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마 9:9-13)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돋보기와 자를 가지고 사람을 보고, 판단합니다. 보편적 기준이 아닌 자기의 주관적 기준을 가진 것입니다. 한 가지 사건을 보면서도 서로 판단과 해석이 다른 이유입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주관적인 판단이 법이나 종교적인 가치를 가지고 판단한다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은 모든 일을 법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법은 바뀌지 않는 이상 절대적 가치 기준이 됩니다. 법 조항을 가지고 한 사람 혹은 한 가정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법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의도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적용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책임을 묻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법이 권위를 가지려면 공정해야 합니다.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종교의 교리나 종교법도 신의 이름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절대적 가치를 가집니다. 그래서 종교 재판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재판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판단 역시 보편적이고, 공정한 가치로 판단해야 합니다. 편을 갈라서 자기편에게는 관대하고, 상대 편에게는 잔인하다면 공정성을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법이나 종교적 판단은 법 조항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법은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최소한의 규칙입니다. 처벌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의 가치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의 최고 가치 역시 ‘생명’입니다. 율법으로 편을 갈라 서로 해치고, 분열하고 갈등하게 만드는 것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신앙과 율법으로 행해지는 모든 분열과 갈등과 폭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물론 율법은 신앙을 보존하고 갈등을 막는 최소한의 기준이 됩니다. 율법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대로 믿고 서로 갈등하고 다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리가 있고,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위에 있는 율법이나 가치는 없습니다. 율법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옛날 일을 잊은 사람을 보고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고 합니다. 팬들의 사랑으로 인기를 얻은 사람이 자기가 잘난 줄 알고 행동할 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지요. 권력을 가지고 재물을 얻은 것이 자기 실력이고 능력인 줄 착각하고 교만해질 때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말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 축복의 약속을 받은 백성’이라고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의 권위와 권력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율법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특별한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를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신음하고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나서 말을 잘 들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로 사랑하며, 생명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으로 판단하고, 남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할 뿐입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의 기독교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 것이 무슨 특권이라도 있는 듯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역시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찬송가 305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하나님은 죄인인 나를 살리시고 생명을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잘 믿고 충성해서, 아니면 능력이 많아서 사랑하고 살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판단하는 기준은 자기 기준입니까? 하나님의 기준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태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합니다. 그리고 자기 친구들도 함께 초대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유다 지방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 군대가 지배하고, 세리들이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쳤습니다. 로마는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유대 땅을 다스릴 유대인의 왕을 두고 통치하도록 합니다. 유대 법으로 다스리도록 허용한 것입니다.
세리는 유대인이면서 로마에 협력하는 관리입니다. 그는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었지만 지키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방인을 만날 때마다 정결 예식을 갖춰야 합니다. 손을 씻고,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로마 사람을 만나고, 이방인들을 만나는데 율법대로 정결 예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이 되었고, 유대 공동체에서 배척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과 장사를 하는 유대인 역시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태의 집에서 예수님과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 랍비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는 것도 정결 예를 지켜야 하는 사항입니다. 죄를 고발할 구실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답을 합니다. 먼저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라야 의사가 쓸데 있다’고 하시며 율법의 뜻, 정신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신 뜻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 곧 율법 준수와 제의적인 정결 의식 등 신앙 행위보다 긴급한 것은 긍휼, 곧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생명을 얻도록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살피신다면, 누가 율법을 잘 지키고 충성하고, 헌신하는지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누가 위험에 빠졌고, 누가 고통 중에 신음하며 울부짖고 있는지 살피시며, 그를 살리기 위해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사람을 찾아서 상 주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 아파하는 이들을 살리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리 마태는 종교적으로도 죄인이라며 비난 받고, 민족적으로도 우리나라를 침략한 로마를 위해 일한다며 비난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비극적인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를 주님을 부르시고, 주님의 제자로 삼으십니다. 마태는 세상에서 자기처럼 비난받고,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잘 알 것입니다. 아마 그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고 고백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도 바리새인들처럼 그들의 조상이 종살이하며 신음하던 백성, 하나님을 거역하던 불순종한 백성이었던 것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특권처럼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큰 사랑을 받았다면,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했겠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맡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죄인은 법을 어긴 사람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참 평화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욕심과 교만, 미움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고, 희망이 없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가난 때문에, 질병으로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전쟁을 멈추게 하고, 폭력을 그치게 하고, 가난한 사람을 부자 되게 하고, 병든 사람을 모두 고쳐줄 수는 없습니다. 참평화와 기쁨은 그렇게 얻는 것이 아닙니다.
참평화와 기쁨은 어려움 중에도 희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 때 얻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가난해도, 아파도, 전쟁 중에도 희망을 가지고 평화를 누리며 기쁨을 얻습니다.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고통 받는 이들, 슬퍼하는 이들의 곁에 머물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작은 힘을 보탤 수도 있고, 정성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아파하고 슬퍼하는 이들이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 나를 사랑하며 나와 함께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잘나고, 힘 있는 사람들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합니다.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것이 게으르고, 능력 없고, 자기 관리를 못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왜 슬퍼하는지 묻지 않고, 그 슬픔을 함께하며 그들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일하십니다.
주님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고, 사랑이 필요한 곳에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를 찾고 기다리는 곳에 찾아가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