건을 팔려고 하지 말고 가치를 팔아라.
“가격만 말하기보다 왜 비싼지, 만져 보게 하고
그 가치를 느끼게 하면 십중팔구 산다.”
사업으로 충분히 만족한 인생을 산 셈인데
이 대표는 왜 뒤늦게 공부에 도전했을까.
“홍익대 평생대학원 디자인 아카데미에 다녔다.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내 색채를 보더니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났다고 칭찬하며
대학원에 다녀보라고 하더라. 하는 수 없이 초등학교 졸업이라고 밝혔다.
너무 창피했다. 아카데미에 같이 다니던 후배가
검정고시에 등록해줄 테니 도전해 보라고 권해서 용기를 냈다.”
이 대표는 TV에서 생소한
단어가 나올 때마다 자신의 무지함이 너무 싫었다.
학교 이야기가 나올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학력을 들키면 어쩌나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곤 했다.
거리에 즐비한 영어 간판을 보고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5남매 맏딸로 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는 ‘양반’ 타령만 하고 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 학교 갈 때 봉제공장에 다니고 감자 깎기로 동생들을 가르쳤다.
‘남들은 다 아는 걸 나는 왜 몰라야 하나.’ 공부에 대한 ‘한’은
지독하게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설움이자
누리지 못한 소녀시절에 대한 억울함인지 모른다.
검정고시반에 등록하고 A, B, C부터
배우는 왕초보 영어반에 들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 7시면 학원으로 갔다. 10시에 집에 돌아와
남편과 하루 일과를 이야기하고 보면 밤 12시.
그때부터 예습, 복습 하다 보면 새벽 2, 3시는 보통이고 날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굳어진 머리는 외워도 외워도 돌아서면 잊어먹었다.
냉장고며 화장실, 화장대 유리 할 것 없이 벽마다 메모지를 붙여놓고 외웠다.
자다가도 일어나 화장실로 슬며시 들어가 공부하는 그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당신 그렇게 노력하면 고시에도 합격할 것 같아. 차라리 고시공부를 하지 그래.”
수학은
하루에 3문제씩 정해놓고 하루 종일 풀릴 때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고졸 검정고시 수학에서 두 문제 틀렸더니 학원 선생님이
“만점이나 다름없다. 인간승리다”고 말했다.
다행히 대학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사회경력을 인정해주는
특례입학이 있어 수능을 보지 않고 입학할 수 있었다.
‘11학번 새내기’로 대학에 입학하자 지도교수가
“우리 과 생긴 이래 최연장자”라고 하더란다.
문제는 입학 후였다. PPT니 워드니 도통 강의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 달 코스 컴퓨터 학원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다니고 딸, 조카의 도움을 받았다.
지난 4학년 1학기 때 학점 4.25를 받아 장학금까지 받았다.
이 대표는 “한턱 내느라 장학금보다 돈이 더 들었다”며 웃었다.
지난해에는 서울 중구 필동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한글 글꼴을 직접 디자인해 만든 텍스타일 작품을 선보인 첫 개인전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혼란을 겪기도 했다.
색채며 디자인이며 이론을 배우다 보니 오히려 작업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디자인이라고 했던 것들은 주먹구구식이었다.
무식하니 용감했더라. 이론을 알고 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3년 동안 디자인을 못했다.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대표는
기사에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꼭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한때 학교에 안 보내준 부모 원망, 부도로 힘들게 한 남편 원망을 했지만
생각해보니 자신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올해 90세인 어머니는 “내가 밥해줄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것 해라”면서 지금도 공부 뒷바라지를 해준다.
어머니에게도 맏딸을 못 가르친 것은 평생 한이었다.
남편은 “집 팔아서라도 학교에 보내주겠다”면서 든든한 응원군이 돼주고 있다.
사위들도 등록금을 한 번씩 대줬다. 이 대표는 공부하면서 몰랐던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기쁨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줄 모른다고 했다.
내년엔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다.
가능하면 박사 과정까지 도전할 생각이란다.
