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어느 날>
제 기억으론... 아마도...
11월 13일 이었을 꺼예요.
낮밤을 거꾸로 사는 엄보컬과 김선수에게는
새벽이나 다름없는 아침 시간..
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가장 귀찮아하는 일 중에 하나가 '통화' 이기에
보통은 그 시간에 울리면 베개 사이에 핸드폰을 묻어버리곤 하는데요.
그날따라 벌떡 일어나서 받았습니다.
점잖은 노신사분의 첫 마디는
" 아코디언 하는 사람이요?? 거기가 어디요??"
안쓰고 있는 악기가 하나 있으니, 지금 가져다주시겠다는 겁니다.
가까운 전철역이 어디냐고 반복해서 물으셨고..
"아.. 곤란한데요.. 근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러워서..."를 반복하다가
홍대역에서 오후 2시에 전화주시겠다는 것을 끝으로 통화를 끝냈습니다.
이상한 기미를 눈치챈 엄보컬이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이러저러한 상황을 설명하자..
여기까지 오시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듯 하니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가능하면 사양하고 돌아오자고 합니다.
어리바리한 저 대신 엄보컬이 다시 전화를 드렸고
살고 계시는 방학동으로 달려갔습니다.
딱 두 내외분 사시기에 적당해보이는 작은 아파트는
먼지 한톨없이 정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거실에.. 들어서자...
벌써 악기를 딱 꺼내놓으셨는데.....
허걱! 체코 델리시아(Delicia) 72베이스!!
아코디언을 만지기 시작한 이래로 시간이 나면
세계 각국의 아코디언의 사진을 검색해보며 침을 겔겔~흘리는 버릇이 생겼는데..
정말 만져보고 싶었던 악기 중 하나였거든요.
쓰다듬어보고 있으니, 메어보라고 하십니다.
맙소사... 뮤제트(Musette)소리가 장난이 아닙니다.
유럽의 냄새가 물씬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거실의 가족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쟉년 내내 용산참사현장을 지켜주셔서 '남일당 본당 주임신부'라는 별칭까지 얻으셨던
- 그리고 지금도 매달 마지막 수요일 용산참사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미사를 진행하고 계신
이강서신부님이 가족 사진 안에 계신겁니다.
혹시나..해서 여쭤봤더니
"제가 .. 이강서 신부, 아비되는 사람입니다. " 라고 하십니다.
하....
환갑이셨던 15년 전에 구입하셨는데
제대로 사용을 못하셨다고 합니다.
용산참사현장과 금강생명평화미사에서 제가 연주하는 걸 보셨고
악기를 꼭 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으셨답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너무 늦게 주게 되어 미안하시다며
이제라도 꼭 필요한 사람에게 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하십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저희 둘의 등을 떠밀어보내십니다.
'좋은 일'에 써달라, '좋은 음악'을 들려달라. 하십니다.
집에 오는 내내..
둘 다 멍~ 해져서 한동안 차 안에서 말없이 있었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겠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가
이젠 음악 그만둘래도, 그만 둘 수도 없게 생겼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기약없이 음악을 그만두게 되었던 일들..
그리고 다시 연주를 시작하면서 결심했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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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 후..>
집에 돌아와 악기를 앞에 놓고보니..
걱정이 더 많아졌습니다.
아무리 좋은 악기라도 15년이나 된 악기이니..
여기저기 손을 봐야할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코디언 수리를 하신다는 분들을 죄다 찾아봤습니다.
고민 끝에.. 혹시나.. 하면서
제가 쓰고 있는 현대48베이스를 만드신 김연도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팔순이 넘으신 분인데 아직도 청년처럼 호기심 넘치고, 늘 공부하시는 분입니다.
현대악기사의 악기가 아닌데.. 이러저러한 사정을 설명했더니
빨강고양이(제 닉넴)에게 딱! 맞는 악기가 생겼다며 마치 자신의 일인양 너무 기뻐하십니다..
손봐주시겠다고 흔쾌히 가져오라 하십니다.
- 현대악기사에서 김연도(가락)선생님과 -
현대악기사에서 수리를 받고 온 Delicia는 소리가 훨씬 더 커지고 명쾌해졌습니다.
그리고.. 쓰고 있던 현대48베이스는 문정현신부님께 빌려드렸습니다.
문정현신부님은 한국사회가 바로 서기를, 교회가 바로 서기를 바라며
명동성당에서 매일 기도를 하고 계신데요.
군산 집에서 아코디언을 못 가지고 오셨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안고 계신 것이 현대 48베이스,
제가 안고 있는 것이 체코 델리시아 72베이스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델리시아 밑 부분에 현대악기사의 로고를 붙였습니다.
새생명을 주신 곳이 현대악기사라는 표시입니다.
-- 아.. 너무 홍보성 글 같당..ㅋㅋ --
국회에서 열리고 있는 시국미사에서 첫 선을 보였고요.
자랑도 했습니다.
이강서신부님의 아버님께서 주셨다고요..
모두들 너무 기뻐해주십니다.
전국사제기도회에서는 이강서신부님을 만나뵈었습니다.
이게 그 악기라고 보여드렸더니,
어쩐지.. 소리가 다르더라고.. 하시며 웃으십니다.
그리곤 아버님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선... 악기가 이제야 제 주인 찾아갔다고 하시던걸.."
새 악기 델리시아는 무게가 9.8kg 정도 되고요.
크기도 훨씬 큽니다.
거의 모든 곡을 새로 연습해야하는 상황이라
솔직히 요즘 좀 많이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음악이란 건
언제나 그렇듯.. 감성보다, 인내를 먼저 배워야하는 분야 이지요.
열심히 꾸준히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
언젠가 제 몸의 일부처럼 딱~ 붙어주는 날이 오겠죠..
오늘도 저는 아코디언과 함께 잠들 예정입니다. *^^*
첫댓글 악기가 무겁다고는 해도 9.8kg 은 정말 무거운 무게네요. 보통 악기가 5kg 이 넘으면 10분 들고 연주할 때 이미 힘들고 통증이 찾아와서 계속 연주하기가 힘들기 마련인데, 거의 10kg 에 육박하는 무게이니, 이거 정말 쉽지 않겠습니다ㅠㅠ
익숙해져야겠지요.. 풀사이즈의 톤쳄버 기능이 달린 아코디언은 보통 13~14kg 이거든요..
그러게요/무거우시겠지만.기분은너무좋으실듯. 저도 열심히 두리반에 함께해야겠습니다. 카메라 주신다고 연락오실분이 있으실지도(퍽).ㅋㅋ
우아아 기분 째지셨겟당! 난 기타 주신다고 연락오면...(컥 숨이 막힐듯...)ㅋㅋ
우와 멋지다!!!!!
ㅋㅋㅋ 라디오에 나올 법한 사연~ 더욱 화려해질 김선수님의 연주 기대 만빵!
헐....화려한 연주..ㅜ.ㅜ
말도 마세요. 들고 있기도 힘들어요..
한동안 완전 버벅대는 연주는 보실 수 있을 꺼예요.. 에고에고..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