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선경의 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청량산을 꼽을 것이다.
-도산9곡, 청량산-
유산하는 자 유록을 써야 한다, 유청량산록
고산정을 지나면 농암시비가 보이고 그 앞으로는 봉화로 가는 35번 국도가 나타난다. 농암시비는 강과 산과 배와 달과 시가 있는 농암의 풍류를 형상화했는데, 멀리서 보면 산, 배, 나비, 물고기 모양을 두루 연상하게 하는 매우 예술성 높은 작품이다. 시비 앞에서 봉화군 명호면까지의 길은 너무 아름답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길이라 생각한다. 경춘가도가 결코 이 길보다 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길을 따라 봉화-태백-사북-고한-정선-하진부-진고개-주문진의 길을 역으로 내려오는 길을 내심 좋아한다.
국도를 오르면 곧 청량산 입구가 나타난다. 이곳을 너분들이라 하는데, 강변에 넓은 돌[廣石, 혹은 博石]이 있어서 얻은 이름이다. 이곳이 선성 14곡 중 1곡인 박석천博石川이며, 도산 9곡의 마지막 9곡에 해당하는 청량곡이다. 돌, 강, 구비, 단애, 그리고 백사장이 갖추어져 있어 도산 9곡의 시발점으로 전연 손색 없다. 요컨대 안동 문화의 기점인 셈이다.
너분들을 건너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 김덕호씨가 근무하는 출입문이 있고, 주변에는 앞 강가에서 옮겨 온 우아한 수석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그 곁에 퇴계시비가 있다. 2001년 퇴계 탄신 500주년 기념으로 봉화군에서 세웠다. 기존에 퇴계 작이라고 하고 세운 <청량산가>는 그 진위 논란으로 교체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청량산가>는 퇴계의 작품이 아니라고 함이 훨씬 합리적으로 보인다. 문집에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도무지 퇴계의 맛이 나지 않는다. 한 번 감상해 보기 바란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峯을 아느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마는 못믿을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가지 마라 어부魚舟子가 알까 하노라
퇴계는 청량산에서 공부한 바 있다. 그리고 혹애惑愛한 나머지 드디어 ‘우리 집의 산’이란 뜻으로 ‘오가산吾家山’이라 했다. 이를 기념하여 후손과 유림들이 힘을 모아 청량사 옆에 오산당吾山堂이라는 집을 지었다. 1832년 일이다. 그런 연유로 청량산은 지금도 그 소유가 퇴계 문중으로 되어 있다.
퇴계는 “산에 대한 소유는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하면서 그 욕심을 경계했다. 그런데 청량산과 더불어 도산에 대해서는 저 유명한 글 <도산잡영>의 끝에 산주기山主記라 하여 도산서원 일대와 청량산의 소유권을 그 당시부터 결정짓게 했다. 산 소유권과 재산 개념이 희박하던 시대에 이런 표현은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청량산의 진가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신재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다. 김생, 최치원, 원효, 의상도 이곳에 머물렀다지만 기록은 없다. 퇴계 역시 이 산을 좋아했지만 어디까지나 유산지처遊山之處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신재는 놀랍게도 이 산을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 구월산, 삼각산 등 5대 명산에 비견되는 하나로 보았다. 그래서 거듭거듭 찬양했다.
우리나라 산 중에 웅장하기로는 지리산이요, 청절하기로는 금강산이며, 기이하고 빼어나기로는 박연폭포와 가야산 계곡이다. 그러나 단정하고 엄숙하며 상쾌하고 경개한 산으로는 청량산으로, 비록 규모는 작지만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우리나라의 명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저 다섯 산을 이를 것이니, 북은 묘향산, 서는 구월산, 동은 금강산, 가운데는 삼각산, 남은 지리산이다. 그러나 작으면서 선경仙境의 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청량산을 꼽을 것이다.