그의 인생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는 출판사도 있다.
이 대표는
“사람들에게 내 나이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어려운 걸 풀었을 때 더 큰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노력도 해보지 않고 힘들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된다.
나태하기 때문이다. 살아보니 어려운 것은 있어도 안 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간신히 살아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더 나타나 그 판자에
매달리자
판자가 가라앉아 두 사람 모두 죽게 될 것 같았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혼자 살아남았을 경우
이 사람은 법적으로 어떤 처벌을 받을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카르네아데스가 제시한
문제로,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는 '긴급피난' 을 설명할 때 인용됩니다.
반면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도
있습니다.
강도를 당하여 길에 쓰러진 유대인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모두 그냥 지나쳤으나
유대인과 적대 관계인 사마리아인이 구해 주었다는
신약성서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명칭의 법입니다.
말하자면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했을
경우,
법적으로 처벌 할 수 있다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강제적인 법적 절차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응급의료와 관련된 법률에
면책하는 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돕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법이 아니라,
돕다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용서해준다는 법입니다.
내가
위험할 때는 남을 해쳐도 된다는 법.
남을 돕지 않으면 너에게도 벌을 주겠다는 법.
이런 것 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남을 도울 때
설령 실수를 해도 '용서' 해 주겠다는 법이
가장 따뜻한 법 같습니다.
- 먼저,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이 더 좋겠지만 말입니다. -
판교 환풍구 사고 유족 대표 한재창씨
"돈 위해 싸운다는 말 듣고 싶지 않았다…협상 오래 끌어봐야 가족만 힘들어져"
“가족 중 한 사람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합시다.
누군가 보상을 얼마나 받고 싶냐고 묻습니다. 금액이 떠오르십니까.
우리는 협상의 목적을 돈으로 몰아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가족 잃은 슬픔을 최대한 빨리 딛고 일어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열린 공연 도중 환풍구 추락 사고로 사망한
희생자 유가족과 행사를 주관한 이데일리,
경기과학기술진흥원이 지난 20일 배상 문제에 합의했다.
사고 발생 57시간 만이었다.
그렇게 빨리 협상을 타결할 수 있었던 배경은 뭘까.
유족 대표 한재창(41)씨는 “대형사고
때마다 (협상을)오래 끌어 봐야
남아있는 가족들 삶만 피폐해지는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를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나.
법적 테두리 안에서 합의에 이른 좋은 선례를 남겨
대한민국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고 했다.
외국계 기업 회사원인
한씨는 환풍구 추락사고로 사망한 윤철(35)씨 매형이다.
그는 “이번에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대부분
평범한 직장인이자 집안의 가장이었다”면서
“사고로 갑자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현실적인 방안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또 “사고를 당한 처남은 태양광 관련 벤처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촉망받는 인재였다”면서
“협상을 오래 끄는 게 오히려 희생자들을
욕보이는 것 같았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예상보다 빠르게 보상안에
합의했다.
“협상을 오래 끌면 오히려 가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봤다.
남은 사람들도 삶이 있다. 이들은 돈을 위해
싸운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힘들다.
유가족들은 이런 비극을 최대한 빨리 이겨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선례를 만들어서, ‘사고 협의를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같은 비극적인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번 사례가 대한민국 사회의 기폭제가 됐으면 좋겠다.”
―합의하기까지 마음고생도 심했을
텐데.
“인터넷 댓글에 상처를 많이 받는다. (유가족들이) 합의를 하지 않는 것이
돈 때문이라는 헛소문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일본 취재진의 관심이 컸지만,
이들의 연락은 일부러 받지 않았다.
나라 망신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희생자를 오히려 욕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고를 당한 희생자들
대부분은
판교 벤처밸리 일대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다.
사고를 당한 처남은 태양광 관련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이 일대 직장인들 퇴근시간은 일러봐야 오후 7시 30분이다.
처남이 행사장에서 사고를 당한 시간이 오후 5시 30분이다.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이 잠시 쉬는 시간에 나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유가족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사실 나는 이런 대표직 같은 거 해 본 적도 없다.
