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성공이란 없는 법. 이승훈은 중년 즈음에 크나큰 실패를 잇따라 겪어야 했다. 그 무렵에는 화폐제도가 통일되어 있지 않아 경기·황해도 일대에서는 백동화가 쓰이고 엽전은 별 가치가 없는 데 비해, 경상·전라도 일대에서는 반대로 백동화보다도 엽전이 널리 쓰이는 형편이었다.
1901년 이승훈은 3만냥어치 엽전을 배에 싣고 부산으로 향했다. 모두 팔면 운임과 잡비를 제하고도 6만냥은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목포에서 일본영사관 배와 부딪혀 엽전이 고스란히 바닷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승훈은 부산에서 거두었을 6만냥을 물어내라고 일본영사관에 소송을 걸었으나, 재판은 한두 해 질질 끌더니 마침내 원금 3만냥만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승훈은 엽전사건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조급해졌다. 그는 해마다 가격이 폭등하며 외국 배가 싹쓸이해 사가던 수수와 옥수수 등 황해도 잡곡만 수만 석을 사들였다. 그러나 그해 전라도 지방에 유례없는 대풍이 들어 황해도 수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든 무역선이 그쪽으로 몰렸다. 그 다음해, 다음다음 해까지 버텨 보았지만 지방마다 풍년이 이어지는 바람에 제때 팔지 못했다. 곡식은 썩어버려 결국 한 섬에 서 돈씩이나 밑져 가며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902년 10월 이승훈은 원산에 터를 잡고 동태를 싹 사들였다. 한 달 만에 동태 값이 엄청나게 뛰었다. 동태는 섣달과 정월에 명태(생태)가 많이 잡히면 제값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최근 몇 년간의 어획량과 기상을 면밀히 조사하여, 그해도 명태는 그리 많이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해 정월 스무 날 즈음 수백 척의 배들이 모두 명태를 수북이 실은 채 돌아왔다. 싱싱한 명태가 이렇게나 많은데 오래 묵은 동태가 팔리겠는가. 창고에 가득가득 쌓여 있던 동태는 모두 썩어버리고 말았다.
“허허, 어쩌려고 이러는가? 아, 하늘이 날 망하게 만드는구나!” 서울로 다시 돌아온 이승훈은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몇 해 동안 계속 손해를 본 이승훈은 그것을 한 번에 복구할 기회를 찾아 궁리했다. 그는 1904년 일어난 러일전쟁을 그 기회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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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강 이승훈(왼쪽)과 도산 안창호
그 무렵 러시아의 힘은 막강했으며, 일본은 까딱하다간 모처럼 피를 흘려 빼앗은 요동반도를 러시아에 빼앗길 판이었다. 수십만 명 일본군의 움직임에 따라 유례없는 전쟁 경기가 이 땅에 엄습해 왔다. 이승훈은 쇠가죽을 선택했다. 쇠가죽은 군수품으로 군인들의 배낭이나 구두 등에 엄청난 양이 쓰였으며, 그 값은 전쟁의 잣대였다.