규모는 작으나 선경의 명산이 신재가 본 청량산이다. 사실이 그러했다. 여러 명산들을 계획적으로 등산한 신재의 안목이기에 이 평가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신재의 청량산 등반은 오랜 준비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행해졌다. 신재가 청량산을 찾은 것은 1544년 4월 11일이고, 하산은 17일이며, 글은 19일에 완성했다. 꼬박 일주일 동안 온 산을 몸소 밟아 가면서 글을 썼다. 그때 신재는 이 작은 산에서 무려 열아홉 개의 절과 암자를 직접 만났다. 문헌으로는 이 무렵을 전후하여 스물일곱 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기록이 의문스러웠다. 도대체 이 작은 산 어디에 그런 많은 절이 지어졌단 말인가? 그런데 차츰 청량산을 오르내리며 유념해 살펴보니 조금 편편한 곳은 절터의 흔적이 완연했다. 청량산은 산 전체가 법당인 불가의 산이요, 사찰과 암자의 바다였다.
그런데 불가의 산 청량산은 신재를 만나면서 일거에 유가의 산으로 변모했다. 한마디로 혁파해 버렸다. 신재는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를 육육봉六六峰(12봉우리)으로 새로 작명하고 나머지 허탄한 불교적 잔재를 그야말로 쓸어버렸다. 천하의 명산 청량산이 올라와 보니 온통 불가의 산임이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이는 16세기의 극심한 숭유억불책과 맥을 같이한다. 이를 결산하는 글이 유명한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이다. 이 글은 아마 청량산 기행문으로는 전무후무한 최고의 명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 글을 읽어 본 퇴계는 발문을 쓰면서 청량산과 신재의 만남을 ‘산의 일대 만남山之一大遇’이라 했다. 청량산이 임자를 만나 그 진가를 비로소 얻었다는 뜻으로, 퇴계는 이 글의 빼어난 문장력과 심미안을 극찬하며 “위대하시다偉哉”라고 했다. 퇴계는 나아가 소백산 기행문을 직접 쓰고 그 효용을 역설했다.
내가 그 시문(<유청량산록>)의 뛰어남을 감상하니 곳곳에서 읊은 것이 마치 홍안의 백발 노인과 더불어 말하고 서로 수창酬唱하는 듯했다. 이에 힘입어 감흥을 일으키고 정취를 얻은 것이 진실로 많았다. 진실로 유산遊山을 하는 자는 유록遊錄을 남겨야 한다. 왜냐하면 기행문은 등산에 유익함을 주기 때문이다.
유산은 등산이며 유록은 기행문이다. “유산하는 자 유록을 써야 한다”는 퇴계의 언급은 하나의 산행 지침이 되었다. 그래서 신재의 기행문은 이후 수많은 선비들의 청량산 기행문 저술의 전형이 되었다. 내가 본 청량산 기행문만도 퇴계의 <백운암기>를 비롯하여 허목의 <청량산기>, 이익의 <유청량산기>, 이상룡의 <유청량산록> 등 50여 편이 넘는다. 최근 국학원의 임노직 선생을 만나니 그는 이미 80여 편의 글을 보았고 정리하는 중이라 했다. 따라서 청량산 등산과 청량산 기행문을 쓰는 것이 유행처럼 전파되었다. 이로써 불가의 산 청량산은 유가의 산으로 급격히 변모했으며, 이후 퇴계의 명성과 함께 영남 유교의 메카와 같은 성지로 인식되었다. 선비들의 청량산 유산과 유록 작성은 일종의 성지순례와 순례 보고서 제출의 의미마저 지녔던 것이다.
굳세고 뾰족함이 여러 바위들이 다투는 듯하다, 김생의 글씨
지금 청량산 등산은 2~4시간 정도 소요되며, 네 개 정도의 코스가 있다. 산 입구 관문에서 2분 가량 차로 오르면 두들마을과 새미터로 오르는 최초의 등산로가 있고, 여기서 조금 오르면 청량사를 바로 오르는 계곡 코스가 있으며, 여기서 또 조금 오르면 웃청량골 아래의 등산로로 입석-응진전-김생굴-자소봉으로 오르는 코스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남청량산 축융봉을 향해 산성, 공민왕당, 가송리를 전망할 수 있는 코스가 있다. 저마다 특색이 있으니 두고두고 오르기를 바란다.