어쩌다보니 유가족 전체 연락처를 받게 됐고, 유가족을 대표하게 됐다.
처음부터 유가족들에게 ‘합리적인 선을 긋고 그 선에서 요구하자’고 했다.
기자회견 하느라 처남 발인하는 것도 지키지 못했다.
이런 모습을 본 유가족들이 모두 똑같은 마음으로 믿고 따라와 주셨다.
처음에는 성남시에서
장례비를 2500만원 선에서 지급보증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장례비를 일부러 부풀려 쓰는 사람도 생길 것으로 보였다.
희생자를 위해 지급되는 돈이 흥청망청 쓰이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을 위해 합리적으로 쓰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고를 당한 처남은 6살, 5살, 3살 짜리 자녀 3명을 두고 있다.
이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현실적인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남시와 유가족들은 배상 합의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경제적 배상은 장례비 지원과 사고 피해 배상 부문으로 세분화하고,
장례비는 행사 주관사인 이데일리가 2500만원을 선지급하기로 했다.
또 배상금은 법원이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합리적인 선을 지킨다고
해도,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경기도와 성남시, 주관사인 이데일리를 믿고 큰 틀에서 합의를 했다.
정부를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나.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자는 데 유족들이 모두 합의했다.
경기도 남경필 지사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고, 남 지사의 말을 믿었다.
정치인은 뒤에서 말 바꾸는 것이 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게 말하면 우리는 순수했다. 나쁘게 말하면,
너무 몰라서 이런 결정을 했을 수도 있다.
보상 주체인 경기도와 성남시에서 오히려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우리를 걱정하기도 했다.
사람이라면 돈을 많이 받고 싶은 것은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법정에서 싸움을 오래 끌면 모호해지는 것을 봤다.
싸움이 돈 때문인지, 아니면 가족을 잃은 슬픔 때문인지
모호해지는 순간이 온다.
남은 가족들의 삶은 법적 공방 때문에 피폐해지는 것을 봤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관련 당사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최소화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이번 사고는 악의나 고의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관련 당사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최소화하기를 희망한다.
(사고와 관련해)고소·고발을 하지 않을 계획이다.
자살한 과기원 직원의 가족들을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고를 당한 우리(유가족)도 모두 같은 직장인 신분이다.
사고가 난 축제 행사 승인 사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써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했다.”
"富者 나라, 가난한 나라 어디서 갈라지나"
민주政·低세율·재산權보다 貧富 가를 더 중요한 요소는 유연·신속한 의사 결정
체제
中·日과의 제조업 勝負는 10~20년 후 판가름날 텐데 우물쭈물 한국病 놔둘 건가
왜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가 갈라졌을까.
많은 사람의 궁금증이자 경제학자의 연구 대상이다.
같은 시대 유럽의 식민지였던 중남미는 궁핍한 국가들로 가득 찼고
미국은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다. 그들은 어디쯤에서 다른 길을 갔던 것일까.
산업혁명 초기
프랑스와 영국은 똑같이 가난했다.
옆에는 네덜란드·스페인·이탈리아 같은 부자 나라들이 있었다.
잘사는 이웃들을 보며 영국에서는 명예혁명(1688년),
프랑스에선 시민혁명(1789년)이 발발했다.
두 혁명 사이에 100년의 시간 차가 있었다곤 해도
왕의 지배 아래 의회가 등장한 정치 체제는 같았다.
인류 역사에서 부국(富國)과
빈국(貧國)을
가장 극적으로 갈라놓은 산업혁명은 영국이 주도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보다 국민의 세금 부담이 두 배나 무거웠다.
경제학자들은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 부(富)를 축적하도록 자극해
경제가 성장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하지만,
그때 영국엔 재산권을 보장하는 장치가 허술했다.
오히려 지금의 중국처럼 국가가 개인 재산을 강제 수용하는 일이 잦았다.
영국의 강점은 국가
정책을 추진하는 권한이 의회에 맡겨진 것이었다.