이승훈은 모든 자본력을 동원, 쇠가죽을 사들였다. 서울 한강 용산창 백사장에다 쇠가죽을 엎어 널었다 뒤집어 널었다 하면서 최고가를 받을 수 있는 때를 노리고 있었다. 강화조약이 맺어지지 않고 전쟁이 끝내 이어지리라 믿었던 것이다. ‘일본이 자신들이 이기는 전쟁을 배상금 없이 그만두겠는가? 틀림없이 끝까지 이어갈 것이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러일전쟁은 허망하게 끝났다. 황급히 쇠가죽을 배에 싣고 잉커우(營口)로 갔으나, 약속했던 중국 상인들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 많은 쇠가죽을 팔 곳이 없었다. 쇠가죽은 달포 넘게 잉커우 항구에 매인 채 천시를 받다가 끝내는 헐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훈은 모든 피가 한꺼번에 온몸에서 다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을 맛보면서 터덜터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참담한 실패 앞에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황해도 연등사(燃燈寺)로 들어가 버렸다. 이승훈이 연등사에서 쉬고 있을 때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이 찾아와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오산 용동 본집에 남은 재산이 조금 있었기에 이승훈은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 지냈다. 그곳에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도산 안창호가 평양 모란봉에서 연설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승훈도 그의 연설을 듣고자 찾아갔다.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양복 차림의 서른 살 청년이 열성적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그는 서양인들이 발달한 문명을 앞세워 동양을 침범해 오고 있으며, 그들에게서 힘을 배운 일본이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4000년 역사의 조국을 잃지 않고 지키려면 썩어빠진 옛날의 모든 나쁜 버릇을 버리고 새 힘을 길러야 하며, 그 길은 오로지 새로운 교육으로 모든 국민이 새사람이 되는 것밖에 없다고 부르짖었다.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나서 이승훈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옳다고 생각되었고, 답답하던 속이 다 풀리는 것 같았다. 이승훈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상투를 잘라 단발을 하고, 앞으로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튿날 그는 안창호를 찾아갔다. 오랜 이야기 끝에 그들은 단체를 만들어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깨우치는 데 뜻을 모았다.
<②편 계속 읽기>
이제 이승훈은 새사람이 되었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와 그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안창호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모든 살림을 고쳐 새롭게 할 것을 주장했고, 서당을 그만두고 신학문 교육 학교를 세우기로 하여 이름도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 고쳤다. 이승훈은 지금까지 나라 안에 살고 나라를 위한 일까지 했지만 참 의미에서 나라를 가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나라를 가졌다. 나라와 하나가 된 것이다.
갑신정변 이래 여러 차례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거의 다 남의 나라 힘을 빌려 시도했기에 실패로 끝났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다. 정치는 결국 국민의 실력 없이는 안 된다. 남의 손을 빌려서 하면 설혹 한때 성공한다 하더라도 끝내 완전한 독립을 유지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몇 해가 걸리더라도 민중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안창호의 주장이었다.
그에 공감한 이승훈은 그 뒤 몇 차례 서울에서 안창호를 만나 단체 결성에 대해 논의했고, 마침내 1907년 9월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도마다 골고루 대표를 뽑았는데, 이승훈은 평안북도 총감이었다. 이 회는 비밀결사였으며, 종으로는 연락이 되나 횡으로는 서로 알 수 없이 만들어 그 비밀을 유지하도록 했다. 105인사건이 일어나 우연히 드러나게 되기까지는 이 회가 있는 줄 알지 못한 것을 보면, 그들의 단결이 얼마나 굳었던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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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경내에 있는 남강 이승훈 어록비. / 남강문화재단
신민회는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해 두 가지 일을 하기로 했다. 교육과 실업이었다. 따라서 대성·오산 등 여러 학교와 태극서관·평양자기회사가 세워졌다. 한편 이승훈은 오산에 돌아와서는 강명의숙을 확장해 오산학교를 세웠다. 신민회는 국권피탈 뒤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아 주요 인사들이 외국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 운동을 유지해 나간 것은 홀로 남은 이승훈뿐이었다.
1907년 12월 이승훈이 처음 오산학교를 시작할 때에 무슨 예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산학교는 외부의 도움은 거의 없이 온전히 이승훈의 재산으로 운영되었다. 있는 재산을 다 바친 것은 물론이요, 친구나 유지에게 자금을 구하느라고 밤낮을 잊고 분주했다. 오산은 학교라기보다는 한 가정이고 도량(道場)이며 수련소였다.