여기서는 입석-응진전 코스를 소개한다. 돌 층 벽을 따라 15분 정도 오르면 문득 시원한 전망대와 함께 서편 까마득한 바위 아래 그림 같은 암자가 보인다. 응진전應眞殿이다. 옛 명칭은 상청량암이다. 나는 백 번도 넘게 청량산을 올랐고, 그 대부분을 이 코스로 지났다. 손님이 오면 안내했고 틈이 나면 올랐으니, 아마 가장 많이 오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 이 암자의 근황을 20여 년 정도 지켜보았고, 그 변모의 모습이 우리 조국의 발전과 함께하고 있음을 보았다. 십 년 전까지도 이 암자를 찾는 신도는 없었다. 뜨내기 중들과 무속인들이 어쩌다 들고 나는 정도였다.
언젠가 고적한 이 암자에 적음寂音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스님이 있었는데, 그를 만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매월당이 환생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사발로 소주를 폭음하며 시국에 비분강개하는 모습은 바로 무도한 수양대군에 대항해 악전고투하며 방황하는 영락없는 매월당이었다. 적음은 자신이 기관에 끌려가 당했다는 고문의 상처를 보여 주며 “이제 끝장을 내야합니다”라고 포효하며, “곧 올라가겠노라”고 했다. 그때 서울 도심을 들끓게 한 소위 넥타이부대의 출현 의미를 한국의 오지 청량산의 한 암자 속에서 생생하게 느꼈다. 그리고 독재 정권이 곧 멸망할 것도 확신했다. 적음은 자신이 경주 최부자의 후손이라 했고, 중광을 형편없는 사이비라 하며, 자작의 시화집도 보여 주었고, 자신의 애인이 자주 이곳을 찾아온다고도 했다. 실로 파격적인 스님이었다.
적음은 어느 날 수수께끼처럼 사라져 버렸고, 그후 다시는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당시의 건강 상태와 자학적인 자세로 보아 아직까지 생존해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응진전을 지나면 곧 천 길 낭떠러지 석벽을 지나게 된다. 아래에서 보면 도저히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수직 절벽에 길이 있다. 이 석벽 길이야말로 청량산의 압권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이곳을 지나면서 한 번도 아래를 바로 내려다본 적이 없다. 지금은 조금 다듬어졌지만 예전에는 매우 가파른 곳이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곳에서 추락한 사람이 있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하긴 산 전체가 법당인 청량산 입석의 길에 석가모니의 자비와 인도가 왜 없겠는가!
석벽 길을 지나면 청량사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른다. 어풍대御風臺다. 바람을 몰아 오고 몰아 가는 그런 우뚝한 지점이다. 여기서는 누구든 쉬어 간다. 하긴 요즈음은 쉬지 않고 가는 사람이 더 많다. 유산의 여유보다 등산의 조급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금탑봉 아래 석별길에는 하청량암, 상청량암, 치원암, 극일암, 안중사 이렇게 다섯 암자가 있었다. 안중사는 신재가 찾았을 때 퇴계의 숙부인 송재 이우 시가 벽에 있었고, 극일암 뒤 풍혈은 그 위치가 매우 험한데 입구에 최치원이 사용한 바둑판이 있었다고 했다. 극일암 돌계단 위에는 둘레가 열 아름에 높이가 천 척인 노송이 있었으며, 주위에 동석, 총명수 등의 명소가 있다고 했다. 송재 이우의 총명수 시는 이렇다.
