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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무제(梁武帝, 502~549년 재위)와 불교 >
양 무제(梁武帝)는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 양(梁)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이다.
중국의 남북조시대란 양자강을 중심으로 4~6세기 남북으로 왕조가 양립했던 시기를 말한다.
북조란 양자강 이북의 북위(北魏)가 5호 16국을 통일한 이후부터
수(隋)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약 200여 년간(386년~589년) 존속했던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의 다섯 왕조를 말한다.
남조란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네 왕조가 420년~589년까지
약 170년간 양자강 이남에 존속한 시기를 말한다.
남북조시대 북부 왕조에서는 한족 출신이 아닌 통치자일 경우
불교를 열심히 후원했다. 이 후원자들은 승려들이 기도와 주문으로써
그들의 번영과 군사적 승리를 보장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남조의 양나라 무제(武帝)는 불교 자체에 심취해 불교발전에 많은
위업을 남긴, 스스로 인도 아소카왕을 모델로 삼았던 군주였다.
그래서 황제보살(皇帝菩薩)로 불리기도 했다.
양(梁)나라를 세울 당시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국정 전반에 걸쳐
검약을 모토로 삼아 관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법률인 양률(梁律)을 반포했으며,
국가 교육기관인 대학(大學)을 설치해 인재 양성에 힘썼고,
조세를 경감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토단법(土斷法)을 실시해 유랑민 대책에도 성과가 있었다.
※토단법(土斷法)은 정착민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어서 유랑민을 없애고
조세와 병역원을 확보하는 제도이었다.
이와 같이 내정을 정비하는 한편 불교를 장려해 문화를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해 약 50여 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해 남조 최대 전성기를 보냈다.
또한 무제의 맏아들인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는 학문과 불지에
조예가 깊어 그가 편찬한 <문선(文選)>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이었다.
더구나 오늘날 전하는 <금강경>을 32분으로 나눈 것이 소명태자의 빛나는 업적이었다.
정확히 문단을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32분 각 분의 제목 또한 멋진 제명을 붙인 즉 그의 <금강경>을 비롯한
불교 식견이 해박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불행하게도 30세에 요절함으로써 대통을 잇지 못했지만
그의 짧은 생이 불교에 미친 영향이 실로 크다.
이렇듯 무제의 집안 모두가 불교에 심취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제는 527년 무렵부터는 황제 자신이 지은 동태사(同泰寺) 절에
자신의 몸을 부처(절)에 바치는 이른바 ‘사신(捨身) 공양’을 실행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사신은 사찰의 노비가 돼 밥을 짓고 물을 긷는 등 온몸을 바쳐 부처를 공양하는 것을 말한다.
황제가 사신을 행하자 대신들은 재산을 사찰에 갖다 바치고
양무제를 다시 환속시키는 이른바 속신(贖身)을 행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의 치세 말년에 수도 건강(建康-建業, 현 南京)에는
굉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사찰이 5백여 곳이나 있었고, 승려만도 10여만 명에 달했으며,
지방 단위 군현의 경우는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무제의 불교 신앙은 표면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무제 자신이
불교 경전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를 집필했다.
또한 황제 자신도 불교의 계율을 따르며 소식(蔬食)하기를 견지했기에,
당시에는 황제를 가리켜 황제보살(皇帝菩薩)로 부를 정도였다.
이는 당시 국가불교로서의 색채가 농후했던 북조에서 사용하던
‘황제즉여래(皇帝卽如來)’에 대비돼 남조의 불교를 상징하는 칭호로서 평가된 듯하다.
이러한 무제에 대해 당시 양과 교섭이 활발했던 동남아시아나 서역,
한반도의 백제나 왜국 등 여러 국가에서는 무제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무제를 보살이라 불렀는데,
당시의 국제사회에서도 양의 무제는 불교 신앙에 있어
고명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었다.