설립 취지부터 학문보다는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개조하기 위한 지도자를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선생도 학생도 다 같이 종교적 사명감 혹은 자부심에 불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화기가 넘치는 사랑 속에 하나로 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엄격하고 규칙적이며 씩씩한 면이 있었다. 학과도 역사·지리·산수 등 중등 과목은 물론 그보다 훨씬 수준 높은 법학통론·헌법대의 같은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민족정신이었다. 누구나 다 애국심에 불타고 있었다. 낮에는 시간표대로 배우지만 저녁이면 나라 형편, 세계 정세 등 돌아가는 시국에 대하여 토론했다. 이렇게 하는 동안 상식이 늘고 사상의 중심이 잡히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봉사정신이다. 이승훈 스스로가 그것을 실천했다. 그는 학교 운영 일로 밖에 나갈 때 말고는 늘 선생들과 같이 먹고 자고 일하고 배웠다. 자기가 먼저 쓸고 닦고 고치며, 설립자인 동시에 교장이고 선생이며 사무원이고 사환이며, 또 같이 배우는 학생이기도 했다.
오산학교 졸업생은 검소하고 소박하며, 일 잘하고, 과한 보수를 바라지 않으며, 민족정신이 높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모두 이승훈이 몸소 실천해 보인 인격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열성과 이종성(李鍾聲), 이광수(李光洙), 조만식(曺晩植) 등의 노력으로 오산학교는 수많은 인재를 낳았으며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냈다.
이 무렵 이승훈이 전혀 돈 버는 일에 대해 담을 쌓고 앉아 선비 노릇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08년 평양에 종로 태극서관을 열었다. 태극서관은 서북 일대에 새로운 지식을 보급하는 가장 큰 책방이었다. 국권피탈 직후에는 서울 안국동에 제2태극서관을 세웠다.
한편 그 무렵에는 일본에서 왜사발·왜대접 등 하얀 백자 사기그릇이 들어오면서 놋그릇은 인기를 잃어갔다. 일본의 사기그릇은 눈이 부시게 깨끗하고 하얄 뿐만 아니라 녹슬 염려도 없고 그릇을 닦느라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이승훈은 도자기 공업을 일으켜 왜사발과 경쟁해 나가려 했다.
그는 1908년 평양자기회사를 세웠다. 사업이 잘되어 그해 10월 주주를 전국적으로 모아 자본이 2200주로 늘어났다. 한 주의 가격은 50원, 총자본금은 6만원이었다. 평양자기회사는 그야말로 시의(時宜)에 맞는 것으로 2년 동안에 급격히 성장했다. 그러나 국권피탈 뒤부터는 일본 사기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아주 값싼 가격으로 경쟁을 하는 바람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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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오산학교의 체조 교육 모습.
이승훈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기독교 대표로서 3·1운동을 이끌었다. 3·1운동을 성사시킨 것은 순전히 이승훈의 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아니면 기독교계를 단합할 수 없었다. 목사들이 “우리는 정치에 대한 것은 모릅니다”라며 뒤로 빠지려 하자 “나라가 망하는데 당신들은 천당 가 있을 터이오?” 하며 일으켜 세웠다. 천도교와 힘을 합치는 것 또한 이승훈의 노력이었다. 민족대표들은 뜻을 모은 뒤에도, 독립선언서에 누구 이름부터 적을 것인지에 대해 옥신각신 말이 많았다. 이승훈이 그 모습을 보고는 일갈했다.
“순서가 무슨 상관이오? 이게 죽는 순서요. 아무나 먼저 쓰면 어떻소? 손병희께서 먼저 쓰시오!” 각오는 했지만 막상 일이 닥치자 죽게 되는 건 아닌가 근심걱정에 맥이 풀린 사람들에게 이승훈은 호통을 쳤다.
“지금 뭐하는 거요! 죽을 줄 알고 한 게 아니오? 목숨을 따로 두고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거요!” 그제야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었다.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 외침과 태극기 물결이 온 나라를 뒤덮었다. 이승훈은 주동자로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가 옥에서 나오기 한 해 전인 1921년, 아내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3·1운동을 이끈 48인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감옥에 들어갔고 맨 마지막에 감옥에서 나왔다.