돌 틈으로 샘물 졸졸 솟아오르는데 石�涓涓側湧淸
중 말하기를 ‘마시면 총명해집니다’ 한다 僧言飮者發聰明
우습다, 나도 그때 수없이 마셨지만 當年笑我傾千斛
아직까지 혼미한 한 늙은이라네 昏瑩依前一老生
총명수는 최치원이 마심으로써 그 이름을 얻었고, 그 부근에는 치원암이 있었다. 서애 류성룡의 아들 류진이 청량산을 찾았을 때 치원암과 보현암에 퇴계가 쓴 친필 시가 벽에 있었다고 했다. 류진의 《수암집》을 보면, 그 시가 실려 있는데, “벽에 그대 탄식의 글 보니壁上看君興歎語, 내 마음 어찌 그대와 같지 않으랴吾心何�與君同”였다. 그 시는 일찍이 제자 금란수가 청량산에서 오랜 기간 공부했지만 별 소득이 없음을 한탄한 시를 보고 지었던 것이다. 퇴계가 이 시를 쓴 해는 1564년이고, 류진이 찾은 해는 1614년이니 적어도 이 40여 년 동안은 치원암과 보현암에 퇴계 시가 존재하고 있었다. 한강 정구는 “치원암의 시는 판각하여 보존했고, 보현암의 시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류진이 찾았을 때 청량산 20여 암자 가운데 중이 있는 곳은 연대사에 서너 명, 지장전에 단 한 명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석벽 길’ 바닥과 좌우 곳곳에 기와파편이다. 당시 암자들의 잔해이다. 이들 기와파편들을 만져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육육봉’의 산세를 가늠해본다. 그리고 청량사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 우측 등산로로 조금 오르니 ‘김생굴’이 나온다. ‘서성書聖’ 김생金生이 그 유명한 ‘김생필법’을 깨우쳤다는 바로 그 현장이다. 김생필법이 ‘청량산의 산세 때문[山故]’이라는 기록은 여러 글에 보이는데, 신재의 글에 “내 집에 김생서첩이 있는데, 그 글자 획이 굳세고 뾰족함이 마치 여러 바위들이 다투는 듯한데, 지금 이 산을 보니 바로 김생이 이 산세를 보고 깨우쳤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김생의 청량산 공부는 김생이 청량산 뒤 ‘재산면 출신’임과, 청량산 앞 태자사의 ‘낭공대사김생글씨집자비문’으로 그 개연성은 충분하다. ‘청량산을 닮았다’는 그 글씨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도 한번 대조하고 감상해보기 바란다.
‘김생굴’에서 위로 올라가면 옛 선인들이 찾아갔던 ‘자소봉’, 선학봉, 장인봉으로 이어지는 멋진 봉우리능선과 낙동강을 굽어보는 절경의 ‘금강대’와 ‘금강굴’을 보게 된다. 청량산이 16세기 이전에 ‘수산水山’이라 했음은 바로 이 금강대 앞의 펼쳐진 한 폭의 그림 같은 낙동강의 풍광 때문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이번 발길은 여기서 아래의 ‘오산당’으로 향한다.
‘오산당’은 퇴계의 청량산 입산공부를 기념해서 19세기에 지어진 아담한 건물이다. 청량산 유교문화의 상징적인 건물로 보면 되겠다.
산행은 곧 공부다
그렇다면 퇴계에게 청량산 유산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퇴계는 13세에 숙부인 송재 이우의 명령으로 청량산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64세까지 여섯 번 정도 입산했다. 13세, 15세, 25세, 33세, 55세, 64세로 평균 10년에 한 번 정도 입산했다 할 수 있다. 많이 올랐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고 결코 적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퇴계는 그 사이에도 청량산과 꾸준하게 교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교감은 다름 아닌 청량산 관련의 시문 저술이었다. 이것은 퇴계 자신이 산행=공부의 등식인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의 신념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퇴계는 “독서가 유산 같다 말하지만, 이제 보니 유산이 독서 같다讀書人說遊山似 今見遊山似讀書”라고 하기도 했다.
퇴계는 또한 산행의 의의를 “나무들이 어려움을 참고 갖은 고생을 하여 싹이 자라 성장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살아가고 생물이 자라 움직이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고 알기 쉽게 표현하기도 했다.
선현들의 이런 산행 관련 문헌을 보노라면 등산이라는 용어는 자연정복을 전제한 서양의 개념이며, 유산은 자연합일의 동양적 자연관을 나타낸 용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산에 오르다’와 ‘산에서 노닐다’는 확실히 다르다. 따라서 신재가 산에서만 무려 일주일 정도 머문 것도 지금의 등산과는 그 방식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그렇다면 산행=공부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퇴계는 청량산 유산에서 열두 가지 일을 시로 표현했다. 먼저 입산에 해당하는 등산, 바람을 만나는 치풍値風, 달을 구경하는 완월翫月, 나그네에 감사하는 사객謝客, 농부를 위로하는 노농勞農, 도를 논하는 강론講論, 사람을 생각하는 회인懷人, 금강산 유산을 거절한 권유倦游, 책을 읽는 수서修書, 앉아 사색에 잠기는 연좌宴坐, 그리고 산을 내려오는 하산下山과 집에 돌아오는 환가還家가 그것이다.
