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당 정명녀
포덕 81년(1940) 경남 남해 출생
한강지부 회장
"심법 그대로 사니
늘 편안해요"
도가로 시집을 오면서 천도교를 하게 되었어요.
남해에서 중매로 연암장(이철기 전 교령)을 만났어요.
예식도 천도교 식으로 하고 결혼한 날 저녁에 입교식 하고 그랬어요.
스무살 때 예요.
친정 아버님께서 교편생활 하셨는데 혼자서 천도교를 하셨나 봐요.
저는 잘 몰랐어요.
제가 천도교 집안으로 시집을 온 다음에 친정 아버님도 더 열심히 천도교를 하시게 되었어요.
천도교를 하니까 기분이 좋고 마음이 항상 편안해요.
처음에는 잘 몰랐죠.
아침 기도하고 공문 내려오면 특별기도 하고 청수 예식 보고 그랬어요.
그 당시는 수련할 적에 강령 같은 걸 잘 안 모셨어요.
집에서 새벽에 온 식구들이 다 일어나 기도할 때도
애들도 강령 모시면 못 하게 했어요.
천도교 집안에 가니까 정말 사람을 위해 주고 경전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시더라구요.
큰시숙님이 교회 일도 많이 하셨는데
재정이 어려우니까
달걀 같은 걸 집집이 다니면서 모아서
그걸 부산으로 내려보내서
그걸 가지고 교회 재정을 확보하시고 그랬습니다.
위 사진 출처=https://m.blog.naver.com/1926nh/221283159152
그러다가 공무원이던 우리 연암장이 서울로 발령이 나서 이사 오게 됐습니다.
어른들 밑에 있을 때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도시에 따로 나와 살다 보니까 별로 열심히 안 하게 됐어요.
그런데 몸이 안 좋아지더라구요.
늘 아픈 거예요. 그러다가 수도원에도 가고 하니까 건강해지더라구요.
서울에 와서 다행히 마음 맞는 분들을 만나서 한강교구 추진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추진위원회를 하면서 시일 되면은 점심 싸 가지고
교당에 가서 교인들하고 나눠 먹고 가정 방문도 하고
어려운 집에 가서 위안이 될런지 안 될런지는 몰라도 방문도 하면서
교당 일을 설설 풀어갔어요
내수도들끼리는 한 달 에 삼천 원씩 모아서 조그마하게 계를 해 가면서 친선을 도모했죠.
벌써 이십삼, .사년 전 얘기네요.
한강교구가 설립되고 나서는 제가 초대 여성회장을 지냈고
사명감이 있어서 했다기보다 좋아서 했고
그랬기 때문에 결과는 그리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강교구 여성회는 모난 사람 없이 다 원만한 분들이 모였어요.
남의 허물을 꼬집어 가지고 나쁘게 한다든지
마음을 다른 데 쓴다든지 그런 게 없고
그저 한마음으로 다 해 가니까
내가 못 하면 네가 하고
서로 배려하고 양보해 가면서 하니까
이때 까지 해 나가도 별로 트러블이 없었던 거 같아요.
신앙생활이라는 거는 딴 거 없고
경전에 있는 그대로 본을 받 을려고 하는 거죠.
될 때는 되고 잘 안 될 때는 안 되고,
있는 그 대로 우리가 밥을 굶으면 안 되듯이 하는 거예요.
이웃사람들이 그래요
이집에는 신선들이 사는 것 같다고.
한편으로 부끄러운 거예요
그렇지만 되도록이면은 심법 그대로 살려고 하니까 늘 좋아요
내 속에 아무 불편함이나 거스름도 없고, 그래요
그냥. 저는 꾸밀 줄 몰라요.
어떤 사람이 그게 법이다 하면 그냥 따라가는 거예요.
■ 구술일 포덕 145년(2004년) 21일