감옥에서 나온 뒤 이승훈은 일본으로 건너가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무렵 조선총독부는 식민교육정책의 하나로서 ‘고등보통학교 승격운동’을 추진했다. 이승훈은 내키지 않았지만, 오산학교를 지켜내려면 어쩔 수 없이 그에 따라야 했다. 너무나 열심히 그것을 추진하는 이승훈의 모습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누가 그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었을까.
규정대로 고등보통 재단법인이 되려면 25만원 이상의 재산이 있어야 하는데 오산학교는 그만 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이승훈은 교섭을 위해 평안북도지사 이쿠타(生田)를 찾아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이쿠타가 이승훈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은 어떤 주지로 학생들을 가르치시겠습니까?” 이승훈은 잠시 망설였다. 총독부의 교육 주지가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굳게 먹고 대답했다. “나는 조선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쿠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이때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승훈은 정색했다. “지금은 서력동점(西力東漸) 시대 아닙니까? 이때에 일본이 그 힘에 대항해 이기려면 조선 사람도 제 노릇을 해야만 같이 이끌어 나갈 수 있지, 제 노릇 못하는 조선을 일본이라고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이쿠타는 손을 내밀어 이승훈의 손을 잡았다. “과연 선생은 다르십니다.” 이쿠타는 그 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주선해, 오산학교가 실지 재산은 부족하지만 고등보통학교 인가를 받도록 해주었다. 큰 적을 이기는 것은 정면 공격만도, 비겁한 타협만도, 간사한 술책만도 아니다.
1924년 이승훈은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해 1년 동안 경영을 맡았다. 이때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 그 활동범위가 매우 넓었다. 동아일보 사장을 물러난 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 운영에 힘썼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는 끈질기고도 매서웠다. 그의 입에서는 학생들에게 애국애족정신을 고취하고 피 끓는 젊은 가슴에 불꽃을 댕기는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승훈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경찰들이 나타났다. 조회시간마다 운동장 연단에 선 이승훈은 학생들에게 쩌렁쩌렁 울리는 쇳소리로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내려오곤 했다.
“이 젊은 놈들아, 정신 차려!” 그것은 교정 곳곳에서 감시의 눈을 번뜩이는 일본 경찰과 조선인 끄나풀들을 향한 일갈이기도 했다. 조선 창조경영 우국의 거목 이승훈은 유기공장 심부름꾼에서 시작해 조선 민족의 심부름꾼으로 살다가 1930년 5월 9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제 내가 나라를 위하는 것이 이것이 마지막이니, 죽거든 뼈를 흙 속에 묻어 쓸데없이 썩히지 말고, 엮어서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연구하는 데 쓰게 하라.”
그의 비석에는 그 사람됨을 옮겨 놓은 글만이 남아 남강의 그리움을 더해 주고 있다. ‘일생 동안 남을 위해 살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이승훈.’
첫댓글 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그런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고....오산학교 그리고 만해스님의 조언을 받아들여 송설당 여사가 세운 김천고보.... 나철대종사가 세운 대종교가 또 다른 민족정신의 기둥이었음에도 최근까지 나철대종사의 기념비조차 세우지 못했던 독립기념관....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깨여있는 교육이 가장 중하지요
이러한 교육개혁을 지금 한다면 가장 반대하고 음해하고 해방을 놓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늘 말과 행동이 다르고 생각과 뜻이 개인의 안위와 영달에 따라 이중 아닌 다중적으로 매일 요동치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요?
'사람이 희망이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그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자신안에 있는 불성을 꺼내어 주는 사람에 한해서만 입니다. 그러니 결국 부처님이 희망이지요. 색즉공 공즉색...
사람이 부처요, 부처가 사람이라.
이러한 위대한 가르침을 자리교육으로 삼아야만 대한민국도 한걸음 진리에 가까워질 것이라 믿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