만행卍行=득도得道가 불가의 등식이라면, 유산은 유가의 거경居敬과 연관된다. 불가가 득도하여 부처가 되고자 했다면, 유가는 성인이 되고자 했다. 경敬이란 유가 최고의 개념이고 목표였다. 경은 선과 흡사한 측면이 있는데, 유산 열두 가지 가운데 앉아 사색에 잠기는 연좌는 더욱 그러하다. 마음[心]이 명제다. 다만 경이 예로 드러나는 몸가짐을 중요시한다면, 선은 마음가짐에 깊이 들어가 있는 듯이 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득도의 피안은 다 같이 저 멀리에 존재한다. 그 득도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이기理氣 이론 역시 온통 마음의 문제에 쏠려 있다. 사단칠정이란 곧 마음의 작용인 이성과 감정의 문제이자 선악의 문제다. 그 관계는 하나이면서 둘이고[一而二], 둘이면서 하나[二而一]라고 인식한다. 그것은 서로 섞일 수도 없으나 떨어질 수도 없다. 그 표현을 불상잡不相雜, 불상리不相離라 했다. 섞일 수도 없고 떨어질 수도 없는 오묘한 마음의 구조! 이를 어떻게 갈고 닦아 하나인 천인 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가. 결국 과제는 하나의 화두, 간단間斷의 문제로 귀착된다.
간단이 무엇인가? 경 사상의 구현은 유자들 일생의 목표였고, 그 구현은 ‘간단 없음’이 요체였다. 퇴계는 끊임없이 경을 말하고 “경 공부에 간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이를 “잔잔한 의식의 긴장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라 했다. 퇴계는 이를 쉬운 말로 “옷깃을 여미는 일”이라 했으니, “옷깃을 단정히 하고 잔잔한 긴장을 잃지 않음”이 곧 경이다. 사실 1555년 퇴계는 청량산에서 “옷깃을 여미고 묵묵히 앉아서 수련했는데, 그럴 때마다 중들이 휘장 저쪽에서 비웃고 떠들었다”고 했다. 간재 이덕홍의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에 보이는 기록이다.
요컨대 집중력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간단 없음의 자세이며, 유산은 그 공부에 효용성을 배가해 주었다. 그래서 퇴계는 청량산 유산을 “농부의 가을 추수 같은 소득이 있다”고 하며 그 의의를 인정했다. “독서가 유산 같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환가還家’의 내용은 이러하다.
유산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遊山何所得
농부와 같이 추수가 있다네. 如農自有秋
돌아와 서실에 앉아 歸來舊書室
고요히 향 연기를 바라보니 靜對香烟浮
오히려 나도 산 사람인 듯 猶堪作山人
속세 근심이 없어지네. 幸無塵世憂
그러나 청량산에 대한 퇴계의 관점은 학문과 인격 수양의 보조적 장소를 넘어서지 않았다. 퇴계는 청량산에 대해 그 인식 한계를 뚜렷이 설정해 놓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상지처遊賞之處로서의 청량산이지 경 실천을 일상화할 수 있는 가거지지는 아니었다. 퇴계는 이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 《도산잡영》에서 문답 형식의 글까지 지었다.
그대는 청량산에 은거하지 왜 도산에 사는가? 내가 답하기를 요산요수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데, 비록 낙천洛川이 청량산을 지나가나 산 속에서는 물이 있는지 알 수 없다네. 내 본래 청량산에 갈까 했었지. 그렇지만 저것을 뒤로하고 이것을 먼저 한 것은 산수山水를 겸하고 있어 늙고 병든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네.
뒤로한 저것은 청량산이고, 먼저 한 이곳은 도산이다. 퇴계에게 살 만한 가거可居의 터전은 산과 더불어 물이 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런 곳은 계상서당이 있는 상계와 도산서당이 있는 도산일 뿐 청량산은 아니었다. 도산에 대해서는 “산수가 맑고 기이하여 구하던 바에 꼭 맞아 몽매간에도 (마음이) 여기에 있다”라고도 한 바 있다. 지금 상계 종택과 도산서원은 퇴계의 안목으로는 경을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가거지지였고, 청량산은 이들 가거의 터전에서 다하지 못한 인생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조밀하고도 아름다운 자연 정원으로 존재했다. 아울러 그 자연 정원은 학문과 경 사상 구현의 궁극인 천인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데 유익한 작용을 했다.