영국 의회는 만백성의 지지로 탄생한 것도 아니었다.
잉글랜드 지역의 유권자 숫자는 전체 인구의 3~5%밖에 되지 않았다.
민주 선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소수(少數)를 대표하는
의원들이 정책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업 활동에 필수적인 은행을 만들었고,
귀족들이 운하(運河) 같은 거대 국책사업을 반대해도
토지를 강제 수용할 수 있는 법을 제정했다.
왕의 명령에도 지중해 근처 프로방스에서 귀족 세력의 반발로
농업용 수로(水路)조차 뚫지 못하던 프랑스와는 전혀 달랐다.
경제를 위해서는 권력을 대통령
또는 국회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시 영국 의회의 권력은 강했지만 그렇다고
선전(宣戰) 포고를 하는 왕권을 거부한 적이 없었다.
의회가 왕과 공존하면서 '된다, 안 된다'는
정책 결정을 빠르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성공한 영국의 경제 모델을 그대로 베껴
갔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가운데 한 명이자 초대 재무부 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1792년)에서 영국이 공업혁명을 선도하는 비결을 요약했다.
한국식 표현으로 보면 평준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대중교육을 확대하자고 했고,
기업 자금줄인 은행 설립과 운하·항만 같은 인프라 사업을 제안했다.
결정은 의회가 신속하게 내렸고 신생국가 미국은
곧 섬유 산업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정책 결정 방식은 산업화 물결이
동양으로 밀려오면서 달라진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후 통산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 관료 집단이 정책 결정을 내렸고
의회는 거수기 역할에 그쳤다. 한국도 관료들이 주도했다.
중국은 모든 결정을 공산당에서 내렸다.
영국과 미국은 번갈아가며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됐다.
일본·한국·중국은 그런 전략을 뒤따라가며
꽁무니 추적(追跡)에 일단 성공하고 있는 듯하다.
어느 나라가 세계 최강으로 부상할지는 불투명하지만
이만큼 잘살게 되기까지는 국가의 진로를 정하고 결단을
내려주는 선도(先導)세력이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본 공업화는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은 60년, 중국은 30년 같은 길을 달려왔다.
동북아의 제조업 혈투(血鬪)는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철강·조선·전자·석유화학 등 중심 업종에서 물고 물리는 싸움이 처절하다.
세 나라 경제는 어깨동무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정책을 결정하는 지휘탑과
결론을 내리는 속도가 달라 10~20년 후면 승패가 분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
이번
전쟁에서 밀리는 나라는
아프리카·인도·중남미처럼 가난한 나라로 추락할 것이다.
왕족·귀족·농장주 같은 집단의 반대에 부닥치면
국가 현안에 대한 결정을 미루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가난한 나라들의 공통된 병(病)이다.
우리 국회는 언제나 결정이 늦다.
공무원들은 정치권 눈치나 보는 구경꾼이 됐다.
세월호 수습, 송전탑·원전 건설은 물론 사소한 규제 철폐에도
지겨울 만큼 지루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가.
동북아 세 나라 가운데 가장 고치기 힘든 몹쓸 병에 걸렸다.
산업혁명 초기의 영국이나
일당(一黨) 지배의 중국을 보라.
민주국가인가, 재산권을 제대로 보호해주는가,
세금이 낮은가 하는 요소들은 잘사는 나라를 결정짓는 필수 요건은 아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유연하면서도 신속하게 결정해주는
의사 결정 체제를 갖추었는가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독재자(Dictator)'란
단어는 로마시대 한때 좋은 뜻으로 사용됐다.
국가 정책이 진영 간 대립으로 혼돈에 빠졌을 때
의회가 독재자를 지명해 6개월 임기 동안 전권(全權)을 행사하도록 했다.
독재자가 내린 결론은 의회도, 행정부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우리가 지금처럼 서로 뒷다리 잡으며 질질 끄는 상태가 계속되면
국민은 로마의 현명한 독재자를 점점 더 그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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