이러한 양 무제가 달마(菩提達磨, Bodhi Dharma, ?~536?) 대사를
만난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달마(達磨) 대사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팔라바스/Pallavas 제국)
셋째 왕자로 태어나 출가해서 인도 불교 제27대 직계 조사인 반야다라(般若多羅, ?~457) 존자에게
40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선(禪)에 통달한바 제28대 조사(祖師)가 됐다.
당시 인도에서 불교는 밀교(密敎) 일색이었으며, 그마저도 힌두교화 해서
더 이상 불교의 설자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달마의 스승 반야다라 존자에게는 혜안이 있었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짓고, 달마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올바른 불법)을 부촉한 후
달마로 하여금 동쪽[중국]으로 가서 불법을 전하라고 당부했다.
마음 땅이 숱한 종자를 키우고 - 심지생자종(心地生者種)
일이 생기면 다시 이치도 생기네 - 인사복생리(因事復生理)
수행의 열매가 무르익으면 깨달음이 원만해지니 - 과만보리원(果滿普釐圓)
꽃이 피듯 한 세계가 열릴 것이네. - 화개세계기(華開世界起)
그리고 반야다라 존자는 말했다,
“그대가 지금 나의 법을 받았으니 너무 멀리 교화하러 가지 말고
내가 열반에 든 후에 동쪽 나라[중국]에 가서 법을 크게 베풀라.
그대는 너무 빨리 가지 말라. (빨리 가면) 재난이 일어나서 백일 아래 쇠퇴하게 되리라.”
이에 보리달마가 여쭈었다.
“제가 그 나라에 가서 교화하면 그곳에 보살이 있겠습니까?” ―
불교 수행자가 많겠느냐 하는 물음이다.
“그 나라에는 도를 얻고자 하는 이가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느니라.
내가 열반에 든 뒤에 제각기 친했던 사람들과 이별하라.
그 나라에서 재난이 있을 터이니, 수중문포(水中文布)를 잘 항복시켜라.”
※수중문포(水中文布)---물속에 물결이 퍼져 나간다는 말인데,
뒷날 보리류지(菩提流支, ?~725)에게 모함을 받게 되는데,
그 유지(流支-물결)를 비유해 동토(東土=중국)에서 달마를 해칠 사람은 보리류지일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 나라에 가거든 남쪽에는 오래 머무르지 말라.
그 나라 왕은 불법의 참 이치는 모르고 유위법(有爲法)의 인연 짓기를
즐기어 공덕을 좋아하니, 그대가 그 나라에 가거든 오래 머물지 말고
바로 떠나라. 나의 참언(충고)을 들어라. 길을 가던 중에 물을 건너서
다시 양(羊)을 만나리라.” ― 여기서 물을 건넌다 함은 바다를 건넌다는 뜻이요,
다시 양을 만난다 함은 낙양(洛陽)에 이른다는 말이다.
※유위법(有爲法)---유위(有爲)라 하는 것은 위작(爲作), 조작(造作)의 뜻으로
일부러 ‘만들어 진 것’이라는 의미다. 바로 ‘연기(緣起)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
어떤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모두가 유위법이다.
즉,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해탈, 열반과 같이 깨댤음의 경지가 무위법이고,
그 외에 사람의 손때가 묻은 것은 모두 유위법이다.
그리하여 달마는 반야다라가 죽은 뒤에 그의 조카 이견왕(異見王)을
교화한 후, 남천축국(남인도)을 출발해서 해로로 중국으로 향했으며,
배를 타고 3년이 걸려 AD 520년 경 중국의 광주(廣州) 남해군에 이르게 됐다.
당시 중국 남조는 양(梁)나라가 강성했던 때인데, 양의 황제 무제(武帝)를 만났다.
달마 대사가 만난 양 무제는 비록 절실한 불교신자라고 하지만
황제의 권위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무제와 달마 간에
묻고 답하는 내용을 보면 달마 대사의 생사를 초월한 의연한 모습이
생생히 부각돼 있다.