바람이 산사를 만나면, 청량산 산사음악회
오산당을 지나면 청량사가 나온다. 옛 청량사와는 관련 없는 건물이나 언젠가부터 그렇게 불렸다. 청량산 청량사라고. 누각도 짓고 현판도 달았다. 그러나 지금 청량사는 청량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손색없다. 공민왕 친필로 알려진 현판이 달린 유리보전이 있고, 그 안에 모셔 둔 약사여래불은 종이를 녹여 만든 특이한 지불紙佛이다. 그 앞 너럭바위 위에는 전설 얽힌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떤 중이 이 절을 짓고자 죽어서 뿔 셋 달린 소, 즉 삼각우三角牛가 되어 재목을 실어 날랐다. 그 수고로움이 너무 커서 어느 날 죽자 돌을 쌓아 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청량산록>에 나오는 기록인데, 말하자면 삼각우의 한이 가지가 셋인 뻗은 소나무로 환생해 그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신재는 당시 이미 중들과 이 전설을 두고 설전을 벌였다. 나는 이 전설을 오직 절을 짓고자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죽은 어느 이름 없는 중의 애환을 담은 것이라 생각한다. 오랜 세월, 암반 위에서 모진 고행을 견디고 자라난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는 지금 청량사의 운치를 빛내는 너무나 멋진 그림이다.
삼각우의 전설이 있고 옛날 연대사蓮臺寺가 자리했던 유리보전 앞 너럭바위에 앉아서 운무가 올라가는 청량산 봉우리들을 둘러본다. 저 봉우리들 아래에 저마다 자리한 제비집 같은 암자들과 그 암자에서 인생의 그 무엇을 찾고자 정진했을 수많은 영혼을 떠올려 본다. 그 영혼이 지금 운무가 되어 피어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청량사는 바야흐로 중흥하고 있다. 그야말로 청량한 산사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지현이라는 주지 스님의 역량 때문이다. 그는 20여 암자 터를 확인하고는 김생암 등의 암자를 복원하려고 노력하는가 하면, 신도와 주민이 함께하는 사찰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지현은 영주에 장애인복지회관을 운영하며 부처의 가르침을 속세에서 구현하고자 한다. 받는 절에서 베푸는 절로 변모하려는 이러한 포교 자세는 신도들의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지현은 시를 쓰는 매우 낭만적인 정서를 지닌 사람으로, 비가 오는 올미재 강변을 걷기 좋아하며, 청량사 앞에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는 예쁜 찻집을 지었고, 몇 해 전부터는 일반 사찰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이른바 심야의 산사음악회를 개최하여 좁은 청량산 골짜기에 모인 6천여 명의 관객을 열광케 했다. 실로 산중의 기흥奇興이었다. 올해는 소리를 주제로 한 음악회를 기획하여 청량사 골짜기를 미어터지게 했다. 나는 도저히 현장에 갈 수 없어 멀리서 화상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떤 무대가 펼쳐질지 벌써 그 날이 기다려진다. 바야흐로 청량산은 다시 불가의 산으로 급속히 변모하고 있다.
우리 안동은 문학만이 폭발한 고장이 아니다. 문화가 폭발한 고장이다. 고려 이전에 안동 사람들은 불교를 받아들여 그 유래가 드물게 발전시켰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봉정사 극락전, 국보 16호인 법흥동 7층 전탑,그 밖에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사찰, 암자들이 그것을 말해 준다. 청량산은 그런 안동 불교 문화의 보고이자 신화였다.
왕조가 바뀌면서 새롭게 들어온 유교를 안동 사람들은 창의적으로 발전시켰다. 안동의 유교 문화는 조선 500년을 선도했다. 경상북도의 유교문화권 개발이란 사실 안동 문화를 염두에 두고 나온 개념이다. 도산서원, 병산서원을 비롯한 수많은 서원이 이를 증명한다. 청량산은 그런 유교 문화의 메카였다.
불교나 유교에 관심이 있는 자 청량산을 올라보기를 바란다. 청량산은 웅장하지는 않지만 엄청난 마력을 지닌 산이다. 왜냐하면 안동 문화는 이 청량산을 중심으로 실질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이 문화는 민족문화 창달에 적지 않게 기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