달마 대사와 양 무제, 두 사람의 세기적인 만남은 곧 진리의 화신이며
진리의 법왕인 달마 대사와 권력의 최고봉인 양 무제와의 만남은,
자칭 불심천자(佛心天子)인 양 무제가 먼저 질문하고 달마 대사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양 무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베끼고
승려를 공양하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습니다.
얼마만한 공덕이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달마 대사의 답이 놀라웠다.
“무공덕(無功德),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달마는 신행(信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유위(有爲)의 공덕은 소용없음을 말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과보를 받는다는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이치는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기본이다.
황제의 신분으로 불교의 선양에 대단한 기여를 했던 무제,
그는 당연히 큰 공덕이 있다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날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무공덕(無功德)’, 곧 공덕이 없다는 벽력같은 일갈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다. 그 순간 무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 한 충격으로 '아니, 내가 잘못 들었나?
공덕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 황제는 불쾌했다.
“그러한 공덕들은 윤회 속에 흩어지고 말 그림자같이 형태가 없는
공덕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문답에서도 달마 대사의 대답은 무제에게는 완전히 동문서답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천하를 통치하는 불심천자(佛心天子)를 자처한 양 무제와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 대사와의 역사적인 문답의 결말은 양 무제가 완패를 당한 것으로 돼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요.”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온전해서 그 자체는 공적합니다.
이 같은 공덕은 세간에서 구해도 구할 수 없습니다.” ―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공덕이라야 한다는 말이다.
절 열 채를 짓기보다 독실한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무엇이 불교의 근본이 되는 진리요?”
“확연무성(廓然無聖), 텅 비어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
“불식(不識) ― 모릅니다.” ― 이 말은 나는 폐하께서 분별(생각)하고
계신 그런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때 달마 대사가 “불식(不識)”이라 대답한 것에 대한 논의이다.
양 무제는 달마 대사의 법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중생심으로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 라고 힐책하듯이 물었다.
여기서 양 무제는 자기와 달마라는 주객(主客) 혹은 상하(上下)라는
상대적인 대립과 차별심이 있었고, 또한 달마 대사 당신은 성스러운 성자가 아닙니까? 라는
고정관념과 분별심으로 질문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객과 상대적인 분별심을 가진 양 무제의 질문에 대해
달마는 “불식(不識)”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불식(不識)’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번역하면 분별심이 된다.
즉, 주객(主客)과 상하(上下), 임금과 신하라는 상대적인 분별의식에 떨어진 대답이 된다.
달마는 ‘나는 황제인 당신과 주객(主客), 상하 관계가 아니다,
상대적인 차별심이 없다.’는 입장이다.
<열반경>에 “법에 의거하고 사람에 의거하지 말며,
지혜에 의거하지 분별의식(識)에 의거하지 말라”고 설한 불법의 정신을 알아야 한다.
‘식(識)’은 중생심의 분별작용이며 ‘불식(不識)’은 분별이 아닌 불심의 지혜작용이다.
즉, 달마는 주객(主客)과 상하(上下)라는 상대적인 차별심으로 질문하는 양 무제를
불심의 지혜로 정법을 설한 것이다.
그러나 중생심으로 접근한 양 무제는 달마가 불심의 지혜로 제시한
정법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의 참된 정신(大意)조차도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질문과 답이 동문서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방광반야경>을 강의할 정도로 불교 이론에 정통해 있던 양 무제가
어째서 달마 대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선(禪)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무제에게
달마 대사가 자신의 선적(禪的) 경지에서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달(진리)을 가리키는 손가락(교리)에만 묶여 있던 무제로서는
달마 대사가 보여주는 달, 그 자체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고 영문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왕법(王法)이 불법(佛法) 위에 군림하던 시대에
달마 대사가 무제에게 큰 실망을 안겨줬으면서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불심천자라 자칭하는 양 무제의 자비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문답이 사실이든 아니든 달마의 선적(禪的) 입장과
그 당시 중국 불교관(佛敎觀)과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불교에 대한 이론적 연구나 외형적 불사에 치우치는 중국불교와
달마의 선불교(禪佛敎)는 전혀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일화인 것이다.
그리고 이 문답은 양 무제가 이룬 모든 불사의 업적이 무공덕(無功德)이 되는
그런 새로운 불교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달마가 중국에 온 목적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왔던 것이다.
또한 이 일화는 달마가 적어도 당시 중국 최고의 불교인을 대했고,
또한 달마는 황제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할 말을 한 강직한 선승이었음을 드러내 보여준 것이다.
후에 양 무제는 달마 대사와의 대화를 지공(誌公, 418~514) 화상에게 말하자, 지공 화상이 말했다.
“폐하! 달마 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무제는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지공 화상이 말했다.
“그는 관음대사이며, 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한 사람입니다.”
당시 지공 화상은 무제(武帝)가 존경하는 고승으로
무제와 지공 화상 사이의 불법에 관한 문답을 「인과법문(因果法門)」이라 해 널리 알려졌다.
이렇듯 지공 화상은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알려지도록 유명해서,
고구려왕이 지공 화상에게 공양물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하며,
신라에까지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어, 해인사 창건설화에도 등장한다.
그리하여 현재 해인사에 「지공증점지(誌公曾點地)」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지공 화상께서 점지해준 자리’라는 뜻이다.
즉, 지공 화상이 지정해준 자리에 해인사를 지었다는 말이다.
또 지공 화상이 지은 <대승찬(大乘讚)>을 비롯한 <십사과송(十四科頌)> 등이
고려 말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경>에 포함 출판됐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고승이었다.
이런 고승인 지공 화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무제는
후에 공(空)과 무아(無我)의 대의를 일러준 달마 대사의 법을 뒤 늦게 깨달아 깊이 후회하고
달마 대사를 다시 만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무제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추모하는 심정을 달랬다.
눈으로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見之不見)
맞이해서 만나고도 만나지 못했으니(逢之不逢)
옛날이나 지금이나(古之今之)
후회하고 한스럽구나(悔之恨之)
그래서 (양나라에서 쫓겨나듯이)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당시 북위(北魏) 땅으로 가서 낙양(洛陽) 동쪽 숭산(嵩山) 소림사(小林寺)로 숨어들어
9년간 면벽수행(面壁修行)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고 보면 양 무제도 무지한 폭군이 아니라 지성을 갖춘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위의 황제 효명제(孝明帝, 515~528 재위) 역시 양 무제 못지않은 독실한 불자였다.
효명제는 인도의 고승이 온 것을 기뻐하고 소림사로 사람을 보내어 황궁으로 초청했다.
<전등록(傳燈錄)>에 의하면, 무려 세 번이나 초청했으나 대사는 가지 않았다.
달마가 중국에 와서 조사선(祖師禪)을 전하고자 했지만,
당시 중국엔 교학이 성한 터에다가 불교를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복(祈福)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심해서 도저히 선(禪)을 받아들일 풍토가 못 됐다.
양 무제를 통해 선을 이해시키려고 했지만 무제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달마는 ‘아직 때가 아니구나,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아니구나!’ 해서,
소림굴로 들어가서 면벽을 하며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6세기 무렵의 당시 중국은 급격한 사회변혁 시대였기 때문에
지각 있는 지식인들은 새로운 불교의 이상을 달마에게 구하고자 했다.
달마 대사는 수행하다 졸리면 눈썹을 뽑아 던졌고
눈썹이 던져진 자리에는 차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추후 중국 선종의 상징이 되는 차(茶)와 선(禪)이 인연을 맺게 되는 사연이 이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달마상의 특징인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모습은
소림굴 면벽 수행을 하면서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기 위해 눈꺼풀을 잘라냈다고 한다.
그래서 달마는 눈꺼풀이 없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표현된다.
결국 양무제와 달마 대사와의 만남은
교학불교에서 선불교로의 전환이라는 중국 불교의 일대 변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외형의 불사(佛事) 중심의 불교 확장이 불심(佛心)의 선불교 확장으로 전이돼가는
대변혁을 의미하는 중대한 일화였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